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안쓰는 저의 펜을 봐주세요.





나는 운명보다는 숙명을 더 좋아한다. 운명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힘에 흘러가듯 이끌린다는 느낌이 강한데, 숙명은 적어도 엄숙한 맛이라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운명의 상대’ 같은 개념은 끔찍하기 짝이 없다. 물론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는 전제하에 구경하는 입장이 된다면 맛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네임버스’같은 일은 팬픽에서나 평생 머물러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녁이다. 내 몸에 이름이 없어 다행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나의 이름조차 모른다. 온갖 서류에 등장하는 석 글자를 나의 이름이라 부를 수 있는가. 나는 걷는다. 집 밖을 나와 동네를 걷고 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석 글자를 구태여 떠올리며 살지 않는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날이면 베개와 다시 마주칠 때까지 머릿속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기도 한다. 그렇다면 역시 그것은 나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이름이 아니다. 나의 영혼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작은 횡단보도 앞까지 온다. 어른 두 명 키보다 조금 더 길거나 짧을 정도인 거리라서 신호등이 없다. 차도는 일요일 저녁에 가장 조용해진다. 나는 기다린다. 차가 오지 않는다. 건넌다. 너무 고요하다. 너무 고요해서 갑자기 뜻 모를 고속질주와 함께 온 차 한 대가 나를 치고 지나갈 것만 같다. 그러면 내 몸은 반동으로 튕겨 나갈 테고 그렇다면 내 영혼은 그보다 더 심한 반동으로 몸 밖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렇게 하늘까지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곳에 가서야 내 영혼의 진정한 이름을 아는 결말을 맞을 수도 있겠지. 어쩌면 모든 지구 사람은 자기 영혼이 어떻게 불려야 하는지 한 번도 알아맞힌 역사를 가진 적이 없을 거다.






뭐지 산책하고 와서 썼나

왜 썼지

뭐 그 당시에는 나름 이유가 있었겠지

나는 바다에서 걸어나왔어. 너를 만나는 일이 두렵지 않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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