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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수레국화의 꽃말은(1)





전채 요리를 노리고 달려든 기사들 때문에 소란스러운 중앙에서 벗어난 왼쪽 부근에 도달해서 나는 드디어 대공국의 가신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한번에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을 소개받았을때쯤이었다.


"원로회의 수장이신 알론 하이엘옴스크 님이십니다." 


대공의 부관이 가리킨 곳을 보니, 노년의 엘프가 서 있었다. 사실 노년이라기엔, 교황청의 추기경들에 비하면 아주 젊고 정정해보이는 얼굴이시지만...엘프와 인간의 노화 기준이 같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하이엘프라면 더더욱. 

보통 엘프는 인간과 수명이 두 배로 차이가 났기에 나이가 든 엘프라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나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로회 수장의 곧게 뻗은 길고 커다란 귀는, 하이엘프의 상징이었다.

아무리 찍히기로 작정한 나라고 해도 몇백 살 드셨는지 모르는 하이엘프 님 앞에서까지 오만불손하게 굴 수는 없는 법.


"처음 뵙겠습니다. 이제 갓 날개를 받은 아르덴 성기사단의 회복술사, 시안 클라라몬드라고 합니다. 세번째 가지의 순을 지키시는 분께 무구한 번영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나는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최대한 깍뜻하게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이런 식의 절은 처음인지라, 맞게 하는 건지 그다지 자신은 없었지만 말이다. <종을 뛰어넘는 교류를 위한 인간-엘프 지침서>에 나오는 '연장자에 대한 인사' 부분을 그대로 따라한 거였다.


그동안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한번도 엘프와 마주친 적은 없기에 벼락치기라도 수도원에 있는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을까.


"만나서 반갑소다. 내 생에 아르덴의 날개를 만나는 건 두번째군."


"저야말로 세계수와 가장 가까운 분을 봽게 되어 영광입니다."


내 인사를 받는 알론 원로의 반응은 특별히 호의적이지도, 적대적이지 않았다. 일단 무사히 통과인 걸까. 하지만 쉬이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알론 원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약간의 주름살과 아래로 처진 눈매는 부드러워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동시에 녹색 눈은 총기로 번뜩였다. 자기 키보다도 훨씬 더 큰 나무 스테프를 쥔 자세는 흐트러짐 없이 곧았고 위엄이 흘러넘쳤다. 


역시 대공국에서 둘째된다 하기엔 서러운 원로회의 수장다웠다. 대공국에 대해 원래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성에 도착하기 전 수도원에서 기본적인 설명은 들었다.


공국에서 원로회는 정치 기구가 아니었다. 원로회는 모든 엘프들의 고향인 세계수의 세번째 가지를 복원하고 번영시키기 위해 존재했다. 그래서 원로회는 세계수와 교감할 수 있는 극소수의 하이엘프와 그 후손들만이 속해있어, 외부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보다 강력하게 정치적으로 대공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기구이기도 했다.


"처음 본 북부는, 마음에 드시오?"


알론 원로의 말에 나는 잠깐 천장을 바라보다가 사교용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활짝 웃었다.


"예. 이렇게 많은 정령들이 함께 하는 연회라니...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풍경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연회가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지만...그런 건 성주에게 치하하시고. 다음엔 다른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소."


하지만 그 사교용 미소가 이렇게 금방 무너질 줄 알았다면 괜히 힘들어웃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서둘러 표정을 수습하고 겸손하게 답변을 이어갔지만 당혹스러움을 감추기는 무리였다.

그 단델리온 대공마저 그저 '성주'라고 칭하고 넘기다니.


"...예, 미흡함을 보여드려 부끄럽군요."


솔직히 당혹스러움을 감추지도 못하게 어이없고 당황스럽기는 했다. 그래, 이건 북부 그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연회장의 풍경에 대한 평이긴 했다. 솔직히...구체적이고 무난한 칭찬을 하려면 그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기에 한 말이었을 뿐.


원로는 북부에 대해 진정한 첫 인상을 말해주기엔 적절한 상대도 아니었을 뿐더러, 나는 이제 겨우 북부 수도원과 단델리온 성만을 오갔기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뭘 나가서 봐야 할 말이라도 생기지. 심지어 단델리온 성조차 겨우 중앙 복도와 내 방, 연회장만 가봤을 뿐이었다. 누가 경우 없이 성에 오자마자 안내도 해주지 않고 연회에 오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더 나았을텐데.


"그냥 늙은이의 농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저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보통 최종보스다. 어떻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차라리 교황 성하 앞에서 대놓고 반항하는 게 훨씬 낫지, 몇 백살을 살았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 하이엘프 원로라니. 괜히 나쁘게 비춰지고 싶지는 않지만 특별히 좋게 보이고 싶지도 않을 만큼 충분히 부담스럽고 어려운 상대였다. 

