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널 위해 그곳에 있을게

-Martin Garrix&Troye Sivan, There For You 中







8






오후 들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어두워진 하늘에서 하나둘 떨어지는 빗방울이 꽤 굵었다. 아직 채 네 시도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탓에 사방이 어두웠다.

겨우 숨 쉴 구석이 생겼다 싶으면 연이어 다음 촬영이 잡히기가 부지기수였다. 살인적인 스케줄이 계속되고 있었다. 집에 잠시 들를 짬도 나지 않는 탓에 개운하게 한 번 씻는 것조차 사치처럼 여겨졌다. 누구 하나 쓰러져야 이렇게 안 굴리지?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말이 굴러다녔다. 그마저도 묵묵히 감내한 정국은 꼭 사흘 만에 직원 숙소에 들러 팀원들 틈에 부대끼며 샤워를 겨우겨우 마치고 나오는 중이었다. 십 분 남짓 짧은 시간 동안 대단한 미션이라도 수행하는 기분이었다. 급박하게 다시 나오느라 물기가 미처 덜 마른 몸 위로 입었던 옷을 다시 걸쳐 입은 탓에 찝찝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몸에서 풍기는 흔하디흔한 샤워젤 향기가 꽤 산뜻하게 느껴져 기분이 한층 나아진 상태였다. 정국은 현관에 서서 잠시 기지개를 켰다. 잠시나마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직원 숙소는 회사와 같은 건물 5층에 있었다. 정국은 1층으로 다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요새 자주 듣는 미디엄 템포의 노래를 재생시키자 소프트한 보컬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한데 섞여 귓가로 흘러들었다. 정국은 박자에 맞추어 발을 까딱거렸다. If life is a movie…….

노래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으로 넘어갈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9층에 멈춰 선 채 내려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저 위 어딘가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연신 울리는 것을 보니 무언가 무거운 것을 옮기는 중인 것 같았다. 정국은 하는 수 없이 계단을 택했다. 비상구 문을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습한 비 냄새가 잔뜩 섞여 있었다. 비상구 안으로 몸을 들인 정국이 손을 놓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문이 닫혔다. 들어온 문을 뒤로 한 채 가볍게 걸어 내려오며 난간을 잡고 몇 번 도니 1층이 금방이었다. 먼지 냄새에 코가 무뎌질 즈음이었다. 1층 문손잡이에 막 손을 가져다 대려는 참에 주머니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정국은 휴대폰을 꺼내 화면에 뜬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어 내려갔다.



[최지선 대리님: 정국 씨 녹음실에서 SD 카드 좀 가져다줘 이 사원이 알 거야] pm 3:53



그다지 성가신 부탁은 아니었으나 누적된 피로로 예민해진 탓에 짜증이 욱 치고 올라왔다. 왜 맨날 나만 시키냐, 진짜. 듣는 이 없는 불평을 쏟아낸 정국이 한 층을 더 내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회사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중간 문을 하나 더 통과해야 했는데, 그 문을 열면 바로 앞에 윤기의 작업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른 작업실과는 확연히 동떨어진 위치였다. 평소 작은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윤기를 위한 대표 나름의 배려였다. 작업실 안에는 불이 켜져 있었으나 복도가 조용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윤기의 작업실을 지나쳐 녹음실로 향하는 복도로 막 접어드는 찰나 옆에 있는 휴게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정국이 다시 방향을 틀어 윤기의 작업실 문에 등을 붙이고 섰다.

"와, 나 같으면 절대 회사로 안 돌아왔을 텐데."

"걔가 원래 눈치가 좀 없었어. 자존심은 말할 것도 없고."

정국을 유난히 미워했던 전 기획팀장이었다.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히스테리를 견디다 못한 직원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밑으로는 신입 사원 한 명만 달랑 남았다고 며칠 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 이름 모를 대화 상대는 그 신입 사원인 듯했다. 이전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분명히 정국의 이야기였다. 잔뜩 신난 듯 의기양양하게 떠드는 꼴이 보기 싫었지만, 회사 구조상 반드시 복도를 지나야만 녹음실에 갈 수 있었다. 잠시 고민했으나 굳이 다시 마주칠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냥 조금 서 있다가 가야겠다. 정국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가수는 안 하는 거래요?"

"그렇겠지, 쪽팔려서. 아마 하라고 해도 못 할걸? 그렇게 얼굴 많이 팔렸는데."


아닌데. 쪽팔려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노래를 할 수 없게 된 건데.

