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칠천자 넘습니다... 시간 여유로울 때 보십시오...)















통제구역이 금세 긴장감으로 채워진다. 자신의 앞을 막아선 제 센티넬들을 보고 나서야 여주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센티넬들 사이에 고요한 신경전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네 사람과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시키듯 앞을 막아선 셋을 보며 여주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도영의 손을 한 번, 그리고 뒤이어 재현과 정우의 손을 또 한 번씩 잡았다놓은 여주가 서서히 가이딩을 풀어냈고 날서 있던 센티넬들의 파장이 본능적으로 가이딩을 흡수하며 서서히 예민함을 덜어내고 가라앉는다. 


그리고 도영과 정우의 사이를 살짝 파고들자 짧게 한숨을 내쉰 도영이 자연스레 옆으로 몸을 틀고 정우 역시도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며 자리를 내어주었다. 다시금 여주가 저들의 앞에 서는 걸 물끄러미 응시하던 네 사람이 너무도 익숙하다는 듯 여주의 양 옆과 뒤를 지키는 셋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가이드에게 센티넬은 약할 수 밖에 없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전제지만 저들에게는 조금 낯선 풍경이라 여러 의미로 신기했다. 가이드 없이 저들처럼 팀으로 움직이는 센티넬들은 꽤 있었다. 생사를 함께 하다보니 서로가 소중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저렇게 단 한 사람만을 지키기 위해 뭉쳐있는건 꽤 낯선 광경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이드 배치에 대해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십년전과 달리 지금은 가이드가 그리 희귀한 존재도 아닐뿐더러 당신들에겐 지금 가이딩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걸 알고 있습니다."


"드림이에요"


"예?"


"당신들이라고 부르는 것보단 이름이 더 낫잖아요. 그리고 우리 팀 이름이 드림이고"


"우리가 한 팀으로 전쟁터 뛰어다닐 때 다들 그렇게 불렀어요. 팀 이름을 지을 때 우리보고 지으라고 했었거든요"

 




전쟁사 기록에 그들이 한 팀으로 서로를 가족처럼 여기며 전쟁터를 누볐다는 얘기는 있었으나 팀의 이름에 대한 건 없었다. 센터는 군 체제를 표방했으나 사령부 내에서 한 팀으로 묶이는 이들은 종종 팀 네임이 있곤 했다. 저들 역시도 각 대대를 이끄는 직급으로 진급하기 전까진 알파팀으로 불리곤 했었으니까. 


팀 알파. 간단한 단어였지만 그 단어가 주는 파급력은 꽤나 컸다. 자연스레 한 팀일 시절을 떠올리던 여주가 나란히 앉아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네 사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팀 드림이라. 저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은 이름이라 그런가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잘 어울리는 팀 네임입니다. 어쨌든 가이드 배치는 최대한 빨리 진행될겁니다. 팀 드림의 센티넬 등급을 아직 확실힌 알수가 없지만 대략적으로 봤을 땐 가이드도 고등급이어야 할 거 같아서,"


"누나가 해주면 되잖아요"


"...예?"

 




동혁의 목소리에 조근조근 설명을 이어가던 여주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호칭이 당황스러워 지금까지 이어왔던 평정심을 단 번에 잃은 탓이다.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호칭에 당황하는 여주를 한 번, 그 호칭을 내뱉은 동혁을 본 재현과 정우가 어이없음을 그대로 드러냈다.


센터에서 여주를 향해 편하게 누나라고 부르는 건 저들 뿐이다. 2사단장이라는 위치도 그렇지만 센터 내에서 측정불가 등급의 가이드는 여주가 유일했기에 여주를 쉽게 대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마냥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알파팀의 팀장이었기도 했고 현재 사단장까지 하고 있으니 깍듯이 대하는 건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오래전부터 함께 했던 저들만이 불러왔던 호칭을 아무렇게나 침범하는 태도에 재현의 미간이 보기좋게 찌푸려졌다. 이십년전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던 뭐했던간에 제 눈엔 어린 센티넬일 뿐이다. 등급이 뭐든 이능이 뭐든 눈 앞의 낯선 센티넬이 제 연인에게 개수작 부리는 걸 계속 참아줄 수는 없어서

 





"사령부 2사단장 이여주 대령님입니다. 예의 갖추십시오."

 




금방이라도 저들을 벽으로 쳐박아 던질 것 같은 표정과는 달리 애써 예의를 지키는 말투에 동혁이 터지려던 웃음을 삼켰다. 제노 말대로 어차피 저들이 이십년 뒤의 미래에서 눈을 뜬 이상 이 곳 상황에 적응해야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서 저들을 깨운 가이드에게 조금이나마 더 호감을 얻어보자 싶어서 내뱉은 호칭일 뿐이다. 어차피 이십년의 시간만 따지면 이 곳의 웬만한 사람들보단 저들이 더 나이가 많겠지만 죽을 때 그 나이 그 상태 그대로 다시 살아났으니 그런 계산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서


그리고 약간의 호승심도 있었다. 통제구역에 들어온 뒤로 줄곧 저들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교묘하게 드러내고 있는 저 센티넬들을 보니 본능적인 승부욕이 갑자기 생겨나서

 




"우리는 계급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요"


"누나라고 부르면 안 돼요?"


