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뭐야, 너 왜 그렇게 다쳤어?!"



이것은 아마 중학교를 다녔을 시절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나는 손에 다른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필요한 입학서나 성적표들을 손에 들고 있었고, 그와 만나지 않게 된 것이 그 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되면서부터였으니까 말이다.


그날은 눈이 내렸다. 황토빛의 길에 소복이 쌓이는 함박눈이 아닌, 질척한 진흙탕을 만들어 내는 축축한 진눈깨비가 계속해서 하늘에서 바닥으로 흩날리는 날이었다. 나는 한손에는 우산을, 다른 한손에는 삼각건을 한채 보자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리고 충혈된 눈과 터진 입술, 한쪽이 빈 어금니와 부러진 팔. 그것들은 잘 정돈된 머리카락과 멀끔한 옷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한심한 나의 모습.



"야, 왜 그렇게 다쳤냐니까?"



그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려있었다. 그래. 오랜만에 만난 친구라는 놈이 이런 꼴이니까... 아아... 그렇지, 너는 친구로써 화내는 거겠지. 이 전에 봤었을 때 어땠더라. 별로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솔직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다 내 잘못이었으니 기분이 상했긴 하여도 나를 피하거나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런 행동을 해버렸는지 알게 되면 분명 그때의 그도 멸시의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죽어도 이야기 하지 않기로 하였다. 아니 그를 만나기 전에 나는 결심해버렸으니까.



"아버지한테 맞았어."



그가 삼각건에 감싸인 팔을 만지작 거리며 투덜거리다 아무말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맞은 주먹에 어금니가 나갔다. 입속에 쇠맛이 퍼지며 아픔에 눈물이 핑 돌기 시작하였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사내자식이 미쳤냐며, 다시한번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그것에 불응 했고, 그 주먹은 이제 내가 아니라...


...하여튼 그것을 막아내다 왼팔마저 아작났다. 아팠다. 몸도 아팠지만 다른 의미로도 꽤나 아팠다.



"그래서, 지금은 또 여자친구 보러가?"



이전처럼 웃어보였다. 네가 그녀에게 고백받기 전. 누구라도 만나러 간다 이야기하면 장난치듯 이야기 했던 예전의 말투와 모습을 그대로 따라 옮겼다. 그녀석은 아니라며 빽빽거렸지만 알고 있었다. 한참 여기저기 깨를 쏟아내며 다녔던 주제에. 입에 씁쓸한 맛이 감돌아 멀쩡한 팔로 그녀석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냐는 둥 선물은 챙겼냐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쏟아 냈다.



"아씨 아니라니까. 하여튼 먼저 간다. 뼈 붙는 데에는 뭐더라, 뭐가 좋댔는데. 여튼 제대로 먹고 다녀라-!"


"너나 여자친구 만나러가는데 늦지 말고 어서 가."


"아니라고!!!"



그가 멀어지던 발걸음을 우뚝 멈추곤 빽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런 그녀석을 마주보며 어깨를 으쓱 하고 모르는채 하였다. 그녀석은 씩씩 화를내며 터벅터벅 걸어갔다. 나는 차츰차츰 사라져가는 그를 우뚝서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너의 첫사랑이었듯 네가 나의 첫 사랑이었어.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싶었지만. 도저히 남는 손이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진눈깨비는 그칠 줄 몰랐고 그의 모습도 그런 질척한 눈 속으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안녕, 잘가요 내 사랑. 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이제 볼수 없겠지. 


이미 그를 떠나보내버린 그 장소에서, 나는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발자취마저 사라진 그의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

.

.



아. 이런 감각이 바로 사랑이구나. 를 느낀 것은 아마 자의적인 자각이 아닌 타인이 알려준 정의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사랑에도 여러가지의 의미가 있고 사랑에도 수많은 표현법과 수많은 의미와 생각과 감각이 있다는 것을. 내가 그것이 사랑이라고 자각할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여동생과의 이야기 덕분이었으니까.


처음에는 그냥 낯간지러운 우정인줄 알았다. 어제오늘 할것도 없이 붙어다니다가 가끔씩 쌈박질도 하고, 허세도 좀 부리는. 그냥 평범한 친우관계였다. 나도 그리 생각했고. 그저 내가 좀 더 그녀석이랑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과 헤어질때의 아쉬움이라던가가 좀 있었지만 그런것들 전부 그냥 친구 사이에서 이 녀석과 같이 노는것이 즐겁고, 그래서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타학교의 여자아이와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손은 잡았냐?"

