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 김동률 - 사랑한다 말해도 (Feat. 이소라))


***


겨울을 날 준비를 한다.

한동안 옷장 속에 처박아 놨던 두터운 옷들을 꺼낸다. 다신 입을 일 없을 거라 봄날 앞에 선언했지만, 진실로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을까. 비록 방치해놨기로서니,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구석에나마 남겨놓았던 건. 어쩌면 어렴풋한 예감 때문이 아니었는지. 봄 안개에 가려졌던 앞날에 대한 예감.

 

-우리 그만하자.

 

보낸 문자엔 역시나 답장이 없다. 내 연락을 기대하며 핸드폰을 내내 붙잡던 손은 진작. 앞으로 그 손이 어느 손과 맞잡더라도 그 역시 내 알 바 아니겠지. 더 이상 다음 낱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드디어 내 손으로 마침표를 찍었으니까.

 

“…….”

 

거울 앞에 서서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그 모양새가 꼭 앙 다문 입모양을 닮아있어 괜히 얼굴도 구겨보지만. 별로 소용없는 짓임을 이미 안다.

나는 이것으로써, 맞사랑이라고 믿었던 5년간의 외사랑을.

맞닿을 옆구리가 없어 이젠 온전히 내 몫인 겨울바람 속으로.

 

“…다녀오겠습니다.”

 

새 계절로 들어서는 첫 발자국을-

 

 

***

 

‘이상형이 뭐야?’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그런 거 없는데.’

 

한결같이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한껏 김빠진 얼굴로.

 

‘존나 재미없다….’

 

따위의 답을 돌려주기 일쑤였지. 사실 비밀스런 사람들은 타인의 눈에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캐어낼 의지를 꺾기엔 밍숭맹숭한 대답만큼 적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상형을 말하는 순간의 나는 늘 거짓말쟁이였다. 숨기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속물 같아서도 아니고, 특이해서도 아니고.

 

‘향이 예쁜 사람.’

 

…이해 받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향이 어떻게 예쁠 수 있냐, 이 무슨 공감각적인 표현이냐 묻는다면 할 말이 없으니까.

 

나는 향을 ‘볼’ 수 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로 그려낼 수 있는 가장 낡은 기억 속에도 그랬으니까. 사람들의 테두리로 무언가 기운 같은 것이 흐느적거리는 게 보인다. 그건 오직 내 눈을 거쳤을 경우일 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까지가 어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날따라 선생님의 기운이 몽글몽글하게 피어나기에 그게 예뻐서 가리키며 친구에게 말했더랬지. 선생님 지느러미 예쁘다고. 어렸을 적 내 눈에는 그게 열대어의 지느러미 혹은 공작의 날개처럼 보였던 것이다. 친구는 선생님한테 어떻게 지느러미가 있을 수 있냐 놀렸고, 유치하게도 그걸 가지고 죽어라 싸웠다. 주먹다짐은 없었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결국 선생님 손에 끌려가 교무실에서 상황설명을 하게 되었지만, 선생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해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지훈아, 엄마랑 얘기 좀 할까?’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엄마는 나를 소파에 앉히셨다. 조심스런 목소리. 어깨를 쓸어 만지는 손길. 찬찬히 말을 고르는 듯했던 엄마는 대뜸 나에게 그랬다.

 

‘엄마가 미안….’

 

말을 고른 것 치고는 과히 다짜고짜 던져진 말이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 모르겠다던 어머니는 이어 시기가 고민이었다는 말을 건네셨다. 알고 있었다고.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유전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그렇고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우리집안 남자들의 특성이라고.

아주 어렸을 때는 비범하다는 그 개념을 알까, 조금 자랐을 때는 친구들과 다른 게 상처가 될까,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 걱정이 많아 미루느라 오히려 상처를 준 것 같아 미안하다며 엄마는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사실 그 때까지도 엄마의 말이 완전히 이해가지는 않았다. 아니, 이게 보이지 않는 게 말이 되나. 당연한 건데.

최대 골머리 앓아본 게 받아쓰기 정도였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고민하느라 밤잠 들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여전했지만 어찌 되었든 ‘이해불가’ 그 자체까지 집어삼켜버릴 정도로 단순한 나이였다. 앞으로 뱃속에서 얼마나 불어날지 몰랐기에.

내가 보는 그것이 다름 아닌 ‘향기’라는 걸 정확히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일이었다.

 

‘아들, 엄마 오늘 어때?’

‘네?’

‘오늘 평소랑 좀 다르지 않아~?’

 

엄마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일렁이는 물결의 색이 다를 뿐. 그걸 의미하는 건가 생각했을 때, 엄마는 덧붙이셨다.

 

‘선물 받은 향수 뿌려봤는데.’

 

거울 앞에 서 계셨던 엄마가 한 발자국 성큼 내게 다가섰을 때, 물씬 풍겨오는 향이 있었다. 꿀을 머금은 듯 달달한 꽃향기. 진달래 빛으로 빛나는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며, 내 이 특별함이 축복이 아닐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춘기를 지나며 그게 딱히 좋은 것만도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지훈아, 나… 너 좋아해.’

 

갖춰 입은 교복. 단정히 묶은 머리. 조화로운 이목구비. 학교에서 예쁘기로 유명한 친구였다. 물론, 내 눈에는 아니었지만.

 

‘어어….’

 

그 애의 어깨 위로 흐릿하게 회색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흔히 볼 수 있는 빛깔이었다. 어디서냐면, 음….

 

‘미안.’

 

…흡연실.

 

 

 

‘야, 미쳤냐? 아니 오는 애들 딱히 막지도 않으면서 왜 오지영을 차?’

‘…그냥.’

‘하여간, 보는 눈 겁나 이상해.’

 

하교 후 피씨방에서 사정을 다 전해들은 선우는 내 등짝을 때리며 바락 소리를 질렀다. 성인에게 흡연은 선택이지만, 우린 아직 아니잖아.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그냥 이상한 애가 되기를 택했다. 선우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저 형. 그래, 롤 하면서 남의 부모님 안부 묻고 있는 저 형도 그 오지영이랑 비슷한 색이라고. 이럴 거면 차라리 모르는 게 낫지.

