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시히나] 걸림돌

W.누리





0.


“와카토시.”


텐도씨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글쎄 당신이 유명한 프로팀에 제의를 받았다는 거예요. 나 배구 그만둔 지 꽤 됐잖아요? 그래서 해외 프로팀에 대해선 엄청 문외해요. 그런 내가 텐도씨 입에서 나오는 프로팀 이름을 듣자마자 입을 쩍 벌렸으니, 말 다했죠. 그런데 당신이 팀의 제안을 거절했대요. 페이 문제라면 어떻게든 해결했을텐데, 돈 문제는 아니래. 그럼 환경의 문제냐고 물어보니 그것도 아니래요. 프로팀이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래요. 나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인 거 당신이 더 잘 알죠? 당신이 더 잘 되었으면 좋겠단 생각에 급히 물어봤어요. 대체 뭐 때문에 거절한 건데요? 라고 물어보니까, 나 때문이래요. 히나타 쇼요라는 애 때문에 못 떠난대.


“무슨 일이지.”

“와카토시.”


그 팀에 가서 경력도 쌓으면, 당신의 미래는 더 찬란히 빛날 거래요. 그리고 해외에 있는 아버지도 자주 만날 수 있대. 얼마나 좋은 조건이에요? 그런데 그 조건을 뻥뻥 차고, 나 때문에 일본에 남는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천하의 재수 밥말아 먹은 텐도씨가 나한테 부탁하려 수소문하여 연락을 했을 정도면 얼마나 중요한, 일생일대의 기회인지 감이 오더라고요.


“우리 헤어져요.”


그래서 더는 날지 못하는 까마귀가 하얀 백조를 멀리 멀리 보낼까 해요.




1.


눈을 떠 보니 저를 맞이하는 건 말끔한 베이지색 천장이었다.  히나타는 별 생각없이 두 눈을 느리게 껌벅이다 뻗어져 있던 오른팔을 슥 움직였다. 달그락, 소리와 함께 어제 밤늦게까지 마신 맥주캔들은 저들끼리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히나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시선만 옆으로 흘긋 옮겼다. 몇 잔을 마셨던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되려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탁자 위엔 빈 맥주캔들이 즐비해있었다. 눈을 뜰 때 까진 쓰리지 않던 속에서 역함이 몰려왔다. 당장이라도 게워낼 것만 같은 쏠림에 몸을 급히 일으켰지만 늘 그랬듯이, 이성보다 본능이 더 빨랐다.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토사물에 부드러운 감촉을 가진 하얀 캐시미어 스웨터가 축축히 젖었다. 전 날 아무 음식도 섭취하지 않은 채, 그리고 안주 하나 없이 마신 탓에 옷과 바닥을 젖게 한 토사물의 색은 무(無) 색이었다. 손등 위로 비스듬히 쏟아진 토사물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손을 슬며시 들어올렸다. 역류한 액체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ㅡ우시지마 선수, 곧 미국에 있는 팀으로 들어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술을 마시면서 TV를 틀어뒀었나 보다. 눈을 떴을 땐 적막이 가라앉은 듯 고요했던 세상이었는데, 우시지마라는 이름이 나오자마자 눈 먼 장님 같던 두 귀에 또렷이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ㅡ그렇습니다.


히나타는 샐쭉 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멋있는, 과거 히나타 쇼요의 와카토시.




2.


짜리몽땅한 다리로 한 걸음을 내걷는다면, 우시지마는 세 걸음을 더 나아가고 있었다.

살랑이는 당신의 옷 끝자락이라도 잡아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우시지마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나쁜 바람은 아니라 생각했다. 전국대회 우승 같은 거창한 바람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그림자만이라도 밟고 따라가고 싶었다. 그 뿐이었다.


“히나타?”

“…아, 죄, 죄송해요 스가선배.”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냥. 히나타는 달싹이는 입술을 검지와 중지의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가뭄이 찾아온 것처럼 갈라진 입술은 형편없기 그지없었다. 스가와라는 히나타의 행동을 보다 땅이 꺼져라 큰 한숨을 쉬었다. 히나타는 그런 스가와라의 반응에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어 할 거면서, 왜 헤어졌어.”


그러게요. 히나타는 앞에 놓인 커피잔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와카토시는 자신을 쏙 닮은 아들을 낳지 않을까요?”

“…히나타.”

“아마 잘난 사람이니까, 어떤 곳에 가도 여자들이 들이댈 거예요.”