"이녀석 부끄러워서 곁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던데"

"아 좀. 정신사납게 나불대지좀 마라, 니들 때문에 지금 3번째 다시쓴다고"



그는 만연필로 쓰던 편지를 다시 북북 지우더니 끙끙거리며 앓다가 결국 연필로 공책에 빼곡히 글을 쓰기 시작하였다. 만나는 날이던 아니던 이렇게 종종 서로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이야기 해주었다. 나는 그 녀석이 그러는 꼴이 한심-하다기 보다는 질투였을 것이다-하고도 미련-하기 보다는, 슬픔이었을 터다-하게 바라보았다. 꼭 그녀가 필요한 것인가. 여태까지 이어온 나날들 만으로도 분명 즐겁지 아니했던가. 매일, 매일을 함께 소모해왔던 시간들이 이제는 나만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다 사귀게 된건데?"



내가 아마 반쯤 퉁명스럽게 내뱉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나를 아~ 이새끼 이거 여자친구 먼저생긴 나를 부러워하는구만~? 하는 눈으로 바라보며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멍청아, 그 뜻으로 물은거 아니었는데.



"아~ 뭐. 등교하려고 버스를 딱 탔는데 왜, 있잖아? 딱 봤는데 와 엄청 예쁘다... 하는 그거"

"그래서 그 뒤로 들이대고?"



한심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 질문의 요지도 모르고, 심지어 첫만남부터 이야기 하다니. 그렇게나 자랑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때는 그의 그런 태도에 신경질이 났었다. 왜 났는지 조차 모르고 짜증이 나서 그의 말을 반쯤 듣는둥 마는둥 하며 대충 받아 쳤다. 솔직히 내가 그런 반응이었어도 그녀석은 그리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이미 다른 녀석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그녀석을 놀리거나,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이야기 하고 있었으니까. 왜 그렇게 심술이 났었는지 몰랐다. 뭐가 불만인지 스스로가 잘 알지 못했다. 그냥 나는 이녀석과 같이 놀던 시간이 없어져가니까. 단지 그 뿐인 줄 알았다. 하긴 그것부터가 조금 이상했었을 지도, 다른 녀석들에게는 별로 그러지도 않았으니...



"걔가 그렇게 좋아?"



퉁명스럽게 그에게 내뱉었다. 그러자 그는 너무나도 당당하게 그렇다 이야기를 해서,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어이가 없었는지 조차 모르면서.



"그래, 참 좋~겠다."



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던 나는 결국 그녀석을 두고 먼저 밖으로 나섰다. 그땐 그냥 그의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다.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여자 하나에 빠져서 헬렐레 팔렐레 해져선. 


…사실은 나도 그랬던 것이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더욱 한심한 아이었다. 눈치채지 못한것은 바로 나였으니까.



"다녀왔습니~...아 뭐야 오빠 왜 있어?"

"내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있거든? 애들 놀러왔다고, 평소에는 밖에서 노느라 늦게왔으면서 오늘은 왜 일찍온거야?"



여전히 귀염성이 없는 여동생이었다. 한참을 옥신각신 거리다가 아마 자리를 비켜줬던 것 같다. 그리고 어찌나 재잘재잘 떠드는 것인지, 한 방에 같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어제 누가 어쨌네, 편지에는 이런 그림을 그리면 귀엽지 않냐는 둥, 그렇게 벽을 하나 둔채 그녀석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친구랑은 어떻게 지내?"



움찔. 꺄르륵 거리며 이야기하던 목소리들 사이에서 잠시 정적이 흐르다 조용조용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게... 최근 조금 만나기 힘든 것 같아. 응? 아니, 뭐 괜찮은데 역시 좀 외롭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심술을 부려 버리는거야. 분명 그쪽이 변한 것이라곤 하나없는데 그냥, 나의 심술인거지..."



나는 그 이야기들을 벽 너머로 숨죽인채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들켰더라면 분명 무얼하느냐며 잔소리를 들었을 터다. 어느새 나의 귀는 벽에 딱 달라붙어 있었고, 그 이야기들이 마치 나의 이야기인냥 나는 그것들에 홀려있었다.



"그 사람이 자꾸만 보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슬퍼. 함께 시간을 보냈을 적의 기억이 떠올라서, 자꾸만 그때 처럼 돌아가려 집착하게 되는거야. 그래서 나도 모르게 퉁명스럽게 답해 버리고... 나중에 가서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 사람이 자꾸만 보고 싶다. 함께 보냈을 적의 기억에 저도 모르게 집착하고, 퉁명스레 답해버리고. 그리고 내가 왜 그랬던 것일까.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다고 믿고 싶었던 것이었겠지. 나는 그를, 그를-



"사랑하는거지?"



