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은 산을 내려가는 내내 노래를 흥얼거리셨다. 그 소리가 퍽 듣기 좋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해가 지며 붉어진 하늘과 선선한 바람. 잔뜩 불러 노곤해진 배까지. 도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이렇게까지 신이 난 것은 처음이다. 앞으로도 자주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와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도착해 마당에 들어서자 낯선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뭐지? 내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도련님은 어디론가 재빨리 사라져버렸다. 어르신이 보시기 전에 곧장 방으로 들어간 거겠지. 인자하게 웃고 계신 어르신의 앞에는 누가 보아도 반듯하고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은 영감님이 서있었다. 곁에는 키가 작은 몸종 두 명이 함께였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막둥이 녀석은 인사도 없이 들어간 게냐?”

“아, 아마 뒷간이 급하시다고...”


나도 모르게 우물쭈물 둘러댔다. 어르신은 말 안 해도 알겠다는 듯 혀를 차며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셨다. 그 미소를 보고 안심한 나는 앞에 선 손님들에게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런데 그때 손님의 뒤에 서서 가려져있던 또 다른 사람이 보였다. 붉은 비단 치마에 검은 머리를 올려 묶은 어여쁜 여자애였다. 아마도 내 또래이거나 조금 더 어려 보였다.


“살펴 가시지요.”

“예. 내일 중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러 오겠습니다.”


막 돌아가는 참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에도 혼담인가? 그러니 도련님이 여자애 뒤꽁무니만 보고도 줄행랑을 치시지. 늘 이런 식이다. 온갖 집안의 어르신들이 도련님과의 혼담을 나누기위해 굳이 어여쁘게 꾸며 놓은 딸을 데리고 행차하시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련님은 한 번도 제대로 얼굴을 비친 적이 없다. 마치 여자라면 치를 떠는 것처럼 굴었다.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럴 때면 혹시라도 향숙이의 말이 진짜인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도련님이... 고자일지도...


“참 잘생겼구나.”

“네?”


예상치 못하게 나를 향한 칭찬에 놀란 내가 주춤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객 어르신께서 허허 웃으며 손을 내저으셨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나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뒤에 선 여자애는 더욱 제 아버지의 등 뒤로 숨으며 크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훔쳐보았다. 의아했지만 인사가 더 이상 길어지진 않았다. 곧 손님들이 돌아가자 어르신은 뒷짐을 진 채 안방으로 향하셨다. 그리곤 발걸음을 얼마 떼시기도 전에 슬그머니 물러나려던 나를 부르셨다.


“진영이 올해 나이가 몇이지?”

“열여덟입니다.”

“많이 컸구나. 다 컸어.”

“하하...”

“제대로 자란 것 같아 보기가 아주 좋구나.”


어르신이 이토록 직접적으로 칭찬을 해주신 일은 없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기도 전에 몸을 돌려 안방으로 돌아가는 어르신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나도 반드시 저런 어른이 될 것이다. 머슴살이 인생라고는 해도 저렇게 따뜻하고 인자한, 도련님이 빼닮으신 성품을 어른이 되기 전에 꼭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소망은 여전했다.


저녁 준비로 바쁠 주방 일손을 돕기 위해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다. 주방 앞에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모르는 향숙이가 서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폴짝폴짝 뛰어서 다가온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또 무언가 시끄러운 소식을 전해줄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도련님과의 외출과 어르신의 칭찬 덕분에 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무슨 소리를 하든 조금 상대해 주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얘 진영아! 참말로 잘 됐다. 그치?”

“뭐가?”

“혼담 말이야. 나는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단다.”

“혼담?”

“들어오면서 못 봤니? 그 어여쁜 아가씨.”


아가씨라면, 좀 전에 그 손님? 향숙이는 손뼉을 마주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옷소매를 쥐고 이리저리 흔들기까지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련님은 분명 인사조차 하지 않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어르신이 무조건으로 허락을 해주실 거야.”

“도련님은 관심이 없으시던데.”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본 향숙이가 혀를 차며 제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얄미워 죽겠다는 듯한 태도다. 어리둥절하게 부른 배만 연신 문지르며 아무 것도 모르겠으니 어디 더 떠들어보라는 얼굴로 기다리는 나에게 빽, 소리를 지른다.


“너 말이야 너! 네 혼담을 얘기하는 거 아니겠어?”

“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정말 하나도 아는 게 없냐며 나를 채근한 향숙이가 이것저것 떠들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신이 났는지 닭 부리 같이 뾰족한 입으로 와다다 말을 뱉어냈다. 나는 모든 이야기를 꿈처럼 듣고 서있었다.