 

뭐 그렇다 해서 반드시 내 연애가 어렵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관계가 성사되기는 쉬웠다. 어느 정도 체념한 후부터는. 나 좋다는 사람 중에 크게 거슬리지만 않으면 만났다. 이상형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지만 확실한 건 그들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큰 기대 없이 시작한 만남은 큰 아픔 없이 금세 막을 내렸다. 나랑 사귀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이니까. 향도 보는데 뭐 그 정도 소문쯤이야.

 

그 맘 때 하나 더 알게 된 사실은 향이 주인의 감정을 담아 일렁인다는 것이었다. 뭐랄까, 춤 같은 느낌으로. 기쁠 때는 캉캉, 편안할 때는 왈츠, 화났을 때는 가시를 세우고 움직이지 않는 등. 그렇다면 사랑할 때는 어떤 모습일까. 부모님의 사랑 말고, 가벼운 호감 말고. 내가 좋아 미치겠다는 사람의 모습은 어떤 아름다움일까.

 

 

열아홉의 여름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씨. 틈을 주지 않고 번갈아 찾아오는 정기고사와 모의고사. 방학도 없이 공부, 공부, 공부. 수험생활에 찌든 소년소녀들에게 대단히 흥분할 만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드물게 교실이 뒤집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안녕.’

 

학기 중도 아니고, 여름방학 보충학습 때 찾아온 전학생. 강다니엘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특이하고 특별한데, 오직 나에게만 가지는 특별한 특별함이 있었다.

 

‘…….’

 

처음이었다. 향에 압도된 건. 내게 사람들은 늘 여름이었다. 온몸으로 피어내는 아지랑이. 닿으면 지글지글 익어버릴 것 같아 늘 적당한 거리를 두게 되는. 그러나 그 때 내가 목도한 것은 한여름의 봄이었다.

서 있는 폼은 고목나무처럼 단단함이 뿌리 깊어 보였는데, 겉을 두른 빛은 막 세상에 나온 여린 잎의 빛깔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은 단언컨대 살면서 처음이라, 그래서…

 

‘너 향수 뭐 써?’

 

내 옆자리에 앉게 된 녀석에게 다짜고짜 그렇게 물어버린 것이다. 그런 적도 단언컨대 처음이었다. 변명이 아니라.

 

‘…그런 거 안 쓰는데.’

 

통명성도 전에 질문부터 던진 내가 당황스럽지도 않은지, 강다니엘은 태연스레 답했다.

 

‘그럼 섬유유연제는?’

‘모르겠어. 엄마가 사 오셔서.’

‘아….’

 

그쯤이었다. 향에 홀려서 무례하게 굴고 있었다는 걸 문득 캐치한 건.

 

‘알아봐줄까.’

‘…아냐, 괜찮아.’

 

깨닫고 나니 좀처럼 낯을 들 수가 없는 터라 고개만 푹 숙이고 책상만 바라봤다. 귓불에 오르는 열감으로 미뤄봤을 때 보나마나 귓바퀴는 이미 붉게 달아올랐을 것이다. 그런 내 어깻죽지로 녀석이 아래로 흘리는 숨결과, 잔잔히 일렁이는 그의 빛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했다.

 

‘다우니 파란색.’

‘어?’

‘우리 집 섬유유연제. 그거던데.’

 

다음날 아침,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녀석이 했던 말이다. 얼떨결에 올려다 본 얼굴은 활짝 피어있었다. 엄청 밝았다. 방금 들었는데, 뭘 쓴다고 했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강다니엘과 제법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건 비단 나뿐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공부만 하는 게 일상인데도 녀석은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런 사람 곁에 사람들이 모이는 건 당연지사였고. 오히려 난, 그래서 더 가까이 다가가기는 어려웠지만. 친해지는 건 ‘제법’까지였다, 글쎄, 강다니엘의 주위에 둘러진 원이 워낙 견고해보였기 때문일지, 아니면 처음 겪는 사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몰라 그랬는지.

 

가끔은 녀석과 점심시간에 무리끼리 섞여 밥을 먹었고, 공을 차기도 했다. 뜨겁게 열 오른 얼굴을 수돗가에서 함께 씻어내는 일도 여러 번이었다. 그리고…

 

‘박지훈.’

‘…어?’

 

석식시간이었다. 주번이라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빨고 있었는데, 같은 반 같은 부랄 단 친구가 소변을 보겠다고 화장실에 찾아왔을 때의 심정을 서술하시오. [529점]

 

대부분은 좆도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저 뒤에서 쪼르륵 물소리가 나든 말든, 세면대에서 꼼꼼히 손을 씻든 말든. 그런데, 난.

 

‘너, 발 다 젖었는데.’

‘아… 맞네.’

 

밟아 물을 빼던 대걸레 사이로 나도 모르는 새 발을 쑤셔 넣을 정도의 심정이었다. 이걸 한 단어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아할지는 모르겠다. 회색이 되어버린 양말을 공연히 털어내는데, 뽀득뽀득 소리가 날 정도로 씻긴 강다니엘의 손이 불쑥 내게 다가왔다. 천천히 움직여 뺨에 닿을 듯 말 듯 하더니, 종래엔 내 어깨를 짚었다. 남아있던 물기가 옮겨와 내 하복을 조용히 적셨다.

 

‘축축하겠다.’

 

…아.

 

‘…나 그, 주번이라, 얼른 가야해서.’

‘그래, 이따 봐.’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도망치듯 가쁘게 뛰쳐나왔다. 빤 보람도 없이 바닥에 대걸레가 질질 끌렸다. 종착지는 한 층 아래 남자화장실이었다. 강다니엘은 이미 곁에 없는데, 그 목소리가 계속해서 귓가에 울렸다.

 

축축하겠다.