"그 호칭은 좀... 팀 드림과 나는 이십년의 간극이 있지 않습니까."

 




본인이 깨웠으니 조금이라도 더 우리에게 잘해주려고 할 줄 알았는데. 이미 이능으로 도움을 받았으니 끝이라 이건가? 정말 저 사람은 우리를, 제노를 이용만 해먹으려고 깨웠나. 고작 그 호칭이 뭐라고 이십년을 들먹이며 선을 긋는 말투에 재민이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래봤자 그 간극동안 죽어있었던 거나 다름없는데. 꼭 그런 것도 따져야 되나봐요? 얻을 건 다 얻어서 그런가?"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면 미안합니다. 워낙 계급이나 직급으로 불리다보니 그런 호칭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혹 마음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허릴 숙여 사과하는 여주를 보며 정우는 결국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여주가 정말 단순히 병력을 늘리기 위해 저들을 깨운 게 아닐거라고는 생각했다. 얘기를 하면서도 묘하게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금껏 여주가 해온 선택이 잘못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제 연인이 낯선 센티넬들에게, 그것도 딱 봐도 저들보다 어린 센티넬들에게 허리까지 숙여가며 사과하는 모습을 보니 심사가 뒤틀릴 수 밖에. 대체 우리 누나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 허리까지 숙여야 돼?


마음 같아선 그냥 여주를 안아들고 이딴 통제구역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상관의 지시가 없는 이상 제가 먼저 움직일 수는 없었다. 지금은 단순히 연인사이로 이 곳에 서 있는 게 아니니까. 뒷짐을 진 손으로 꽉 주먹을 쥔 정우가 애써 화를 삼켰다. 

 





"가이드 해달라는 거 그냥 한 말 아니에요. 제노랑 우리도 나름 고민을 한 건데"


"그렇습니까"


"그 쪽, 아니 누나가 우릴 깨웠잖아요"

 




제노의 말에 여주가 단번에 대답하는 것 대신 입술을 말아물었다. 제노의 말대로 제 욕심으로 저들을 깨웠다. 제 소속 부대로 저들을 소속시키는 것도 어쨌든 자신이 깨운 센티넬들이라 자신이 책임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 가이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팀 가이드라는 걸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고, 본인이 온전히 감당하는 센티넬은 도영과 재현, 그리고 정우까지 그 셋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


단순히 센티넬과 가이드로써의 관계, 한 팀으로써의 관계를 넘어선지 오래였다. 진급과 동시에 알파팀이라는 이름을 지웠음에도 여전히 숙소를 같이 쓰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센터 내에서 넷의 관계는 연인으로 공공연하게 알려져있었고

 




"이여주 대령님은 팀 가이드 안 하십니다."


"도영아-"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도영이 팔을 뻗어 허리를 끌어안았다. 상관과 부하의 직급으로 서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여주의 센티넬로써 서 있는 것도 맞으니 더 이상 여주가 저들에게 휘둘리는 걸 보고싶지 않아서 그랬다. 우리가 왜 팀 체제를 버리고 각자 진급을 했는데.


측정불가 등급의 가이드이자 멀티가 하나의 팀만 관리하는 게 말이 안 된다며 파면된 전 센터장은 여주에게 많은 것들을 요구했고 여주는 혹여 저들이 작전 현장에서 피해보는 게 있을까봐 저들에게 숨겨가며 본인 혼자 버텨왔던 시간이 있었다. 뭣도 모르고 한 팀이라서 너무 좋다고 웃기만 했던 저들의 뒤에서 여주가 무슨 고생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권력이 필요했고 힘이 필요했고 저들을 따를 사람들이 필요했다. 윗선들 입맛대로 맞춰주고 구를바엔 차라리 저들이 윗선이 되고자 했다. 아직 사령부 내에는 여러 센티넬팀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팀 알파는 이제 이름만 남았을 뿐이다. 저들이 직접 저들 손으로 팀을 버렸으니까

 




"왜 안 하는데요? 지금 누가봐도 팀 가이드같은데"


"그 쪽들이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관계도 아닐 뿐더러 그걸 그쪽들에게 설명할 의무 없습니다. 소속과 계급 관련으로 안내 될때까지 쉬고 있으십시오"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되는데요"


"대령님 지시 있을 때까집니다. 오늘 안에는 다 처리될테니 기다리십시오"

 




원래 말투가 저래? 민형이 재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감각이 예민한 이들이라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선명히 꽂혀들었지만. 


도영은 통제구역에 들어선 뒤로 내내 심기가 불편했다. 이 곳에 발을 딛게 될 거라는 생각도 한 적 없지만 묘하게 저 어린 센티넬들에게 약하게 구는 듯한 여주를 보고 있으니 자꾸 심사가 뒤틀렸지만 참았다. 어쨌든 저들도 곧 부대원으로 소속될 테고 전쟁터에서 같이 뛰어야 할 동료가 될테니까. 


