아침이 되자 그들은 다른 마을을 향해 길을 나섰다. 어제 일이 있어서 그런지 호우는 여랑을 피해 호운과 하연 사이에서 걸어갔고 하연도 여랑이 자신에 대해 여전히 의심이 남아있다는 것이 좀 껄끄러워서 여랑과는 좀 거리를 두고 걸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호운이 여랑의 옆에 서서 걸어가게 되었다.  

 

그 모양새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여랑 역시 불만이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서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호운은 그렇게 세 사람 사이에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호우가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 

 

 

“호우는 인간을 처음 봤지만 넌 참 좋은 인간인 거 같아.” 

“그런가요?” 

“응. 있지. 호우가 들은 인간들은 언제나 탐욕에 가득 차 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고 패악을 부린다는 거였어.” 

“모든 인간들이 그렇진 않죠. 물론 그런 인간들도 있겠지만... 전 그래도 인간은 선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 선하다는 거. 넌 그 선한 인간인 거 같아.” 

“선한 건 아니지만... 최대한 선한 사람으로 살고 싶은 건 맞아요. 호우님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분 좋네요.” 

 

 

하연이 웃으면서 호우를 보자 호우도 같이 웃었다. 호우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하연에게 상대방을 편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는 마음에 안 들었지만 볼수록 하연이 좋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너는 그 나쁜 왕자를 어떻게 할 거야?” 

“네? 아. 글쎄요. 어떻게 해야겠다고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그저 제가 이용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여랑과 있으면 그런 나쁜 놈이 너를 해하진 못하겠지만 인간계라서.... 여기선 천인의 힘을 쓸 수 없으니 도움이 못 될 거야.” 

“저도 압니다. 그래서 어서 여랑이 여우구슬을 찾아서 돌아가길 바라는 거고요.” 

“왜?” 

“네?” 

“여기 있으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너를 도와줄 수 있을 텐데 왜 여랑이 돌아가길 바라는 거나구.” 

 

 

그 물음에 하연은 조금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호우의 동그란 눈동자가 궁금하다는 듯이 하연을 보고 있자 하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렇죠. 있으면 제가 도움을 받을 수는 있겠죠. 그러나 결국 여랑에게 해가 될 겁니다. 오히려 제가 여랑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영성군은 그 정도로 왕위에 대한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왕위를 위해서라면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상상조차 불가할 정도라서... 그래서 전 그 위험 안에 여랑이 들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어서 함께 있지만 얼른 찾아서 돌아가길 바래요.” 

“근데 여우구슬을 찾아도 결국엔 못 돌아가는 거 아니야? 둘이 묶여있는 거라며.” 

“그렇네요. 그래도 얼른 찾았으면 좋겠어요.” 

 

 

하연의 말에 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운도 반드시 찾을 거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여랑의 표정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했다. 그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한참을 걸어 산 중턱에 다다랐을 때 누군가가 서서 그들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여랑은 가까이 가지 않고서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흑영. 네가 여기는 무슨 일이지?” 

“호우와 호운을 데리러 왔다.” 

 

 

작지만 확실한 저음의 목소리였다. 하연은 가까이에 와서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더운 날임에도 얼굴부터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두르고 있었다. 그저 볼 수 있는 건 그의 검은 눈동자였다. 여랑은 그런 그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곧 있으면 알아서 갈 거야.” 

“아니. 지금 가야만 한다.” 

“이미 내려온 거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서야 데리러 온 이유가 뭐지?” 

 

 

여랑이 짜증난다는 듯이 흑영을 봤지만 흑영은 그런 여랑을 무시하고서 마치 감정이 없는 듯 억양없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천제님의 명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지?” 

“그러니까 그 놈의 천제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지금껏 아무 말도 안 하다가 이제와서 이러는 거냐구.” 

 

 

흑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서 여랑을 노려봤다. 여랑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상대에게 응수했다. 침묵 속에 그들의 기싸움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호운과 호우는 그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며 난감해 하고 있었고 결국 그들의 기싸움을 중재한 것은 하연이었다. 