축축하겠다.

 

맞아, 축축했다. 그것도 너무.

 

‘아… 진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화장실을 뛰쳐나와 간 곳이 또 다시 화장실인지는, 내 스스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를 두 번 바꿨다. 강다니엘이 우리 반에 온지 두 달이나 되었다는 이야기다. 새로운 계절은 더 이상 반팔을 허용하지 않게 되었고, 잎사귀 끄트머리가 점점 단풍으로 변해갈 때쯤 교생선생님이 오셨다. 보통 고3한테는 배정되지 않는데, 우리 학교가 워낙 학급수가 적은 터라 우리 반에도 배정된 것이었다. 그 날은 영어담당이라는 그 선생님이 처음 단독수업을 맡은 날이었다.

 

‘선생님-’

‘니네…,’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어휴.’

 

담임선생님의 부재를 틈 타 잠시 딴 짓이라도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당시 지금의 내 나이쯤 되었을 어린 선생님은, 그런 상황을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우리를 불렀다. 얘들아.

 

‘첫사랑은 얼룩이야.’

 

아름다울 것도 없었고. 들어봤자 재미도 없다. 빈틈없는 그 말에 아이들은 정오의 파도처럼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아아-!’

‘자, 얼른 수능특강 펴. 126페이지.’

 

퍽 단호한 태도. 김이 팍 샜는지 느적느적 움직이는 아이들 사이에서 애초 별 흥미가 없어 미리 책을 펼친 나. 어차피 이따가 풀 거 먼저 풀어보자 싶어 샤프를 들었는데. 첫 문장부터 손이 굳고 말았다.

 

Some scents are just like hallucination*.

(어떤 향들은 마치 환각과도 같다.)

 

hallucination. 처음 보는 단어의 뜻을 알아보기 위해 문제 끝에 달린 주석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문득 정말 뜬금없는 곳을 바라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래서 바라본 곳에 그 애가 있었다.

 

‘…….’

‘…….’

 

정확히 날 바라보던 눈과 마주쳤다. 노을빛에 등이 온통 젖어 무지개를 그려내는 강다니엘. 그 애가 소리 없이 천천히 입술로만 그려내던 말.

 

‘얼룩이래.’

 

별 의미 없이 지은 눈웃음과 별 생각 없이 모방했을 말. 하지만 나는 그 때 알았다. 그 순간이 내 삶에 얼룩져 다신 지워낼 수 없을 거라는 걸.


*


자각이 자신을 바꾸지는 않았다. 강다니엘을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막지 않았다. 어쩌면 더 확실한 감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움직인다고 해서 그 애랑 만날 리가 없다는 확신.

 

이유는 많았다. 남자랑 남자라는 것, 녀석은 내 이상형이 맞지만, 나는 절대 아닐 거라는 것. 열아홉의 나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

 

‘박지훈, 우리 그냥 그만 하자.’

 

사귄다 하면 매번 차였는데, 그래도 이 순간은 늘 어려웠다. 즉답은 기다렸다는 듯 느낄 것 같고, 싫다고 붙잡기엔 감정이 없었으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어 침묵만 지키고 있으면 상대방이 알아서 끝을 내주더라.

 

‘너도 진짜 너다, 끝까지….’

‘미안.’

‘됐어, 애들한테는 내가 찬 거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 애는 등을 돌렸다. 그런 류의 당부를 하는 애들이 더러 있었다. 이별 후 혼자 남아서는 생각했다. 왜 굳이 그러는 걸까. 사실인데,

 

너도 영문?’

‘아, 응.’

 

그 날 담임선생님의 수업 시간엔 교과 수업 대신 상담이 이뤄졌다. 특이한 점이라면 출석번호 순이 아니라 전공 별로 묶어서 대기를 시켰다는 점이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짝이 얼른 교무실 앞으로 가보라며 등을 떠밀었고, 가 보니 강다니엘이 있었다. 녀석은 급한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더니 반색했다. 일렁이는 빛에 괜히 드는 기대는,

 

‘잘 왔다, 혼자 있기 심심했는데.’

 

때때로 쉬이 추락해버리고.

실망감과는 별개로 다니엘과의 대화는 늘 내가 고대하던 일이라, 5교시 하늘 꼭대기에 매달려있는 태양을 붙잡아 놓고 싶을 지경이었다. 다니엘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불현듯 내게 물었다.

 

‘근데 말이야… 김은지랑 진짜야?’

‘어?’

‘어… 그러니까….’

‘걔랑 헤어진 거?’

‘…응.’

 

맞아. 대답하니 그렇구나, 싱거운 대답. 다니엘의 새싹들이 하늬바람을 만난 듯 요동치고 있었다. 아직 궁금한 게 더 남은 걸까.

 

‘왜 헤어졌는지 궁금해…?’

 

사귈 때는 말 한번 꺼낸 적 없었는데, 헤어지고 나니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린다.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입술은 적당선을 잊은 듯 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강조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애와 나와는 이제 끝이라고.

 

‘질린대.’

‘아….’

‘다들 그러더라. 내가 별로 재미가 없나봐.’

 

그래서 매번 얼마 가지도 못하고. 쓸데없는 말을 주절대던 나는, 내 나름 필사적으로 변호 중이었다. 지금까지 사귄 애들 모두 스쳐지나간 정도라, 깊어질 새 없었다고. 그래봤자 관심 없겠지만. 다니엘은 내 눈을 바라보지도 않고, 시선만으로 날아가는 바람을 잡을 듯, 허공만 내내 무겁게 바라보다 말했다.

 

‘어떻게 그러지.’

‘응?’

‘잘 이해 안 가서. 난 한번 좋아하면 오래 좋아하는 편이라. 사람이든 취미든 뭐든.’

 

잔인하다.

그런 말을 하면, 유순한 바람도 더 차게 느껴진다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따뜻하단 걸 실감해버려서.

 

‘…너 같은 애 좋아하면 좋았을 텐데.’