근방에도 황씨 가문 못지않은 양반 가문은 많다. 오늘 찾아온 손님은 그 중에서도 꽤 이름을 날리는 ‘나’씨 가문 댁이었다. 늙어서 낳은 막내딸의 미모가 향기를 머금은 꽃과 같아 고을 남자들의 청혼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단다. 잘은 몰라도 향숙이의 표현에 따르면 그랬다.

나씨 어르신은 근심 걱정이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이대로 혼기가 차버리면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제 소중한 막둥이 딸이 다른 양반 댁 며느리로 들어가 고생할지도 모르게 생겼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시집을 보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처음에는 은근슬쩍 민현 도련님과 연을 맺으려고 애써보았다고 한다. 황씨 어르신 댁이라면 믿고 제 딸을 보낼 수도 있다고 여겼을 테지. 하지만 도련님의 꾸준한 혼담 거절은 고을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으므로 곧 생각을 바꾸셨다.


“몸종이라두 똑똑하고 양반가문 출신인 네가 기둥서방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니. 어르신은 딸내미랑 같이 살며 눈치 볼 일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너는 몸종 신분을 벗어나 나씨 집안 식구가 되는 거란다. 어머니도 모시고 가게 될 거 아니니.”

“확실한 거야?”

“그래. 지금도 주방에선 그 얘기로 떠들썩하지 뭐야. 내가 끼어들 틈도 없어 밖으로 나와 버렸어.”


허풍이 섞여있을 지는 몰라도 혼담 자체는 사실인 것 같았다. 향숙이의 말을 들은 후로는 자꾸만 씰룩거리며 올라가는 입 꼬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혼인을 하는 일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어여쁜 아가씨나 가족을 이루는 것에 아직 큰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다. 다만 내가 그런 일을 계획할 만큼 어른이 되었다는 사실과, 나로 인해 어머니가 고된 집안일에서 손을 뗄 수 있게 되리란 것이 기뻤다.

좀 전의 말씀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어르신은 분명 나의 혼인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어머니는 별다른 말이 없으셨다. 내 앞에선 일부러 말을 아끼시는 것 같았다. 잠자리에 누운 뒤에도 가슴이 뛰어 잠이 오질 않았다. 잠에든 어머니의 거칠어진 손과 얼굴로 비치는 달빛을 들여다보았다. 다 죽어가는 나를 살려주신 어머니를, 이제는 내가 구해드릴 수 있으려나.


잠을 설쳤음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몸을 씻었다. 화창하고 조금 시리기까지 한 산바람을 들이쉬며 계곡 물에 첨벙 빠져버렸다. 주변에 보는 이가 없기에 망정이었다. 누군가 새벽녘에 찬물에 들어가 몸을 닦는 나를 보았더라면 미친놈이 있다며 기겁을 했을 것이다.

몸이 마른 뒤에는 어르신이 주셨던 가장 아끼는 옷을 꺼내 입었다. 머리는 뒤로 빗어 이마가 보이도록 단정하게 정리했다. 어머니는 나를 말리지 못하겠다는 듯 웃으며 천천히 등을 쓰다듬어 주셨다.


“진영아. 너무 무리하지 말았으면 하는데...”

“아직 모르는 일인걸요. 괜찮아요, 어머니.”


어머니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이 싫어 애써 말을 돌렸다. 오늘도 날씨가 참 좋으니 삼촌들을 따라가서 열심히 일하고 오겠다며 어머니의 거친 손을 꼭 잡았다. 어른신 앞에서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분명 장가를 갈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어르신을 만나기 전인데도, 나는 이미 어머니께 처음으로 제대로 된 효도를 해드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침밥을 잔뜩 퍼먹고 삼촌들의 뒤를 따라 집안 곳곳을 청소했다. 손님이 오늘 다시 오신다고 했으니 이렇게 구석구석 청소하는 거겠지? 평소와 달리 힘 조절이 안 되어 빗자루를 휘두를 때마다 먼지가 날리자 핀잔과 함께 머리를 쥐어박은 삼촌들이 은근히 나를 놀렸다.


“진영이가 벌써 장가들 나이가 되었나?”

“녀석도 참. 키가 이렇게 컸는데 여태 몰랐단 말이야?”

“나는 몰랐지. 애기 꼬추일 때만 목욕을 해봐서 그런가.”

“삼촌...”


주먹으로 콩, 삼촌들의 배와 팔뚝을 때렸다.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에 부딪히자 힘이 모자란 내 손만 아팠다. 삼촌들의 호탕한 웃음이 마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때. 애기 꼬추도 어른 꼬추로 다 컸나?”

