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님, 이사회 일정 나왔습니다."


가벼운 노크소리에 남준이 고개를 까딱였다. 민영은 여느 때처럼 손을 가만히 앞으로 모은 채 남준이 스케줄 차트를 확인하는 것을 기다렸다. 


대대적인 인사이동 직후 처음 전략개발팀에 배정을 받던 날, 동기들은 민영을 위해 축배를 들어줬지만 민영은 그 뒤에서 홀로 고배를 들었다. 축배를 든 이유는 자명했다. 이제 막 유학길에서 돌아와 전략개발팀을 새롭게 지휘하게 된 팀장이 여느 구닥다리 영감들과는 다르게 젊고, 훤칠한데다 꽤 젠틀한 사람인 덕분에. 게다가 소위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최연소 팀장이라느니, 소문으로만 듣던 재벌 2세라느니 떠들기 시끄럽던 동기들은 이것이 새로운 출세 가도가 될 수도 있잖냐며 민영을 놀리기 바빴다. (아마 반 쯤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물론 사석에서 만났다면 마음이 먼저 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영이 홀로 고배를 들어야 했던 것은 그가 사내에서도 유명한 일 중독자인 탓이었다. 음……. 엄밀히 표현하자면, 좋은 '사람'과 좋은 '상사'는 다르다고. 게다가 최근 팀이 큰 프로젝트를 하나 성사시킨 뒤 자잘한 프로젝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준의 일정 하나 하나를 세세하게 관리하고 동선과 시간이 꼬이지 않도록 조율해야하는 민영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허구한 날 남준이 하는 일이라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넘어지는 김우진 이사까지 난리인……. 


하지만 오늘은 뭔가 조금 이상했다. 팀장님, 하고 의아함을 담아 부르자 무덤덤하게 일정표를 넘기던 남준이 무슨 일이냐는 듯 민영을 살짝 올려다본다. 잘못 들은 게 아니다, 그는 분명 무엇인가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묘하게 귀에 익은 멜로디였는데……. 게다가 남준이 업무용 모니터에 띄워놓은 창이 유난히 화사하다. 민영은 눈썰미가 좋은 여자였다, 김남준이라는 남자 곁에서 살아남으려면 마찬가지로 집요해질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아……. 왜요, 오늘 뭔가 달라보입니까?"

"방금 웬 노래까지 흥얼거리셨잖아요."

"제가요?"

"그것 말고도요, 뭐……. 팀장님, 저 눈치 되게 빨라요."


민영이 눈을 흘기듯 웃자 남준의 표정이 한 결 가벼워진다. 어쩐지 최근들어 평소보다 칼처럼 퇴근하신다 싶더니……. 당장 민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후보는 하나밖에 없었다. 자그마한 체구에도 꽤 당찬 걸음걸이를 가진 KC의 아가씨 말이다. 단순히 김우진 이사라는 방해물을 넘기위해 선택한 극단의 조치인줄로만 알았더니, 역시 페로몬이라는 건 무시할 수 없나보다. 어머, 어머. 그럼 설마 그 향수 냄새는 페로몬 향이었나? 민영은 새삼스레 그래, 팀장님도 인간이셨지, 싶은 마음이 들어 코끝이 찡해졌다. 마땅히 할 일도 없다며 주말까지 출근해 일에 파묻혀 있는 모습을 봤을때는 이 남자가 조만간 꼼짝없이 컴퓨터와 혼인신고를 해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갑자기 의욕이 불타오른 민영은 허리를 숙여 남준의 모니터 구석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여기, 제 눈에는 이게 제일 예쁘네요."

"아, 이거 말입니까? 그럼 혹시 크기는 어느 정도 돼야……."

"그걸 질문이라고 하세요? 무조건 커야죠, 무조건!"

"아아……."


그래도 자신은 남준의 다양한 면모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온 존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가 보여줄 낯선 모습이 남아있었다. 민영은 남준이 엉겁결에 결제까지 마치는 모습을 뿌듯하게 지켜본 뒤, 크게 조율할 것도 없어보이는 일정표를 다시 받아들고 사무실을 벗어났다. 덩달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민영을 향해 같은 팀의 대리 하나가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뭐야, 민영 씨. 무슨 좋은 일 있어? 민영이 저도 모르게 허공으로 치솟는 광대를 숨길 생각도 않고 작게 속삭였다. 이렇게 재밌는 걸 혼자만 알고 있을수는 없지.