 

나도 모르게 말해놓고 지레 놀라 입술이 오므라들었다. 암암한 흑심에도 여전히 다니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빛나고 있었다. 날아가지도 못할 건데, 이번에 그 시선이 붙잡고 있는 건 나다. 아, 말할 수 없어 더 말하고 싶은 말들이 늘어난다.

 

야, 사실 있잖아.

 

‘그러게.’

‘…….’

‘차라리 나 같은 애 좋아하지.’

 

널 좋아하고 있어.

너 ‘같은’ 애 말고.

 

 

*

 

짝사랑 앞에 시간은 맥없이 흘렀다. 특히나 수험생에게는.

 

모의고사 성적 추이 그래프가 오른쪽으로 늘어난 만큼, 마음 역시 불가항적으로 몸을 키웠다. 내내 보아야만 하는 뒷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다니엘과 많이 가까워졌다. 내 노력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니엘의 노력도 아니었겠지만.

 

우리 반에 영문학과 지망자는 우리 둘뿐이었다.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그걸 빌미로 대화의 물꼬를 튼 건 절대 아니었다. 사심은 아니었다고.

 

가볼게요.’

‘오냐-’

 

교무실을 나와 걷는 발소리가 어쩐지 조금 무겁다. 수능이 끝난 학교는 다니던 3년 중 최초로 한적하고 최초로 여유로웠다. 복도에 울리는 내 발자국을 의식하며 걸은 것도 맹세코 처음이었다.

 

사실, 다니엘이 합격했다는 학교에 정시 원서를 넣어보려던 작정이었는데, 그 날 오전 마지막으로 남았던 수시 전형에서 합격 소식을 전해주는 바람에 다 물거품이 됐던 차였다. 3교시의 애매한 시간, 그 소식을 교무실에 계신 담임선생님께 전해드리고 왔을 때, 교실 안은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간 거지 싶어 창가에 다가가니 창밖에는 새끼 손망울 만한 눈송이들이 텅 빈 교실보다 더 거짓말 같은 모습으로 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나간 건가.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강다니엘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갈 기회를 놓쳤다는 게 가장 큰 일이었다. 눈 내리는 날, 홀로 비처럼 슬픔에 젖어 그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던 내 뒤로 비구름이 덮쳤다.

 

‘뭐해?’

 

다니엘이었다.

 

‘아… 그냥.’

‘맞다, 밖에 눈 내리더라.’

‘그러게. 애들 그래서 다 나갔나. 아직 제대로 쌓이지도 않았는데.’

‘우리도 갈까?’

‘…….’

 

고민했다. 그러자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솔직한 욕심으로는 단 둘이 있고 싶은데, 나가지 않겠다고 하면 혼자서 밖으로 가 버릴까봐. 아무 말 없는 나를 바라보다가, 다니엘은 갑자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추우니까 그냥 여기 있자.’

‘…어, 그래.’

 

다니엘은 내 옆에 와 서더니 나와 같은 자세로 창틀에 팔을 얹었다. 내 곁에 머물려는 거구나.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무심코 옆을 바라봤을 때,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걸 실감한 건, 녀석의 푸른 빛과 나의 하얀 빛이 경계를 잃고 섞이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굳은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이나 창가에서 눈 구경을 했다. 다음으로 강다니엘이 꺼낸 말은, 일기예보에 엇나가 내리는 눈보다도 뜬금없었다.

 

‘나 너 좋아해.’

‘…….’

‘지훈아.’

 

내가 꿈을 꾸는 걸까 생각했지만, 꿈이라고 해서 부끄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갑자기 터져나오는 기침에 허리를 구부리자 그 위를 어루만지는 손길. 아, 현실이었다.

 

‘콜록, 콜록!!!’

‘괜찮아?’

‘아, 왜, 왜 지금 갑자기-’

‘그냥, 지금 말하고 싶어서.’

 

이게 현실이라니. 다니엘은 저까지 허리를 숙이고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터질 듯한 내 얼굴을 정통으로 눈에 담으며. 마구잡이로 날 괴롭히던 기침이 어느 정도 멎자, 녀석이 다시 물었다.

 

‘근데 알아들은 거 맞아?’

‘흐읍, 후우…’

‘지훈아, 알겠으면 응, 한마디라도.’

 

숨 쉬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이상하게 구는 나를 강다니엘이 태연하게 달랬다. 눈앞, 코앞에서. 어그러졌던 시공간을 의식적으로 바로잡자 겨우 실감할 수 있었다.

 

믿기지 않게도,

사랑스러운 사람이 날 사랑하고 있었다.

 

 

‘…웅.’

 

모의고사 그래프는 수능 점수를 마지막으로 정점을 찍은 상태였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고백과, 승낙 같지도 않은 대답이 있은 후 우리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대로 대화했다. 가족 모두가 잠든 시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서로가 몰랐던 서로에 대해서. 언제 어디서부터였는지, 어떻게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 처음 나눠보는 화제인데도 말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백할 생각을 어떻게 했냐는 물음에 다니엘은 내 마음을 진즉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느낌이라며. 자기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확실한 느낌은 처음이었다고.

 

[착각일 거라고 생각도 안 했지만, 그래도 만약에 거절당하면 그냥 동창회 평생 안 나가려고 했어.]

‘그것까지 생각한 거야?’

[어. 하마터면 나 친구 다 잃을 뻔.]

 

과장스러운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으니, 건너편에서 따라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이 좋았다. 녀석에게 내가 갖는 전염성을 몸소 느끼고 나니.

 

[이제 나랑 손잡고 같이 동창회 다녀야해.]

‘…손은 놓고 가면 안 돼?’

 

괜스레 부끄러워 건넨 말에 다니엘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동창회를 안 가고 말지, 손 놓는 건 안 돼.]

 

나는 다니엘 몰래 팔뚝을 살살 긁었다. 너무 간지럽고 또 너무 좋아서.

 

*

 

새로이 알게 되는 게 많았다.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의 연애는 그랬다.

 

‘뭐 할래?’

