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어먹을 우산 
Written by 시민


이번엔 한 달까진 아니고 일주일 정도 쌩 깠음. 김여주는 고백 아닌 고백 뱉고 집 가는 길 내내 울면서 아 이제 끝이구나, 진짜 아는 척도 못 하겠구나 했는데 이 빌어먹을 이동혁이 또 연락을 함. 얘기 좀 하재. 연락을 받고 두 가지 감정이 들어찼음. 우리가 친구였던 시간이 일주일 만에 정리되진 않았다는 안도감과 형용할 수 없는 비참함.

> 너네 집 버스정류장 앞이야 잠깐만 나와 봐

> 제발 나와

> 넌 친구 아닐지 몰라도 난 친구인데

> 마지막이 그런 기억인 건 싫어 너도 싫잖아

기어코 마지막을 고하려고.

이동혁이 쓸데없이 집요하고 친절해서 김여주도 친절히 나가 줌. 너한테만 마지막인 게 아니야. 나도 마지막이야. 너만 마지막을 고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나도 마지막을 말할 수 있다고. 김여주는 그런 마음가짐이었음.

내가 널 좋아한 거라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라고. 니가 갑인 게 아니라고. 주체는 나라고.


"……."

"……."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이었음. 이렇게 표정이 없는 채로 마주하는 건 거의 처음이었지. 이번엔 김여주가 먼저 운을 뗌.


"뭐 어디 카페라도 갈래? 너무 거창한가. 아니면 근처 공원이라도?"

"너 편한 대로."

"그럼 여기서 해. 빨리 집 가게."


이동혁은 잠시 말이 없더니 문 닫은 상가 턱에 걸터앉아 말함. 서서 얘기할 거야? 옆에 앉아. 둘이 나란히 앉아 앞만 보고 있다가 이번 정적은 이동혁이 깸.


"너 나 언제부터 친구로 생각 안 했냐."

"...대체 뭔 대화를 하려고,"

"우리 1학년 때 기억나냐. 5월쯤인가 나 한국사한테 쥐어터졌던 날."


이동혁이 목소리 톤을 살짝 높이며 부드럽게 말했음. 뜬금 없게. 김여주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임. 국사 쌤이 유난히 이동혁만 싫어했거든. 수업 안 듣고 처잔 게 자랑은 아니지만 이동혁한테 유독 박했음. 머리 툭툭 치는 건 예삿일이고.


"그때 국사 핀트 나가서 나 죽일듯이 패는데 니가 안 말렸으면 진짜 큰일났을걸."


김여주가 한국사 책을 놓고 온 날이었음. 안 갖고 오면 수행평가 점수 깎이는 것부터 시작해서 별 히스테리를 다 부리거든. 안절부절하는 김여주에 이동혁이 책 넘겨주고선 말함.

안 가져왔어? 내 책 가져가. 나 어차피 잘 거야.

김여주는 얼결에 받았음. 어어. 고마워... 근데 국사가 그때 미쳤던 건지 아니면 아싸리 건수 잡아서 이동혁을 좆패고 싶었던 건진 몰라도 그 두꺼운 한국사 책으로 엎드려 있는 이동혁의 머리를 계속 내려쳤음. 폭언은 덤이었고. 매국노냐는 둥, 너 같은 양아치 새끼는 다 죽어야 한다는 둥.

그만, 그만하세요. 걔 책 제가... 제가 가져갔어요. 제가 벌 받겠습니다.


"난 그때부터 너 친구로 생각했어."

"……."

"너 좋은 애야. 그래서 친구 하고 싶었어."


진지한 이동혁에 김여주가 헛웃음을 치며 말함.


"야... 상식적으로 누구든 말렸을걸. 내가 아니라 니 옆에 다른 사람 누구라도,"

"난 쉬운 일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그때 니가 내 옆에 있었잖아. 니가 말려 줬고."

"……."

"니가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금까지도."


울컥할 것 같아. 김여주가 고개를 숙임.


"니가 그렇게 좋은 친구여서 그런 마지막은 싫었어."

