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나리

01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볼 수 있는 좋은 날이었다. 산책하며 후원에 심어 둔 꽃이 자아내는 향을 맡기에도 적당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을 비웃는 듯 황제의 손에 머무르던 유리잔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전까지는.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잔을 채웠던 차는 누각의 카펫을 서서히 적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밖을 지키던 궁인들이 놀라 문을 열었지만, 붉어진 볼을 감추기 위해 숙였던 고개는 섣불리 들지 못했다.


“이 짓 하는 거 싫지?”


침묵을 깨고 백현의 입에서 나온 날카로운 한 마디에 눈을 감아버렸다. 지은 잘못도 없거니와 균열의 원인도 모르지만, 고개를 들어 백현의 눈을 마주하면 증오와 경멸을 직시할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가만히 수긍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까놓고 말해. 나라고 불편한 상황 계속 만들고 싶진 않아.”

“폐하.”


경수의 옆에 서서 유리 조각들을 치우라 궁인들에게 지시하던 수석 비서관이 단호히 말렸다. 보는 눈, 듣는 귀가 많다는 뜻이었다. 아니라며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를 상실한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직접적으로 말해줘야지 알 정도로 눈치가 없었나 봐.”

“…….”

“질린다고, 너.”


끝내 백현의 입을 뚫고 나온 잔인한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는 모습을 보여 봤자 더 미움 살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가슴 속에서 격양되는 울분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모진 질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함구하는 경수를 한 번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접시와 금속기가 맞닿는 소리가 들린 후, 백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누각을 빠져나가자 궁인들이 그때서야 다급하게 경수의 옥체를 확인했다.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폐하.”

“괜찮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다. 매일 백현의 날이 선 말투와 시선을 견디며 심연 속으로 잠기는 기분을 느꼈다. 고개를 들자 차를 담아왔던 접시 위로 무언가 반짝였다. 확인하지 않아도 경수의 약지에 끼워진 것과 똑같은 백현의 결혼반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한제국의 황후. 경수를 따라다니는 비극적이고 아름다운 수식어였다.





——•°•❀•°•——



제국의 역사는 길고도 짧았다. 태황제太皇帝께서 대한제국을 공표한 이후로 120년이 겨우 넘는 시점이었으나 조선의 역사까지 헤아린다면 황실의 위상은 흔들림 없이 굳건히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백현은 제국의 유일한 황손이었다. 선대가 병마로 승하한 직후 즉위식을 거쳐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이 6년 전이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군주제의 모순을 비난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쇄도하여도 현 황제의 기품과 역량 앞에서는 하나같이 고개를 조아렸다. 군주로서의 백현은 온화하고 너그러우며, 냉정하고 날카로웠다. 권력의 가장 최상위에 존재하면서도 각료들과 국민들의 목소리에 항상 귀 기울였다.


그러나 성군의 기질을 모두 겸비한 그가 단 한 사람에게는 유독 폭군처럼 굴었다.


경수는 이 나라의 황후이자 백현의 반려자이다. 황실의 법도에 따라 간택령을 거쳐 황후의 자리에 올랐지만, 경수에게는 원치 않은 정략결혼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선택권은 없었다. 일찍이 정계에 몸담은 아버지와 본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쁜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온 삶은 비극 자체였다.


한 번도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마음조차 있을 리 만무했고 무언가 간절히 열망하거나 염원하는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결혼마저 제 뜻이 아니라는 사실에 억울했었다. 그러나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살아온 인생에서 자의적으로 행동하는 건 불가능임을 알고 일찌감치 포기했다.


백현을 처음 봤을 때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사람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다정하게 대화를 시도해보려 해도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색을 띠는 황궁에서 백현만이 유일한 무채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눈빛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었다.


국혼 전 황실 예법을 교육받기 위해 신혜원晨暳院에 머무르며 종종 마주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오가는 대화 하나 없는데도 이상하게 백현의 앞에 앉으면 두 뺨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무관심함 속에서 나오는 백현의 배려에 멋대로 뛰는 가슴을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짝사랑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백현에게 국혼이란 형식적이었으므로. 합방은커녕 스킨십도 없는 둘 사이의 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다.


경수가 느낀 사랑의 첫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백현을 좋아한다고 수긍한 들 한겨울 칼바람보다 매서운 그의 눈빛을 보면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는 듯 고통스러웠다.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정을 억누르는 연습을 해온 것도 그때부터였다. 약지에 낀 결혼반지가 족쇄 같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엮이고 싶었기에 차마 뺄 수가 없었다.


