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처음으로 같이 영화를 보기로 했다. 처음엔 영화관처럼 오만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에서 데이트해도 되나 걱정했으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여전히 걱정은 됐지만, 그가 나를 숨기려하지 않고 우리 관계를 부끄럽지 않게 여긴다는 자그마한 반증인 것 같아, 나는 내심 기뻤다.

 

 
 

예매도 벌써 그가 했고, 비싼 선물에 다른 비용도 일체 그가 내왔기 때문에 나는 일부러 일찍 와서 팝콘을 사서 그를 기다렸다. 아마 내가 먼저 사놓지 않으면, 이번에도 자기가 내겠다고 주장을 펼칠 게 뻔하니까. 아, 내가 왜 이럴까 진짜. 왜 자꾸 입꼬리가 헤실헤실 풀리는 거냐고.

 

 

약속시간보다 한 30분 정도 일찍 왔으니까.. 곧 올 때가 됐겠는데. 나는 팝콘통이 쏟아지지 않도록 살살 손목을 틀어 시간을 확인했다(또다시 내 손목에 시계를 끼워주던 그 모습이 생각나, 나는 히죽이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그때, 내 뒤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녕.”

“안녕하....”

 

 

 

뒤돌아 마주 인사를 건네다 말고, 서로 눈이 마주친 우리는, 잠시 벙 쪄있다가 어쩔 도리 없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의 손에도 나랑 똑같이, 커다란 팝콘 통 두 개가 들려있었다. 아, 뭐야 이 사람 진짜.

 
 

 

“왠지 네가 팝콘 사겠다고 우길 것 같아서 좀 더 일찍 와서 미리 산 건데.”

“어... 저두요..”

“그랬구나. 우리 생각하는 게 똑같다.”

 

 

오늘도 역시 멋진 차림인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심장이 철렁 하고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왤케 머리부터 발끝까지 멋있냐고. 무딘 광이 나는 깨끗한 구두마저 멋있어서, 나는 괜시리 앞축이 조금 구겨진 내 조던 운동화를 바닥에 문질렀다.

 

 

“별안간 팝콘부자가 됐네.”

“이걸 어쩌죠...”

“아직 영화시간 조금 남았으니까... 무슨 맛 샀어?”

 

 

나는 그가 뭘 좋아할지 몰라 치즈 하나랑 오리지널 하나를 샀다. 그는 카라멜과 오리지널을 들고 있었다. “우리 바꿔서 같이 먹으면 되겠다.”

 

 

빈 소파에 앉아서, 우리는 수다를 떨며 팝콘을 먹기 시작했다. 기분이 들뜬 나는 평소보다 약간 톤이 높아진 목소리로 이말저말아무말을 주워다 지껄이기 시작했다. 계속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내 말을 열심히 듣던 그가, 갑자기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조금 창피해진 내가 말을 멈추고 눈을 껌뻑이자, 그가 대꾸한다.

 

 
 

“팝콘 통 봐봐, 마이클.”

 
 

 

그의 통은 아직도 거의 가득인데, 내 팝콘통은 두 개다 벌써 반쯤 비어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주먹에 한가득 들려있는 팝콘을 보고 그가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었다. 나는 정수리까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손에 들고 있는 팝콘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똑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이게... 푸하하, 아니. 아, 웃지 마세요.”

“하하하, 아니야, 귀여워서 웃은 거야.”

“.... 그래도..”

 
 

 

귀엽다는 말 한 마디에 고개를 푹 수그리며 쫑알대자, 그가 계속 큭큭대며 입을 손으로 가린다. 난 고개를 숙인 채 그 모습을 곁눈질로 흘끔 보았다. 아 진짜, 왜 굳이 저렇게까지 멋있을 일인가? 왜 손까지 저렇게 잘생겼냐고.

 

 
 

“같이 먹자.”

 
 

 

그는 그 손을 뻗어 내 주먹에 아직도 쥐어져 있던 팝콘 두어 개를 가져갔다. 여전히 즐거운 웃음을 띤 채 내 눈을 바라보며 그 팝콘을 한꺼번에 입안에 넣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뺨이 간질간질했다.

 
 

 

“그렇게 먹으면 더 맛있어?”

 
 

 

이번에는 그도 그 큰 손 한 가득 팝콘을 집어 나처럼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먹는 게 익숙지 않은 모양인지, 입으로 들어가지 못한 팝콘들이 자꾸 후두둑 떨어졌다. 어정쩡하게 입술을 움직여 어떻게든 그 팝콘들을 입 안에 넣어보려는 모습이 진짜 귀엽기(아악)짝이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우리 둘 다 빵 터져서 다시 또 웃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이것도 해본 사람이 잘 하는 거예요.”

“아니, 이거 어떻게 하는 거야, 알려줘.”

