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문에 열쇠 꽃을 심자마자, 그 틈새에 흐르는 향기로 온갖 식물들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엘리제가 처음 맡은 향은 매우 다채곱고 신비한것들로 가득했다. 가득히 자라있는 크랜베리, 정체모를 방향으로 뻗어있는 나뭇가지와 그 끝을 옮겨다니는 이파리, 발 밑으로 넘쳐흐르는 잔디와 토끼풀의 생명들.


"비타, 이건..." 

엘리제가 감탄함과 동시에 비타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눈이 띄인 비타가 포착한 풍경은 엘리제의 것보단 훨씬 깊은 종류였다.

"협곡...같지만 아니야. 물은 하나도 없네."


엘리제는 그 길을 바로 달려 들판을 한달음에 가로질러 만끽했다. 처음엔 여섯잎으로 나뉜 클로버를 주웠다. 다음에는 아주 새콤한 산딸기를 먹었고, 가득찬 물컵을 찾아내 벌컥 들이마시곤 배부른듯 토끼풀사이에 볼을 부대꼈다.


"행복해. 더할나위없는 행복이야." 엘리제가 말했다. 비타는 특유의 갸르릉 거리는 소리를 냈다. 

"네가 좋다니 됐다만. 여긴 확실히 이질적이야. 알고있어?"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그래도 이상한 냄새는 피해뛰고 있었는걸... 이를테면, 저기. 물감냄새가 나는 바위라던가 말야."

"바위?"


비타가 엘리제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애매하게 큰 둥굴고 투박한 돌덩이가 있었다. 그 바위는 희미하게 빛나고있었는데, 그 빛은 글자처럼 파여있고 푸른 기운에 휩싸여있었다. "글씨잖아." 비타가 말했다. "심지어 점자도 아니야..."


"비타, 글씨를 읽을 수 있었지?" 엘리제가 잔뜩 기대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려줄 의무가 없는데."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비타한테 점자를 알려주는거지, 그리고.."

"됐네요." 엘리제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비타는 한숨을 쉬며 바위근처로 뛰어올랐다. "음..「 꽃의 여로 」. 열쇠 꽃을 찾으려면 다른 꽃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없어. 이게 끝이야? 너무 불친절한데."

"...."


엘리제는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타의 말대로 탑의 2층은 확실하게 햇빛도 비치고있었고 여러종의 식물들이 피어있을 뿐 뒤엉키거나 나있는 길같은건 하나도 있지 않았다. 특이한 식물들이 보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싱그러운 꽃밭이였다.


"비타, 나는 느낄 수 있어." 엘리제가 말했다. "그 바위는, 탑의 꼭대기를 막고있는 것의 벽과 똑같은 냄새가 나."

"그게 뭐 어쨌는데?"

"꽃이 너무 많아서, 내가 확인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나는 벽으로 둘러싸였던 그 냄새가 전혀 맡아지지 않아."

"탑은 벽으로 둘러싸여있는 곳일텐데."


"우리 어디에 있는거야?" 


비타는 엘리제의 의도를 눈치챘다.

엘리제는 탑 안에서 뛰고 놀았지만, 그 한켠의 크기는 비타 백 마리 정도 있다면 꽉차보이는 정도였다. 침대와, 작은 밭, 그리고 계단. 엘리제의 층이 하나의 다락이라면, 지금 서있는 들판은 한없이 넓고 광활했다. 엘리제가 벽 냄새를 못맡는것도 이해가 갔다. 이런 크기는 비타라는 단위로는 셀 수도 없다.


"길을 '잃는다' 라는 말. 이럴때 쓸수 있는걸까."






2F

꽃의 여로

「 탑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자 해를찾는 꽃들의 여행길. 마법이 섞인 풀들은 해에 닿기위해 스스로 진화하고 변화되어간다. 」







"그래서, 저걸 타자고?"

비타의 시선이 위를 향했다.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안 돼, 못 해."


엘리제가 가리킨것은 하늘을 유영하고있는 거대한 민들레 홀씨들이였다. 그리고 엘리제는 그것들에 대한 설명을 차분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방랑 민들레씨 (Wander Dandelion seeds).

군집으로 모여다니는 이 거대한 민들레 홀씨들은 잡고있으면 그들의 방향대로 날아갈 수 있다. 특이하게도 이 홀씨들은 시간이 지나도 비대해질 뿐 꽃으로는 성장하지 않는다(...)


저 민들레 홀씨들은 뿌리없이 어떻게 성장하는걸까? 아니면, 이미 성장한 뒤 홀씨째로 날아가는 것일까? 알수 없지만, 비타는 굉장한 공포에 휩싸였다.  

