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에게.

오늘은 장을 보고 왔어요. 아저씨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했으니까 꼭 드셔주세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포스트잇을 힐끗거린 민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그득하게 묻어있는 혈흔에 혀를 쯧. 차며 손을 거두었다. 굳게 닫혀있는 방문은 종현이 자고 있음을 알려주어 느슨하게 풀려있는 넥타이를 힘주어 풀어낸 민현은 식탁에 곱게 차려진 밥상을 보고는 입술을 꾹 물었다. 밥은 먹고 자나. 거실에 걸려있는 시계는 4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피가 묻은 손을 씻어내며 종현이 붙여둔 거북이 캐릭터의 포스트잇을 읽었다. 아저씨 칫솔이 상한 거 같아서 바꿔뒀어요. 영락없는 남자아이의 글씨체여서 웃음을 흘린 민현은 손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며 수건을 찾아 들었다. 붉게 선명하던 핏자국은 이제 남아있지 않음에도 아무리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미간을 좁혔다. 옷에도 진득하게 묻어 있는 혈흔을 보며 단추를 톡톡 풀어내던 민현은 손을 뻗어 욕조에 물을 받았다. 한 겹, 한 겹. 몸을 둘러싸고 있던 옷들을 떨어뜨리고 나서야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욕조 안에 자리하자 민현의 몸 주변으로 불그스름한 액체가 번져갔다.

나의 피인지, 남의 피인지 모를 액체들을 빤히 보던 민현은 손을 대충 휘휘 저으며 몸에 힘을 풀고 물속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꼬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쉬어지지 않는 숨에 한참을 아무런 미동 없이 눈을 감고 있던 민현이 푸하. 하는 소리와 함께 물 위로 얼굴을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종현의 포스트잇. 언제부터였더라, 네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기 시작한 게. 민현은 이 집 어딘가에서 곤한 잠에 빠져있을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금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저씨에게.

오늘은 필요한 참고서가 있어서 카드 좀 썼어요. 아저씨한테 물어보고 쓰려 했는데 바쁜데 방해될까 봐 그냥 썼어요.

사실 이 핑계로 아저씨 목소리가 듣고 싶었지만 그러면 아저씨가 싫어할 거 같아서 안 했어요.

보고 싶어요, 아저씨.]


오늘도 벽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떼어낸 민현은 비교적 깔끔한 손으로 포스트잇의 끝을 만지작거렸다. 글씨 참 되게 못 쓰네.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져 살풋 웃은 민현이 오늘도 가지런히 차려져 있는 식탁에 시선을 두었다. ps. 오늘도 맛있게 드셔주세요. 밤이 내려앉은 차가운 식탁에 불도 켜지 않고 앉아 서툰 솜씨로 정성스레 담아둔 음식들을 보던 민현은 작게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차갑다 못해 딱딱한 밥을 한 술 떠 입안에 욱여넣은 민현은 아무것도 없는 싱크대를 바라보다가 그곳에서 해맑게 웃으며 음식을 할 종현을 상상해 보았다.


[혼자 먹으니까 별로다.]


기껏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민현이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 남긴 말이었다.



 

늘 민현을 반기던 포스트잇이 없자 눈에 띄게 눈꼬리를 내린 민현이 조금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벗었다. 고작 하루 안 남겼다고 이러냐. 애가 바빴을 수도 있지.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음에도 혼자 툴툴거리던 민현은 제 목을 죄이던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내며 거실로 뚜벅뚜벅 들어섰다. 그러자 보이는 건, 소파 위에서 몸을 말고 잠들어 있는 종현의 모습. 조심스럽게 다가간 민현이 그 앞에 털썩 앉아 하염없이 고이 잠든 종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오늘은 험한 꼴이 아니라.


왜 여기서 자. 조금 퉁명스레 말을 거니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종현이 실눈을 뜨고 배시시 웃었다. 왔어요? 그리 묻는 얼굴에 사르르 녹음을 느끼며 살풋 웃은 민현은 손을 뻗어 종현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쓸어주었다. 종현도 오랜만에 받는 민현의 손길이 나쁘지 않은지 옅은 웃음을 터뜨리며 민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담배 냄새.”

“아직 안 씻어서 그래. 얼른 놔.”