“아닠ㅋㅋㅋㅋㅋㅋㅋ 이걸 어떻게 알려줘욬ㅋㅋㅋㅋ 일단 봐봐욬ㅋㅋㅋ”

 

 
 

내가 일부러 뽐내듯 주먹에 든 팝콘을 와구와구 먹어치우자 그가 또 빵 터지며 결국 손 안에 든 팝콘을 우수수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걸 보며 나도 또 웃음이 터져서 팝콘통을 무릎에서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붙잡아야만 했다. 아, 이게 뭐라고 웃기냐 이렇게.

 

 

그는 간신히 웃음을 거두면서, 그가 자신의 팝콘통과 내 팝콘통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나는 이미 충분히 많이 먹었다고 하며 거절하려 했으나, 그는 내가 먹는 모습을 면밀히 관찰한 후에 오늘 내로 마스터하겠다며 계속 우겨댔고, 그래서 나는 답례로 양 손에 팝콘을 쥐고 먹어치우는 신공을 보여줬다. 더 터질 웃음도 없을 줄 알았는데, 우리 둘 다 아까보다 더 크게 빵 터져서, 이번엔 그가 팝콘통들이 내 무릎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했다.

 
 

 

그렇게 웃고 떠들고 팝콘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어느새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서, 우리는 남은 팝콘을 우르르 쏟아 합쳐서 한 통씩 나눠들고 허겁지겁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상영관 문을 열기 전에, 그가 ‘안에서는 그렇게 먹지 마. 나 정말 못 참을 지도 몰라.’ 라고 짐짓 경고를 보냈다. 내가 푸슬푸슬 웃으면서 또다시 주먹 안에 한움큼 팝콘을 쥐고 입을 벌리자 그가 ‘You....’ 하는 표정으로 눈을 가볍게 치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헤헤 웃으면서 나는 다시 팝콘을 통 안에 털어 넣었다.

 
 

 

조용히 상영관으로 들어가니, 이미 불은 다 꺼져있었지만, 아직 광고가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문을 조용히 닫는 것을 보고, 나는 서둘러 우리 자리로 가려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잡아 부드럽게 멈춰 세웠다. 나는 얼른 자리로 가야하는데? 라는 표정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광고의 어슴푸레한 빛에 드러난 그의 두 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딘가 애절해 보이기도 하고, 처량한 강아지 같아 보이기도 하고, 여하튼 내가 절대 그냥 무시하고 우리 자리로 가버릴 수 있는 눈은 아니었다.

 

 

 

그가 내 쪽으로 한 발 더 내딛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 더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부드러운 쿠션처리가 된 벽이 내 등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그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나도 그랑 같은 생각이라는 걸.

 
 

 

팝콘통을 들고 있지 않은 한 손이 내 턱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점점 그의 입술도 내게 가까워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큰 스크린에선 어떤 내용인지 들어오지도 않는 시시한 광고가 계속 나오고 있었고, 안에 관객들이 가득 들어차있을 게 분명했지만 아무도 우리를 쳐다볼 수 없었다. 아, 이건 진짜 키스 각이야. 완벽한 타이밍이라구. 저번에 한 새털 같은 뽀뽀랑은 다를 게 분명한 지금, 나도 모르게 긴장감에 입술을 한 번 혀로 핥았다.

 

 

 

그게 촉진제라도 됐는지, 내 턱을 감싸쥔 손을 살짝 틀어 그가 내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깊게 입을 맞춰왔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열고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정말 키스를 잘했다. 혀와 입술이 움직이는 데에 전혀 머뭇거리지도 않고, 너무 질척거리거나 소리가 크지도 않았다. 그의 혀가 나의 혀에 자연스럽게 얽히는 동안, 나는 마치 이 세상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슴푸레하게 비치던 광고와 그 배경음도,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 아무것도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단지 그와 나, 우리 둘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 입술에 입을 맞추고 살짝 뒤로 물러나자,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몰려와 얼굴을 빨갛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가 이런 내 애송이 같은 모습을 못 보는 게 천만 다행이었다. 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그가 내 뺨을 쓰다듬으며 내 이마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 괜찮아?”

“...... ... 네.”

“음, 우리... 영화 못 볼 거 같지.”

 
 

 

소곤거리며 내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 필사적으로 팝콘통으로 가리고 있는데, 아까 그 키스로 벌써 아래가 단단해져서 아주 곤란했다. 이대로 영화를 보러가는 것도 못할 짓이었지만, 이대로 나가는 것도 민망했다. 하지만 어쨌든 영화에 집중하기는 아주 글러먹은 상황이었다.

 

 
 

“저... 음.. 우리 영화는... 나중에... 봐요.”

 

 
 

그는 살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내 눈가에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그 길로, 우리는 상영관을 나갔다. 그리고 다행히도, 쓰레기통을 찾았을 때 쯤, 나도 상당히 진정되어있어서 맘 놓고 팝콘통을 내 몸에서 떼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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