 

 

“그만들 두시죠.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본래 인간계에 계셔서는 안 되는 것이 맞으니 그만 호운님과 호우님은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야!”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든 하연이 마음에 안 들었던 여랑이 하연에게 한 마디 하려고 하는 사이 흑영의 시선이 하연에게 향했다. 

 

 

“처음 뵙습니다. 하연님.” 

“저를 아시나요?” 

 

 

하연은 흑영과 마주하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렇지만 상대는 천인이고, 지금 마주하기 전까지 본 적이 없다는 게 하연의 결론이었다. 흑영은 여전히 억양없는 말투로 하연에게 말했다. 

 

 

“천제님께서도 하연님을 알고 계십니다.” 

“저를요?” 

“예. 여랑의 여우구슬을 찾고 있는 걸 돕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천제님이라면 알고 계시겠네요. 여우구슬이 어디에 있는지.” 

 

 

갑작스런 하연의 말에 흑영의 시선이 일순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일 뿐, 고요한 흑영의 시선이 하연에게 향했다. 

 

 

“글쎄요.” 

“알면서도 안 가르쳐주겠다는 거군.” 

 

 

여랑이 비꼬는 듯 말하자 흑영의 시선이 또 다시 날카롭게 여랑에게 꽂혔다. 그러나 여랑은 오히려 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도대체 천제의 꿍꿍이는 알 수가 없어. 알면서도 안 가르쳐주겠다는 건 날 괴롭힐 심산인 거잖아.” 

“자업자득이다.” 

“알게 뭐야. 그 늙은 영감탱이가 일부러 내게 어떤 술수를 부린 걸지도.” 

“여랑!!” 

 

 

참다못한 흑영이 여랑에게 소리를 질렀다. 여랑이 응수하려는데 호운이 그 둘 사이에 서서 흑영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만 진정하십시요. 흑영님. 저와 호우는 지금 흑영님을 따라 천상계로 돌아가겠습니다.” 

“여랑. 그만해. 우리 어차피 갈 거였잖아.” 

“하지만..” 

 

 

뭐라고 더 하려던 여랑은 그만 뒀다. 어차피 흑영은 천제의 수하였고, 천제는 어떤 말도 자신에게 해주지 않을 테니까 결국엔 자신이 손해였다. 호운과 호우는 하연에게 인사했다. 

 

 

“좀 더 인간계에서 하연님과 함께 있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저도 아쉽네요.” 

“언젠가 호우랑 다시 봐. 호우가 또 몰래 인간계에 놀러올게.” 

“몰래 왔다가 크게 혼나면 어쩌려구요.” 

 

 

하연의 부드러운 미소에 호우는 아쉬운 마음이 더 커졌다. 좀 더 함께 놀고 싶었는데 이렇게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호우는 까치발을 들고 하연에게 안겼다. 크지 않은 키의 하연을 어린 아이와 비슷한 키의 호우가 끌어안자 호우가 잡은 건 하연의 가는 허리였다. 하연은 조금 놀란 듯 했지만 이내 호우의 등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하연의 따뜻한 체온이 호우에게 닿았다. 

 

 

“하연은 참 따뜻해.” 

“이게 인간의 체온이라는 겁니다.” 

“정말 정말 넌 좋은 인간이야.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같이 있고 싶을 정도로.” 

“과찬이시네요. 여랑을 봐요. 절 정말 싫어한다니까요. 같이 있다보면 호우님도 제가 싫어질지 몰라요.” 

“아니야! 그건 여랑이 나쁜 놈이라서 그래. 무시해버려.”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리고 만약에..” 

“알아. 조심할게. 진짜루. 호운이가 하라는 대로 할 거야.” 

 

 

호우가 하연을 향해 예쁘게 웃었다.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 모습에 하연의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젠가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호운은 “조심하세요.” 라는 말을 남기고 호우와 흑영과 함께 사라졌다.  

 

하연은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일족처럼 영원히 다시 못 만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헤어짐이라는 이별이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연이 복잡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자 그 옆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여랑이 하연에게 말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어서 가자.” 

“네..” 

 

 

그들은 다른 마을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새 해가 넘어가고 밤이 오고 있었다. 

 

 

 

달을 보며 위안삼듯이 누군가가 나의 글에 재미와 위안을 받길 바라며 이것저것 끄적거리는 공상가.

구월의 달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