여주에게 가이딩을 바라는 센티넬병들은 많다. 가이드 등급이 높은 멀티다보니 다른 가이드들과 다르게 파장의 모양새가 센티넬 파장과도 비슷해서 가이딩을 받을 때 더 편하고 흡수가 잘 되는 부분이 있다.


본능적으로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약하니까 본인의 파장과도 잘 맞는 가이딩이라면 당연히 더 끌릴 수 밖에 없겠지.


하지만 센터에서 보낸 시간과 수많은 경험으로 인해 계급이 워낙 높기도 하고 여주 옆을 늘 지키고 있는 저들이 있다보니 대부분의 센티넬병들은 여주의 가이딩으로 만들어진 대체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여주의 가이딩을 느낀다.


사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런 대체제로도 여주의 가이딩을 등급낮은 센티넬병에 불과한 그들과 공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현실과 타협한 게 그 정도였다.  


제 귓가로 들린 여린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한 도영이 여전히 여주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살짝 숙였다. 가자 여주야. 귓가에 아주 작게 속삭인 목소리가 간지러워 저도 모르게 움찔한 여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센티넬들의 기싸움엔 가이드가 끼지 않는 게 낫다는 걸 오래된 경험으로 학습한 여주는 팀 드림의 넷과 팀 알파의 셋 도합 일곱의 센티넬 파장 위로 느릿하게 가이딩을 풀었다.  

 




"일단 팀 드림의 자리부터 만들어내는 게 우선이라 서류처리가 끝나는대로 콜 보내겠습니다. 그럼 푹 쉬십시오"

 




여주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 이상으로는 기다려줄 생각도 없다는 듯 정우가 여주와 재현의 손을 붙잡고 이능을 썼다. 그와 함께 순식간에 눈 앞에서 네 사람이 사라진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주가 서 있던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재민이 고갤 돌렸다. 


뚫어져라 여주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고 있는 제노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인 재민이 몸을 옆으로 기울이며 동혁의 어깨에 턱하니 턱을 괴었다. 

 





"팀가이드는 원래 저런건가"


"글쎄"

 




낮게 울리는 재민의 목소리에 짧게 대답한 동혁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노가 시간을 돌려주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받아내는 게 당연한 일이고.


그 사람이 다급히 통제구역을 벗어난 뒤로 저들끼리 이 상황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주고 받았다. 정말 그 사람 말대로 지금이 미래라는 것, 그리고 저들은 가이딩을 받고 눈을 떴다는 것, 그래서 저들에겐 그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까지.


옆에 센티넬이 있을 거라는 예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그 사람을 싸고 돌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들이 한창 전쟁터를 뛰어다닐 땐 가이드가 워낙 부족하기도 했고, 가이드와 센티넬의 애정관계를 직접적으로 접할 일도 많지 않았어서 더 그랬다. 


말없이 눈만 깜빡이고 있는 제노를 보던 동혁이 아 모르겠다- 하며 뒤로 털썩 드러누웠고 갑자기 드러누운 동혁을 내려다보던 재민과 민형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다. 저 역시도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민형을 보며 피식 웃은 재민이 동혁의 옆에 나란히 누웠고

 




"우리보고 전쟁터 나가라는 건 아니겠지"

 




민형의 말에 동혁은 말없이 천장만 응시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전쟁과 반정부군은 대체 언제쯤 사라지나. 

 


















집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한숨을 내뱉은 재현이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넘겼고 정우는 빈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여전히 제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도영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여주가 그의 품에서 빠져나옴과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여주에게 꽂혀들었다. 

 




"누나. 걔네 팀가이드 해줄 거 아니지"


"...글쎄"


"아니라고 해야지이이"

 




애매한 대답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정우를 보며 여주는 말을 덧붙이지 못했다. 전 센터장이 모든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팀 가이드라는 이름 하나로 착취당하듯 가이딩을 해야했다. 워낙 흠이 많은 인간이었고 그래서 센터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로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팀가이드라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을 깨운 건 자신의 가이딩이었고, 지금이 미래라는 걸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그들에게 시간을 되돌려달라 부탁까지 했다. 시간을 되돌려주지 않았다면 김도영을 이렇게 다시 마주할 일도 없었을텐데. 사지 멀쩡하게 서 있는 김도영을 힐끔거린 여주가 입술을 말아물었다.


팀 가이드는 어려워도 그냥 상사로써 방사 가이딩 정도로는 챙겨줘도 될거 같은데. 제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런 것 뿐일테니까. 