이화궁李花宮(황후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궁의 초입에 다다르자 제조상궁提調尙宮 주 씨가 수석 비서관에게 미리 연락을 듣고 황궁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수의 창백한 입술과 열이 올라 붉어진 볼을 본 주 상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궁인들에게 명령했다.


“욕조에 온수를 채우고 내의원에서 태의太醫를 모셔 오거라. 어서!”


괜찮다며 만류하는 경수의 손짓에도 불구하고 궁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닫혀있던 교태전의 문을 열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향을 방 곳곳에 피웠다. 혹시라도 들어올 냉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후원으로 난 복도의 창문도 모두 닫았다.


날이 더운데도 오한이 드는 것처럼 떨리고 한기가 돌았다. 시중 아이의 도움을 받아 얇은 옷으로 환복하고 침대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덮자 태의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묵례를 한 그녀가 경수의 옆에 앉아 미열이 있는지 체온을 잰 후, 입안을 살피더니 주 상궁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가벼운 몸살이십니다. 내의원에서 약을 조제하여 올리겠습니다.”

“다른 건 괜찮으신가.”

“편도의 붓기가 보이는데 심한 정도는 아니라 조제약으로도 해결될 듯싶습니다.”


태의의 말에 주 상궁이 안도의 한숨을 뱉었다. 궁에 들어와서부터 잔병치레가 심했던 황후 폐하인지라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국정 업무의 양이 밀려 밤을 지새우며 일을 했거나, 국가의 큰 행사가 있는 다음 날이면 앓아눕는 일이 빈번했다. 내의원에서 탕약을 지어 올리고는 있으나, 심신이 미약해진 상태로는 세상 어느 좋은 약을 갖다 바친다고 하여도 들지 않을 것이다. 주 상궁은 경수가 품고 있는 나약함의 원인을 알고 있었다.


“괜찮으니 이만 나가보세요.”


경수가 천천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불편하신 곳은 없는지, 시키실 것은 없는지 묻는 지밀나인, 연비를 향해 온화하게 웃는 얼굴을 보였다. 혼자서 슬픔을 내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주길 바랄 때 짓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피로함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 창문은 그대로 둬.”


궁인 하나가 침대 옆으로 난 창문을 닫으려 하자 경수가 말렸다.


“곧 해가 집니다, 폐하. 밤바람이 춥습니다.”

“눈에 담고 싶은 풍경이 있어서. 여차하면 내가 닫을게.”


모두가 물러나고 경수 혼자만이 남은 공간은 적막만이 맴돌았다. 수면에 물방울이 떨어지며 내는 파열음이나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이 유일한 소음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으나 후원의 석등이 점화되고, 교태전의 불은 점멸하며 저마다 밤의 색으로 변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약사발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켰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쓴맛이 혀끝에 아릿하게 남았다. 제대로 먹지 않으면 주 상궁에게 한마디 들을 것을 알지만, 절반도 마시지 못하고 다시 다홍색 비단보를 덮어두었다.


창밖으로는 일몰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화궁의 교태전에서 정면을 바라보면 황제가 기거하는 건청궁乾淸宮의 모습이 한눈에 담겼다. 창문을 닫지 말고 열어두라 명한 이유였다. 그렇게나마 황제를, 백현을 품고 싶었다.


그의 이름을 떠올리자 잊고 있었던 아까의 기억들이 산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찻잔에 올려져 있던 결혼반지는 잊으셨을까. 나에 대한 분노는 수그러드셨을까.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피어올라 가슴이 답답해지고, 통제되지 않은 감정이 울음의 형태로 터져 나왔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죽이려 억지로 깨문 입술에는 붉은 선혈이 맺혔다. 현실을 직시하면 이리도 참담하고 암울한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염원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일찍이 접고 포기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 번 품은 마음은 미련을 가지고 서서히 경수를 좀먹어갔다.


미움 받아도 좋았다. 멋대로 사랑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도 만족했으니까.





