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는 아주 복잡한 규범들 속에서 살아가며, 이는 특히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데에 아주 핵심적이다. 열거한 것들 각각은 모두 특징적인 부작용이 있지만, 여기서는 ‘연애’라는 현대 사회의 관계에서 지배적인 규범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엮어 보고자 한다.

이원 젠더 규범은 정형화된 성별 고정관념을 부여하고 그것은 성 역할이라는 말로 중립을 가장하여 우리 사고방식으로 파고든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에 상대방의 성별을 그 사람의—얼굴, 옷, 머리카락, 목소리, 장신구, 제스쳐 등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의—신체 언어를 통해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성별이 인간을 파악하는 데에 유의미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성별을 파악하려는 시도는 곧 상대를 이원 젠더 체계 속으로 다시 한 번 더 욱여넣는 행위이며, 그 과정에서 상대 자체보다 앞서는 건 젠더 체계가 된다. 규범을 거부하지 않는 한 규범은 타자에 선행한다.

이러한 이원 젠더 안에서 이성애가 규범으로 작동할 때에 모든 인간은 타인을 연애 상대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라서 파악한다. 우선 동성은 배제하고 이성이라면 그 사람이 부여된 젠더를 얼마나 수행하고 있는지에 따라 연애 상대가 될지 안 될지를 판단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쟤가 무슨 여자야”와 같은 말들은 당사자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와 무관하게 젠더 규범을 바탕으로 하여 그 사람의 젠더를 규정하고, 해당 성별을 ‘정상적으로’ 체현하는지를 먼저 보는 것이다. 이때에도 선행하는 건 타자가 아닌 규범이다. 타자는 규범에 의해 두 번째 지워졌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서로가 상대방을 자신의 연애 상대로 승인하고 이를 확인한 후에,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독점적 영역을 구성한다. 오늘부터 1일, 기념일이 숫자로 달력에 꽂히고 관계라는 복잡한 것은 아주 단순한 숫자들로 세어지게 된다. 그 누구도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이 관계에서 그들은 모두로부터 고립된다.

남자의 ‘여사친’들, 여자의 ‘남사친’들, 이 명칭들 속에 부여되어 있는 성별 표기가 이성애 규범 속에서 그들이 모두 잠재적 불륜 상대임을 드러낸다. 이 튼튼한 이자적 독점 관계를 언제든 깨려고 할 무시무시한 세균으로 여겨진다. (이 정도면 빨갱이를 색출하거나 빨갱이가 아니라고 증명해야 했던 메카시즘 수준이 아닌가!) 그래서 ‘결코 연애하지 않을’ 사람임을 드러내지 위해 일부러 더 막 대한다, 즉 ‘동성에게 하듯이’ 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이중, 삼중으로 성별을 인식해야만 가능한 행위로, 이 경우에도 진짜 그 사람과의 관계보다 선행하는 건 이원 젠더 규범이다. 규범은 타자로의 항해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풍랑이다.

“왜 그렇게 자주 연락해?”, “그냥 친구 맞아?”, “주변에 남자/여자가 왜 그렇게 많아?”, 그리고 “쟤 차단해.” “걔랑 연락하지 마.” ‘친구’와 ‘연인’이 완벽하게 나뉠 수 있고 중간은 없다는 상상된 이분법 속에서 그 경계를 교란하려 드는 ‘애매한 이성 친구’들은 모두 ‘개새끼/나쁜 년’이 된다. 모노가미 규범에서 연인 외에는 모두 ‘완전 친구’, ‘그냥 친구’, ‘불알친구’여야 한다. 그 범주를 벗어나는 느낌이 조금이라도 생긴다면 그 사람은 친구 목록에서 방출되어야 한다.

이원 젠더-모노가미-이성애 규범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수많은 친구들과 이별하게 된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동성 친구들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성들의 호모소셜은 자연스럽게 유지/강화된다. 소유물로서의 여자친구 한 명만을 남겨두고 나머지 모두를 배척함으로써 완벽한 독점과 호모소셜의 강화를 꾀한다.

‘남사친’들 ‘여사친’들은 각각 ‘내 여자친구의 잠재적 연애 상대’, ‘내 남자친구의 잠재적 연애 상대’라는 이유로 방출되었다. 그런데 이원 젠더-이성애 규범 하에서 ‘이성 친구’를 잃는 데에서 오는 ‘아쉬움’은 과연 연인에게 받아들여질 만한 ‘순수한 아쉬움’인가? 스스로에게 그렇다 해도 상대방에게는 결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못한다. ‘아쉬움’은 오히려 해당 피방출인이 ‘잠재적 연애 상대’였음을 더욱 분명히 확인시켜 줄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억울함까지도 개입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감정에 대해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아쉬움은 마음속에 갇혀서 맴돈다. 그 과정에서 상실감은 증폭되고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해당 피방출인에 대한 감정은 친구와 연인의 이분법을 더욱 흔든다. 그렇게 그 방출 행위는 점차 연인과의 이별처럼 해석되기 시작한다. 몇 겹의 규범에 막혀 인식은 결코 타자들과 그 관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그 결과는 방출과 그것의 사후적 해석으로서의 이별이다.

온 사방이 내 남친/여친의 잠재적 불륜 상대로, 혹은 적어도 내 남친/여친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둘은 끊임없이 마음을 확인하려 한다. “너의 사랑을 보여 줘.” 도대체 어떻게? 바로 여기서 자본주의가 개입한다. 마음이라는 무형의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는 수를 세고 특별히 달력에 꽂힌 날들, 혹은 불시에 ‘잡히는’ 무엇을 선물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능한 선물은 ‘살 수 있는 것’과 ‘살 수 없는 것’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돈만 있으면 언제든 복제/재현이 가능하며 후자는 그 가치가 주관적이기에 선물을 주는 과정에서 그 의미가 ‘번역’되고 따라서 의미의 손실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완전히 독점적인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번역의 불완전성을 제대로 애도할 여유 따위는 없다.

결국 ‘잡히는 것’은 ‘객관적인 것’이다. 돈으로 환산되어 비교가 가능한, ‘내가 이만큼이나 사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지표를 구매하여 선물하게 된다. 그렇기에 마음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소비인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경합 상태에 놓인다. 주변인들이 이원 젠더-모노가미 규범-이성애 규범 속에서 이 관계에 불안을 주었다면 이제는 ‘마음의 크기’가 양화되는 과정으로 인해 ‘사랑’이 그 자체로 못 믿을 만한 것이 되고, 상대방에 대한 불신과 자기에 대한 불안이 생긴다. 그러다가 결국 이 관계 또한 무너진다. 규범들의 결합은 둘만의 성역을 지키기 위해 이별들을 선사한 뒤 또 다른 독점을 향한 과정으로서의 하나의 이별을 선사한다. 이 규범 아래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연애해야 하니까. 연애가 나의 가치를 보장해 주니까. (하지만 대체 왜?)

‘사랑’은 아주 강력한 유대로, 그래서 연대와 변화의 계기로 작동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이러한 규범들이 강력하게 신체 언어 하나까지 규제하는 상황 속에서 ‘사랑’은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오히려 이렇게 모두를 분열시켜서 개인들을 원자화시키는 게 지금 사회에서의 ‘사랑’의 모습이 아닌가? 결국 이 모든 규범들의 결합은 신자유주의에 적합한 원자화된 개인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에서 희망을 찾기 이전에 지금의 사랑의 모양 자체에 질문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의 전제조건으로 깔려 있는 수많은 규범들, 우리에게 끊임없이 수많은 이별을 선물하는 황폐한 규범들에 대해.

#내_생각의_과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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