“아이참.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구요.”

“벌떡벌떡 잘 서냐는 말이지.”

“서긴 뭘 서요.”

“어휴 이 녀석아. 단단하게 잘 서야 애도 낳고 마누라한테 사랑도 받지.”


서로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은 삼촌들이 다시 한 번 웃는다. 침까지 튀겨가며 웃어대는 통에 나는 고개만 갸웃거리며 괜히 허리께를 문질러봤다. 삼촌들이 말하는 고추라면... 이미 여러 번 단단해졌었다. 고양이의 저주를 받았을 때가 가장 심했다. 도련님의 것도 곧잘 그렇게 됐었지.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게 왜 중요한 건데요?”

“안서면 고자라서 그렇지.”

“첫날밤을 치러보면 안다. 혼담이 확정되고 나 이 삼촌들이 전부 다 아주 확실하게 가르쳐주마.”

“그래. 걱정일랑 말아라. 우리가 고을에서 제일가는 고추들 아니냐.”


걸걸한 목소리로 충고하며 내 어깨를 둘러맨 삼촌들이 너도나도 제 것이 더 단단하고 훌륭하다며 말싸움을 시작했다. 나는 멍청하게 빗자루만 받아든 채 바보 같은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진영이가 나가면 도련님은 어쩌나.”

“아이고. 그러고 보니 이제 소일거리는 다 향숙이가 해야 하나?”


깜짝 놀란 삼촌들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제서야 머릿속에서 빠져나가 있던 도련님을 떠올렸다. 너무 긴장을 해 잊고 있었다. 곁에서 벗이 되어주어야 할 내가 집을 나가고 나면 도련님은 혼자서 어떻게 지내실까. 그런 생각을 하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하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은 일은 하는 동안 도련님께는 반드시 여쭈어 본 뒤 혼인을 결정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가장 아끼시고 하나뿐인 몸종으로 여겨주시는 분인데. 아무 말 없이 덜컥 혼담을 받아들이면 섭섭해 하실 것이다. 분명 많이 놀라시겠지. 어르신이 따로 언질을 해드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바보처럼 마음을 졸였다. 왜 그렇게 조마조마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도 중요했지만 도련님도 반드시 행복하길 바랐다.


청소를 마친 뒤에는 깨끗하게 씻은 것이 무색할 정도로 땀이 났다. 도련님께 간식 상을 드릴 시간에 맞춰 대강 땀을 씻어내고 옷매무새를 만졌다.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언급해 주시면 좋으련만. 차마 내 입으론 말문을 열 수 없을 것 같았다. 연습을 해보려 해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도련님, 저... 혼인을... 나씨 어르신 댁 아가씨와...


꿀꺽. 마른침만 삼키며 주방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가벼운 상을 받아들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모들은 평소보다 훨씬 깔끔하고 보송해진 얼굴로 휘휘 주방을 둘러보는 나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 했다. 이모들도 도련님만큼이나 섭섭한 걸까? 그 틈에 낀 향숙이도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 가장 수상했다. 어머니는 주방에 계시지 않았다. 빨래라도 하러 가신 건가. 은근슬쩍 주변을 살피며 주방을 빠져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향숙이가 쪼르르 내 뒤를 따라 나왔다.


“도련님 방에 갈거니?”

“그럼 이거 들고 어딜 가겠냐.”

“그렇구나...”

“오늘은 빨리 드리고 돌아올 거야. 손님 맞을 준비도 해야 하고.”

“진영이 너, 아직 못 들었구나?”


걸음을 재촉하는 나의 뒤를 졸졸 쫓던 향숙이가 평소답지 않은 조심스런 투로 말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언가 이상했다. 말이 많은 녀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머뭇거리며 내 팔을 잡기까지 한다. 온갖 호들갑을 떨던 어제와는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네 혼담 말이야.”

“어.”

“그게...”

“빨리 말해. 팔 아파.”


짜증 섞인 목소리에 기가 죽었는지 한 발자국 물러선 향숙이가 제 치마를 움켜쥔다. 더더욱 답지 않은 모습이다.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혼담이 왜. 무슨 일인데?”

“그거... 못하게 되었단다.”

“뭐?”


혼담이 없던 일이 됐다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세상이 무너질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단지 바람이 잔뜩 들었던 허파에서 한 번에 공기가 다 빠져버린 듯 허무했을 뿐이다. 하긴. 그렇게 어여쁜 양반 댁 아가씨와 풍족한 생활이 한 번에 손에 쥐어질 일은 아니지. 그저 평소의 머슴으로 돌아가 황씨 어르신 댁을 섬기면 될 일이다. 하지만 나의 머리가 뒤집히게 한 것은 바로 뒤에 이어진 말이었다.


