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 저항



 아버지의 의미모를 죽음. 그 후 어머니의 도망, 그로 인해 친척집을 전전하며 온갖 욕을 먹으면서도 굳세어라, 금순아.를 찍은 불운아. 그게 황민현이었다. 저만큼은 보호해주리라 생각했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해당하자마자 저를 친가쪽 큰 집에 맡기고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어머니의 생사에 관한 부분은 충분히 알아낼 만한 위치에 서 있지만 민현은 굳이 찾아내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큰집에 맡기고 갈 때의 어머니와 저의 마지막 눈맞춤이, 떨리는 손길과 불안한 시선 처리가 보통의 14살이 모르기에는 손 쉬운 날 것이었기에. 민현은 딱 한 번의 눈물을 흘렸다. 더 이상 돌봐주기 어렵다는 큰아버지의 말씀에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17살의 한 겨울, 작은 집으로 책가방 하나와 쇼핑백 하나를 들고 가장 작은 창고방에 자리를 잡았음이 슬픈 건 아니었다. 단지 그럴 뿐이었다. 민현이 짐이라 할 것도 없는 것들을 각맞춰 놓고 화장실을 가려고 발꿈치를 들고 걸었을 때 거실에 모여 단란하게 과일을 먹으며 농을 주고 받는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화장실을 갔다가 낡은 이불에 몸을 웅크리자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눈물이 흘렀다.

 

 민현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건 공부였다. 국어, 수학, 영어... 과학탐구는 영 체질이 아닌 거 같아서 문과를 갔기에 사회탐구, 제2외국어로 신청한 독일어까지. 민현은 학교 수업과 약간의 EBS로 저를 모든 위치에서 가장 꼭대기로 올려놨다. 민현은 필사적이었다. 공부에만 신경쓰는게 아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항상 머리도 단정하게 만졌고 미용실을 가지않아도 나름 자기 머리 만큼은 적당히 자를만한 솜씨도 길렀다. 모든 선생님과 학생들은 저만 보면 어쩔 줄 몰라했고 모두들 칭송했다. 학생회 회의를 늦게까지 끝마치고 책가방을 챙겨 나서는 길이었다. 그런데 쟤, 부모님 안 계신다며? 저와 같은 학년으로 앞서 회의실을 나가던 부회장과 서기였다. 그랬다. 아무리 외모, 공부, 운동 등 모든게 완벽해도 민현에게는 흔한 울타리 하나가 없었다. 민현은 언제나 울타리를 갈구했다. 남들은 가지고 자신만이 없는 부모라는 울타리를. 민현이 스스로의 능력 안에서 일궈낼 수 있는 건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결국 민현은 우리나라의 상아탑의 긍지를 나타내는 대학의 법학과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민현이 가장 하고 싶은건 검사였다. 모든 범죄자는 죄질이 나빴고 무죄, 무혐의는 극히 소수였다. 아버지를 죽인 사람도 그러했다. 사실 민현은 제 어미가 도망간 이유를 알았다. 민현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 된 진범을 어미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범인에 대한 증언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범인은 아버지의 오랜 친우이자 어머니의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이었으니까. 죄책감이었을 것이었다. 민현은 분노했다. 왜 범인을 범인이라고 말을 하지 못하는가. 증언으로 인한 신변의 위험을 느껴서 그런 것이라면 애초에 위험 요인을 차단하면 되지 않은가. 민현은 오래전부터 대한민국의 사법계에 대한 악취에 환멸을 느꼈다. 사법계가 낳은 최대의 희생자로도 칭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민현은 스스로 썩은물을 정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택한 로스쿨이었다. 바쁜 학사과정 속에서도 과외를 하며 모은 돈으로 로스쿨에 쏟아부었다. 돈이 문제였지만 제 뒷받침을 해주는 교수들이 있어 가능은 했다. 모교 법학과의 수석 졸업생이 모교 로스쿨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었다.