——•°•❀•°•——



눈을 떴을 때는 오전 5시가 조금 넘어 새벽의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이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약의 기운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웠다. 열이 가셨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을 올려 이마를 짚자 물기를 머금은 수건이 만져졌다. 협탁 위에 올려져 있던 탕약도 새로 가져다 두었는지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필히 밤새 궁인들이 오가며 돌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실로 향하여 세안을 마치고 나오자 채비를 돕기 위해 연비가 문을 두드렸다. 용모를 단정히 하고, 일정에 대한 내용을 들으면 궁인들이 초조반을 가지고 교태전으로 들어온다. 혹시나 목이 부어 식음이 불편할 경수를 위해 미음이 준비되었다. 조식을 거르는 일은 거의 없었으나 아직은 속이 쓰렸기에 쉬이 손이 가질 않았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교태전에 부속된 집무실로 향했다. 건청궁의 편전便殿만큼 크진 않으나 황후가 국정을 논하고 업무를 볼 수 있게 마련된 작은 개인 공간이었다.


“오후에 있을 대전 바이오센터의 기공식이 우천 때문에 내일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엊그제 국무회의에 올라왔던 공문을 이화궁으로 보내세요. 황제 폐하 대신 제가 검토하겠습니다.”


경수의 말을 들은 건청궁 수석 비서관이 대화 내용을 기록했다. 일정의 조율은 독단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제와 황후는 위치가 같았다. 경수에게도 천제天帝의 호칭을 붙이는 이유였다. 황제의 의견을 황후가 기각시킬 수도 있었고, 황후의 명령을 황제가 무마시킬 수 있었다. 비서실에 연락을 전달한 비서관이 경수를 향해 가볍게 묵례한 후 교태전을 빠져나갔다.


“연비 네가 밤새 나를 간호했니?”

“네? …폐하, 그것이…….”

“황후 폐하.”


말끝을 흐리던 연비의 목소리는 주 상궁의 부름에 묻혔다. 대답을 기다리던 경수도 고개를 돌렸다.


“어제보다는 열이 가셨어요. 오전 업무에는 차질 없을 겁니다.”

“기공식이 취소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급하게 결정한 사안이라 하더군요.”


잠시 머뭇거리던 주 상궁이 경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 윤지섭 군과 김민우 군을 기억하십니까.”

“제 학창 시절 친우들입니다. 모두 부친께서 정계에 몸담고 계셨기에 어릴 때부터 교류가 잦았는데……. 지금은 연이 끊긴 지,”


오랜만에 듣는 이름들에 경수가 곧바로 반응했다. 철없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는지 추억을 회상하는 얼굴에는 미묘한 웃음이 번졌다.


“두 분께서 황후 폐하를 만나 뵙길 청합니다. 오후 일정에 변동이 없으시면 이화궁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주 상궁의 말에 시선을 올려 그녀를 응시했다. 긍정적인 대답을 표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망설이는 이유는, 각료나 황제, 고위관리직 이외에는 이화궁으로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궁인들만 눈 감으면 되는 일이다. 나무랄 이 하나 없었다. 이화궁의 모든 궁인은 황후께서 웃음을 되찾길 원하고 있었으므로.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오전 업무를 마무리 짓고 연비가 가져온 진피차를 머금었다. 향긋한 귤의 향이 방 안에 가득 퍼지는 것이 좋았다. 우천예보가 들어맞는 듯 흐리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소리를 듣기 위해 열어놓은 창가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젖은 날개를 말리는 건지, 미물을 보는 경수의 눈빛이 신기해서인지 오랫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응접실로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찻잔을 내려두자 문이 열리고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예의를 갖추는 둘의 행동이 어색했다. 경수는 곁에 서 있던 궁인에게 다과를 내오라 명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황궁에 들어오고 이 얼마 만에 마주하는지……. 이렇게 연이 닿을 줄은 몰랐어. 너무 격식 갖출 필요 없잖아. 편하게 대해.”


앳되었던 열아홉의 소년은 없어지고 성숙하고 단아한 황후만이 앉아있는데도, 오랜만에 듣는 경수의 다정한 말에 그들의 긴장이 풀렸다. 응접실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는 그늘만 드리우던 이화궁에 비치는 따사로운 햇볕 같이 평화로웠다.


“……이화궁에 찾아온 이가 누군가.”


예상보다 이른 황제의 환궁에 건청궁의 궁인들이 바삐 움직였다. 대리석 바닥에 담청색의 융단을 깔고 제습을 위해 온풍기를 틀었다. 차에서 내린 백현이 우산을 씌워주는 경호실장 찬열에게 물었다. 시선은 이화궁 입구에 세워진 낯선 차량에 고정한 채로였다.


“건국제建國祭에 참석할 귀빈을 만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람을 시켜 제대로 알아봐.”