"팀장님이요, 아무래도 데이트 가시는 것 같아요!"





운명방정식

W. 삐요삐요 (@ComPpiyo)






남준은 그날도 평소처럼 교문에서 조금 떨어진 대로변에 차를 세워둔 채 태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만 아니었다면 교실에 있을 시간이었고, 주말에도 밖을 나돌아다니는 성격은 아니라 이맘때쯤의 햇빛을 받아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남준의 환한 웃음 위로 부서지는 빛줄기를 보자마자 강민규의 엄마가 차곡차곡 채워놓은 불쾌한 감정의 조각들이 삽시간에 으스러진다.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금방 왔어요. 뛰어올 것 까지는 없었는데……."


하지만 태형은 콧잔등에 딱 기분좋게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웃었다. 오늘따라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남준의 배려가 유난히 쑥스럽다는 생각을 해버렸다. 이제 몇 번 타봤다고 제법 익숙해진 차의 조수석으로 몸을 실으려는 순간, 태형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저씨……. 이게 뭐예요?"

"아, 혹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아뇨, 그런, 그게 아니라……."


무방비한 품에 한가득 안겨든 꽃향기가 그 원인이었다. 


"이거 제 거예요?"

"그럼요."


태형이 다시 한 번 확인하듯 묻자 남준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품에 꽃을 안고, 혹시나 약한 줄기가 바스라지지나 않을까 조심스레 차에 올랐다.


이 나이대의 남자애들이 대부분 그렇듯 태형도 꽃과는 그리 친숙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풍성한 꽃다발을 받아본 게 언제인지도 아득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당연히 꽃다발보다야 부모님이 사주시는 새 운동화가 더 좋았고, 중학교 졸업식에는 고슬고슬한 참기름 냄새를 풍기는 고모가 대신 왔었다. 당신도 바쁘신 참에 잠깐 여유를 내 얼굴만 보러 와주셨으니, 꽃은 고사하고 나란히 마주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바빴던 기억만 난다. 지금껏 태형의 삶에는 꽃향기처럼 고풍스러운 것이 불쑥 끼어들 여유랄 게 별로 없었다. 이건 수국인가……. 아, 이건 안개꽃. 그나마 이름을 아는 꽃 몇 송이가 반가웠다. 볼때에도 크다고 생각은 했지만 무릎 위에 꽃다발을 두고 앉으려니 파묻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지금껏 남준의 차를 탈때면 늘 서늘한 숲 내음이 풍겼는데, 오늘은 꼭 봄철 언덕 위에서서 바람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잠깐 눈을 감고 그 향기 사이에 뺨을 파묻었다. 와아……. 좋다……. 태형은 너울거리는 꽃송이 사이에 파묻혀 오랜만의 평온함을 잔뜩 만끽했다.


"시험 끝난 기념이에요, 축하한다는 의미에서. 그런데……. 내가 아무래도 크기를 조금 잘못 고른 것 같죠? 미안해요, 설명만으로는 이렇게 클 줄은 몰랐는데. 그건 그냥 뒷좌석에 두고……."

"아니, 아니요……. 좋아요. 사실 이렇게 큰 꽃은 처음 받아보는 거라, 좀 놀랐어요."

"정말 좋아요?"

"네!"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오른 남준이 태형을 향해 커다란 손을 뻗쳐왔다. 태형은 그 순간 이유없이 꽃다발을 꽉 끌어안았다. 물론,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이름도 모를 선홍빛 꽃봉오리가 토닥토닥 태형의 뺨을 두드렸다. 남준의 손은 태형과 꽃다발을 그대로 지나쳐 벨트 버클을 스르륵 잡아당긴다. 아……. 달칵, 하고 버클이 잠기는 소리와 향긋한 꽃내음 사이로 남준의 페로몬이 지닌 시원함이 스며든다. 


또다, 다시 심장이 콩콩 요동치기 시작했다. 얇은 하복 셔츠 위를 다정하게 가로지르는 남준의 손.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다. 태형은 차가 부드럽게 정차하고 출발하기를 반복할때마다 목덜미와 가슴팍을 촉촉하게 두드리는 꽃봉오리를 살금살금 쓰다듬었다.