 

 김재환에 대해 안 건 로스쿨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부터였다. 인정하기 싫을 정도로 재환은 유명했다. 얼굴도 귀엽고 잘 웃고 다니고 노래도 잘하며 교우관계도 좋고 무엇보다 억울한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변호사가 되고 싶은 거로 유명했다. 그런 재환의 신조가 민현은 마땅찮았다. 그 소수의 피해자를 위해 지금 다수를 희생시키자는 건가. 소수에 집중할수록 다수의 피해자는 늘어가는데. 그래서 갖잖은 말로 피해자에게 2차 피해를 주는 이들에 본 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로스쿨에서도 민현은 수석에서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진로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교수님의 방을 찾은 날. 민현은 그 날 완벽한 좌절을 느꼈다. 완벽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다. 검사로서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윤리적으로 어긋난 행위만 아니면 뭐든 탑으로 해냈다. 그런데도 검사에 어울리는건 저가 아니라 고작 소수민의 변호를 외치는 이였다. 민현은 그 당시 답을 전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재환은 끝끝내 검사의 길을 걷지 않았고 민현 역시 변호사의 길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녹진한 밤을 보내고 제 품에서 잠든 연인의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외로 즐거웠다. 땀으로 흐트러진 머리에 뺨만 붉게 달아올라 제 몸에 낑겨 잠든 것이 좋은 구경거리였다. 그 모습이 귀해서 조심스레 눈가에 붙은 머리카락도 떼주고 목에 흐른 땀도 손으로 닦아주는데 연인은 그것마저 귀찮은지 얕은 앙탈을 부리며 매트로 얼굴을 숨겼다. ...어젯밤에 그렇게 괴롭혔으면 됐잖아요. 귀여워서 만진건데... 안 돼요? 네. 꽤나 단호한 거절이었다. 더 하지는 않을 생각이었는데 이런식으로 나오면 건들고 싶어지는데요. 그 말에 다 죽어간다고 잔다고 하던 재환이 민현의 위를 덮고 있던 이불까지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저 진짜 건들지 마요. 건들면 진짜 못 하게 할겁니다. 민현은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이불로 몸을 감싼 재환에게 다가가 그대로 끌어안았다. 재환씨. ...네. 저 처음으로 휴가 가려고요. 민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재환이 이불 속에서 얼굴을 보이자 민현이 그대로 뭐라 말하려는 재환에게 키스했다.

 

 저 연차 쓰겠습니다. 새로 들어온 집단 폭행 사건에 관한 파일철들에 파묻혀 있던 부장검사가 안경을 치켜올렸다. 황검. 네. 이 늙은이가 설마해서 묻는데 그 날 판결 때문에 지금... 이러는 건가? 아니라고는 못하겠습니다. 민현의 대답을 들은 부장검사가 두꺼운 의자 뒤로 등을 기댔다. 황검, 물론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어. 이게 김변하고의 전투에서의 최초의 패라 마음이 조금 그렇겠지만. 압니다. 알아? 기대고 있던 상체를 일으켜 노안 보조용 안경으로 바라본 민현의 얼굴은 태는 나쁘지 않아보였다. 볼살이 조금 없어진거 같긴 한데 그건 판결의 패배라기보단 질기고 추접한 살인사건이 2심을 지나 3심까지 끌고 갈 때부터 보였긴 했었다. 그저 다시 생각해볼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부장님. 물론 패배는 분합니다. 그런데 최초의 패배가. 민현이 침을 삼키며 입을 적시는데 부장검사가 눈꺼풀을 살짝 들어올리면서 답을 재촉했다. 그게 김변이어서 좋았습니다. 그건 부장님이 잘 아시지 않습니까? ...좋아. 연차 쓰게 해주지. 대신 다녀와서 제일 큰 사건은 황검한테 밀어버릴거야. 네 감사합니다. 민현답지 않은 민현에게서 볼 수 없던 최초의 표정을 본 부장검사는 갑작스런 어이없음에 코웃음이 흘렀다.