 

다니엘이 손을 잡으며 그렇게 물었다.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떠오르는 게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으음…. 생각 좀.’

‘그래.’

 

나는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뭐 하나 고르기가 힘들다. 다니엘이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좀처럼 보채는 일이 없는 애인…이다. 아, 미친, 애인이래.

 

‘…뭐해?’

‘취미생활.’

‘그게 뭐야-’

‘박지훈 만지기.’

‘…나 간지러운데.’

‘응.’

 

간지럽지만, 애인이라는 말 말고 설명할 수 있는 단어도 없다. 입밖으로 낼 순 없었지만 난 정말 사랑을 하고 있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제 할 일을 꿋꿋이 할 줄 아는, 그런 다니엘을.


*

 

다니엘과 지낸 나날에서 좋은 것만 배우게 되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다른 학교에 입학하고, 서로 다른 환경을 살면서 서로 맞추기가 힘든 부분이 많았다. 놓고 싶지 않아서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어렸을 때 기흉을 앓았던 적이 있는 터라 군대를 면제 받은 나와, 1급 판정을 받아 육군으로 입대를 하게 된 다니엘. 녀석이 군대에 가기 전에 조금이나마 같이 학교에 다니고 싶어 스무 살 때부터 바로 편입 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2학년 1학기, 당당히 같은 학교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은 2학기에 다니엘은 입대했다. 꿋꿋이 기다렸다. 녀석이 제대하고 함께할 수 시간이 많으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로. 무언가 오산이라는 판단은, 그 무언가에 처해지고 나서야 가능하다.

 

‘미안, 복학하니까 만날 사람이 많네.’

 

내게 내어질 시간을 확신했는데, 그 기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래, 이해해. 좋은 녀석이니 나만큼이나 기다렸던 사람이 많았겠지. 또 부질없이 기대했다. 학기 초까지만 그러겠지. 하고.

 

미안, 나 동아리 회식.’

‘1학년 때 팀플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불러서.’

‘주말엔 진짜 어디 놀러 가자.’

 

…난 왜 항상 너한테 두 번째여야 해.

 

제대한 후 다니엘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예전의 습관을 잃은 듯. 더 이상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먼저 전화하지 않는 너.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따위의 말을 전처럼 자주 하지 않는 너. 아침에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내던 문자가 이젠 더 이상 오지를 않고. 하나하나 이 잡듯 따지고 들기엔 질리게 구는 것 같은. 그런 서운한 행동들.

 

‘변한 거네.’

 

고민상담을 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이었다. 이럴 말을 들었을 때의 나는 동조하지도,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음에는 이 친구한테 털어놓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할 뿐. 그러다보니 점점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이 줄어들었다. 기어이는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더라도, 강다니엘은 변하지 않았다. 그 애를 둘러싼 환경이 바뀐 거였다. 묶여있던 목줄에서 벗어나자 많은 사람과 엮이고, 그 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이게 본모습이다. 그걸 알기에 보채는 게 쉽지 않았다. 아무리 애인이라도 내가 뭐라고, 다른 사람이 되어 달라 요구할 수 있을까 싶어서. 그게 버거워 나를 떠날까봐 참기에 급급했지.

 

근데,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다니엘.’

 

전날 동아리 회식에 가서 새벽 1시부터 연락두절에 사람 애태우더니, 결국 첫차를 타고 자취방까지 찾아온 애인에게 보여주는 게 이 꼴이다.

 

‘으으….’

 

두서없이 나뒹구는 몇 개의 소주병. 과자 봉지. 지난 주말, 주인도 없는 집에 찾아와 오후 내내 청소해줬던 바닥이 온통 더럽혀져있었지만 그런 건 문제도 아니었다. 침대 위에 강다니엘 혼자 있지 않았다는 게 내 마음을 찢는 일이었지.

 

침대 위엔 딱 봐도 긴 머리인 게 어느 여자가 한 명. 그 외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불을 턱 끝까지 뒤집어 쓴 두 사람. 그 아래에 두 나체가 엉겨있는 상상을 하다 지레 놀라고 말았다. 이불을 들춰볼 생각도 못하고 그저 몸이 굳었다. 혀가 삽시에 말라버린 침을 삼켜 발버둥을 친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그 곳을 빠져나왔다. 현관문에 몸을 기대어 도망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건… 스스로가 이방인인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흐윽….’

 

숨이 막혔다. 내 처지를 확인한 순간, 순식간에 그 곳은 고산지대였다.

 

눈이 매웠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지하철을 탔다. 평소 강다니엘과 타던 습관 때문에 애먼 칸에 올라 탔다. 환승 구간이 길었다. 그 곳을 걷는 사람들과 눈물 젖은 얼굴로 마주해야만 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 위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녀석에게 전화가 온 건, 거의 저녁이 되어서였다.

 

[어디야?]

‘넌 어딘데?’

[너희 집 앞.]

‘…나 밖인데.’

[엇갈렸나보네. 곧 들어와?]

‘아니, 좀 걸릴 것 같아.’

[아… 그냥 가야겠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소 같은 목소리. 이 밑에 뭐가 있을까 두려워 한 번도 파헤치지 못했으나, 나는 오늘 맨손으로 땅을 파보기로 했다.

 

‘다니엘,’

[응?]

‘오늘 자취방에 누구 왔었어?’

 

내가 듣는 내 목소리에서 흙냄새가 난다. 손톱 밑에 온통 지저분하게 모래 먼지가 끼었다. 답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는 찰나에도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리고-

 

[아니, 안 왔는데?]

 

땅 밑이 무너져 내렸다.

너는, 왜, 내게 사실이 아닌 걸 말해…!

 

‘…나 좀 피곤해서, 내일 연락할게.’

[…그래. 연락도 제대로 못하고 주말 그냥 보냈네.]

‘…괜찮아, 끊을게.’

[어.]