"이것도 먹어봐요. 아, 혹시 양고기는 좋아해요?"

"먹어본 적이 없어서……. 저, 괜찮으니까 아, 아저씨 드세……."

"아, 이건 좀 매우니까 조심해요. 이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좀 순한 맛으로 시킬 걸 그랬네요."


태형은 양념장이 새빨갛게 묻어있는 게장을 태형의 앞으로 당겨주는 남준의 행동에 당장이라도 손바닥 뒤로 얼굴을 파묻고 싶은 심정이 됐다. 딱 자신의 팔 길이만큼의 반경 안으로 오밀조밀 모여있는 반찬 그릇들을 보니 마음이 더없이 착잡해진다. 남준은 이제 아예 턱을 태형을 향해 돌아앉은 채 태형이 젓가락질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둘만 앉아 식사를 할때는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사실이 있었다.


"……아저씨,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바로, 이게 남들에게 보여주기에는 꽤 부끄러운 그림일 수도 있다는 점 말이다. 태형은 숟가락을 든 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속닥거렸다. 남준은 그런 태형의 속삭임을 들은 것이 분명한데도 그저 잔 가득 물을 따라주며 웃는다. 아니이…….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분명 자신을 놀리는 기색이었다.


"하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요, 태형 학생."


맞은편에 앉아 꼭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기라도 한듯 멋쩍게 웃는 남자는 남준이 소개해준 변호사였다. 강민규와 자신의 일이 학교의 범주를 넘어 소위 말하는 '어른들'의 싸움까지 확장되었을때 그가 태형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고. 나이는 남준과 엇비슷해보였고 말끔하게 뒤로 올린 머리에 커다란 웃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따금 일 얘기를 할때마다 진중해지는 눈매가 깊은 신뢰를 풍기는 인상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사업이 한참 힘들어졌을때, 아버지는 꼭 술을 마시면 변호사를 만나셨다. 그러니 어린 태형은 막연히 변호사란 힘이 들 때 만나는 사람인가보다, 싶은 추측을 할 뿐이었다. 아, 그들의 시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싸다는 것도 알고있다. 이렇게 같이 밥을 먹는 시간을 위해서도 돈을 내야 하는 걸까? 태형의 어린 눈에는 어른들의 세상이라는 것은 엇비슷하게 어렵고 멀찍해보였지만 그가 남준의 지인이라는 사실이 친밀감을 얹어준 탓일까, 이 자리가 마냥 불편하지만은 않았다. 아는 것은 없어도 그는 좋은 사람 같았다, 남준이 제게 그러했듯, 남준이 믿는 사람을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남준은 태형의 밥그릇 위로 불고기를 한 점 더 얹어준 뒤 다시 변호사를 향해 몸을 조금 숙여 앉았다.


"그럼, 일은 문제 없는겁니까?"

"상식적으로 봐도 저쪽 죄질이 훨씬 무겁잖아요. 게다가 집단이기까지 하고, 오메가를 대상으로 저지른 범죄는 가중처벌을 받게 돼있어요. 보통 이렇게 강경하게 나오면 앞에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도 이상할 게 없는데……."

"알아보니 부친이 2선 교육감이더군요. 일을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을텐데, 뭔가 이상합니다."

"그렇네요. 아, 태형 학생은 이럴 때일수록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는게 좋고요……. 만약 저쪽에서 대화를 요청하면 반드시 저한테 먼저 연락 주세요."


남자가 태형을 한 번 쳐다보고는, 저쪽이 아무리 짱짱한 변호인단을 꾸려도 이기기 힘들 거예요, 하고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에게서는 어떻게든 태형을 안심시키려는 다정함이 엿보였다. 남준과 변호사는 그 뒤로도 한참동안 어려운 얘기를 이어나갔다. 태형은 남준이 연거푸 자신의 밥그릇에 반찬을 얹어주느라 정신이 없는 데에 반해 정작 그의 밥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모습이 속상해졌다. 이대로 배만 채우고 있기가 민망해진 태형이 도중에 쭈뼛쭈뼛 손을 들고 끼어들었다. 