상상하고 싶진 않은데 참 괜찮을 거 같단 생각도 들었다. 우시지마의 멘션에 있던 유년 시절 사진들을 볼 때 마다 히나타의 가슴은 첫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한 없이 두근거렸다. 우시지마도 이렇게 작은 시절이 있었구나. 지금보다 눈매가 덜 찢어졌네요? 히나타는 까르르 웃으며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그런가. 우시지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진 한 장을 꺼내 골똘히 바라보았다.


ㅡ응, 지금은 엄청 눈매가 사나운 걸요?

ㅡ그래서 싫은가?


히나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완전 좋아요.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목을 끌어안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우시지마는 큼직한 손으로 히나타의 뒷통수를 감쌌다. 머릿결 사이로 들어온 우시지마의 손가락에 히나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와카토시, 손이 엄청 커요.


그래. 우리에게도  그런 행복한 감상에 젖는 적이 있었다. 히나타는 슬픔이 묻어나는 걸 여실히 비추는 커피잔을 밀어냈다. 스가와라는 잔을 밀어낸 채 옅게 떨고 있는 히나타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스가와라의 손이 히나타의 손등을 토닥토닥 어루만질 뿐, 그 이상 언어적인 위로는 오고가지 않았다.




3.


신문이며 Tv, 모든 매체에선 우시지마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의 배구에만 관심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모든 이들은 우시지마의 사생활, 연애사까지 파고 들려 하고 있었다. 그럴 때 마다 히나타는 몸을 웅크린 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자취를 감추려 애썼다. 본디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과거의 히나타 쇼요’ 도 우시지마와 같이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편이었겠지만, 열등감과 현실감이 적절히 길러진 ‘현재’의 히나타 쇼요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은 이제 빛을 잃어버린 별이었고, 우시지마는 더 찬란히 빛나게 될 별, 아니 행성이라고 비유하면 좋을까.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되었다. 게이라고 소문이 난다면 평판이 나빠질게 뻔했다. 날이 지날수록 히나타의 행동 가짐이 더 조심스러워졌다.


그런 히나타 쇼요를, 모두의 이목이 쏠린 우시지마는 볼품없는 히나타 쇼요의 어떤 모습을 보고 사랑했을까. 패기롭고 자신감이 넘치던 때와 달리 우중충하고, 덜 빛나는 아이가 되었는데. 지금의 수식어는 추락한 까마귀. 일개 대학생. 카페 아르바이트생. 딱 그 뿐인데.


ㅡ와카토시.

ㅡ무슨 일이지.


그래서 히나타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소녀와 같은 감성에 마음 한 편이 젖을 때 마다 물어보고 싶었다. 와카토시, 왜 나와 교제를 하고 있나요? 무슨 모습을, 어떤 매력을 내게서 찾았나요? 나보다 더 잘난 사람들이 널리고 깔렸는데 왜 하필 나였나요?


ㅡ쇼요.


그렇게 속으로 되묻다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이런 미련하고 문드러진 속내를 솔직히 털어놓고 물어보면, 그가 사실 난 널 좋아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할까봐 두려웠다. 히나타는 어금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녜요.




4.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때, 히나타는 두 손을 우시지마의 목에 걸쳤다. 손가락에 힘을 꽉 준 채, 갓 태어나 생존을 갈구하는 행위를 하는, 모로 반사를 하는 아이처럼 떨어지지 않으려했다. 그럴 때 마다 우시지마는 자신의 목에 걸린 히나타의 두 손을 풀어내 손에 깍지를 끼고 관계를 이어갔다. 교성이 아닌 울부짖음에 가까운 신음소리와 꺽꺽 울어대는 소리는 공기가 눅눅한 멘션 안을 웅웅 울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여느 연인들처럼 다정한 말을 뱉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시지마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어찌 입이 헤질 정도로 달달한 멘트를 할 수 있을까? 평소처럼 쇼요라고, 아니. 하다못해 히나타라고 불러주면 좋을 텐데 그 마저도 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관계를 할 때 행복감에 젖어들어 정신을 못 차린다 하였는데, 왜 저는 그러지 못하는지. 히나타는 자신의 약아빠진 정신 상태를 탓하며, 그저 탄탄하게 박힌 굳은살들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며 울음을 토해냈다.


가끔 히나타는 실눈을 떠 저에게 집중하는 우시지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고요함을 유지하는 카키색 눈동자는 감겨진 지 오래였다. 집중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달뜬 숨을 내 뱉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멋있고, 또 잘생겨서. 그래서 히나타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붙잡아보려 하지만, 깍지가 끼워진 채 결박되어진 손은 자유롭지 못했다. 히나타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와 함께 히나타는 다시 눈을 감곤 했다. 와카토시, 와카토시. 그의 이름을 절절히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5.