엘프는 본디 정직하고, 결벽적으로 보일 정도로 도덕을 중요시한다고 알려져있다. 몇백 년을 외부와 접촉 없이 오직 혈족 안에서 세계수와 교감하며 지내온 하이엘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어둠이 깊어지는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날개가 오시니 이 늙은이의 마음에도 약간의 기대가 생기는구려."


그리고 가끔 예언 아닌듯 예언 같은 기묘하고 시적인 말을 하는 걸로 유명하기도 했다. 그녀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아주 옅은 웃음을 짓더니, 느리지만 빠르게, 눈에 잘 띄지 않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나는 입을 떡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이런 게 흔한 일인지 따지듯 부관을 바라봤지만,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서 많은 것을 읽어내기는 무리였다. 원로의 말에 대한 설명이나 해명이나, 심지어 놀라운 감탄사 하나조차 없었다. 로얀은 순간 나를 안내하는 것조차 잊고 그저 눈동자에 깊은 고민의 기색을 보이며 생각에 잠겼을 뿐.


"벌써 연회를 시작할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일단 내 자리에 가고 싶......"



"발데마르트 드 단델리온 대공 전하 드십니다!"



입구에서 들리는 큰 소리 때문에 내 말이 막혀버렸다. 모두 고개를 돌려 거대한 아치형 입구에서부터 뚜벅뚜벅 들어오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정중앙에 깔린 레드카펫 위로, 예복을 차려입은 단델리온 대공이 곧장 앞을 보며 걸어왔다. 대공이 입은 검정 제복은 암적색 띠와 황금 견장과 메달로 장식되어 있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절제된 장식이 대공의 예복다웠다. 어깨에 걸친 망토 역시 검정에 가까운 남색이었는데,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망토는 위엄있는 제복과 어울렸다.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다. 새하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밤처럼 검은 공막과 대비되는 하얀 눈동자는 한없이 신비로우면서도 순간 심장이 철렁일 정도로 차가웠다. 날카로운 눈매와 굵은 콧대와 단정한 이목구비가 그림처럼 수려했지만 그가 주는 위압감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시선에 꿰뚫리는 것 같은 감각이 낯설었다. 나를 지나쳐 가버린 대공은 이제 날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대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던 부관은 대공이 지나가자마자 나에게 말했다.


"상석으로 가시죠."


나는 그의 손이 가리키는 자리를 보았다. 내 자리는 단델리온 대공의 바로 옆의 귀빈석이었다.






연회는 특별한 점 없이 진행되었다. 채식을 하는 일부 엘프들의 습성 때문인지 한쪽은 고기, 다른 한쪽은 전부 채식인 극단적인 식단이긴 했지만 어느 쪽이든 신경 써서 준비한 요리들이었다. 어느 정도 음식이 나온 뒤에는 곧 시인들의 시 낭송과 함께 작은 공연들이 이어졌는데, 다른 곳과 달리 특이한 점은 정령사 엘프들이 정령을 이용해 볼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었다.


오래간만에 주최되는 단델리온 성의 환영 연회는 겉보기로는 그렇게 별 문제 없이 흘러가는 듯했다. 문제는, 정작 연회의 주인공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건 전적으로 연회의 주인인 단델리온 대공이 연회가 시작하기 전, 시안의 발령을 환영하는 의례적인 개회사를 한 뒤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까닭이었다.


"단델리온 대공께서는 과연 공사다망하신가 봅니다. 연회 전에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을텐데요."


"연회 전에 급히 처리할 업무가 있어서 그만."


결국 참다 못한 시안이 가볍게 웃는 얼굴로 첫 마디를 던지자, 대공은 고개를 잠깐 끄덕이며 그렇게 답했다. 다른 말을 더할 줄 알고 기다렸지만, 시안의 예상과 달리 그 뒤로 20여분 이상 정적이었다. 윗사람들이 도무지 입을 열지 않으니 옆에 앉은 이들도 자연히 좌불안석이었다.


"대공께서 저를 계속 지원인력으로 요청하셨다고 들었는데."


"그렇소."


대공은 그렇게 한 마디를 하고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시안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주변에 앉아있던 공국의 귀족들이 한 마디씩 거들고 나서기 시작했다.


"나이가 님께서 애써 주셨지만, 아무래도 나이가 님은 연세가 있으시다보니 정찰 임무를 나가실 때마다 불평하시도 했습니다."


"시안 님의 명성은 북부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서부 사막 지대에서의 활약이..."


시안은 그들을 향해 과찬이라며, 소문은 과장되어 있을 뿐이라는 말을 하며 웃었다. 그러나 정작 주인을 두고 진행되는 대화는 여전히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대공을 자주 만나는 가신들은 다들 일 밖에 모르고 사교라고는 오직 검에 대한 대화를 하는 게 다인 대공이, 연회를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환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막 성에 도착한 시안이 그것을 알기는 무리라는 사실 또한, 너무나 잘 알았던 것이다.