"제가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변호사가 태형을 돌아봤다. 음……. 


"혹시 그날 있었던 일을 좀 더 상세하게 진술해줄 수 있는 증인은 없어요?"


태형은 눈치가 제법 빨랐기 때문에 곧장 떠오른 이름이 하나 있었다.


"알파는 아닌데요, 저한테 약이 든 음료수를 줬던 애가 있거든요."

"약이 든 음료수요?"

"네, 같은 학교 오메가예요."


하지만 태형이 말을 이어가려는 찰나, 남준이 숨기지도 않고 인상을 팍 찌푸렸다. 잠깐, 잠깐만요. 


"태형 씨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은 안 돼요. 아무리 오메가라고 해도 가해자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차라리 CCTV나 주변 정황을 모아서……."

"그, 그렇긴 한데요, 그래도……."


남준은 답지않게 단호한 태도로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단단히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언짢은 일이 생길때마다 불쑥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눈썹 산을 보며 그가 꼭 자신을 채근하듯 '김태형' 하고 부르던 날이 떠올랐다. 만약 오늘 강민규의 엄마가 학교까지 찾아왔었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남자는 이번에도 자신을 위해서 강민규의 멱살을 틀어잡았던 그날처럼 분노해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없던 걸로 합시다."


그, 그래요, 태형 학생이 무리 할 필요는 없어요. 변호사도 남준의 눈치를 보듯 상황을 웃어넘기려 들었다. 그때, 남준의 주머니에서 드르륵 드르륵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곧장 번호만 확인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남준은 이내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태형과 변호사를 한 번씩 돌아봤다. 미안해요, 급한 통화라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태형은 처음 보는 어른과 단 둘이 남겨진다는 사실이 조금 어색했지만 의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금방 끝날 것 같았던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지는 것 같았다. 태형은 고개를 빼꼼히 내어 복도에서 전화를 받는 남준을 한 번 쳐다보고는, 후식으로 나온 유자차를 꼴깍꼴깍 들이키며 침묵을 지켰다. 이유없이 목과 어깨가 뻐근하니 긴장이 됐고 자연스럽게 나오던 움직임과 말, 웃음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경계 어린 짐승처럼 굳어가는 태형의 상태를 알아차린 듯한 남자가 가벼운 목소리로 먼저 말을 붙여왔다.


"팀장님이 태형 학생을 많이 아끼시나봐요."

"……네, 네에?"

"엄청 바쁘신 분이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따로 시간까지 내셔서 신경 써주시는 걸 보면……."


물론 남자로서도 태형의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려왔다. 태형은 남준의 '일'이라는 꽤 커다랗고 중요한 단면을 전혀 모른다. 그저, 그가 남자의 말대로 귀찮을 법도 한데 자신을 아주 꼼꼼히 챙겨준다는 것 밖에는. 하지만 '아낀다'라는 건 어떤 걸까. 태형은 그 애매하게 간질간질한 단어를 속으로 곱씹으며 남준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친절을 하나 하나 나열해봤다. 이렇게 예쁜 시계를 선물해주시는 것, 맛있는 저녁을 사주시는 것, 조수석을 계절에 어울리는 꽃으로 가득 채워두시는 것…….


"아,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팀장님과는 어떻게 만난 건지 물어봐도 돼요?"


남자의 물음에 태형은 가만히 둘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닌데도 벌써 한참이나 지난 것 같았다. 남준이 소매치기 당한 가방을 찾아준 것이 시작이었지. 무슨 낯간지러운 정의감 같은 게 불타오른 건 절대 아니었고, 그저 훤한 대낮에 뻔뻔하게도 남의 가방을 훔쳐 달아아는 괘씸한 도둑놈을 잡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전부였던 것 같다. 달리는 것이라면 자신있었으니까, 그게 전부였다. 좀 더 본격적인 만남의 시작은 지하철에서 히트가 터져버린 날이었지…….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남준이 그날 자신을 놓쳐버렸다면. 좀 더 정확히는, 지하철에 자신도 모르는 새 퐁퐁 흩뿌리던 무향의 페로몬을. 만약 남준이 여느 알파들과 같았으면 어땠을까. 두 사람은 만날 일 없는 행성처럼 서로를 스치고 지나갔으려나. 그럼에도 인연은 둘을 닿게 해주었을까. 