 

간신히, 간신히. 습관처럼 괜찮다는 말을 해놓고,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나 하나도 안 괜찮은데, 뭘 위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지. 눈물이 울컥 솟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날 원하는 네 모습이지, 이게 아닌데. 미안해하게 만드는 일도 사람 지치는 일이다.

 

밤새 생각했다. 스스로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 관계를 돌아보려 노력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사실 내가 주려가고 있었다는 걸. 사람이 너무 오래 곡기를 끊다보면 더 이상 음식 생각이 나지 않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더 이상 강다니엘의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뜨고 학교에 갈 준비를 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 치고 몸이 되게 멀쩡했다. 가족들과 밥을 먹고 씻고 가방을 챙기는 그 일상은 조금의 균열도 보이지 않고 견고했다. 내가 담담히 이별을 결심하고 나서도.

 

그것은 내가 사랑 앞에 발휘한 거의 최초이자 마지막 용기였다.

 

-우리 그만 하자.

 

내일 연락 주겠다는 내 말에 정말 정직하게도 먼저 연락하지 않는 너. 그런 널 대신해 마지막을 말하는 것은. 집을 나서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문득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더 간절한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길로 모든 강의를 째고 한강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하루를 내리 보냈다. 전화기는 끈 채였다.

 

*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한 건 기대였을까, 단순한 예상이었을까.

 

“전화 왜 안 받는데.”

 

강의실 앞에서 강다니엘에게 어깨를 붙잡힌 순간에도 명확히 답을 낼 수 없었다.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 굳은 얼굴을 마주하자니, 잘한 일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해지는데.

 

“…받기 싫으니까.”

“어제 그거 니가 보낸 거 맞아?”

“그럼 나 말고 누가 보내겠어.”

“…우리 얘기 좀 해.”

“연락도 그런데, 얼굴보고 얘기를 왜 해.”

“지금 이게, 하아…. 무슨 일인데.”

 

강다니엘의 아지랑이는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염치없지만 그 모습이 망연히 실망스럽다. 내가 이 정도로 괴로웠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나 저명해서. 난 정말로 네게 뭐였나.

 

“우리 그냥 여기서 끝내면 안 돼?”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그만하자고 했잖아.”

“그러니까, 왜!”

“…조용히 해, 학교야 여기.”

“하…….”

 

강다니엘은 쥐어 부술 듯 내 어깨를 잡은 손에 악력을 넣더니, 한 순간 뚝- 바닥으로 떨궜다. 고개 역시 함께. 그런 녀석이 내 손목을 미약한 힘으로나마 붙잡은 건, 서너 명의 행인이 우릴 스쳐 지나간 후였다.

 

“…나한테 납득할 기회도 주기 싫은 거야?”

“…….”

“아니면, 후… 얘기 좀 해 제발.”

 

애원하고 있다. 최소한 이별을 받아들일 기회를 달라며. 다니엘, 그러고 나면 우린 정말 끝이겠지.

 

“…알았어.”

 

잡힌 손목을 뿌리치며 뒤를 돌았다. 먼저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다. 하필이면 전공 책을 내려놓으러 사물함에 들르기도 전이라 그렇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정한 연인의 모습으로, 강다니엘과 카페에 마주 앉아서.

드라마를 보면 이별은 거의 카페에서 하던데, 이 안의 누군가는 지금도 이별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네가 어떤 여자랑 같이 자고 있는 걸 봤어.”

 

사람일은 정말 모르는 것이다. 그게 내가 될 줄이야.

강다니엘은 영문을 모른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상세히 설명해주니, 그제야 동아리 후배들을 집에서 재워준 기억이 난다며, 자신이 일어났을 땐 그 애는 가고 없었다고 했다.

 

“알았어.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뭐에 화났는지.”

“알았으면-”

“근데, 이건, 너무, 일방적이잖아. 나는 몰랐던 일인데.”

 

아아, 다니엘….

넌 영영 하나밖에 볼 줄 모르는구나….

그 일 하나를 알고 모르는 건 중요치 않아.

 

“진짜 몰랐던 거 맞아?”

“뭐?”

“솔직히 못 믿겠어서.”

 

내가 더 이상 널 못 믿겠다는 게 문제지. 아니, 믿기 위해 들였던 노력이 이젠 역부족이라는 거야.

 

“…….”

 

강다니엘의 손아귀에서 페트컵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아드득, 안의 얼음들이 우그러지며 지르는 고통의 비명.

 

“니… 지금 내 못 믿는다 했나.”

 

…화났나보다.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말하는 게. 게다가 어렸을 때 상경한 후 고쳤다던 사투리가 다시금 튀어나오고 있다. 심장이 또 그걸 알고 쿵쿵대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미움이라도 받을까 전전긍긍하던 나날들. 수축 이완하는 감이 점점 세지고 있다.

 

“…내가 이런 말 하게 될 줄 몰랐는데.”

 

하지만 다니엘, 너는 알까.

 

“외로워.”

 

이제 그런 건 내게 그저 ‘익숙함’일 뿐. 더 이상 쓰라리지 않다는 걸.

 

“네 옆에 있으면 내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뭐?”

“어제 갑자기, 이게 말이나 되는 건가 싶더라.”

“…갑자기라고. 니 지금-”

“갑자기 아니야….”

“지훈아.”

“갑자기 아니란 말이야…!”

 

울음이 섞여서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하나도 모르는구나. 그 동안 밑바닥에 고여서 곪았던 시간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허나 그걸 지금 따져본들 무슨 소용일까. 나는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며, 고갤 숙이고 차게 식은 가슴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우리, 서로 필요해서 만나야 하는 사이잖아. 요즘 너가 날 찾기나 해?”

“지훈아.”

“원랜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야 하는 게 정상 아니야…?”

“훈아.”

 

어떻게든 막무가내로 말을 이어가려는 내 손목을 강다니엘이 붙잡았다.

 

“박지훈,”

“…….”

“나 너 없으면 안 돼.”

 

그러더니 급히 가로막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입술을 답삭이는 게 어떻게 더 이어보려는 것 같은데. 나는…

 

“아니, 다니엘.”