“도련님이 당장 무르라며 찾아가서 거절을 했단다. 어르신도 어쩔 수 없으셨던 모양이야. 정말 이상한 일이지...”


하마터면 손에 쥔 상을 그대로 바닥에 떨굴 뻔했다. 머리끝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대로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을 지켜본 향숙이가 잔뜩 겁에 질렸다. 어마어마한 정신적 충격에 제정신이 아니게 된 나는 씨익씨익 거친 숨을 쉬었다. 너무 화가 났다.

그대로 몸을 돌려 쿵쿵 발을 굴리며 도련님의 방으로 향했다. 더 이상 뒤를 쫓아오지 못한 향숙이는 제 자리에서 입만 틀어막은 채 어쩌나, 어쩌면 좋나, 하고 중얼거렸다. 나와 도련님이 걱정이 된 듯하다. 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써줄 여유도 없었다.


나는 분명히 도련님과 상의하여 결정을 하고자 했다. 혼담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다면 미리 좋게 설명을 해주셔도 되었을 일이다. 그동안은 묻지 않은 것까지 잘도 말해주셨으면서. 어제까지만 해도 자상하게 제 것이라는 증표까지 달아주신 도련님이 어쩌면 이렇게 냉담한 행동을 하실 수 있을까. 나와 어머니의 삶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에도 나에게 언질도 없이 직접 혼담을 물러 버리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처럼 열이 올랐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온 건지는 모르겠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모양이다.


평소대로라면 인사와 함께 허락을 받고 열었어야 할 방문을 발끝으로 밀어버렸다. 덕분에 홀랑 열려버린 문 안에서 점잖게 책을 읽고 있던 도련님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도련님이 손에 쥔 것은 어제 함께 저자거리에 나가 사온 책이었다. 한 손으로 들고 있던 간식상은 대충 밑에다 내려뒀다. 거칠게 숨을 쉬며 땅을 노려보고 있는 나를 놀란 눈으로 지켜본 도련님께서 책을 덮어 상 위에 얹어두셨다.


“왜 그래 진영아.”

“어떻게... 도련님께서... 저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자꾸 거친 숨이 섞이며 목소리가 꺾였다. 도련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오셨다. 하지만 그 걸음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오늘은 품에 안아주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나의 속을 모르는 도련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휙 고개를 들며 도련님을 노려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야. 조금만 진정해봐.”

“도련님... 도련님께서... 제 혼담을...”


뒤까지 말하기도 전에 도련님의 손이 굳었다. 동시에 걱정스럽게 나를 들여다보던 흰 얼굴도 경직되었다. 조금 냉랭하기까지 했다. 그것 때문에 더욱 서러워진 나는 얼른 도련님의 어깨를 밀쳐버렸다. 간이 배 밖도 아닌 집 밖까지 튀어나온 짓이었다. 하지만 정말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진영아.”

“저한테 먼저 말씀 해주셔도 됐잖아요.”

“이유가 있었어.”

“저는... 도련님만을 섬기고, 그토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지만 당장 도련님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는 싫었다. 힘을 주어 참아보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아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련님은 난처하다는 듯 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삼촌들만큼이나 강한 힘이었다. 도련님이 이토록 손아귀 힘이 강하셨던가. 무심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몸부림을 쳤다. 무어라도 말해야 속이 시원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하얘져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것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거야?”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아무것도...”


순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말해선 안됐다.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고 도련님 때문에 가슴 깊이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기어코 도련님의 팔에서 벗어난 나는 잔뜩 뒤로 물러섰다. 도련님은 계속해서 냉랭한 표정을 지으셨다.


“내가 뭘 몰라?”

“고자주제에!”


입에서 뱉어진 두 글자를 나 스스로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단지 무어라 욕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게 없어 튀어 나온 말이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흘렀다. 씨익 거리며 숨을 몰아쉰 나는 순식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미친 듯이 달렸다. 집 마당을 가로지르고 대문을 빠져나가 뒷산까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엄청나게 달려갔다.


내가 무슨 소릴 한 거지. 무슨 짓을...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겼던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졌다. 딱히 갈만한 곳도 없다. 그저 깊고 깊은 산 속으로 계속해서 달려 나갔다. 


도련님은 바보. 도련님은 고자야! 이런 내 속도 헤아려주지 못하다니, 정말 바보 멍청이 고자라고! 속으로 마구 외쳤다. 나뭇가지에 기대어 쉬고 있던 작은 새들이 내 움직임을 피해 이리저리로 날아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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