"……."

"미안."


음성이 견고했음. 낄 틈도 없다는 듯이.

짝사랑 절대 안 할 것 같은 이동혁도 일 년 정도 이원을 혼자 좋아했음. 노빠꾸 직진일 것 같은 얘가 은근 순정파더라고. 나름 반전 매력이었지. 이원도 그렇게 이동혁한테 빠진 거였고. 이동혁의 순정을 잘 알아서 간만에 김여주랑 단둘이 논다는 이동혁을 허락해 준 거고(결국 놀진 못 했지만). 이원도 질투가 안 난다면 거짓말이지만 말 그대로 질투뿐이지 위기감 따위 전혀 없었음. 이동혁이 이원의 남친으로서 그런 안정감과 믿음을 줬음.

이동혁의 음성만큼이나 이 둘 사이가 견고해서 낄 틈이 없다는 뜻이지.

아무튼 이동혁도 마지막 음성을 끝으로 고개를 숙임. 김여주는 주먹을 꽉 쥐고 생각함. 개새끼. 존나 개새끼. 개새끼인 주제에 왜 개새끼가 아닌 거야. 왜 씨발 끝까지 다정해서...

좋은 친구가 아니게 만들어.


"미안해 하지 마. 내가 좋아한 거니까. 내가 갑이니까. 너도 갑이야. 우리 둘 중 을은 없어."

"……."

"니가 날 거절할 수 있듯이 나도 널 좋아하겠다고 내가, 내가 택한 거야."


끝말은 살짝 울먹거렸음. 말하면서도 좀 비참해서. 근데 정신승리면 뭐 어때 시발. 가오는 챙겨야지. 김여주는 고개를 빳빳이 처들고 이동혁과 눈을 맞추며 마지막을 고함.


"야 버스 왔다."

"……."

"잘 가라 이동혁."


10월의 끝자락이었음. 여름이 다 지나가고 긴 천가죽이 몸을 감는 것에 익숙해질 즈음.

이동혁의 계절이 저물 때쯤.

김여주는 이동혁을 보내주기로 함.

그게 정 안 되는 날이면, 표면적으로라도.


* * *


그 뒤로 극적인 변화는 없었음. 그냥 서로 아는 척 안 하고 반 구성원쯤으로 보는. 그렇다고 서로 피하지도 않았음. 같은 조가 되면 성실히 임하고 말할 필요가 생기면 하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 둘 다 선을 잘 알았음. 여주야 뭐 아직까지 좋아하긴 했지만 현생 다 버리고 식음전폐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건 아닌지라 그냥 받아들일 뿐임. 가끔 이원이랑 동혁이 같이 있는 걸 보면 아 그냥 아직도 좋아하고 있구나. 하고 마는 거지. 너무 우울한 날이면 울컥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음. 다음 해에는 제에발 반 좀 떨어지게 해 주세요 저 대학 가야 해요 이러면서 빌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는 중이었음. 자신의 감정을.



근데 이제 이동혁이랑 완전 쌩 까기로 한 거야?

아 십 깜짝이야. 김여주가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침. 음성의 주인은 나재민이었음. 나재민?? 간만에 봉사 시간 채우러 보육원 왔더니 니가 왜 여기서 나와 상태됨.


"뭘 그렇게 놀라. 서운하게."


우리가 서운까지 할 사이였던가. 이동혁 친구라서 이동혁 놀릴 때 몇 번 티키타카 하고 말 튼 것까진 아는데 따로... 이럴 사이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 김여주... 당황 작렬에 그대로 굳음.


"봉사 자원자분들 잠깐 모여 주세요!!"

"가자 여주야."


어색의 정점에 있을 때 보육원장님이 소리쳤음. 근데 어색한 건 김여주뿐이었는지 나재민은 태연하게 등 떠밀면서 가자가자 이러더라고. 김여주는 당황 작렬에 어어... 가야지가야지. 하다가 얼결에 둘이 같은 팀 됨. 진짜 뭐지??