....그 한마디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이야기에 홀려버렸다. 당당하고도 쏘는 듯한 그 말투는, 다른 아이들도 아닌 바로 나의 동생이었다. 사랑하는거지? 사랑해서 그러는 거 잖아. 아아~ 좋겠다 나도 사랑좀 하고 싶다.라며 능청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벽으로부터 한발, 두발. 서서히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아니다.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남자잖아? 그냥 나의 졸렬한 질투고, 욕심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런 것은 전혀 정상적이지 않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들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그 이상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구역질이 났다. 그 때에는 왜 그렇게 구역질이 났는지 모르겠다.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렇게나 아플정도로 싫은 일이었나?



"야, 너 괜찮냐?"



그였다. 변함없이 좋은 친구인 그였다. 나의 안색이 안좋아 보였었는지 나를 챙겨주었다.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어떤 것으로 와닿는지 본인은 알지도 못하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저 평소와 같은 수업 시간이었을 텐데. 평소와 같은 쉬는 시간과 평소와 같은 점심시간. 곁에 있는 데에도 나를 봐주었으면 좋겠어. 그 아이가 아닌 나를 바라봐주었으면 좋겠어. 아니야 그렇지 않아. 같은 남자라고. 그래, 나는 그녀석을 사랑하는게 아니야. 나는,



"아, 맞아 어제 내가 쓴 편지 한번 봐볼래? 크으, 이번에는 역작이 나온거 같거든?"



그를. 사랑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두근 거리는 심장이 귓가까지 와서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그를 사랑해. 그것은 거짓됨이 없는 현실이야. 나는 그것에 알아, 안다고. 대답하고 소리를 질러보아도 그 속삭임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쁜데, 그 사실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너는 나에게 이 편지를 보여주는 이유가 뭐야? 왜? 읽어달라고? 그가 준 편지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예쁜 시다. 반짝반짝 빛나도록 잘 갈고 닦은 아름다운 단어들과 사랑을 속삭이는 한글자 한글자들. 읽고 있는 내가 이 두근거림과 달콤함에 녹아 버릴 것만 같았지만, 이것은 나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다. 그래. 이것은 너의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였지. 그 사실을 자각하자 다시 구역질과 함께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원망.

네가 나에게 이것을 보여준 것에 대한 원망. 나에게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한 것에 대한 원망. 그 아이와 이어져 버린 것에 대한 원망.


절망.

나는 절대 이러한 편지를 네게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 나는 절대 그 아이와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 네게 이 마음조차 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슬픔.

절대, 절대로 이 마음이 닿을 수조차 전해지지 조차 않을 것이란 것을 깨달은데에 대한 슬픔.


편지를 쥐고 있던 손을 고쳐쥐었다. 나에게 왜 이러는건데?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하였던 나는, 그녀석이 하룻동안 고민하고 고민하여 썼다던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왜 나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냐는 그 마음과 함께.



"뭐, 뭐하는 짓이야?!"


"...뭐하는 짓이냐고? 너야말로 나한테 뭐하는 건데?"



냉담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찢어져 버린 종이가 교실의 바닥에 데굴 나뒹굴기 시작했고 곧바로 나는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모른다는 그 사실부터가 너무 화가나고, 원망스럽고 또 그 와중에 내가 그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뼈져리게 느껴져버려서 그에 대한 화풀이를 그에게 해버렸다. 그래선 안되는 것이었는데.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어느정도는 깨닫고 있었었는데도 그 모든 것을 그저 참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하고 보는 것도 너무나도 작아서. ...차라리 이때가 좋았었는데.


하여튼 이제는 어째야 좋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2학기의 말. 날은 점점 추워져가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이제 학교를 갈 일도 얼마 남지도 않았었다. 같은 고등학교에 가자며 키득거렸었는데. 이젠 어째야 할까. 깊은 한숨이 저 안쪽에서부터 밖으로 튀어나왔다. 무거운 다리를 옮겨 집에 도착하였을 적에는 여동생이 이미 와있었다.



"뭐야, 왜 있어?"


"나 원래 학교 끝나면 이시간이야."



동생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아마 도서관에서 빌려온 것이겠지. 아무말 없이 그런 동생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날 들었던 이야기와 오늘에 느낀 감정과 생각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뗐다.



