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첫 만남은 중학생 때였다.

새 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책상 자리를 바꿀 때, 내가 탐내던 창가 자리를 독차지한 너. 무리에서 홀로 떨어진 너는 친구들의 놀림을 웃으며 맞받아쳤다. 떠들썩한 자리 이동 시간, 남들 몰래 토라진 네 얼굴을 나 홀로 봤다. 항상 웃고 시끄러운 모습만 보이던 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해 한동안 쳐다봤다. 너는 내가 시선을 옮기고서야 나를 알아챘다. 시선 옆으로 보이는 네가 당황해 얼굴을 붉히는 모습은 나름 볼만했다.


다음 날부터 너는 나에게 친한 척하기 시작했다.


"안녕, C! 오늘 1교시 뭔지 알아?"

"C, 지우개 좀 빌려줘."

"C, 오늘 점심 탕수육이래!"


오전 내내 나를 C라고 부르며 친한 척하던 너는 점심시간 뒤, 새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며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 B……."


왜 틀린 이름을 듣고도 정정해주지 않았느냐 되묻지도 않고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사과하는 네게 말했다.


"상관없어."


그 당시 나는 너 같은 애들이 딱 질색이었기에.

그 말을 들은 너의 붉은 얼굴이 무섭게 창백해진 기억이 난다. 5교시가 시작하고 습관처럼 창가로 눈을 돌리니 네가 서럽게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책상 위에 놓인 네 팔을 잡았다. 당황한 나를 보고 너는 제법 귀여운 소리를 내더니 참던 울음을 터뜨렸다.

네게 붙잡혀 반강제로 함께 하교하는 길에서 네가 말했다.


"B랑 친해지고 싶어. 선 긋지 마. 부탁이야."


그 당시 나는 너 같은 애들이 딱 질색이었지만.


"응."


네 미소가 꽃처럼 피었다.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주로 네가 표현하고 내가 받아들인다. 일방적으로도, 불공평하게도 보이는 우리의 모습에 몇몇이 참견하는 일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틀어지지 않았다.


고등학생이 되니 네게 늦은 변성기가 찾아왔다. 남자다워진 목소리에 맞춰 키와 체격도 커졌다. 내 키를 앞지른 날, 너는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연신 내 앞에서 깝죽거리다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키가 크고 남자다워진 너는 인기 있었다. 유머러스하고 여기저기 친한 척하는 성격 때문에 더했다. 학기 중의 이벤트날은 너의 날이었다. 네가 받은 초콜릿, 사탕, 빼빼로, 러브레터, 사랑고백 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양손가득 쇼핑백을 들고 너 혼자 신나서 떠벌거리며 걷던 하굣길. 그런 걸 주지도 받지도 않는 나에게 이거라도 먹으라며 동정하듯이 건네준 판초콜릿, 츄파츕스, 가장 기본적인 빼빼로는 쇼핑백이 아닌 네 주머니에서 나왔다.


언젠가 같은 학년 여자애에게 자그마한 초콜릿 상자를 받았다. 고백도 편지도 없이 수줍은 미소만 남긴 정성스러운 선물이었다. 너는 그날 종일 기분이 안 좋았다. 하굣길은 조용했다. 네 쇼핑백 안에 담긴 초콜릿들만 덜그럭거렸다.

갈림길에서 그냥 가는 너를 불러 세웠다. 심드렁하게 돌아보는 네게 손을 내밀었다.


"뭐."

"줘."


나는 네 바지주머니를 가리켰다.


"내 거."


네 눈이 점점 크게 뜨이더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너는 황급히 주머니에서 판초콜릿을 꺼내 나를 향해 집어던지고 도망쳤다. 집으로 와 포장을 까보니 초콜릿이 반쯤 녹아있었다. 나는 그 미지근한 초콜릿을 포장지까지 싹싹 핥아먹었다.


다음 날부터 너는 날 피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못 본 체 다른 곳으로 가거나 형식적인 인사뿐. 귀찮을 정도로 보내던 문자도 뚝 끊겼고, 하교도 따로 했다. 어쩌다 만나면 너는 날 철저히 무시했다.

나는 기다렸다.

기다림이 지겨워질 때쯤 네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면전에서 네게 무시당했을 때보다 아팠다. 아파서 조금 울었다.


너희는 생각보다 잘 어울렸고 예쁘게 사귀었다. 그리고 드디어 네가 말을 걸었다.


"잘 지냈냐?"


멋쩍지만, 스스럼없는 말투. 잘 지냈느냐는 말 이후로 예전 일을 물어보는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래, 네 선택이 그렇다면.


"응."


네 미소가 보기 힘들다.


우리는 적당한 친구로 지냈고 학년이 올라가고 학교를 졸업하며 자연스레 연락을 끊었다.

그 뒤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신입생 환영회다 뭐다 여기저기 끌려가고 시큰둥한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고 선배에게 찍혀 한바탕 난리도 겪고 아르바이트를 찾다 겨우 호프집 야간 알바가 붙어서 하루하루가 숨 막히게 지나갔다.