“…….”

“너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그렇게 느낀다고.”

“…….”

 

나도 이제 날 우선적으로 생각해보면 안 되겠니. 그런데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힘든지.

 

“…힘들어.”

“……”

“나 진짜 더 못해먹겠어.”

 

네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말이.

 

“…….”

“…….”

 

충격을 받은 건지. 강다니엘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고, 컵 위에 맺힌 물방울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갈게.”

 

그러나 곧 말라비틀어질 한 줄기 물살에도 쉽게 휩쓸려버리는 건 정작 나다.

 

*

 

편입 전 학교에 다닐 때, 잠시 성소수자 동아리에 발을 들인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형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만났다. 그전까지 단 둘이 술자리는 피했는데 이젠 그럴 이유도 없으니. 역시 눈치가 빠른 형이라 몇 잔 넘기기도 전에 “근데, 무슨 일이 있냐”며 군더더기 없이 물어왔다. 애인하고 헤어졌다 간단하게 말하니 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한테 이별에 대해 말한 건 처음인데, 한번 입을 여니 술술 나왔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외로웠고 괴로웠는지.

 

별이 밝아진 건지 밤이 깊어진 건지 알 수가 없다. 확실한 건 테이블 위에 빈 술병이 과하게 늘어있다는 것이었다. 술기운이 슬슬 퍼지니 차츰 판단력이 흐려진다. 아까까지는 분명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못 박을 수 있었는데, 괜히 제삼자한테라도 묻고 싶어지는 기분.


“형….”

“응?”

“…….”

“뭔데, 말해.”

“…저요, 잘 헤어진 걸까요.”

 

강경했던 내가 어중간하게 굴자, 선배 역시 한풀 꺾여서 눈썹을 굽혔다.

 

“어……. 솔직하게?”

“네.”

 

선배는 눈썹을 살살 긁다가 어중간한 온도로 나를 불렀다.

 

“지훈아.”

“…….”

“까놓고 말해서 잘된 이별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그래, 그럴 수 있겠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는 말처럼, 시작이란 게 필연적으로 끝을 수반하는 거라면. 그렇다 해서 대단한 위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연애 뭐 있냐. 짠이나 하자.”

 

맞다, 연애 뭐 없지. 그래서 더 뭐 같다고. 결국 남은 건 그 사실 하나다. 연애 뭐 별 거 없다는 그거 하나.

경호 선배는 버릇이 하나 있다. 상대방을 대단히 곤란하게 하는 짓이다. 조금 술이 들어갔다 하면 그 때부터는 상대방 잔 한가득 술을 따르기 시작해서 도무지 잔을 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흘러 넘칠까봐.

 

“…….”

“…….”

 

오늘도 그래서 잔을 차마 건들지 못하고 있는데, 경호 선배는 그런 나를 가만 바라보더니 별안간 외쳤다.

 

“이모! 여기 휴지 좀요!”

 

고개를 들지 못함은 잔이 넘치기 일보직전이라 그렇다.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그렇다고.

 

***

 

“…그렇다더라고.”

“…에휴.”

 

박지훈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고받은 지 어지간한 시간이 흐른 뒤다. 혼자 내내 생각으로 앓던 중에 내게 남자애인이 있다는 걸 아는 유일한 형에게 불려나왔다. 정황을 들은 성철이 형은 탄식을 금치 못하며 황태포를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었다. 사실 술자리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내는 지금도 잘 실감나지 않는다. 며칠 사이의 일들이 모두 깊은 꿈인 것만 같다.

 

‘…힘들어. 나 진짜 더 못해먹겠어,’

 

미간에 깊게 잡힌 주름과 입술에 걸쳤다 나 몰래 흩어지던 한숨. 그 얼굴을 내가 빚었다 생각하니 도무지 현실이라 믿기 싫은 것이다.

 

지금 떠올리기엔 참으로 모순적이지만, 박지훈을 좋아하게 되었던 그 처음을 여전히 생생히도 기억한다.

 

‘너 향수 뭐 써?’

 

초면에 다짜고짜 묻던 얼굴. 3월의 햇살은 유난히 하얗다. 그 빛에 젖은 녀석의 모습은 벌써 내게 일상이었다.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느낌으로 먼저 알았다. 무색무취의 공기 같다고, 뜨는 해와 지는 달 같다고. 공전하는 행성 같다고.

 

“언제부터 이상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지금의 부재가 믿기지 않는 걸까.

 

“모르겠어. 워낙… 싫은 소리 한 번을 잘 안 해서.”

 

맹세코 몰랐다. 헤어지자는 말을 할 정도로 힘들었을 줄은.

 

“말을 안 해서 몰랐다고.”

“어.”

 

하지만 몰랐다는 말이 과연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후… 그런 타입인가 보네. 쌓아놨다가 한 번에 터트리는 타입.”

“…….”

“야, 다니엘. 죄인처럼 그럴 거 없다. 따지고 보면 걔도 잘한 거 없잖아. 아니, 사람이 말도 안 하는데 어떻게 아냐, 어?”

“…….”

“잘 헤어졌다 생각해. 어차피 다시 만나도 같은 이유로 헤어질걸.”

 

전 헤어질 생각 없는데요. 그 말이 혀끝까지 달랑거리는데 겨우 집어 삼켰다. 이 형한테 해봤자 의미 없는 말이 될 것이다.

 

“나도 그런 스타일 만나본 적 있는데-”

 

형은 자연스럽게 대화 방향을 돌리며 제 경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 스타일이라고. 뭘 안다고 그 따위로 표현하는 거지. 기분이 확 상해서 술을 한 잔 넘겼다. 성철이 형의 음성은 귓등에 오물처럼 번져가고, 아직 새하얀 부분에 맺히는 건 어느 옛 기억이다.