“싫어요.”

“근데 왜 여기서 잤어. 티비 보다가 잠들었어?”

“아니요… 혼자 먹으니까 별로라길래.”

“너 내일 학교 가잖아. 얼른 들어가서 자.”

“아저씨 밥 먹는 것만 보고요.”


이 고집은 어디서 배웠는지. 금세 말똥하니 눈을 뜨고 저를 보는 모습에 입꼬리를 씰룩거린 민현이 종현의 뒷머리를 살살 간질였다. 지금 일어나면 다시 못 잘 텐데. 시계를 힐끔거리며 짐짓 엄한 얼굴을 하자 입술을 삐쭉 내민 종현이 민현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그럼 더 안 잘래요.”

“학교 가서 피곤하면 어떡해. 얼른 자.”

“싫어… 아저씨 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우리 오랜만에 보잖아요. 응? 투정 한 번 부리지 않던 아이가 칭얼거리며 안겨오니 받아주지 않을 수가 없어 그 등을 토닥거리던 민현은 손에 닿은 종현의 몸이 차게 식어있어 종현을 품에서 떼어냈다.

 

“얼마나 기다린 거야. 몸 찬 것 좀 봐. 이불이라도 좀 덮고 있지. 이러다 감기 걸려야 정신 차리지?”

“아저씨가 이렇게 걱정해주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말이나 못 하면.”

 

헤헤 웃으며 하는 말에 미간을 좁힌 민현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내며 제 목을 감고 있는 종현의 머리 아래와 다리 아래에 손을 밀어 넣으며 꽤나 가벼운 몸을 쑥 들어냈다.

 

“너 왜 이렇게 가벼워. 내 밥만 차려주고 넌 안 먹지?”

“머, 먹어요….”

 

거짓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말하니 어물거리던 종현이 입술을 비죽거렸다. 나도 혼자 먹으니까 별로라서요. 아저씨는 보고 싶은데 잘 보지도 못하고, 안 자고 기다리면 싫어하잖아요.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리던 말이 끝나자 발걸음을 멈춘 민현이 종현의 몸을 침대 위에 눕혔다. 이대로 재우려나 싶어 체념하고 등을 돌리려던 종현은 제 몸 위로 둘둘 말아지는 이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해요?”

“뭐 하긴, 너 추울까 봐 이불 덮어주잖아.”

“…이불을 누가 이렇게 덮어줘.”

“내가.”

 

김밥 말 듯 이불 속에 폭 싸이게 만든 민현은 다시금 종현을 껴안고 거실로 나갔다. 대강 발로 식탁 의자를 빼내고 조심스레 앉힌 뒤 달칵 불을 켜낸 민현은 눈이 부신 듯 깜빡이는 종현의 위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오늘도 밥 안 먹었지?”

 

차마 대답은 못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종현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 고개를 끄덕인 민현은 반찬 몇 가지를 집어 전자레인지에 돌리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집에서 내 손으로 밥을 챙겨 먹은 적이 있었던가. 자신의 집임에도 낯선 주방을 배회하던 민현은 자신이야 밥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이었기에 몇 번 사용해본 적 없는 주방을 헤매고 있었다.

 

“아저씨, 그릇은 저쪽에.”

“…응.”

“숟가락은 저어기 싱크대 옆에.”

“….”

 

근데 얘는 왜 이렇게 잘 아는 거지. 얼굴만 겨우 빼꼼 내민 상태면서 조잘조잘 지휘하던 종현은 제 옆에 털썩 앉는 민현을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랑 같이 밥 먹는 거 처음인 거 같다. 그죠. 그 해맑은 얼굴에 차마 타박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 민현은 밥 한 술을 떠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는 종현의 입안에 넣어주었다.

 

“이렇게 잘 먹는데 왜 안 챙겨 먹어.”

“오늘은 아저씨랑 같이 먹는 거잖아요. 게다가 먹여주기까지 하는데.”

“…미안.”

“아저씨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앞으로는 일찍 올 수 있도록 해볼게.”

 

정말요? 오늘 무슨 날인가. 정말 기쁘다는 듯 눈이 휘어지게 웃은 종현은 묵묵히 수저만 움직이는 민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마지막 한 술까지 먹여주고 물까지 마시게 해준 민현은 휴지로 종현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나 씻고 올 테니까 먼저 가서 자고 있어.”