고민하고 있는 듯한 여주를 알아차린 재현이 통제구역에서 저들을 경계하며 살피던 넷의 얼굴을 곱씹었다. 앳된 얼굴들이라고 하나 그들도 센티넬이다. 몇십년 전 과거에 살았다는 건 이젠 중요하지 않다. 그들도 센티넬이라는 것, 그리고 여주의 가이딩을 받았다는 게 중요하니까

 




"일단 그건 차차 생각ㅇ,"

 




대령님. 제주에서 온 긴급 전언입니다. 여주가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노크소리와 함께 부관의 목소리가 넘어온다. 여주가 직접 문을 열기도 전에 이능을 쓴 재현 덕분에 문이 벌컥 열렸고 그 너머로 꽤 다급한 얼굴의 부관이 서 있다. 문이 열리자마자 곧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부관이 여주에게 서류 하나를 건넸다. 

 




"센터장님 쪽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결국... 중위는 일단 자리 지켜. 내가 지시 내릴 때까지 제주에서 온 전언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


"예"

 




빠르게 경례를 하고 돌아서는 부관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서류를 살피던 여주의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져가고 그 옆으로 세 사람이 다가섰다. 현 센터장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센터의 모두가 알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전쟁이 터지자마자 제주로 제일 먼저 대피시킨 것이었는데

 




"병력 데리고 부산에 넘어가있는 국장님이 임시 센터장 역할 하실거래."


"뭐? 김 국장님이?"


"김 국장님이 부산에 있다는 건 제주 경계는 1사단장님이랑 3사단장님이 지키고 있나보네"


"응. 지부 상황이 이렇다는 건 결국 시티는 우리가 어떻게든 지켜내야된다는 소리야"

 




시티에 위치한 중앙센터를 제외한 지부는 제주 하나 뿐이다. 다른 곳들은 지부라고 하기엔 규모가 굉장히 작고 사무실 정도에 불과하다. 센터의 가장 중요한 컨트롤타워나 마찬가지인 센터장의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는 건 그 쪽 지부의 지원을 바랄 수는 없단 소리다. 


시티는 결국 저들의 손에 달린 것과 다름없는 상황임을 단번에 정리한 여주가 손에 쥔 서류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린 여주가 현재 자신의 부대와 세 사람의 부대가 있는 위치를 확인한 뒤 옆에 놓인 호출기 버튼을 눌렀다. 


여주가 호출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세 사람이 차고 있던 워치 화면에 불이 들어오고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짧은 한숨을 삼키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앉아있는 여주의 뒤에 익숙하게 서서 자리를 잡은 세 사람이 저들 부대원들의 위치들이 떠 있는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붉은 점들이 잔뜩 찍혀있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각자 부대원들의 위치를 확인하던 그 때 호출기를 잡은 여주의 목소리가 워치에서 흘러나온다. 

 




"전 부대원에게 알립니다. 지금부터 별도의 지시가 있기까지 센터 주변 및 시티 경계태세 돌입합니다. 국경 부대원들은 가이딩 수치 확인해서 교대 타이밍 놓치지말고, 전 부대원 가이딩 수치 잘 확인하도록 합니다."

 




지시를 내리는 단정한 목소리를 말없이 듣고만 있던 이들의 시선이 다시금 여주에게 향했다. 지부 상황이 좋지 않다. 여기 상황이라고 해서 더 나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되면 여주가 끌어안을 부담감만 더 늘게 된다.


저도 모르게 통제구역의 센티넬들을 곱씹은 도영이 머리를 쓸어넘기며 여주의 어깨를 다독였고 가장 먼저 제 부관에게서 받은 메세지를 확인한 재현이 가볍게 목을 풀며 여주를 불렀다. 누나

 




"N213에 부대원들 무사 도착 했다고 곧바로 경계태세 들어갔다고 연락왔어"


"응. 알겠어"

 




이들이 더 이상 제 집무실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한 여주가 곧장 가이딩을 풀어냈다. 통제구역에서도 그렇고 줄곧 가이딩을 해 왔으니 이제 힘겨울텐데도 가이딩부터 챙기는 여주를 보며 한숨을 삼킨 재현이 허릴 숙였다. 순식간에 거리감을 좁혀온 재현의 입술이 여주의 입술 위로 짧게 닿았다가 멀어진다. 

 




"나 먼저 가볼게"


"응 조심해 재현아"

 




어깨를 으쓱인 재현이 메세지를 보낸 부관에게 콜을 넣으며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수색과 전투에 능한 부대원들이 많은 대대라 센터 주변에서 반란군과의 접촉이 있을 경우 재현의 부대원들이 가장 먼저 전방에서 싸울 수밖에 없다. 빠르게 사라지는 재현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여주가 제 손을 잡아오는 정우와 도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N213은 우리 애들이 많이 갔으니까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민간인들 대피는 금방 될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누나"


"그래. 대피하는 상황 생기면 일단 민간인들 데리고 센터 주변으로 대피시키라고 지시해. 경계태세 돌입하느라 센티넬들이 시티 밖과 인접한 지역에 많을테니까 그 안쪽으로 민간인들 데리고 가는게 맞아. 지금 민간인들 제일 많은 구역이 어딘지는 파악됐어 도영아?"