 

 민현은 곧장 뉴욕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간 번 돈도 있겠다 1등석에 앉았다. 이런 때에 제 옆에 연인이 같이 있지 못한게 아쉽다면 아쉬운 거였지만 앞으로 함께 할 나날들이 많으니 비행기 창으로 바라보는 하늘도 맑았다.

 

 민현은 묵었던 숙소 앞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자몽에이드를 시키고 아이패드로 다음에 갈 목적지를 정하고 있었다. 뮤지컬의 본고장에 가서 뮤지컬이나 보고 올까 하는 마음에 현재 진행중인 뮤지컬에 대해 보며 ‘프랑켄슈타인’에 조금 마음이 쏠렸을 즈음이었다. 그 때, 자몽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고 스크롤을 내리려고 하는 순간 아이패드 화면이 회색빛으로 물들었다. ‘Do you have some time?(시간 좀 있어요?)’ 무던한 목소리지만 노골적인 유혹의 대사를 흘렸다. 민현이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민현의 앞에 놓인 유리로 된 에이드잔이 휙 들렸다. 제대로 된 선글라스를 끼고 하얀 린넨 셔츠를 걸친 청바지 입은 남자였다. 그 모습이 말로 하지 않아도 누구를 나타내는지가 너무 투명해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쩐지 열 몇 시간 동안 갑자기 전화, 문자, 카톡 모두 답장을 안 한다 했었다. 일이 바쁜가했지 이런 깜찍한 짓을 꾸밀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Yes.(...네.)’ ‘Uhm, Even if I steal your something?(음, 내가 당신의 무언가를 훔친데도?)’ 에이드 잔을 들고 협박하는 듯이 민현의 시야 위에서 에이드 잔을 휘휘 돌렸다. 민현은 그런 남자가 사랑스러워 얼굴에 꽃이 만개했다. ‘As many as you want.(얼마든지)’ 진심이었다. 민현이 빈말을 하는 경우는 기억하는 한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였다. ‘Oh, Excellent!(오, 훌륭해!)’ 민현의 대답이 상당히 만족스러운 듯 남자는 밝게 웃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고이 집어넣자 하얀 얼굴이 아침 햇살을 받았다. 그럼 이제 어디부터 가볼까요. 나는 자연사 박물관 가보고 싶었는데. 아니면 할리우드 거리는요? 그냥 뉴욕 거리만 모델 워킹으로 활보해도 좋겠네요. 그 전에 당신부터 끌어안아봐도 돼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키스해도... 오늘은 봐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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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완결 난 Rock the court 입니다.

부분적인 수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표현상의 문제를 수정하는 것이니 전개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약 5개월의 시간동안 같이 달려주신 독자님들께 큰 절 한 번 드리겠습니다.

제 전공이 아닌 부분이라 배틀호모로 법정물 쓰면서도 저도 참 많이 힘들게 했네요.

이 글 때문에 1학기 교양으로 법관련 교양을 들었는데 쓰는데 조금 도움이 된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rock the court의 민현과 재환은 글은 끝나지만 우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겨먹으려 하고 있을겁니다. 법정에서도 침대에서도요.

이 글이 끝나고 질투를 소재로 한 연재물이 올 것 인데 그것은 이것처럼 오래 달릴지는 잘은 모르겠네요.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를 읽고 떠오른 연재물이라... 그런데 그 작품과 비슷한 전개는 아닐 예정입니다.

그냥 질투에 미친 황민현 정도면 설명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 새 연재물 전에 계간 공개가 먼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년짼계간 공개 전에 씰탐 단편은 무조건 하나 더 올릴 예정입니다.

꾸준히 제 글을 봐주시는 독자님들께 항상 복이오길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만두집전기저항 @P_i2r_jj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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