"그래서 그 뒤로 쭉 도와주고 계신 거예요."

"그렇구나……."


태형이 횡설수설 늘어놓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어준 남자가 이내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웃는다. 역시 우연에 우연이 겹친 이야기는 제법 신기한……. 남자가 불시에 손바닥을 짝, 마주대는 바람에 태형이 놀라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꽤 운명적이네요!"


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잖아요. 그런데 그런 인연이 몇 번이나 겹쳤으니까요. 태형이 가만히 변호사의 말을 곱씹었다. 최근 운명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고있는 것 같다. 아니면 단순히 신경이 쓰이는 단어라 더 자주 들리는 것 뿐일까. 인연, 인연에 인연……. 그게 운명을 정의하는 방법일까? 정작 태형이 생각하는 더 놀라운 인연이랄 것은 따로 있는데. 그 틈에 젓가락 떨어지는 소리를 예리하게 포착해낸 직원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새 수저를 내어줬다. 하지만 더이상 뱃속에 무엇인가를 밀어넣을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태형은 정중하게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흠흠, 목이 잠기지도 않았으면서 태형은 괜히 헛기침을 두어번 내뱉었다. 


"사실 아저씨는요……." 


아아, 아니다. 태형이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이 유치하게 들떠버렸다는 경각심이 든 탓이다. 태형이 재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래도 아저씨께는 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귀찮은 일에 휘말리셨으니까요."

"아뇨, 팀장님이 귀찮은 일이라고 생각하셨으면 애초에 휘말리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정말요?"

"그럼요. 이해타산 하나는 확실하신 분이니까요."

"저기, 혹시 그럼 아저씨가요……. 지금 돈이라던가, 이런 거 많이 쓰고 계세요?"

"뭐, 설마 선임비용 같은 거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태형이 머쓱함에 꼬물꼬물 손가락을 주물렀다. 손톱 아래가 하얗게 변했다 금방 다시 발그레해졌다. 남자는 태형이 민망해하는 것을 눈치채고 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특하기는 한데, 그런 거라면 태형 학생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네? 어째서요?"

"사실 팀장님은……."








그날 밤, 다시 낯익은 놀이터를 찾은 태형은 낡은 운동화 앞 코로 콩콩 부드러운 흙바닥을 짓이기며 시간을 죽였다. 


벌써 약속했던 시간으로부터 20여 분이 더 흘렀다. 애초에 약속이라고 부를수나 있을까, 태형이 일방적으로 시각과 장소를 '통보' 당한 것 뿐이니까. 하지만 만남이 지체될수록 복잡한 감정이 태형의 속내를 지배했다. 사실은 좀전부터 휴대폰을 쥔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만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약하게. 잘 갈무리하면 숨길 수야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본능에 새겨진 두려움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준은 분명 만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잠자코 앉아 호의만 받아먹기에는 자신도 제법 어리숙하게 철이 들어버린 탓이다. 손도 못 써보는 것은 싫었다. 우선은 부딪혀볼 생각이었다. 무력감……. 태형은 언제든 그 무력감이란 게 가장 싫었다. 어디로든 달려나가는 것이 아무래도 천성인 것만 같다.


그러니 이번에는 다른 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음……. 이를테면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 양고기 생각. 노릇노릇하고, 고소한 맛이 났다. 입에 맞아요? 다정한 질문과, 자신의 앞접시에 고기를 덜어주던 젓가락과…….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초조해지면 손목의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저도 모르는 새 길이 들어버린 버릇이라, 말없이 매끈한 유리 위를 어루만지고 있는 손을 발견할 때마다 어쩐지 스스로가 낯설어졌다. 남준을 만나지 못했다면 생기지 않았을 버릇이었겠지, 원래는 시계를 차고 다니지 않았으니까. 근의 공식을 노래로 외우는 방법도, 수국에서는 어떤 향이 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남준에게는 자신으로 인해 새로 생긴 버릇이 하나라도 있을까? 태형은 두 무릎 사이에 뺨을 포옥 파묻고 좌우로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먼지를 털듯 이렇게 무거운 생각도 털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태형이 운동화 코로 제법 커다랗게 들쑤셔놓은 흙바닥 위에 낯선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림자는 태형을 향해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태형이 먼저 고개를 들고 인사를 했다, 안녕, 하고. 