정국이 씁쓸함이 잔뜩 배인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꼭 쥐어진 주먹 안으로 손톱이 손바닥에 배겨 들었다. 팀장은 이어 정국의 실력이 부족했다는 둥, 대표가 이상하게 예뻐했다는 둥 가치 없는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다. 신입 사원은 알지도 못하는 예전 일에 대해 신나게 맞장구를 쳤다. 어이가 없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정국은 그렇게 멈추어 선 채로 예전 일을 잠시 곱씹었다. 한참 손톱이 파고든 손바닥이 찌르르 아파졌다. 그렇게 몇 분가량이 흘렀을까, 계단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듯하더니 윤기가 비상구 문을 열고 나왔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 전정……."


윤기가 아는 체를 하려고 입을 열자 정국이 빠르게 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신호를 보냈다. 윤기는 잠시 입을 다물고 복도 건너에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반투명 유리 사이로 대화를 나누는 두 개의 실루엣과 가장 듣기 싫은 그 목소리. 아, 단박에 이해가 갔다.


"내가 비록 지금은 기획팀에 없지만, 그래도 그때 그 사건 마무리할 때 제일 잘한 게 뭔지 알아?"

"뭔데요?"

"전정국 내보낸 거."


저게 미쳤나, 진짜. 삽시간에 윤기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대로 휴게실로 향하는 윤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당겨 쥔 정국이 다시 한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어쩌라고, 가만히 있으라고? 윤기가 분을 못 이겨 씨근덕댔다. 정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눈짓을 했다. 석진이 녹음실 복도를 가로질러 오고 있었다. 방향을 보아하니 휴게실 쪽으로 향하고 있는 듯했다. 윤기는 겨우 몸에 잔뜩 주었던 힘을 뺐다. 석진이 일말의 고민도 없이 휴게실 노크를 두어 번 하고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안에서 허둥지둥 일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그리고 심사원. 오늘까지 주셔야 하는 프로젝트 서류 아직 안 넘기셨던 것 같은데요. 프로젝트 마감 다 하시고 시간 남으셔서 쉬고 계신 거라면 다른 일 드려도 될까요?"


아닙니다. 아, 죄송합니다. 팀장과 신입 사원은 변명할 시도조차 않고 재빨리 엘리베이터 방향으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이어 휴게실 문을 닫은 석진도 안무실 방향으로 다시 사라졌다. 복도가 조용해지고 난 뒤 다시 한참이 지나서야 윤기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가 대표님한테 말할게. 걱정하지 마."

"뭐를요."

"저 개 같은 팀장, 안 그래도 가만 안 두려고 했어."


여전히 분노에 치를 떨고 있는 윤기와 달리 정국은 차분했다.


"가만둬요."

"뭐?"

"저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저 진짜 괜찮아요. 정국이 시선을 내리깔고 덧붙였다. 윤기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에 아찔함을 느꼈다. 아, 그때도 그랬을까. 내가 없었던 그때도 이 애는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사방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정국이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제 겉옷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회사 나가고 그 직후에는 저런 말보다 더 심한 말도 더 많이 들었어요. 원래 소심해서 말을 잘 못 했는데… 주변에서 몰아세우기 시작하니까 더 못하겠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주변 사람들이 나서서 쟤는 어디가 모자라서 그렇네 하는 말부터 시작해서 제가 하는 행동에 하나하나 전부 의미를 붙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내가 무슨 큰 죄라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도망 다녔어요."

"…네 잘못 아니야."

"알아요, 저도. 근데 그걸 깨닫기까지 진짜 오래 걸렸거든요. 저런 말들에 익숙해지기까지도 진짜… 오랜 시간을 거쳐서야 겨우 무뎌졌어요. 아까 나서지 않은 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였어요."


조금 전의 대화에 상처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애써 괜찮은 척 말을 뱉을 뿐이었다. 그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윤기의 마음 한쪽이 무섭게 따끔거렸다. 지난날 호석에게 했던, 자신 때문에 정국이 그렇게 된 거라는 말들이 하나둘 다시 떠올라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의 제가 그때의 저를 본다면… 형이 그때 말해 준 것처럼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어요."

"……."

"울면서 도망쳤지만 겁쟁이는 아니었다고, 그때의 너는 이곳에서 발을 떼고 도망치는 것조차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테니까."

"……."

"뭐 무뎌져도 또 듣고 싶지는 않지만."


정국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슬프게 들리지. 윤기가 내내 잘근잘근 깨물던 입술을 열었다.


"만약 형이 그때 옆에 있었다면 네가 도망갈 때 달려가서 안아 줬을 거야."

"……."

"괜찮다고, 잘했다고. 정말 잘했다고."


윤기와 시선을 마주한 정국의 눈가가 시큰했다.


"네가 울고 있을 때, 형이 같이 울어 줄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이었다. 그 말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한 정국의 눈가가 순식간에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윤기 앞에서 우는 일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다. 아, 저 SD 카드 가지러 가야겠네요. 대답을 얼버무린 정국이 애써 얼굴을 숨기며 엉뚱한 소리를 했다. 윤기는 그런 정국의 마음을 백 번 천 번 이해할 수 있었다. 말없이 넓어진 등을 두어 번 두드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 때문에 할 이야기도 있었으나 지금은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윤기가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려 먼저 몸을 틀었다.