한참 시안이 다른 귀족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때 대공이 입을 열었다.


"시안 경."


시안이 대화를 멈추고 그를 돌아보자, 곁에 있던 귀족들은 자연스레 말소리를 죽여 그들의 대화를 듣고자 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정적 속에서 대공이 말을 이었다.


"내일 아침에 혹시 특별한 일정이 있소?"


"아니오."


"그렇다면 내일 오전 아홉시 경에 집무실로 와주시면 좋겠군."


대공이 말을 마치자마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뒤, 시안이 답했다.


"...그렇게 하지요."


그렇게 답하는 시안의 얼굴에는 아까와 같이 보여주었던 의례적인 미소조차 없었다. 시안에게 말을 걸려고 한 가신들조차 시안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고 연어 스테이크를 써는 데 집중할 뿐이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 없이 와인잔을 잡아 천천히 들이마셨다. 그를 본 시안이 포크를 소리나게 내려놓았지만, 오직 그만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와인을 음미하며 생각에 빠져 있을 뿐이었다.


로얀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같으면 자신의 주군에게 귓속말이라도 해 다른 화제로라도 이야기를 하게 만들었을테지만...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번에는 딱히 그렇게 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공의 무뚝뚝한 태도와 명령조는, 고의가 아닌 습관이었다. 대낮에 마수를 퇴치하고, 보고를 들은 그는 마수 출현에 공민들이 피해입지 않도록 막을 방비책을 고민하느라 손님에게 신경 써줄 정신이 없었다.


북부의 냉엄한 지배자.


그것은 발데마르트 대공을 직접 만나지 못한 이들이 하는 말이었지만 가신들도 그에 동의하곤 했다. 그들이 그 수식에 동감하는 까닭은 그가 자비없이 냉정한 폭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국에서도 오직 소수의 가신들만 알았지만 그런 대외적 이미지는 전부 발데마르트 대공의 비사교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본래 엘프는 인간처럼 말이 많고 사교적인 종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엘프치고도 정말 극단적으로 말수가 적었다. 본래도 외향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릴 적에는 평범하게 낯을 많이 가리는 아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발데마르트는 급격하게 말수가 적어졌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에게 엄격한 후계자 교육을 받은 뒤 필요한 말만 하고 사담은 삼가한다는 원칙을 철칙처럼 지켰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공이 되고 난 뒤에도 그러한 성격은 바뀌기는 커녕 더욱 심화되었다. 지존의 자리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굳이 이끌어가야할 필요는 없었다. 다른 이들이 그에게 맞춰야했기 때문에 발데마르트로서는 그런 자신의 성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로얀은 어색한 정적으로 가라앉은 테이블을 보고 한숨을 작게 내쉬다가, 눈에 띄지 않게 악사에게 음악을 더 크게 연주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연주 소리가 커지가 아래쪽에서 식사하는 기사들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지며 소란스러워졌다.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활기가 넘치고 즐거워보이는 연회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시안은 그 뒤로 한 마디로 먼저 꺼내지 않고 간간히 들어오는 다른 가신들의 질문에만 대답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도 시안이 무뚝뚝하게라도 계속 이야기를 하자, 가신들은 곧 안심하는 얼굴로 웃으며 잔을 들었다. 

아무도 시안이 성이 그렇게 났다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결국 상대적으로 평가되는 법이라, 옆에 훨씬 차가운 분위기를 가진 대공이 앉아있는 터라 본래 무뚝뚝한 편인 북부인들 사이에선 오히려 시안의 반응이 긍정적인 편이었다.

 


환영연회는 그렇게 소란스러운 듯 고요하게, 자정이 지나기 전에 끝났다. 밤이 길고 추운 공국에선 밤새 파티를 하는 사치스러운 문화는 없었기에 그날의 연회는 삼 년만에 열린 가장 긴 연회였다. 그러나 이제 막 북부에 처음 온 시안이 그걸 아는 방법은 전혀 없었기에, 오히려 그녀는 연회가 다소 이르게 끝났다는 오해까지 해버린 터였다.

왕족들조차 치료받기 어려울 정도로 희소한 회복술사라는 신분 덕분에 항상 극진한 대접만을 받아온 시안으로서는, 오늘의 연회는 나름 충격적일 정도의 푸대접이 된 셈이었다.



잠들기 직전, 침실로 돌아온 시안은 베개를 당장 터트려버릴 듯 힘주어 끌어안으며 분을 삭혔다.


'찍히려고 일부러 무례하게 군 건 맞지만, 그렇다고 뒷끝을 이렇게 부릴 줄이야! 말도 안 걸고, 연회도 일찍 끝내버리고! 완전 짠돌이에 쫌팽이 아냐?'


그렇게 오해는 깊어져만 갔다.





글연성 백업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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