원치 않는 대답이었는지 백현의 어투가 날카로웠다. 건청궁으로 들어서는 황제의 등 뒤로 빗줄기가 더욱더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잠깐 지나가는 소나기라던 예보와는 달리, 해가 지고 황궁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비는 멈출 줄 몰랐다. 친우들을 돌려보내고 홀로 응접실에 앉아 수석 비서관이 올린 공문을 검토하고 있을 무렵, 밖이 소란스러운 것이 느껴졌다. 복도를 걸어오는 무겁고 위압적인 발소리는 궁인의 것이 아니다.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교태전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금박이 덧칠된 유백색의 육중한 문이 열리고 흡사 야차夜叉 같은 모습의 백현이 걸어 들어왔다.


“황후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모두 나가.”


백현의 등 뒤로 고개를 숙인 채 망설이던 궁인들이 다시 문을 닫고 나가자, 둘만 남은 공간에 소름 끼치는 적막이 맴돌았다. 굳게 다문 입에선 또 어떤 독을 뱉어낼지 예상할 수 없었다. 책상 위로 올려둔 손을 말아 주먹을 쥐었다. 손톱에 살이 짓눌려 욱신거리는데도 잔뜩 긴장한 몸은 고통을 느낄 줄 몰랐다.


비서관을 시켜 전달하거나 경수가 직접 건청궁에 가는 일은 잦았어도, 백현이 이화궁을 찾은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경수의 맞은편에 앉은 백현이 어질러진 공문들을 천천히 살폈다. 거센 비바람처럼 몰아치던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태도는 초연하고도 차분했다. 여전히 눈빛에 담고 있는 의중은 읽을 수 없지만 바라보는 시선에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가면을 쓰고 하는 연기는 형편없었다. 백현의 앞에만 서면 진실한 심정이 가면 위로 투영되었으니까.


“후원으로 꽃들이 만개했던데.”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백현이 입을 뗐다. 여느 때보다 부드럽지만 살벌한 목소리였다.


“날이 갑자기 따뜻해지니 때를 모르고 꽃을 피웠나.”

“…….”

“곧 겨울이 오면 다 시들어 죽어버릴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백현의 말은 새파란 칼날 같았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매정했다.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망망대해였다. 방향감을 상실한 채 표류하다가, 끝내 감정적인 그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경수에게 백현의 언어는 폐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고통을 선사했다. 꽃이 의미하는 바는 다분하지만, 경수는 무엇을 비유하는지 알고 있다. 비바람에 흔들려 낙화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등바등 애쓰다가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심해로 가라앉는 난파선의 조각같이.


“예법이고 품위고 이제 다 버리려고. 가식 질도 이쯤이면 질릴 때도 됐다는 건가.”


누군가 왔다 간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경수가 속에서 치닫는 울분을 삭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을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런 적,”

“나 몰래 정분이라도 나셨나?”

“폐하,”

“끝까지 부정하겠다는 거지.”


지독했다. 속으로 품으면서 감히 사랑을 말해 달라 애원한 적 없었는데. 여과되지 않은 원색적인 단어들이 경수의 가장 여린 부분을 사정없이 찢고, 헤집고, 무너트렸다. 갈라진 상처들 틈으로 붉고 뜨거운 핏물이 흘러넘쳐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황후 폐하.”

“…….”

“3년만 참으시라고,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

“입 닫고, 귀 막고, 눈을 가리는 게. 그렇게 어렵나?”


차라리 눈과 귀가 멀어버려 편협한 말들로 해석하고 싶었다. 이혼이란 수단으로 끊어야 할 인연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완벽한 타인으로 살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랬더라면. 이름도, 얼굴도, 서로가 존재하였는지도 몰랐더라면. 이제는 당신의 이름 두 글자만 들어도 가슴이 아리고 밤마다 혼몽 한다.


같은 공간에서 숨 쉬는 것도 지겹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백현의 약지는 허전했다. 응접실의 문이 닫히고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도 시선은 함부로 거둘 수 없다. 고개를 내리면, 발아래로 무참히 짓밟혀 나뒹구는 꽃들이 보일 것 같아서였다.





——•°•❀•°•——



며칠째 내리던 비가 멎고 맑게 갠 이화궁은 조용했다. 궁인들은 백현이 다녀간 이후 교태전 집무실 문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경수를 애타게 기다리며, 후원에 떨어진 꽃잎과 나뭇잎들을 치우고 누각의 바닥을 수놓은 은빛 비단도 새것으로 갈았다. 모두가 그날의 대화를 경청했지만, 황제와 황후 사이의 냉전을 함부로 떠벌릴 사람은 없었다. 한편으로는 측은지심이 들어도 지금은 오히려 침묵이 위로될 때다.