모처럼만에 본 하민석은 태형이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초췌해져 있었다, 마치 그 사이 혼자서만 두 배, 세 배의 시간을 살아낸 사람처럼. 민석은 조급 후덥지근한 날씨에 맞지않게 팔꿈치와 무릎이 후줄근하게 늘어난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는데, 발가락이 훤히 드러난 슬리퍼가 괜한 이질감을 줬다. 


"잘 지냈어?"


제게 질문을 먼저 던진 건 하민석이었다. 예의 치레로 물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말의 끄트머리가 확연한 의문문처럼 치솟지는 않았다. 질문인지, 혹은 스스로 잘 지내왔음을 선언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도대체 왜 잘 지낸 몰골을 하고있느냐며 자신을 채근하는 것인지. 애매한 문장 사이에서 갈팡질팔하는 사이, 하민석이 불쑥 태형을 향해 다가왔다. 다짜고짜 제 어깨를 쥐어잡는 모습이 강민규나 여느 알파들처럼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크게 저항하지는 않았다. 태형은 하민석이 제 목덜미와 팔뚝 곳곳에 코를 묻고 짐승처럼 냄새를 맡는 꼴을 마냥 내버려뒀다. 그는 절박해보였다, 꼭 자신에게서 무슨 답을 찾으려는 사람 마냥하민석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알파 냄새가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나네."


태형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향이지? 엄청 시원한데. 나무 같기도 하고……." 


아리송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싶어 고개를 틀어 킁킁 스스로 냄새를 맡아봤지만 조금 눅눅한 섬유유연제 향 말고 크게 느껴지는 건 없었다. 낯선 냄새라면 그 새 제 몸에 녹아든 만개한 꽃향기가 전부인 것 같은데. 그러고보니 그때 정국이도 꼭 이런 반응을 보였지, 무슨 냄새를 묻히고 다니는 것이냐며. 알파에게는 알파의 체취가 역하다던데, 그래서 더 예민하게 눈치챈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제 무딘 코가 이제는 남준의 페로몬에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아, 알 것 같다. 이 알파는……. 너를 지키고 싶은 거야, 그렇지? 간혹 그런 알파들이 있다고 들었어, 습성이라고."


태형은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세우고 하민석의 두 눈을 쳐다봤다. 급한 용건은 따로 있었으니까.


"민석아, 나 좀 도와줘."


하지만 되려 난데없는 질문이 돌아왔다.


"왜 너였는지 알아?"

"……뭐?"

"왜 내가 하필 널 선택한 건지 아냐고. 우리 학교에도 오메가는 많잖아."


하민석은 꼭 태형이 무엇인가 되묻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태형이 고집스럽게 입을 열지 않자 하민석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그날 나한테 우산을 줬잖아. 기억나? 나는 그냥 비 맞고 가도 되는데, 네가……."


네가 처음이었어, 하고 놈이 속삭였다. 워낙 작은 목소리라 잔뜩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대로 풀벌레 소리에 먹혀들 것만 같았다. 내가 우산을 줬기 때문에. 태형은 난데없이 가슴팍을 향해 날아와 꽂히는 화살을 조금 멍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런데 왜……."


하민석이 그대로 태형의 두 어깨에 팔을 뻗었다. 흡사 자신을 저 깊은 바닥 아래로 끌어내리는듯한 하중에 무릎이 휘청거렸다. 태형은 은연중에 하민석의 팔을 붙들고 그가 무너지지 못하도록 종아리에 단단히 힘을 줬다. 하민석은 울고 있었다.


"왜, 씨발……. 강민규 그 새끼는 왜 하필 나였을까. 그냥 처음부터 너였으면 좋았잖아, 안 그래?"

"민석아……."

"아무 이유도 없잖아, 나는. 나는, 그냥……. 평범하게 학교도 다니고, 재수 좋으면 괜찮은 알파를 만나서……. 나는, 나도 너처럼……."