너를 생각한 적이 없느냐면, 그렇다. 단지 그 미지근한 초콜릿의 텁텁함이 입 안에 감돌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한껏 요란을 떨다 잠잠해진 거리를 걷던 때였다. 평소보다 늦게 끝나 사장님이 교통비를 챙겨줘 택시를 타고 가려고 큰길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몇 분 만에 나타나 내 앞에 설 줄 알았던 택시는 한 블록 앞에 뒤늦게 나타난 사람 앞에서 멈췄다. 빨리 집으로 가 침대에 뻗고 싶은데 새치기 당한 것 같아 괜히 빤히 쳐다봤다. 한 사람이 인사불성이 된 사람을 택시에 밀어 넣고 택시기사에게 선금을 줬다. 택시기사와 남자의 웃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멍하니 서서 내 앞을 빠른 속도로 지나쳐가는 택시 뒤꽁무니를 바라보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B…?"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일행을 택시에 태워 보낸 남자가 머뭇거리다 다가왔다.

잊혀지지 않는 초콜릿의 끈적함처럼 너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너는 변함없이 친한 척하며 나를 대했다. 활짝 웃으며 대뜸 나를 끌어안더니 어떻게 지냈냐며 묻기에 잘 지냈다고 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 여기 사냐, 난 이 근처에서 자취한다는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택시 한 대가 더 지나갔다. 내가 곤란한 표정을 짓자 너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마침 토요일이고, 아침 일찍 약속 없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여기 이 시간에는 택시 잡기 힘들어."


너는 대답 않는 내 팔을 잡고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네 자취방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너는 신이 나서 나에게 새 속옷과 잠옷을 들려 욕실로 밀어 넣었고, 씻고 나오니 좁은 방 안에 간단한 술상이 펼쳐져 있었다.

그건 좋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술의 힘을 빌려 잠깐 동안 옛날로 돌아갔다. 그건 무척 즐거웠고, 남은 술이 줄어들수록 슬펐다.

너는 마지막 한 캔을 따고 잠시 말이 없었다. 네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본다.


"나 너 좋아했었다."


나도 안다.

대답이 없자 어떻게 받아드렸는지 너는 장난스레 웃으며 사춘기 때 성정체성이 어쩌고, 나와 가장 가까워서 그랬던 것 같다는 둥, 그때 여자 친구를 사귀며 마음이 정리가 됐는데 어린 마음에 나를 대하기 어려웠다느니 온갖 쓸모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네 한 마디, 한 마디에 술이 깬다.


"미안한데 자면 안 되겠냐."


시큰둥한 내 말에 너는 오히려 사과하며 네 침대를 양보했다. 침대에 모로 누워 등 뒤로 들리는 네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비참함에 잠도 오지 않았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듣지 않았더라면 그냥 첫사랑의 추억 정도로 갈무리되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초콜릿 맛을 잊을 수 없는데, 네 감정은 이미 홀로 정리되어 한 때의 실수가 되었다. 피곤해도 일찍 일어나 첫차를 타고 돌아가자. 잊었던 약속이 생각났다고 문자로 해명하고 연락하지 말자.


"B, 자?"


갑작스러운 네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어 나는 잠든 척하기로 했다. 네 그림자가 내 위로 드리웠다.


"B."


네 손이 내 눈 위를 오가는 것이 느껴졌다. 샤워하고 왔는지 바디워시 냄새가 났다.


"진짜 자는 거야?"


네 손이 어깨에 닿았다 떨어지더니 내 뺨에 놓였다. 너는 침대에 걸터앉아 내 얼굴을 한참 만지작거렸다.


"진짜 자네."


내 이마를 쓸어 올렸다가 뒤집어진 앞머리를 다시 정리해주고 눈썹을 매만지다 광대를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콧등을 살살 쓸어보고 다시 이마, 눈썹, 광대, 이번에는 손등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마디로 턱을 따라 쓸기도 했다. 그러다 너는 손을 놓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입술에 무언가가 닿은 건 아주 잠깐이었다.

네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울 때까지 나는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곧이어 들린 미세한 훌쩍이는 소리에 몸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네가 침대에 앉는 느낌에 잠에서 깼지만, 눈은 뜨지 않는다. 너는 벌써 씻었는지 다가오는 손에서 희미하게 비누냄새가 난다. 네 손이 어젯밤처럼 내 얼굴을 조물거리다 멈춘다. 네 시선이 느껴진다. 어제보다 용기 낸 입맞춤에 입 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참는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네 손을 잡고 눈을 뜨니 예전처럼 눈을 크게 뜬 네 얼굴이 보인다.


"나도 좋아해."


무슨 말이냐며 허둥지둥하던 네 눈이 일렁이더니 서럽게 눈물만 뚝뚝 떨어졌다. 너를 달래주려고 일어난 나를 끌어안고 미안해와 좋아해를 반복하는 네가 사랑스럽다.

재촉하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나는 너를 마주 안을 것이다.


1차 글러/BL(현대/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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