집무실에는 간혹 경수가 국회에서 올라온 공문에 황실의 인장을 찍고 서명하는 소리나, 복도를 오가는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의 반복이다. 초점조차 흐릿해진 눈은 허망함을 담고 있었다. 슬픔은 삼켜야 하고, 상처는 감추어야 했다. 기억을 반추하면 또다시 괴로워질 것을 알기에 떨치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다른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았다.


경수의 곁에서 보필하던 연비가 그를 초조한 눈빛으로 바라보다 후원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궁인들의 말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내용마저 명확히 들려왔다. 업무에만 집중하고 있던 경수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응시했다.


“웬 소란들이냐.”

“폐하, 이것을 좀 보세요.”


궁인 하나가 기반암을 밟고 창문 쪽으로 무언가 내밀었다. 한 품에 들어올 정도로 작은 동백 화분이었다. 아직 개화할 때가 아닌지 빨간 꽃망울 하나가 맺혀있었다. 이화궁의 후원은 다른 궁들과는 다르게 황후인 경수가 직접 관리했다. 계절마다 피어날 꽃들을 엄선하고, 색과 조경의 배치에 대한 조언을 듣고 지시했다. 봄에는 만물이 뛰노는 화려한 색채로, 여름에는 짙은 녹음의 빛깔로, 가을에는 청아한 황금 들판과도 같은 색감으로, 겨울에는 소슬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묘목이나 어린 꽃을 옮겨 심는 일은 본격적으로 겨울이 오기 전 하는 일인데, 아무리 보아도 의미를 담아 선물한 것처럼 포장이 다채로웠다.


“누각을 정돈하다 홍연鴻淵 쪽으로 난 창문에 놓여있는 것을 제가 발견했습니다. 분명 어제까지는 없었는데…….”


궁인이 내민 화분을 두 손으로 들어 소중한 것을 돌보듯 품에 안았다. 꽃망울에 맺혀있던 빗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려 소매를 적셨지만 개의치 않았다. 만개하진 않았어도 미약하게 향이 감돌았다. 누가 이런 꽃을…….


“이화궁 출입 명부를 가져올까요?”

“……괜찮다. 선물한 이가 본인을 자처하기 싫으니 그곳에 몰래 둔 것이겠지.”

“서편 화단에 남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오래 가지 못할 터인데, 옮겨 심는 것이 어떨까요.”


이화궁 입구와 가까운 서편 화단에 심어진 꽃과 정원수들은 후원에서도 가장 아름다워, 간혹 황궁을 오가는 이들에게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차분한 경수와 달리 궁인들은 들떠있었다. 정사政事가 아닌 다른 곳으로 황후 폐하의 이목을 돌릴 수 있었으니까. 손에 쥔 화분을 빤히 보던 경수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곧이어 입을 열었다.


“지하 창고에 분갈이 재료가 남아 있었나?”

“예. 지난봄에 쓰고 혹시나 몰라서 채워놨습니다.”

“내가 가서 직접 할게.”


고아한 그 손에 흙을 묻히게 할 순 없다며 말리던 궁인들도 경수의 고집에 물러섰다.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황후의 표정을 외면할 수 있을 리가. 후원으로 향하는 경수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이화궁이 활기를 되찾은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태위부太尉府 경호원이 경수의 입진入診을 위해 의관과 함께 방문했다가, 후원에서 보고 들은 것을 알리며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이름 모를 누군가 황후 폐하께 매일 꽃을 선물한다더라. 황후 폐하를 연모하는 이가 보낸 것이다. 황제께선 그걸 두고도 방관하시는가? 궁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희보는 흉문으로 변질되어갔다.


황궁의 중심인 백현이 그 소식을 모를 리 없었다. 이미 궁인들 사이에서는 황후께 정인情人이 생겼다는 건 기정사실로 되어버렸다. 그러나 백현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함부로 입을 놀린 자를 색출하여 벌할 수도 있었고, 경수를 찾아가 추궁할 수도 있었으나 마치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인 듯 무심했다. 침묵은 많은 것을 함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것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비서실장 준면이 보는 그는 마치 태풍의 눈 같았다. 언제 집채만 한 파도를 일으킬지 모르는 거대한 태풍. 