둘은 봉사자들 중 제일 젊다는 이유로 스펙타클 온종일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에 당첨됨. 뭐 옮기고 꾸미는 것보다 이게 제일 힘든 거 아시죠. 언니!!!!! 나 목마 태워 줘!!! 누나!!!! 나 잡아봐라!!!!! 김여주가 뉴페이스라 그런지 애들이 오지게 굴림.


"아 나 죽어... 제발..."


결국 봉사 거의 끝날 즈음 김여주가 죽는 소리를 냄. 실제로도 거의 죽어감. 나재민 푸석한 웃음 작렬하면서 김여주 일으킴. 여주야 바닥에 앉으면 안 돼. 엉덩이 차가워. 뜻밖에 엉덩이 워딩에 당황한 김여주 어어... 하면서 일어남.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데 괜시리 민망해지는 엉덩이...


"누나!!!"

"누나 힘들대. 형이랑 놀자."

"누나..."

"누나 힘들대. 째미니 형은 싫은 고야??"

"아니 형도 좋쥐..."

"그취그취. 형아도 울 애기 너무 좋아. 형이랑 같이 놀자."


애들 다루는 게 아주 수준급이네... 김여주 오늘 봉사하는 내내 처음 웃음. 그것도 아주 크게 푸하학!! 그러다 나재민이랑 눈 마주쳤는데 입꼬리 미미하게 올라가 있는 거 보고 또 괜시리 민망해져서 입 다묾.

아 쟤랑 있으면 뭔가 간파당하는 기분이야. 머쓱해진 기분에 뒷목만 쓸고 있는 김여주...

그렇게 남은 시간은 나재민이 거의 혼자 다 해서 머쓱하지만 편안한 자세로 봉사에 임함. 할 게 없어서 얼결에 나재민 관찰이 됐는데 보면 볼수록 투박한데 섬세하더라고. 애교는 무슨 메시지 보낼 때도 점까지 딱 붙여서 보낼... 아니다 걍 씹을 것 같은데. 뭐 아무튼 그런 이미지였는데 동화책 읽어 줄 때 와장창 깨짐. 김여주가 오히려 더 몰입해서 듣다가 나재민이랑 눈 마주침.


"그으래서!! 게으른 베짱이는 어떻게 됐냐면용~~"

"(김여주 자기도 모르게 고개 끄덕거림)"


그런 김여주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나재민... 나재민 씨익 웃더니 손가락으로 여주 쪽 가리키고 말함. 당연히 애들 시선은 당연히 가리킨 쪽으로 가버리고...


"저기 있어요. 여주 베짱이."

"어? 뭐? 아니 니가 쉬라며..."

"여주 베짱이 혼내 줘요. 성실한 개미 친구들."

"아니 야 잠만 이건 아니지."


아이들의 비난이 쇄도함. 김여주 당황 작렬해서 어 아니 얘들아 그게... 아니라 상태됨. 나재민 그거 보고 만난 이후 처음으로 제일 크게 웃을 듯.

아무튼 그렇게 다사다난한 봉사 끝나고 나오니 밤이 내려 앉았더라고. 멍하니 밤하늘 보면서 걷다가 정신 차려 보니 나재민이랑 나란히 걷고 있음...


"여주 배 안 고파?"

"왜. 사 주게?"

"사 주면 같이 먹어 주게?"


국힙 원탑임. 한마디를 안 짐. 내적친분 좀 쌓여서 장난치려던 김여주 백스텝 밟으며 본인이 더 당황함.


"야 장난이지..."

"사 줄게. 아까 베짱이로 몰아갔으니까."

"아 그거 솔직히 진짜 너무했다. 제대로 받아 먹어야겠네."

"그래야겠지. 여주 뭐 먹고 싶어."


어라... 싶으면 이미 말려 있음. 어쩌다 보니 같이 밥도 먹고 버스도 타고 여주 집까지 데려다 준다는데 이 모든 게 숨쉬듯 자연스러워서 여주도 어라... 싶음. 정신 차리면 옆에 나재민이 있다니까요.