이번 층계에 가장 큰 요소는 두개로 갈라져있는 절벽사이를 건너가야한다는 것이였다. 다행히 반대쪽이 꽤나 낮아서, 그냥 뛰어내려도 땅에는 닿을것 같았지만 그렇게되면 살아있을수는 없겠지.


"나 달리긴 자신있어."

"그게 문제가 아니야. 어떻게 타고, 또 어떻게 내릴건데? 절벽이라 잘못하면 떨어진다고."

"떨어져?"

"시체도 못 찾을걸." 비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할 것 없어." 엘리제는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나는 몸이 가볍고, 비타가 뛰는 습관만 지도하면 쉽게 올라 탈 수 있을거야. 비타는 무거우니까, 홀씨도 점점 땅으로 내려갈거고..."

"나 안무겁거든."

"둘이 타면 그렇다는 얘기지." 엘리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협곡의 절벽을 오르는건 보는것보다도 쉬운 일이였다.

이미 고도가 높은 평지에 낮은 언덕과 그 땅을 풀과 새싹들이 아름히 채우고있어서, 맨발인 어린 아이도 쉽게 뜀박질 할 수 있어보였다.

그러나 민들레 홀씨들은 공중에서 난기류를 만나 아주 잠시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그 지점은 절벽 끝 너머였다. 엘리제는 자신이 있었지만, 정확한 도약이 아니라면 그 홀씨들을 잡는건 불가능해보였다.


비타가 끝까지 설득했지만("그런건 불가능해." "난 죽기 싫어." "저기, 듣고있는거야?")  홀씨들에 탑승하지 않으면 결국 절벽을 붙잡고 기어가야한다는 의견을 결국 묵살하지 못했다. "냄새가 나. 저쪽이야, 저쪽에 다른 바람이 불어와." 

비타는 엘리제보다 두박자 늦게 도착했다. 절벽에서 기다리던 엘리제가 벌떡 일어났다. 비타는 한 숨을 쉬고 엘리제의 어깨에 폴짝 뛰어올랐다. "그래, 내려오자고 한 내 잘못이지."

"준비 됐어?"

"물론이지."

"셋하면 뛰는거다. 하나, 둘....셋!"


둘의 계획은 간단했다. 절벽까지 도움닫기, 홀씨가 내려올때 점프.

줄기는 충분히 굵어서 놓칠 염려는 없었다. 단지 엘리제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중간에 소리를듣고 멈추거나 하는건 늦고도 위험한 일이라는것.


신호와 함께 엘리제는 그 작은 체구로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달렸고 (그와 동시에 본인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달리고있다고 생각했다.)  "언제 잡을까?" " "언제 뛰어야 해?"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물었다.

그러나 비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엘리제는 비타를 믿고 달렸다.


그리고 순간이였다. 비타는 갑작스리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워낙 순식간에 떨어졌고 엘리제는 달리는데 집중한 터라 어떤식으로 비타가 왜 뛰어내렸는지까진 짐작하지 못했다. 여전히 엘리제의 두 다리는 뛰고있었다. 그저 홀씨들의 냄새에 집중하면서.


"지금이야!"


비타의 외침이 들렸다. 그리고 엘리제는 망설임 없이 절벽 끝을 뛰어올랐다.



엘리제는 거대한 민들레 줄기를 껴안듯이 잡았다. 그 홀씨에 비하면 엘리제는 작고 가벼워서, 그 중심을 흐트리긴 했어도 곧 상승기류를 타고 문제없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홀씨의 줄기는 다행히도 잡아쥐기 전혀 미끄럽지 않았다.  "으악!" 엘리제가 비명을 질렀다. "나, 날고있어. 내가 날고있어, 비타!"


발이 땅에 밟히지 않아 엘리제는 혼란스러운듯 물장구치듯 다리를 버둥거리며 외쳤다. 두려움과 신남이 반쯤 중첩된 상태로 엘리제는 비타의 이름을 계속해서 불렀다. "조심해, 멍청아!"  그 고양이의 목소리는 위쪽에서 들렸다. 엘리제가 외쳤다. "위에있는거야?"


"내가 먼저뛰어서 줄기를 끌어내렸어. 왤까?" 비타는 천천히 윗줄기를 타고 내려와 엘리제의 어깨에 안착했다. "바로 네 달리기가 형편없었기 때문이지!"

"너무하잖아!"

"마음만먹으면 너보다 바토리가 더 빠르겠다." 