천지를 진동하는 폭풍우는 황후 앞에서만 유효했다. 태자 때부터 지금까지 백현의 가장 가까이서 삶의 전반을 바라본 사람으로서도 황후에 대한 적대감과 경멸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을 불신하고 밀어내던 습관은 오래전부터 형성된 것이지만 지금의 황제를 위협할 이는 아무도 없는데. 혹시 그날의 일 때문에……. 사념의 바다에 잠겨있던 준면을 일깨운 건 백현의 목소리였다.


“내일 있을 회담에 류 장관이 불참한다고.”

“예. 모친께서 위독한 상태라, 수술 경과를 지켜보신다고 합니다.”

“국무회의에서 전달된 공문은.”

“황후 폐하께서 검토 후 총리께 전달하셨습니다.”


건국제에 쓰일 연설문을 검토하던 백현이 특정 단어에 짧게 반응했다. 이화궁의 낭설이 거짓이라 해도 경수는 황제의, 백현의 사람이다.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입을 열기를 주저하던 순간 입구에 차를 대기 시켜 두었다는 수석 비서관의 말이 문 너머로 들려왔다.


리셉션이 개최된 호텔로 가는 길에도, 축하 연설 도중에도 백현은 일관된 표정이었다. 그룹의 총수들이 황후의 안부를 물을 때 혹시 몰라 준면이 곁을 지켰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대외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황궁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타국과의 교역 규모 증가 폭 그래프를 보며 직항 노선의 신규 취항이나 관광 사업 추진에 대한 질문을 간혹 던질 뿐, 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준면은 그것이 백현이 긋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황궁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시간이었으나, 저녁에 있을 스페인 국왕 내외와의 만찬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건청궁의 초입으로 향하던 백현의 발걸음이 일순간 멎었다. 고개를 돌려 궁인들을 물리고 비서실장만 동행을 허락하였다. 백현이 향한 곳은 황궁 서편 남단에 있는 비류관緋柳館이었다. 황족과 관리인에게만 개방된 이곳은 태자의 교육 장소로 황실 도서관을 겸하고 있다. 규모가 크진 않으나 높은 곳에 있어 황궁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준면은 군말 없이 백현의 뒤를 따랐다. 황제가 비류관을 찾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서고 뒤편의 창문을 열자 작열하는 태양 아래로 이화궁의 드넓은 후원이 펼쳐졌다. 저 멀리 홍연 위로 지어진 누각 옆으로 궁인들의 도움을 받아 꽃을 심는 경수의 모습이 보였다. 황후를 바라보는 백현의 옆모습에는 온갖 쓸쓸함과 외로움이 담겨있었다. 외면하려 했던 뒤엉킨 감정들을 고독이란 이름으로 덧칠하여 자신의 빛을 소멸 시켜 가는 것 같았다.


“어떤 분이 황후 폐하께 저런 선물을 보내는 걸까요.”

“…….”


준면은 백현의 속내를 떠볼 심정으로 말을 흘렸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곳이 온통 칠흑 같은 심연인지, 만에 하나 한 조각의 빛무리라도 존재한다면 그것이 경수를, 황후를 참칭하고 있는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백현은 침묵으로 응수했다.


“이화궁의 궁인들을 통해 알아볼,”

“왜 그런 짓을 하지?”

“…….”

“궁인들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낭설 따위의 진위를 논하는 행동이, 황실의 위상을 깎아내릴 이유밖에 더 되겠나.”


소문을 믿지도, 듣지도 않겠다는 소리였다. 준면이 짧게 속으로 탄식했다. 황제께는 이 질문마저도 우문이었나. 오랫동안 쌓여 올린 견고한 성벽을 파훼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조아린 고개를 들자 백현의 눈빛에 담긴 처연함이 읽혔다. 낙하하는 시선은 경수의 웃는 낯을 품는 듯 아른거렸다.


저녁 만찬 이후 모두가 물러난 경회루에는 황제와 황후만이 남아 있었다. 궁인들이 석등의 불을 켜고 향을 피울 동안에도 오가는 대화 하나 없이 조용했다. 침묵이 어색하여 고개를 든 경수가 호수 너머를 바라보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물 위를 지나가며 파면을 일으키자 낙엽들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늘에 뜬 청아한 달빛 아래로는 불 꺼진 영월궁盈月宮의 터가 보였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방치된 모습이 오늘따라 유독 악몽의 배경처럼 스산했다.