"봉사 자주 해?"

"응. 애기들 귀여우니까. 봉사라면 보육원 아니어도 좋긴 해."

"신기하다. 애들 엄청 잘 다루더라."

"동혁이 동생들도 친구들 중에 나 제일 좋아해. 걔네 까다로운데. 짱이지."


간만에 들리는 이동혁 이름에 잠깐 멈칫한 김여주... 이내 아무렇지 않게 오 대박이네 ㅋㅋㅋㅋ 하는데 나재민은 틈을 놓치지 않아요.


"근데 요즘 왜 동혁이랑 안 놀아 줘 여주야."

"평소랑 똑같은데 뭐."

"동혁이가 여주 놀릴 때마다 반응 귀여웠는데."

"야 나 집 다 왔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이러다 또 말리겠다 싶어서 흐름을 끊음. 나재민도 별말 않고 그래. 조심히 들어가. 하길래 끝인 줄 알았음.


"여주야."

"엉?"

"나 매주 토요일마다 거기서 봉사해."

"어?"

"알아두라고. 갈게."


그리고 광대 뽕싯 올라오게 웃으면서 손 방방 흔들면서 사라지는데

솔직히 좀 귀엽게 느껴져서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음. 보통 건장한 열여덟 고딩에게 귀여움을 느끼진 못 하거든요. 그리고 곱씹다 보니 되게 하루 만에 많은 걸 한 느낌. 김여주 원래 친구들한테도 집 안 알려 주거든요. 하물며 이동혁도 하교 같이 해서 버스 정류장이 어딘지만 아는 건데 얼결에 집까지 바래다 준 나재민... 김여주도 되게 의아했음. 물 흐르듯이 영역을 침범당한 거지. 말리면 큰일나겠다 싶었고.


* * *


이 그지 같은 몸뚱이는 환절기마다 난리였음. 무슨 계절알리미도 아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학교도 못 갈 정도로 앓았음. 아 오늘 진도 다 놓쳤겠네... 생각하며 까무룩 온종일 잠듦.


"너 뭐야?"

"어 일어났네."


그런데 짜잔. 눈 뜨니 집에 나재민이 있음. 이게 뭐냐? 무슨 일이냐? 그것도 지 집처럼 과도 들고 사과를 깎고 있음. 당황해서 들어 보니 학교에서 내일까지 제출해야 되는 통신문을 전해야 하는데 여주네 집 아는 사람이 나재민뿐이었다는 거... 여주네 엄마도 여주가 집 알려 준 거면 믿을 만하다 해서 들여보낸 거였음. 게다가 사과도 잘 깎더라고요(일 등 사윗감). 여주네 엄마 자꾸 나재민이랑 뭔 사이냐고 물어봄. 골이 아주 지끈지끈 울림.


"그리고 오늘 진도 프린트물 복사해 왔어. 이 페이지 전체 다 수행평가니까 잘 봐 두고."


나재민이 깎아 준 사과 먹으면서 고개 끄덕이며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고맙다 하는 김여주... 그러면서 핸드폰 보는데 친구들한테 서운 작렬 연락 옴. 니 죽어도 집은 안 된다고 하더니 나재민은 대체 어케 아는 거냐 하면서 서운함을 팍팍 티 내길래 땀 뻘뻘 흘리며 변명 중 아니 어쩌다 보니... 너네도 나중에 와라... 변명 톡 보내는 와중 손이 뚝 멈춤.


> 나재민이랑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냐

> 걔는 너네 집 어떻게 아는데


잠잠해질 즈음 돌을 던지는 이동혁에 손 벌벌 떨면서 카톡 창 나옴. 이까짓 걸로 우는 건 자존심 상해서 아랫입술을 꽉 깨묾.


"그렇게 하면 피 날 텐데."


나재민은 다정한데 투박한 손으로 김여주의 아랫 입술에 손가락을 얹음.


"차라리 날 물어."


지독한 감기가 김여주를 지나쳐갔으니 이제 완전한 겨울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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