비타가 일갈했다.


짧은 감사를 나누기도 전에, 이번엔 측면에서 불어온 깊은 바람이 홀씨에게 불어닥쳤다. 밑은 바람한 점 없는 청량한 하늘이였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이상한 난기류들이 솟구치고 내려앉았다.

"탑 안인데 왜 바람이 부는거야?" 비타가 투덜댔다. 

"아냐, 이건 바람이 아니야. 길이야!" 엘리제가 코를 킁킁이며 말했다. "다른 향기가 나는 기류 두개가 있어."

"무조건 아래쪽으로 가!"


비타는 줄기에서 엘리제의 어깨로 다시 내려왔다. 엘리제가 손아귀 힘을 뒤쪽으로 당기자, 홀씨는 어느 한쪽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도가 다시 낮아질수록 바람이 약해졌고, 천천히 반대편 언덕쪽에 도달하자 바람은 부드럽게 멎었다. 

비타의 지시에 따라 엘리제는 언덕에 한발 위에서 민들레를 놓고 풀석떨어졌다. 얼굴부터 떨어져도 다치지 않을 속도였다.

엘리제는 착지하자마자 반대쪽으로 돌아누워 크게 웃었다.


"후후. 정말 최고의 호흡이였어, 비타!" 

"고양이가 목숨이 아홉개라는 이야기 알아?" 비타는 몸 어디도 움직이고싶지 않은듯 뒹구는자세로 가만히 입만 움직였다. "지금 한 여덟개 줄은 것 같아."


엘리제와 비타는 그렇게 잔디속에서 서로의 불평과 감사를 교환했다. 따듯하지 않은 빛이 서로를 향해 내리쬐고있었다. 이곳이 이렇게 밝은 이유는 천장의 광원때문이였다. 바토리는 저것을 '등대' 라고 가르쳤다. 엘리제도 심어본적이 있는 식물이였다. 다만 저렇게 크고 싱그럽게 피워낼 순 없었지만. 비타는 아마 탑에 햇빛이 있다면 등대의 빛과 닮았을거라고도 말했다.


"엘리제, 아까 내가 뛰어내렸을때 말이야." 비타는 엘리제 옆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째서 멈추지 않았어?"

"응?"

"민들레를 향해 절벽끝까지 달릴때 말야."

"아, 아." 엘리제는 바보같은 소리를 내며 말했다. "뭐야, 왜 물어보는건지 모르겠는데."


"비타가 외칠때까지 달리기로 했잖아."

"....정말 바보네. 엘리제."

엘리제는 비타의 말을 이해했는지 못했는지(비타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입모양으로 흠뻑 웃음을 지었다. "푸하하, 오늘 너무 재밌었어 비타." 엘리제는 비타의 이마까지 자기 이마를 들이밀고 숨을 머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할거야."



"그나저나, 어서 열쇠 꽃을 찾아야 하는데."

"여기 있어." 

비타가 묻자마자 엘리제는 손에 쥔 열쇠 꽃을 보여주었다. 분홍 빛이 감도는 신비한 꽃이였다. 


"그게 어디서 났어?"

비타가 물었다.

"내 생각엔 말이야, 열쇠 꽃은 한종류만 있는게 아니야. 아마도 어딘가에 또 다른 꽃이, 또 다른곳에 여러 모습으로 피어있을거라 생각해...이건 1층에서 거짓말쟁이 튤립한테 받았어. 문이 열려있어서 쓸모는 없었지만. 이곳에도 두가지 열쇠꽃의 냄새가 두개나 있어."


엘리제는 조심스레 열쇠꽃을 감싸어 교감을 시도했다. 뽑혀져 있는 꽃이기 때문에 엘리제가 느낄 수 있던건 특유의 향기, 감촉, 뿌리를 내린 모양새와 그 토양정도였다.

비타는 시큰둥히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빙긋 미소를 짓고 순식간에 꽃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바로 앞쪽에있는 벽의 근처였는데 그 벽은 특이하게도 가시가 들쑥 나있었다.


"뒤쪽 비탈길에도 하나 피어있네." 비타가 말했다.

"저 꽃이 가리키는건, 우리가 내려왔던 절벽의 가운데야. 저 절벽 안에 통로가 있었어."

"갈림길이야."


엘리제는 그 말을 하며 다시 유영하는 민들레씨들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길로 안내해줄 홀씨들은 이미 기류를 타고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미 들판에 착지한 엘리제와 비타는 다시 돌아가기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없었다.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것 뿐.








-「꽃의 여로」마침.


I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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