허공을 부유하던 시선은 백현의 앞에서 멈췄다. 짙은 청색과 은빛이 어우러진 용포를 어깨에 걸친 모습이 낯설었다. 손에 쥔 찻잔 속에는 둥근 만월이 맺혀있었다. 미세한 진동에 흩어지는 모습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자신의 심정 같아 고개를 돌려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다 갑자기, 백현도 이화궁에서 들려오는 낭설을 알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경수도 소문을 알게 된 건 연비에게 들어서였다. 정인이니 정부니 이상한 의미로 덧씌워진 형태에 놀라 궁인들을 불러 꾸짖었지만, 이미 곡해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황궁 전역으로 퍼져나간 뒤였다.


내게 정인이 있다면, 과연 당신은 조금이나마 질투할까. 가슴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나의 치기 어린 욕망을 이해해줄까. 스스로가 떠올린 가정에 드러난 저열한 감정이 우스웠다.


목조 계단을 지나 복도를 걸어오는 구두 소리에 감은 눈을 뜨자 비서실장이 내실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내일 회담에 쓰일 자료와 기사를 건네는 손이 분주하다. 스페인과의 관광 협력 및 무역 체결은 추후에 있을 여타 국가들과의 관계 증진에도 좋은 예시가 될 것이기에 중요한 사안이었다. 백현이 준면과 대화하는 동안 공문을 살피던 경수의 눈에 기사 하나가 띄었다. 황실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극적인 기사 제목에 초조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스크롤을 내렸다. 완화된 정책에도 불구하고 전제군주에 가까운 황권이라 돌려 말하곤 있었지만, 내용은 가히 모욕적이었다.


“곧 있을 건국제를 대비해 집회 금지 명령을 내렸더니 벌어진 사태입니다. 소수의 의구심이 자칫 거대한 파란으로 번질 수 있을 듯하여.”


물의를 일으켰던 자를 구속하여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는 식의 어조였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고 있었다. 선황의 집권 당시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 건국제 기간을 중심으로 난동을 일으키는 무리의 동태를 고려하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준면이 묵례 후 내실을 빠져나가자,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요함을 깨부순 건 백현의 한 마디였다.


“이화궁이 요즘 시끄럽던데.”


짧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낭설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고, 그에 따른 경수의 대응 방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했다.


“…그것이,”

“원인을 알고 있으니 굳이 설명하려 들지 마.”

“…….”

“그래서. 손이 그 모양인가.”


백현의 지적에 전보다 거칠어진 손을 다급히 아래로 숨겼다. 안 쓰던 도구를 사용하고 차가운 가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니 상처 입는 게 당연했다. 허나 달아오른 수치심은 그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백현도 낭설의 원흉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질책 속에는 질투나 투기 따위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한심하다는 어투였다.


“곧 있으면 건국제야. 온갖 매스컴에 네가 손 흔드는 모습이 찍히는데, 부르트고 갈라진 손이 보이면 과연 국민들이 황실의 품위를 뭐라 생각할 것 같아?”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화단은 없애도록,”

“그냥 두고 궁인들을 시켜. 이해력이 부족해?”


백현의 말끝에 섞인 한숨에 금방이라도 무너질 위태로운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내디디면 갈라진 틈이 완벽히 부서지고 종국에는 추락할 것이다. 그래. 당신의 세계에 나는 없지. 머리로 사실을 되뇌며 체념하는 순간에도 드는 서글픈 감정에 비참해졌다.


늦은 밤, 이화궁으로 돌아가는 길목은 빛이 앞을 밝혀도 새카맣다.





——•°•❀•°•——



교태전을 분주히 오가는 궁인들의 발걸음이 소란스럽다. 금빛 비단에 쌓인 향유와 무수한 보석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인공적인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그 가운데 상의원에서 새로 지어 올린 대홍색 적의를 입고 수려한 금빛 봉황 떨잠을 한쪽에 걸친 경수가 무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간밤에 꾼 악몽이 탁한 기운을 품고 있어서 치장하는 내내 느껴지는 불안감을 떨쳐내질 못했다. 긴장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해도 눈앞이 어지러웠다.


희고 고운 얼굴 위로 석류 알 같은 붉은 보석의 빛이 스며들어 경수의 자태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가체를 걸치는 대신 쓰일 은빛의 면류관을 손에 들고 치장을 돕는 궁인들의 손길을 기다리던 경수가 저 멀리서 잰걸음으로 달려오는 연비를 보고 몸을 살짝 틀었다.