"하아? 뭐야 그게 최악이잖아?"



그런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완전 멍청한 짓이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 밤을 새 쓴 편지를 눈앞에서 그렇게 갈기 갈기 찢어버리곤 이유도 말하지 않은채 뛰쳐나오다니. 최악이었다. 나의 기분도 최악이었지만 그에게 와닿은 것은 얼마나 더 당혹스럽고도 끔찍한 기분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때에는 감정을 잘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냥 내가 좀 더 참았더라면,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눈치 채고서도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 편지를 찢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여동생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더라면...



"하여튼 의외네, 오빠는 애인같은거 절대 안생길줄 알았는데. ...그리고 정 그렇게 미안하면 사과하고 고백하면 되잖아?"



그 말을 들어선 안 됐었다. 아니, 이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됐었다. 이 상황이 되게 해서는 안 됐었다. 왜 그 때의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우선 같은 반이면 매일 얼굴 볼텐데, 남은 중학교시절 내내 어색하게 지내는 건 별로일거 아냐. 뭐 오빠가 상관 없다면 괜찮은 것이겠지만."



그랬다. 맞는 말이었다. 심지어 내가 가려고 하였던 고등학교는 그와 같은 학교였다. 즉 중학교에서의 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서 고등학교에서도 그녀석을 본다는 뜻이었고 앞으로의 3년동안도 그녀석과 서먹하게 지낼 자신은 없었다. 나는 동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어째서 그에게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밝힌다면, 그렇다면 서로의 사이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보같긴, 그 시대에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리가 없잖아. 애초에 여동생도...


하여튼, 사과와 고백. 그것을 어떻게 그에게 전해야할지 고민하였다. 그와 서먹해지고나서의 첫날이었다.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미워졌다. 이틀째, 그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멍청한 나. 그라면 그저 사과만으로도 이전의 사이로 돌아갈 수 있는데. 멍청한 과거의 나. 사과해야할 방법도 고백해야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아 매일을 고민했다. 그와 같은 편지는 싫었다. 그 아이를 떠오르게 하니까. 그렇다고 말로 전하는 것도 싫었다. 누군가 들을지도 모른다. 다른이들에게는 전하고 싶지 않다. 오롯이, 오롯이 그에게만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혼자 전전긍긍 하고 있었던 사흘째의 밤.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처음에는 나 혼자였다. 한참을 맞고 있다가, 아버지의 팔을 붙잡았다. 더 이상 맞고 싶지 않았기에 반사적으로 하였던 것이었는데 그때부터 아버지보다 내 힘이 더 쎄졌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더 이상 나에게 손찌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나 대신에 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어머니와 동생이었다. 여동생은 아마도 내가 '남학교'에 다니는 것을 잊고 아버지에게 같은 학급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야기 했던 것이었겠지. 맞았다. 나를 대신해서 머리를 세차게 맞고 발길질 당하고. 내가 남자를 사랑해서. 사랑해버려서.


더 이상 맞는다면 정말로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 때문에 둘중 누군가 정말 죽어버릴 것만 같아서. 그것을 저지하려다가 왼팔이 부러지고, 그러고도 한참을 막느라... 아팠다. 정말로 아팠다. 그런데 그것을 몇번이나 맞았던 어머니와 동생은 얼마나 아팠을까.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왼팔이 아려온다. 그 뒤로 나를 혼내야 할 일이 있다면 내가 아닌 여동생의 머리채부터 잡아 당겼다. 뭐, 이 이야기는 넘어가고. 하여튼 그 뒤로 결심했다. 이런 사랑이라면 사절이라고.


...이런식의 사랑이라면, 다시는 바라지도 원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아마 그 뒤로 며칠간 학교에 빠졌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말다툼이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 때문에. 나는 그 학교를 가고 싶지 않았다. 그 길을 걷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고집을 부리고, 또 부리다가 또 이전과 같은 상황이 벌어 질 것만 같아서. 이번에는 정말로 죽여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공포와 아픔에 결국 알겠다고 순응하였다. 아마 이젠 다신 그와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만날 수 있는 상황이라 하여도 내가, 피할 것만 같았다. 다시는 이런 사랑은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아버지가 미리 준비한 서류들을 들고 집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였다.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이면 안 된다는 말에 곱슬거리는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하고, 잘 정리된 옷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집 밖에는 질척질척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잡덕 그냥 ㅁ뭐 잡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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