"저기… 형."


정국이 다시 윤기를 불러 세웠다.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돈 윤기의 손목을 정국이 천천히 붙들었다. 아직 고였던 눈물의 흔적이 속눈썹에 고스란히 엉겨 붙어 있었으나 표정은 한층 차분해져 있었다.


"형, 나는."

"어."

"이제 남들 시선이나 이런 거 진짜 신경 안 써요. 그 사람들의 깃털보다도 가벼운 말들 때문에 도망가지도 않고요."

"그래, 그러지 마."


정국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며 윤기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시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했다.


"그러니까, 형이 나한테서 도망가는 이유가 그런 이유는 아니면 좋겠어요."


무어라 답할 말을 찾지 못해 잠시 윤기가 혼란에 빠진 사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정국이 먼저 자리를 벗어났다. 그 자신의 말처럼, 정국은 이미 윤기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자라 있었다.





*





그날로부터 며칠이 흘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워크샵도 벌써 끝나가고 있었다. 난리 통이었던 여장 대회가 끝난 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술자리가 시끌벅적했다. 여장 대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석진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지운 후 남준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상태였다. 석진의 뒤를 이어 다른 직원들도 차례로 옷을 갈아입은 후 자리를 떴고, 종래에는 탈의실에 지민과 윤기 둘만 남게 되었다. 흰색 프릴 머리띠를 벗어 구석으로 던진 윤기가 얼굴을 구겼다.


"아, 여장 대회 미친 거 아니냐."

"그러니까요. 남준 팀장님 너무해……."


지민과 윤기가 한 차례씩 말을 주고받았다. 치렁치렁한 메이드 복은 갈아입는 과정도 상당히 귀찮은 축에 속했다. 김남준 진짜 죽일까? 레이스 카라를 떼어내던 윤기가 자못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지민이 윤기를 따라 어정쩡하게 구석으로 머리띠를 던졌다. 분홍색과 흰색이 섞인 머리띠였다.


"아, 맞다. 근데 정국이 인기 많더라고요."

"뭐가?"


뜬금없는 말에 한쪽 스타킹을 끌어 내리던 윤기가 동작을 멈췄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지민은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지난번에 새로 들어온 신입 인턴 애가 정국이한테 고백했던 거 모르세요?"

"몰라."

"그때 난리도 아니었어요. 걔가 정국이한테 같이 영화 보러 가자고 했는데, 정국이가 단박에 거절해서 애 울고……."


그렇구나. 마저 스타킹을 벗은 윤기가 원피스를 휙 벗어 소파 구석에 올렸다. 아, 먼지! 지민이 꽥 소리를 질렀다. 윤기는 관심 없는 척 셔츠를 주워 입고 단추를 착실히 채워 나가고 있었으나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의 사이는 여전히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그 무언가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그러한 상황의 특성 때문에 정국의 단호한 행동이 꽤 마음에 들게 느껴졌다. 옆에서 버둥거리며 옷을 갈아입은 지민이 겨우 한숨을 돌리며 거울 앞에 서더니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현 대리님이 정국이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던데요. 자꾸 연락하고 그러던데."

"아, 그래."

"근데 이상하게 정국이가 지현 대리님만 단호하게 끊어내지 못하더라고요."


뭐? 지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기가 차려던 시계를 손에서 놓쳤다. 메탈 소재의 시계가 바닥에 떨어지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시계를 주워든 윤기와 지민의 시선이 거울 속에서 맞부딪혔다.


"왜?"

"뭐가요?"

"왜 단호하게 못 끊어내는 거래?"


지민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았다. 이 사람, 아닌 척해도 엄청 걱정하고 있구나.


"글쎄요."

"……."

"연애하고 싶은가 보죠, 뭐."


저 다 갈아입었어요. 태형이한테 가 있을게요. 무어라 우물거리는 윤기의 뒷말을 싹 잘라먹은 지민이 쌩하니 문을 열고 사라졌다. 윤기는 지민의 뒷모습에다 대고 짜증 섞인 한숨을 길게 뱉어냈다. 다 알려 줄 것도 아니면서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다시 생각해보니 최근 지현 대리가 별 연관도 없는 영상팀 사무실에 자주 들락날락 오갔던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전정국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밤이 깊었다. 생각지도 못한 단톡방의 야자 타임 사건으로 인해 신경이 곤두선 탓에 윤기는 쉬이 잠들 수 없었다. 아수라장이 된 단톡방을 어찌어찌 잘 정리한 후, 만취한 호석의 방으로 찾아가서 그가 조용히 잠들 때까지 온갖 주정을 묵묵히 들어주다 방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벌써 세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아, 진짜 얼른 가서 자야지. 벌써 몇 시냐…. 뻐근한 목을 좌우로 몇 번 꺾은 윤기가 카드키를 꺼내 들고 방문 앞에 섰다. 삐리릭, 하고 문이 열리는 찰나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윤기가 손잡이를 쥔 채 몸을 틀어 인기척의 근원지로 눈을 돌렸다.


