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시. 오늘도 그는 사람으로 가득 찬 버스 안에서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는다. 퇴근길로 차가 막힐 시간이라 20분은 더 걸린다. 그는 조용히 플레이 리스트를 셔플 해놓고 코트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미디엄 템포의 차분한 비트가 재생됐고, 울창한 숲처럼 자리 잡은 사람들을 조심스레 해쳐지나 가며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금요일 밤이지만 즐거운 마음보다는 후련한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이틀 동안에는 매번 잔소리하는 상사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아주 조금의 안식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는 사소한 다짐을 하며 버저를 눌렀다.

'주말에는 잠만 자야지.'

노래가 바뀐 순간, 내일 집에 놀러 갈 거라고 말한 애인의 문자가 떠올라 머리를 긁적였다. 일에 치여 살아서 그런지 여유가 없어진 그는 애인과 있는 시간마저 에너지를 쓰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 쉬고 싶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지만 애인이 굉장히 서운한 마음을 비쳐서 당황했더랬다. 좋아서 사귀는 거지만 개인적인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룸 빌라에 살고 있어서 한 집에 따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쯤 되면 내가 마음이 떠난 거라 단정 지었다. 언제나 연애는 서툰 그였기에 그런 걸지도.

가로등 빛이 간헐적으로 깜박이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훅 불어오는 바람에 코트를 여몄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겨울 옷을 전부 꺼냈다. 넣어야 하는 여름 옷을 아직 다 정리하지 못해서 애인이 또 잔소리할 걸 상상하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코트 주머니에 진동이 몇 번 울렸다. 슬슬 시려오는 손으로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회사 단톡방에 상사가 몇 마디를 써올린 모양이다. 그는 끝까지 확인하지 않고 다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었다. 사무실에서 느끼던 뻐근함이 다시 몰려왔다.

누구도 좋으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줬으면 좋겠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멘션 입구에 들어섰고, 듣던 노래를 일시 중지했다. 회사 앞부터 쭉 귀를 막았던 이어폰을 빼내자 바람이 부는 소리와 멘션 현관문이 조금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빈 우편함을 잠시 살펴보고 계단을 올랐다. 엘리베이터를 안 타도 괜찮은 2층이라 운동할 겸 계단을 오르는 건 작은 습관이 되었다.

계단을 반쯤 오르자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집 문 앞을 보니 이상하게 큰 박스가 놓여있었다. 세탁기 정도의 큰 박스에 그는 어리둥절했다. 이렇게 큰 택배가 올 일이 있나? 내가 무언가 잘못 주문했나 하고 박스를 요리조리 살펴봤다. 박스 모서리를 잡고 양옆으로 흔들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박스 안이 꽉 찬 느낌이 아니어서 가전제품은 아닐 거라는 생각에 다시 박스를 유심히 봤지만 택배 송장은 없었다. 갑자기 큰 박스를 들이기엔 집안이 좁아서 지금 안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우선 현관문을 열고 신발장 위에 있는 공구함을 뒤적거렸다. 커터 칼로 박스 테이프를 가볍게 그어내고 안을 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큰 소리를 외치며 뒤로 자빠졌다. 박스 안에는 붉은 리본으로 온몸을 칭칭 감은 시체가 있었다. 넓적한 리본이 입과 코를 막고 있었지만 그는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내일 집에 놀러 올 예정이었던 자신의 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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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목의 '도와주세요.'는 경찰에 전화하는 그의 목소리입니다.

단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뭔가 재미없어져서 뒷내용을 끊고 공개합니다. 뭐 알고보니 집착이 심한 애인의 깜짝이벤트였는데 몸을 잘못 묶인 바람에 뒤엉킨 채로 박스 안에서 죽었다는 내용입니다.. 제목은 며칠 전 실트였던 해시태그입니다.

독자 여러분들도 추위 조심하세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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