 

어제 저녁에 뭘 먹었는지 기억하기도 힘든 각박한 세상이지만, 한 조각만 빠져도 머릿속이 와르르 무너질 만한 중요한 기억들이 있다. 박지훈의 스무 번째 생일이었다. 나 없이 보냈던 열아홉 날의 생일에 조금도 뒤지지 않게 완벽한 하루로 만들어주겠다 벼르고 별렀다. 끝이 뭉툭한 손가락들이 서툴게 포장한 선물을 풀던 순간, 난 내 심장이 어디 있는지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지.

 

‘헤에-?’

‘입에 파리 들어간다.’

‘이거 비싸지 않아? 아니, 근데 어떻게 알았어? 나 이거 갖고 싶어 한 거. 말도 안 했는데.’

 

박지훈은 눈썹을 눕히고 어쩔 줄을 몰랐다. 실제로 난 그걸 사기 위해 그 한 달 내내 녀석을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집밥만 먹으며 돈을 모았다. 그러나 기뻐 동동 구르는 발장구를 보다보면 그런 건 다 껌값이 되는 것이다. 세상 의기양양하게 어깰 으쓱이니 박지훈은 까르르 아이처럼 웃었다. 맞아, 한때 우린 그런 적도 있었다.

 

아니, 사람이 말도 안 하는데 어떻게 아냐, 어?

…아니야, 형.

 

‘말 안 해도 다 알지, 지훈아.’

 

나는 원래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애인이었어.

 

*

 

집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거나하게 취해 도어락 비밀번호를 세 번이나 잘못 눌렀다. 신을 벗고 우당탕 집 안에 들어서면, 굳이 불을 켜지 않아도 눈에 익은 것들. 이젠 끝이라며 내 삶에서 자신을 통째로 앗아갈 것처럼 굴더니 아직 이렇게 집에 그 애 흔적이 가득하다. 갈 거면 확실하게 남김없이 떠나버리지. 내가 그렇게 미웠나. 이거 보고 네 생각하며 내내 괴로워하라고.

 

‘누구랑 오래 가 본 적이 없어.’

 

서툴러서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많이들 겪어봄직한 일을 그 애는 경험한 바가 없다.

모르겠다. 사실, 이기적이라고 박지훈을 모질게 욕하고 싶은 의욕조차 비실거린다. 지금은 그냥, 그냥…

 

고장 난 건 우리가 아니라 일상인 것 같았다.

 

지훈아, 미숙함이 이유가 아니라면 어쩌지.

자그마한 배려마저 베풀기 싫을 정도로. 그 정도로 내가 미운 거라면. 그래서라고 생각하면.

 

“후우….”

 

…눈앞이 아찔한데. 습관적으로 손을 놀려 단축번호 0번에 저장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그러나 역시나다. 나도 저렇게 꺼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풀썩, 겉옷도 벗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아으으….”

 

간절히 염원하니 들어주는 건지 까무룩 현실감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뤄줄 거면 다른 거나 이뤄주지. 뭐든 지금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박지훈, 너는 왜 나를,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으려고 해. 시발. 이젠 녀석을 원망스러워 하는 내가 다 원망스러웠다.

 

아, 찢어버리고 싶은 밤이다.

 

*

 

작정하고 피하는 건지 녀석이랑 마주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학점 그렇게나 신경 쓰던 애가 겹치는 강의가 다 결석이다. 참다못해 박지훈의 집에 찾아가보기로 했다. 늘 타던 칸 앞에 서서 할 얘기를 정리했다. 혹여나 감정적으로 밀어붙일까.

짜고 차가운 바람이 분다. 마음이 얼었다 녹았다, 살얼음이 끼었다 불이 붙었다를 반복한다. 바닷가에 널린 명태마냥 마음이 비려지는 것만 같다. 넌 내 어떤 모습이 그렇게, 내가 왜 못 미더웠다는 걸까.

박지훈과 항상 타던 칸에 나 혼자다. 내가 먼저 환승하러 내리고 나면, 녀석은 20여분을 더 탄 후에 환승한다. 박지훈이 혼자 걷던 길에 나 혼자다. 나 혼자라고, 씨발. 아 이번엔 불이 붙는 타이밍인가보다.

박지훈이 오늘도 내렸을 곳에서 하차해 환승구간을 걸었다. 붐비고 덥고 숨 막히고. 다섯 번이나 타인의 어깨에 부딪쳐. 걸음을 방해받는다. 시발. 거 참 환승구간 더럽게 기네, 평소 같았으면 거슬리지도 않았을 일로 다 시근덕대다가 문득 깨닫는 것. 잠시 잊고 지냈던 기억.

 

‘어디서 탈까.’

‘나 2-1에서 환승인데. 너는?’

‘그럼 그냥 거기서 타자.’

‘괜찮아? 너는 안 멀고?’

‘웅, 괜찮아. 환승하는 거 별로 안 힘들어.’

‘우와….’

‘응? 왜?’

‘내가 만나고 있는 게 사람 맞나. 천사 아니야?’

‘크힣- 또 오바는.’

 

박지훈은 내 말이 과장이라며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웃는 얼굴이 정말로 천사 같아서 나는 또 한 번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고마워, 예뻐 죽겠다.’

 

내가 먼저 내려 헤어진 후, 걷는 내내 통화하는 동안에도 내내 그런 말들을 속삭였던 것 같다. 그게 스물한 살, 지훈이가 우리 학교에 편입 온 첫날이었다.

 

최근, 나는 어떻게 대했더라.

 

“…….”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근래 신경 쓴 적이 없으니까.

…나 무얼 위하고 있던 거지.

어느새 멎어버린 발걸음은 이미 방향감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

 

나는 지금 어딜 가고 있는 걸까.

 

“…….”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자격 없는 이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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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타를 일주일 이상 비워놓으면 조금 슬퍼지는 병이 있어서.... 하편은 쓰고 있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릴 것 같네요ㅠ_ㅠ

벌써 금요일이에요 내일이면 주말이고 월요일이면 시험이지만 흑흑 그래도 주말이라 하면 일단 신이 납니다 모두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랄게요! 


RPS 녤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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