"C210구역에 제일 많고, 그다음이 T208구역이긴 해. N215구역 쪽에도 있긴 한데 215구역은 너무 시티 밖과 인접한 지역이라 208 안 쪽으로 대피시켰어."


"혹시라도 215구역에 여전히 대피 못한 민간인들 보이면 최대한 C210 안으로 대피하도록 안내하라고 하고"

 




각자 한 손을 맞잡고 가이딩을 이어가며 지시할 내용을 잊지 않는 여주를 보며 정우는 짧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곤 터지려는 한숨을 애써 삼켰다. 지금 이 현실이 가장 답답할 사람은 여주일테니까.


저마저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을 뻗은 정우가 여주를 품에 끌어안았다. 앉아있던 탓에 어정쩡하게 안긴 여주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우를 더 끌어안고 등을 다독이자 도영이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고생많다 우리 정우"


"누나만할까"


"아 정우야 나 이능 카피 좀"


"이능? 왜?"


"통제구역 센티넬들 데려와야해서"


"아..."

 




제 품에 쏙 안겨든 여주의 입에서 썩 듣고 싶지 않은 이들의 얘기가 흘러나온다. 내 품에 있으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놈들 얘기는 왜 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을 삼키며 여주 어깨에 이마를 마구 비비적거리던 정우가 고개를 들며 보드라운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경쾌한 입맞춤 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여주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고 웃는 얼굴을 보고나서야 겨우 마음이 놓인 정우가 여주의 손을 맞잡고 이능을 넘겼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초록빛이 반짝이다 사라지고 때마침 제 워치로 들어온 콜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여간 우리가 쉬는 꼴을 못봐요. 좋은 분위기를 깨트린 제 부관의 연락에 일부러 누나와 형 들으라는 듯 볼멘 소리를 중얼거린 정우의 머리를 도영이 웃으며 마구 흐트러트렸다. 

 




"얼른 가. 나도 곧 가봐야 돼"


"진짜 전쟁 끝나자마자 우리 휴가받고 어디 가서 좀 쉬자. 우리끼리, 우리 넷만. 다른 놈들 아무도 없이"

 




저들 넷을 강조할 때만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시선을 알아차린 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주는 찰나의 순간 날선 정우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세 순한 눈이 된 정우가 여주의 볼에 다시금 짧게 입을 맞추고는 눈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제 이능을 써 금세 눈앞에서 사라진 정우때문에 허공을 응시하던 여주가 제 손을 맞잡아 오는 도영의 손을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시간을 되돌렸고 3차 전투가 일어나지 않도록 213구역으로 부대원들을 보냈다. 


거기서 반란군들을 먼저 잡는다면, 그들의 꼬리를 물고 본거지를 먼저 칠 수 있을텐데. 만약 그렇게만 잘 된다면, 그래서 반란군의 우두머리를 먼저 쳐낸다면 도영이 쓰러지는 모습은 다시 보지 않겠지. 이 손을 다시 잃는 일은 없겠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어 그냥"


"...여주야"


"응?"

 




도영의 부름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본 여주가 갑자기 저를 끌어안는 손길에 말없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코끝으로 익숙한 향이 스치고 일정한 속도로 숨을 쉬는 가슴팍이 온전히 느껴진다. 김도영이 정말 살아있다는 걸 다시금 느낀 여주가 눈을 감고 도영의 품에 더 기대었다. 

 




"여주야. 악몽이 전부가 아닐거라는 건 알아."


"......"


"재현이도 정우도 다 네가 말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알거야. 나도 그렇고"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 여주의 시야를 채우는 건 도영의 옷자락이다. 저를 끌어안은 손은 여전했고 일정하게 숨을 쉬는 속도도 여전했다. 단지 달라진 건 일주일 전 과거로 돌아온 자신 뿐이다. 어설픈 자신의 변명을, 뜬금없는 이유를 무조건 믿기에 세 사람은 능력 좋은 센티넬들이다. 무언가 이상한 틈이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 

 




"하지만 네 선택을 믿기때문에, 우리가 믿는 건 너 하나라서 이번에도 네가 말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거라고 믿어"


"...응..."


"우린 그저 네가 혼자 힘들어하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야. 울어도 좋고 뭘해도 좋으니까 혼자 다 끌어안지만 마. 우리한테, 나한테 더 의지해도 돼"


"전에도 지금도 되게 의지하고 있어. 너희 아니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버티진 못했을거야"

 




많은 사람들이 포기해야 된다고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하는 순간에도 도영을 포기하지 못했던 건 그가 그만큼 단단하고 중심을 잡아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심이 되어주고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왔다. 그랬기에 그 누구도 잃을 수는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가면서까지도

 





"그럼 앞으로도 쭉 그렇게 해줘. 네가 해달라는 건 어떻게든 해내보일테니까"


"응"


"그 놈들한텐 굳이 마음주지 말고. 나 질투나"


"...아직 아무것도 준 게 없는데?"


"가이딩 해줄 거잖아 너"


"......"