“…오늘은 같이 자면 안 돼요?”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그럼 같이 씻어요.”

“…뭐?”

 

아저씨 씻을 동안 저는 양치하고 있으면 되잖아요. 시무룩하게 말해오는 얼굴을 빤히 보던 민현은 잠시 동안이라도 엄한 생각을 했던 자신의 머리를 휘휘 저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안 피곤하겠어? 그렇게 묻는 의미를 모르지 않아 신나게 고개를 끄덕인 종현이 꼬물꼬물 이불 속을 벗어났다.

 

 

변기 위에 앉아 칫솔을 물고 있던 종현은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근육에 넋을 놓고 구경 중이었다. 뒤돌아 있음에도 그 시선을 모르지 않아 옅은 한숨을 쉰 민현이 종현을 힐끔거리자 퍼드득 놀라 시선을 내리 까는 게 퍽 귀여웠다. 왜 그렇게 봐. 보고 싶어? 장난스럽게 몸을 반쯤 돌리니 안 그래도 바닥을 보고 있던 고개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다시금 민현이 벽을 보고 씻기 시작하자 눈만 힐끔거리며 구경하던 종현은 컵에 받아두었던 물을 머금고 우물거렸다. 입안을 모두 헹구고 입가를 닦아내니 민현에게서 나던 물소리도 잦아들었다.

 

“다 씻었어요?”

“응. 너는?”

“저도요.”

 

물방울이 사라지니 더욱 여실하게 드러나는 근육에 또다시 넋을 잃은 종현은 민현의 움직임을 쫓다가는 바짝 다가오는 몸에 흠칫 뒤로 물러나야 했다. 보고 싶으면 말을 해, 종현아. 눈앞이 온통 살색으로 가득하자 아찔해짐을 느낀 종현이 침을 꼴깍 삼켰다. 왠지 더워지는 것 같아 다리도 배배 꼬며 눈만 요리조리 돌리던 종현의 시야에 옆구리로 길게 그어진 상처 하나가 들어왔다.

 

“…아팠어요?”

“….”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것을 훑어 내리니 개구지던 민현의 눈이 차갑게 식어갔다. …자자, 종현아. 제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등을 돌리는 민현에 또 실수한 건가 싶어 시무룩해진 종현은 앞서 나가는 민현의 뒤를 쫄레쫄레 따라가며 무어라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했다. 미안해요?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면 뭐라고 하지…. 아무렇게나 만져서 미안해요. 사귀는 사이에 만질 수도 있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삐쭉 나오는 입술과 착잡함에 한숨을 푹 쉬던 종현은 수건을 대충 아무렇게나 놓으며 침대에 눕는 민현을 쪼르르 따라 누웠다. 자연스럽게 팔을 뻗는 민현의 팔에 머리를 뉘고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종현이 아까 제가 만졌던 옆구리를 슬쩍 피하며 손을 놓았다.

 

“…아저씨.”

“응.”

“미안해요.”

“뭐가.”

“여기… 물어보지도 않고 만져서.”

“….”

“아저씨도 원하면 저 만져요.”

“얘가 못하는 말이 없네.”

 

…진심인데. 민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아주 작게, 민현에게만 들리도록 속삭인 종현이 민현의 허리를 더욱 끌어안으며 붙어왔다. 옅은 한숨 같은 웃음을 흘린 민현이 그의 등을 두드려주며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었다.

 

“괜찮으니까 이제 진짜 자자. 이따 학교 가려면 힘들겠다.”

“…으응. 아저씨도 잘 자요.”

 

머지않아 새근거리는 숨을 내뱉는 종현을 힐끔거린 민현이 그제야 눈을 감으며 입안을 짓씹었다.

 

자꾸만 자신의 잘못된 인생을 상기시켜주는 그 맑은 눈이 따갑게 다가왔다. 이미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내가, 맑디맑은 네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 나로 인해 네게 위험이 닥치면 어쩌지. 환하지 않을 우리의 미래를 알고 있음에도 종현을 놓아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던 민현은 제게 찰싹 붙어있는 종현의 등을 천천히 쓸어주다 눈을 감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기적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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