“폐하, 수석 비서관께서 전할 것이 있다며 오셨습니다. 들라 할까요?”


경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건국제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이유는 황명을 받아서겠지. 비서관이 들어오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무슨 일입니까. 급한 사항이 아니라면,”

“황제 폐하께서 패물을 보내셨습니다. 황태후께서 행차 때 쓰시던 것이라며 직접 전달하라 당부하셔서.”


책상 위로 아담한 푸른빛의 궤가 놓여졌다. 백현이 직접 패물을……. 섣불리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경수가 조심스럽게 궤를 열었다. 안에는 감청색의 비단 위, 백금으로 세공된 손 장신구가 놓여있었다. 화려하진 않으나 고아했고 적의를 입은 경수와도 잘 어울렸다. 궁인의 도움을 받아 장신구를 오른손에 착용하자 마치 주인을 찾은 것처럼 크기가 맞아떨어졌다.


“잘 어울리십니다. 황후 폐하를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연비가 말끝을 흐리며 경수의 눈치를 살폈다. 황태후의 것이 아님은 알고 있다. 그러나 백현이 진심으로 경수를 위했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신구를 어루만지는 경수의 손길은 어딘가 모르게 애틋했다.


건국제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육‧해군 의장대의 사열식이 거행되었다. 땅을 구르는 발걸음과 움직임에는 흐트러짐이 없어 소리조차도 하나로 모여들었다. 개국 연설을 위해 백현이 근정전 단 위로 올라서자 관악대 소리가 멈추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현색의 구장복을 입고 면류관을 쓴 모습에서 황제의 굳건하고 강인한 기품이 느껴졌다. 경수는 오른편 아래에 서서 백옥규를 정갈히 쥐고 백현의 연설을 경청했다.


연설이 끝난 직후 의장대의 행렬이 선두로 광화문을 지나 광장을 향해 출발한다. 그 뒤를 황제와 황후가 탄 어가가 이동하고, 행군은 종로를 지나 종묘에 닿기까지 이어진다. 대제를 올리고 돌아오기까지 긴 여정이지만 피로함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다. 오늘만큼은 고결한 황후 역할을 착실히 연기해야 한다.


행차를 위해 적의를 벗고 단출한 예복으로 갈아입었다. 아까보다는 트이는 숨통에 호흡을 길게 뱉고 다시 백현의 옆에 섰다. 태황제의 제복을 입고 앞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모습에 백현의 훤칠한 외모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멋대로 달아오르는 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백현이 경수의 손을 잡고 팔을 교차했다. 단단히 얽혀 가까워진 거리에 심장의 두근거림은 더욱 거세졌다.


광장은 건국제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근위대와 경호대가 주변을 통제하며 나아가는 길이 질서정연했다. 어린아이들이 던지는 꽃잎이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고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온화한데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에 자꾸 장신구를 만지작거렸다. 시민들에게 다정히 인사하는 척 고개를 좌우로 돌려 주변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광장을 둘러싼 정부청사 건물과 대사관, 빌딩에는 층마다 경호원들이 배치되고 근위병이 무장한 채 황제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정신 차리지.”


유독 한 건물을 멍하니 응시하던 경수의 팔을 잡고 백현이 일깨웠다. 주변에 들리지 않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짜증을 내며 언질 한다. 백현의 부름에 다시 광장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머릿속이 하얘지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옆에 서있던 백현을 밀쳐낸 건 찰나의 선택이었다. 오른쪽 어깨를 무언가 빠르게 관통하며 버틸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총성이 울린 건 그 직후였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엄습해온 통증을 이겨내지 못한 몸이 바닥으로 천천히 추락했다.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소리가 한데 뭉쳐 환청처럼 아스라이 멀어진다.


경수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였던 광경은 자신을 감싸 안아 붉은 선혈로 적셔진 손과 경호원들을 향해 핏대 선 목으로 소리 지르는 백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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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도온리전 4에 냈던 회지 <비나리>입니다. 원래 좋아하던 입헌군주물 황제공 소재였고, 썰로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줄글로 쓰게 되었어요. 둘 사이의 감정선을 길고 자세히, 이입하며 풀어보고 싶었는데 잘 전달되었을진 모르겠네요.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언제나 환영입니다. 페잉 원래는 닫아두는데 공개댓글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오랜만에 열었어요. 편하게 저한테 질문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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