"팀가이드까지는 몰라도 네가 그 센티넬들 가이딩을 책임질 생각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거기까지만 해줘. 책임감 거기까지만"


"......"


"어 어? 왜 대답이 없지? 이여주 대령 남자로는 우리 셋이면 충분할텐데"

 




품에서 여주를 떼어놓은 도영이 짐짓 진지함이 섞인 얼굴로 부러 목소리 톤을 높였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만큼 어떤 생각을 하는지 굳이 말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때가 있다.


이여주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 저들이 하지말라고 해도 여주가 그들을 가이딩 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도는 거기까지다. 가이드가 센티넬에게 베풀 수 있는 친절. 그리고 여주가 본인의 자리에서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부분까지만


도영의 말에 결국 웃음을 터트린 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웃으며 대답하는 여주를 보며 따라 웃은 도영이 아까부터 제 워치로 들어온 콜을 한 번 더 못본 체하며 여주를 품에 안았다가 놓았다. 이제는 정말 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더 이상 모른 체 할 수는 없어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콜해. 통제구역 센티넬들이 말 안 들어도 콜하고"


"걱정말고 가. 아까부터 네 부관이 콜 보내고 있잖아"


"...알고 있었어?"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총책 이여주와 중령 김도영의 사이로 돌아가야 한다. 아무리 저들끼리 마음을 주고 받는다 할지라도 지금은 전시니까. 


그래도 이대로 가기엔 아쉬우니까 여주가 한 걸음 물러선만큼 다시 다가선 도영이 허릴 숙여 짧게 입을 맞추고 물러섰다. 그리고 경례로 모든 말을 대신한 도영이 빠른 걸음으로 여주를 지나치고 집무실을 빠져나간다. 문이 닫히기 직전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도영을 보며 손을 흔들어주고 나서야 집무실은 온전히 이여주만의 공간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가득 차있던 그들의 존재감이 사라진 곳엔 공허함이 남았지만 그 공허함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여주는 다시 제 자리에 앉아 손을 움직였다. 팀 드림의 부대 편성을 해야 한다. 어차피 총책이 본인이라 제 승인만 있으면 되는 일이지만 자료를 남기는 건 필요한 일이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다. 서류 작업을 모두 끝내고 팀 드림의 보급품까지 챙기는 와중에 중간중간 부대원들의 보고를 받던 여주가 갑자기 울리는 진동소리에 저도 모르게 흠칫 어깨를 떨었다.


원래 손목에 차고 있던 워치를 통제구역에 두고 온 뒤 예전에 쓰던 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일을 하느라 잠깐 잊고 있었던 탓이다. 빛이 깜빡이며 화면이 켜진 워치를 손에 쥔 여주가 화면에 뜬 부관의 이름을 보자마자 콜을 연결했다. 어 왜

 




[대령님 N213 구역에서 전투 발발 보고 들어왔습니다. 정재현 중령님께서 곧바로 출정하셨습니다]


"전투 규모는? 민간인 사상자는 아직 없고?"


[예. 아직 사상자 보고는 없습니다.]


"알았어. 혹시 모르니까 의국 대기하라고 지시하고 문 팀장 콜은 나한테 바로 넘겨"


[예]

 




부관의 콜을 끊자마자 여주가 익숙한 코드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한 번도 채 울리기 전에 건너편에서 정우와 도영의 목소리가 각각 넘어왔다. 

 




"재현이 출정했다던데 김 중령과 김 소령은 주변 경계에 조금 더 신경써주고 우리 부대원들도 바로 내보낼테니까 혹시 의심스러운 새끼 있으면 바로 생포해"


[알겠습니다]


[네 팀장님]

 




두 사람의 목소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여주가 워치를 손목에 둘렀다. 시간을 돌렸으니 그 전처럼 맥없이 213구역을 넘겨주진 않겠지. 재현까지 그 쪽으로 갔으니 어쩌면 그 전과는 다른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단 생각을 하며 여주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펴는 걸 반복했다. 


통제구역에 있는 팀 드림을 제 집무실로 데려와 보급품을 나눠주고 숙소로 보낼 예정이다. 비어있는지 꽤 된 숙소라 조금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당장 쓸 수 있는 공간이 거기 뿐이라 일단 그들을 숙소로 보내고 의국으로 가서 문태일 팀장을 만나야겠지. 대체제가 언제 바닥날지 모르니 미리미리 만들어놔야하니까


잠시 호흡을 고르던 여주가 주먹을 쥐었다폈다 반복하던 손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카피한 이능은 본래의 능력보다는 사용 범위가 적을 수밖에 없다. 두 번은 움직여야 팀 드림을 이곳에 데려올 수 있겠구나 생각하던 여주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어?"




 

저들만 있던 통제구역에 여주가 다시금 나타났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여주에 네 사람이 놀란 얼굴을 하며 눈을 깜빡였다. 분명 순간이동은 아까 그 키 큰 남자의 이능이었는데.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제노가 이내 아- 하는 소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여자가 그 희귀한 멀티라고 했던 게 기억나서.