어, 저건…?


반대편 복도에는 정국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요주의 인물 지현 대리가 함께였다. 윤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저도 모르게 손잡이를 놓쳤다. 문이 다시 철컥하고 잠겼다. 윤기는 다시 주머니에 카드키를 집어넣었다.


"어, 지금요?"


지현 대리가 무어라 말하자 정국이 놀란 얼굴로 지금이요? 하고 되물었다. 더 보고 있으면 참지 못하고 직접 면전에다 짜증을 낼 것 같았다. 일단 마음을 한 차례 수습한 윤기가 방으로 들어섰다.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에 휴대폰을 쥐고 있었으니 금방 받을 것 같았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음성 사서함으로…


지금 전화를 씹어? 이 새끼가…. 다시 짜증이 치솟을 무렵, 금방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기는 자리에 꼿꼿하게 선 채로 답신을 작성했다.



[잠깐 나올 수 있냐] am 3:36

[지금요?] am 3:36

[어] am 3:36



"그럼 지금이지, 나중이겠냐."


몇 차례 짜증스럽게 머리를 넘겼다. 홀로 고전하고 있는 윤기를 알 리 없는 정국의 다음 답신은 꽤 가관이었다.


 

[아 지금 지현대리님이 잠깐 보자하셔서요!] am 3:37



뭐 하냐니까 편의점에 간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편의점을 가는데 왜 전정국을 데려가. 이어진 답신 또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눈치는 개나 준 새끼…. 이마를 짚은 윤기가 한숨을 내쉬는 찰나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혹시 질투하는건가??] am 3:38



잠이 확 달아났다. 뭐야, 얘. 왜 이래. 마음을 전부 간파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민망해진 윤기가 황급히 부정하는 내용이 담긴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거울 속 비친 자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만은 숨길 수 없었다.



[나 필요한 거 같은데] am 3:40



결국, 자존심을 구긴 윤기가 답신으로 호실을 보냈다. 명백한 패배였다. 채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마치 승리자의 그것과도 같은 답신이 도착했다. 술을 잔뜩 들이켜고 싶은 기분이었다. 윤기가 자신의 얼굴을 쥐고 한창 자책하고 있을 때, 침묵을 가르고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체인을 빼내고 문을 열자 그 앞에는 시원한 미소를 띤 정국이 서 있었다. 솔직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정국이 두 팔을 벌렸다.


"배달 왔어요."

"뭐가."

"민윤기 씨한테 지금 나 필요한 거 같아서. 전정국 배달."

"아, 미쳤나. 왜 이래."


등을 돌리자 바로 정국이 달려들었다. 문이 천천히 닫혔다. 뒤에서 윤기를 감싸 안는 그 품에서 옅게 술 냄새가 났다. 아마 높은 텐션에는 술도 한 몫 제대로 거든 듯 싶었다. 백허그를 한 정국이 윤기의 목덜미에 입술을 대고 자꾸만 쪽 쪽 소리가 나도록 진한 입맞춤을 했다. 민망한 소리에 윤기가 진저리를 쳤다.


"야야, 하지 마."

"아… 귀여워, 민윤기."

"뭐?"


별것 아닌 말에 왜 이리 가슴이 뛰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반항심이 치밀어 고개를 젓자 되려 정국이 감은 팔에 힘을 더했다.


"나 봐서 좋죠."

"아니."


윤기를 돌려세운 정국이 무릎을 살짝 굽혔다. 어쭈, 같잖게. 윤기가 혀를 찼다. 같은 눈높이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정국이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조금 더 내밀었다.


"나 거짓말하는 거 싫어하는데."

"……."

"진짜? 진짜 아니야?"


잘생긴 얼굴이 너무 가까이 와 있었다. 윤기는 정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어 외면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것처럼 서로의 호흡이 간질간질 와 닿았다. 정국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귀여워서 어쩌지, 진짜…. 하얗고 곧은 얼굴의 선을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 덧그리던 와중, 잠깐의 침묵을 깨고 윤기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래, 거짓말이야."

"…어?"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윤기의 말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정국이었다.


"너한테 결국 사정없이 흔들려."


정국이 무릎을 곧게 폈다. 허공을 맴돌던 윤기의 시선이 똑바로 정국을 향했다. 만면에 걸렸던 미소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정국은 다시 한번 윤기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을 목도하며 깨고 싶지 않은 꿈속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아찔함을 느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정국."


입맞춤이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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