태형은 그제야 지금의 하민석에게는 울분을 토해낼 대상이 필요한 것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민석이 고개를 파묻은 후드 셔츠의 소맷단 쪽이 축축하니 젖어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녀석은 한참 뒤에야 다시 고개를 들어 까만 눈에 태형의 모습을 닮았다. 흐릿한 시선은 마치 자신을 꿰뚫어 그 너머의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듯 했다.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무언가를.


"……왜 연락한 건지는 알아. 그치만 나는 못 도와줘."


무서워. 나는 강민규가 무서워, 태형아. 나한테는 아무도 없어, 나를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강민규'라는 이름을 내뱉는 입술이 애달프게 달싹거렸다. 녀석은 눈물 범벅이 된 채로 풀숲에 숨은 짐승처럼 몸을 웅크리고, 날이 그리 춥지도 않은데 온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섣불리 손을 뻗었다가는 화상을 입혀버릴까 겁이 났다. 태형은 무너지듯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는 하민석의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작다. 원래도 작은 체구라고 생각은 했는데, 오늘따라 하민석이 무서울 만큼 작아보였다. 나는 너랑 달라, 하민석이 고요하게 울부짖고 있었다. 태형이 가만히 그런 하민석 앞에 몸을 숙여 앉았다. 정말 그럴까. 나는 정말 다를까, 민석아? 갈 곳 없는 태형의 손가락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몰라 허공을 가만히 더듬을 뿐이었다.


운명이라고. 자신도 그때에는 마냥 그렇게 생각했었지, 변호사가 그랬던 것처럼 손바닥을 짝짝 마주치며 웃었다. 하지만 근 몇 달 사이 철이 들기라도 한 건지, 불현듯 운명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다가왔다. 너무 무거워서 섣불리 남발하지도 못할 만큼. 실은 그 순간, 태형도 속에서 무엇인가가 아주 자잘하게 부서져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민규 무리에게 발길질을 당하던 순간과는 또 다른 통증이 갈빗대 아래에서부터 태형을 짓눌렀다.


사실 아저씨는요, 제 페로몬을 맡을 수 있어요. 제 페로몬에는 향이 없는줄 알았는데요, 아저씨는 달짝지근한 자두 냄새가 난대요. 제 페로몬은 자두향이에요. 


하마터면 신이 나서 한참을 떠들어 댈 뻔 했는데, 만약 그랬다면 훨씬 더 부끄러워졌겠지. 태형은 눈을 질끈 감고 머릿속을 아프게 두드리는 변호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사실 팀장님은 곧 제 매형이 되실 거거든요.'








민석은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와 맞서싸우기위해 손바닥으로 두 팔을 세게 문질렀다. 자신이 놀이터를 떠날때에도 태형은 줄 끊어진 인형처럼 오도카니 그곳에 앉아있었다. 알겠어. 무리한 부탁 해서 미안해, 조심히 들어가, 하고 파리하게 웃는 얼굴이 떠오른다. 본인도 당장 부서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는……. 민석은 고개를 세게 휘저었다. 누군가을 동정하고있을 여유는 없다, 그딴 것은 모두 다른 절박함으로 채워버렸으니까. 내일은 새벽부터 다시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했기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느덧 밤이 까마득해졌다. 꼴사납게 울음을 터트리느라 부어터진 뺨 위로 바람이 스칠때마다 쓰라림이 일어났다.


낡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꽃봉오리 같은 방 한 칸이 벌써 캄캄했다. 노친네는 진작 자러 갔겠지. 민석이 조심스럽게 녹슨 철문을 열어젖히려는 순간이었다.


"윽!"


억센 손아귀가 그대로 목덜미를 낚아챔과 동시에 숨통이 막히며 세상이 노랗게 점멸한다. 담벼락에 아프게 짓눌린 뒤통수가 아릿했지만 민석은 신음조차 시원히 내지를 수 없었다. 역겨운 페로몬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와 기도를 틀어막기라도 하듯 손을 뻗쳤기 때문에. 민석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호흡을 참았다. 짐승같은 으르렁거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안녕 민석아.


"오랜만이네."


강민규의 목소리였다.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이네요 (ㅠㅠ) 모두들 건강히 지내고 계시죠? 내일부터는 차근차근 밀린 댓글 답변 드리러 올게요! 여담이지만 운명방정식도 슬슬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네요, 늘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삐요 드림




삐요삐요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