아까는 분명 쉴드 이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는데 순간이동까지 쓰는 걸 보니 센티넬 이능이 카피인가 싶었다. 확실히 뭐라고 알려준 적은 없지만 나름의 추론을 끝낸 제노가 민형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이능이 카피인가봐. 그 말에 그제야 동혁과 재민도 아- 하는 소리를 내었고 여주는 그들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이능 카피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복제한 이능은 본래의 범위보다 사용범위가 좁아서, 두 분씩 움직여야겠습니다. 일단 집무실로 가시죠."

 




여주가 제노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이능을 썼으니 먼저 집무실에 데려다주는 게 맞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 내민 손이었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의 군데군데 흉터가 남아 있는 걸 저도 모르게 가만히 응시하던 제노가 조심스레 그 손을 맞잡았다.


제노의 손이 겹쳐지는 걸 확인한 여주가 이번엔 다른 쪽으로 손을 내밀자 남은 세 사람이 서로 시선을 주고 받는다. 누가 먼저 이 손을 잡을지 저들끼리 의견이라도 나누는 듯한 모양새라 여주는 말을 덧붙였다. 

 




"혹시 불편하시면 제노씨 손 잡아도 됩니다."




"...그럼 실례할게요"




 

동혁이 민형의 팔을 툭 치자 민형이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여주의 손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간이동 이능을 쓰던 센티넬은 저들이 센터에 있을 때에도 꽤 흔한 이능이었어서 태연하게 세 사람이 사라진 곳을 응시한 재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두 사람을 집무실이라는 곳에 두기만 하고 곧바로 오겠지. 그래서 먼저 일어난건데 아니나다를까 제가 일어나자마자 다시 혼자가 된 여주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말없이 손을 뻗는 여주의 앞으로 재민과 동혁이 다가섰고 그들의 손이 겹쳐지자마자 통제구역엔 정적만 남았다.


눈 깜짝할 새 제가 서 있던 곳이 통제구역이 아니라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이다. 통제구역도 뭐 처음 가본 곳이긴 했지만. 발 아래에서 안정감이 느껴지자마자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린 동혁이 제가 서 있는 공간을 쭉 살폈다. 


제노와 민형은 먼저 도착해서 이미 이 공간을 한 번 살펴봤는지 의자에 앉아있었고 그 옆으로 빈 의자가 두 개 더 놓여져있는 걸 보고 나서야 동혁과 재민도 그 위로 자리를 잡았다. 


적막이 흐르는 공간. 하지만 차갑고 서늘한 기운만 가득하던 통제구역과는 달리 이 곳은 이유모를 따스함이 느껴진다. 사람이 줄곧 사용하고 있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 곳곳에 놓인 가구와 물건들 역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단단한 명패를 발견한 재민이 턱을 괸 채 명패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령부 2사단장 대령 이여주. 반듯하게 새겨진 글자들을 속으로 하나하나 곱씹었다. 이여주. 가이드이자 센티넬인 멀티. 자신들을 깨운 사람. 

 




"제 산하의 별도 부대로 편성시켰습니다. 현 센터는 각 대대마다 일정한 숫자로 인원을 나눠 함께 숙소를 쓰고 있습니다. 팀 체제보다는 같은 부대사람으로 인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렇구나..."


"숙소를 같이 쓰는 건 룸메이트 개념으로 생각하면 되고, 작전은 대대에 속한 부대원들이 작전의 성격에 따라 차출돼서 움직이게 됩니다. 각 대대마다 지휘권을 가진 이들이 따로 있어서 지휘권자를 포함해서 작전을 계획하고 움직입니다."


"그럼 우리는 누나 지시를 받는 거네요"


"그런 셈입니다. 전시 상황이라 굳이 다른 대대와 공식적으로 인사를 나눌 일은 없을겁니다. 인사발령도 제 권한이라 센터 내 단순 공지만 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건 팀 드림의 숙소 위치와 제 보안카듭니다. 이 위치대로 움직여서 이 보안카드로 찍고 들어가세요. 아직 보안카드가 발급되지 않아서 이걸로 쓰시면 됩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네 개의 상자와 지도 하나 그리고 카드 한 장까지. 하나씩 설명하는 목소리를 가만히 들으면서도 제노는 본능적으로 여주와 그것들을 번갈아 쳐다보며 여주의 얼굴을 살폈다. 저들이 얘기한 대가에 대한 얘기가 빠져있다. 가이드 해주기 싫은가... 근데 딱히 싫은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데...

 




"누나"


"예"


"우리 가이드 해줄거예요?"


"......"


"가이드으..."

 




제 보안카드를 민형의 손에 직접 쥐여주던 여주가 제노의 질문에 잠시 말을 삼켰다. 팀 가이드라는 걸 벗어던진지가 벌써 몇 년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가이드가 필요한 건 당연한 얘기고, 이들의 등급은 추측하기로 꽤 높은 등급일 것이다.


그러니 고등급의 가이드가 필요한 것도 맞는데 저를 감싸던 세 사람의 얼굴이 둥둥 떠다닌다. 셋의 얼굴을 떠올리다 시선을 살짝 내리면 약간의 기대감을 갖고서 저를 응시하는 네 쌍의 눈이 있다. 묘하게 시무룩해진 듯한 제노를 보던 여주가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삼켰다. 


자꾸 이들이 누나라고 부르기 때문에 더 그런건지 아니면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라 더 그런지 제 연인들과는 다르게 마음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본인이 큰 부탁까지 했었으니

 




"팀 가이드가 아니어도 가이딩은 할 수 있으니까 필요할 때마다 얘기하세요. 가이딩은 당연히 받아야되고 필요한 거니까 챙겨드리겠습니다."


"치"

 




...치? 아주 가볍고 귀여운 앙탈에 순간 여주가 제 귀를 의심했다. 정우에게서나 듣던 소리를 여기서 듣게 될 줄은 몰랐는데. 심통이 났는지 입술을 삐죽이는 동혁을 보며 당황함을 숨기지 못한 여주가 어, 음- 하는 소리를 내다 결국 작게 웃고 만다. 

 




"현 센터는 팀 체제로 움직이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팀 체제를 없앤 뒤로 팀 가이드라는 부분보단 담당 가이드 개념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니 조금 불편하고 이해하기어렵더라도 양해 부탁합니다."

 




웃음기가 서린 말에 네 사람의 시선이 묘하게 풀어졌다. 얘기를 하면서 가이딩을 풀어냈는지 은은하게 맴도는 가이딩까지 더해지니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닐지라도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리고 넷은 동시에 과거의 센터 사람이 저들에게 농담처럼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아 이래서 그 때 어른들이 가이드는 위험한 존재라고 했었구나. 


제 손에 쥐여진 보안카드를 제 몫의 보급품 상자안에 집어넣은 민형이 숙소 위치가 적힌 지도를 손에 쥐었다. 과거의 센터와 달리 현재의 센터는 꽤나 규모가 컸다. 이십년 사이에 못 보던 건물들도 되게 많이 생겼네. 저도 모르게 감탄하며 지도를 살피는 민형의 옆으로 재민이 붙어앉는다. 


지도를 살피는 둘을 힐끔거린 여주가 때마침 온 태일의 메세지를 확인하고는 의국으로 가기 위해 의자에 걸어뒀던 재킷을 들었다. 의국가서 채혈부터 해야겠다 생각하던 그 때 재현의 콜이 걸려왔다. 

 




"어 재현아 어떻게 됐어?"


[부대원 사상자는 좀 있으나 민간인 사상자는 없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김 소령 부대원들 이능으로 민간인들 대피시키고 있습니다.]


"고생했어, 그럼 반란군 쪽은"


[대부분 사살했으나 습격자들 중 생포한 놈들 있습니다. 지금 바로 구금실로 데려갈 예정입니다.]


"구금실 말고 심문실로 데려놔. 내가 직접 심문할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재현의 콜이 끊어지고 여주는 태일에게 메세지를 회신했다. 지금 바로 의국을 가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심문하고 가겠다는 짤막한 내용의 메세지를 보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집무실을 비울 예정이니 숙소로 바로 가면 됩니다."

 




그리고 꽤나 다급한 걸음으로 집무실 문 쪽으로 걸어가던 여주가 문을 열기도 전에 앞이 가로막혔다. 제 앞을 가로막은 길쭉한 팔의 주인을 확인하려 고개를 든 여주의 시야에 재민이 들어온다. 

 





"우리보고 도와달라고 했잖아요. 근데 아무 지시도 없이 가요?"


"이미 제노씨에게서 큰 도움 받았습니다. 그걸로도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이상 무리하지 않아도 되고 편히 쉬어요. 제노씨 워치로 센터 식당 배달도 가능합니다. 전시라 음식이 변변치는 않겠지만"

 




고갤 돌려 제노를 응시한 여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시 중이라 음식은 최대한 간편식 위주다. 변변치는 않아도 저들이 배를 채우는 정도로는 괜찮겠지. 센티넬들은 애초에 음식 영양분으로 컨디션을 유지하는 존재는 아니니까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제노를 확인한 여주가 여전히 제 앞을 막고 있는 재민의 팔을 조심스레 옆으로 치워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넨 여주가 집무실을 나서고 재민은 눈앞에서 문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탁-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집무실 문이 닫히고 조금 전까지 여주가 서 있던 곳을 힐끔거린 재민이 약간의 짜증섞인 손길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 뭔데 자꾸 신경쓰이지. 


















상중하로 끝내려고 했는데 실패... 줄글병은 정말 어쩔 수가 없나봅니다... .그래도 한달 채우기 전에 올릴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요즘 현생이 바빠서 덕질 떡밥도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흑흑...

여튼 주말 마지막까지 편안하고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라고 내일도 편안한 하루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하트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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