현관 비밀번호는 우시지마의 생일이었다. 히나타는 우시지마의 생일로 해두었던 걸 자신의 생일로 바꾸었다. 그러곤 집 안 곳곳에 놓여진 우시지마의 흔적을 재활용 봉지에 하나 둘 씩 담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은 선반 위에 사진이 끼워진 액자들이었다. 액자와 사진을 분리해내 조심스럽게 봉지에 넣었다. 그 다음은 옷장에 걸려있는 몇 없는 그의 옷자락들, 짝을 찾지 못해 한 개씩 널브러진 양말들, 화장실에 있는 그의 칫솔, 양치컵. 히나타는 거침없이 물건을 봉지에 넣었다. 그러지 않으면 버릴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썼던 밥그릇과 국그릇, 수저도 조심스럽게 넣었다. 생각 이상으로 버릴 물건이 많았다. 적당히 정리를 하고 나서 멘션 안을 둘러보니 허전해진 풍경에 히나타는 허탈한 미소를 자아냈다. 꽉 차보이던 멘션 안이 이렇게 공허해질 수 있을까. 히나타는 이 환경에 어떻게든 적응해내리라 다짐하며 쓰레기 봉지를 내다놓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우시지마의 흔적을 없애는 걸 도와주겠다는 마냥 히나타를 맞이해주었다.




6.


“10번,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딱하지?”


히나타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 찾아온 텐도는 여전히 붉은 빛을 띤 머리를 바짝 세우고 다녔다. 히나타는 고개를 살짝 까닥이곤 잔에 샷을 내렸다. 텐도는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히나타의 행동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텐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텐도의 음료가 담긴 잔을 진갈색 쟁반에 담은 채 히나타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힘든 결정이었을 건데, 고마워.”

“힘들지 않았어요.”

“정말?”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면 더 비참하잖아요.”

“그건 그래.”


히나타는 텐도의 앞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빼 자리에 앉았다. 텐도는 예전과 다름없이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히나타는 그런 텐도를 건조하게 몇 초간 응시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에선 솜털 같은 하얀 눈이 펑펑 쏟아내려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내가 밉니?“


텐도의 말에 창 바깥을 초점 없이 바라보던 히나타가 고개를 돌렸다. 밥을 제대로 챙겨먹고 다니지 못한 것이었을까,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볼살이 더 많이 빠져 헬쓱해져버린 얼굴이 여간 안쓰럽기만 했다. 텐도는 굳게 닫혀,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히나타를 향해 입을 뗐다.


“드라마에서 나올 법 한 시어머니 역할을 한 거 같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텐도는 문득 3년 전, 텁텁한 공기와 땀에 절어 미끌미끌한 소리를 내는 코트 위에 있던 작은 까마귀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때는 비상하는 까마귀가 저를 노려보았건만, 이젠 추락해버린, 날지 못하는 까마귀가 미동도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차라리 버럭 화를 내주면 좋으련만. 그러면 자신의 마음이 한결 편해질 것 같은데. 마음 생을 단단히 시킨 죄 값을 달게 받으라는 것일지도 몰라 텐도는 씁쓸히 웃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향긋한 원두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하지만 와카토시군, 이번 기회를 놓치면 꽤 타격이 컸을 거야.”

“…….”

“미안하면서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히나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커리어가 멈추었다 해서 우시지마의 커리어까지 제자리에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이제 일개 대학생일 뿐이고, 우시지마는 세계무대에 발을 디딜 인물이었다. 히나타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현실감을 꾸역꾸역 짓누르며 입을 떼어냈다.


“와시죠 감독님의 말이, 맞았으니까요.”


ㅡ있는 힘껏 너를 부정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단다.

히나타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우연찮게 길가에서 마주친 와시죠 감독과의 대화를 회상했다. 와시죠 감독은 히나타의 손에 무언가 빽빽이 적힌 수첩과 따뜻한 코코아 캔을 양 손에 하나씩 쥐어주었다. 하얀 입김만 뿜어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히나타를 향해 와시죠는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의 너는 분명 1학년 때 보다 강해졌지만, 과연 대학에서, 사회에서 널 받아줄 지는 여전히 의문이로구나. 그 당시 히나타는 악을 쓰며 와시죠에게 발악했다. 전 우시지마씨 처럼 일본을 대표하는 사람이 될 거예요! 두고 보시라고요! 히나타는 그 때를 떠올리자 당장이라도 드러누워 몸을 덮은 이불에 발을 뻥뻥 차고 싶어졌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감독님의 현실성은 정확했으니까요.”


어른 말씀은 틀린 게 없다더니, 사실이었나 봐요. 히나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텐도는 저를 바라보지 않는 히나타를 향해 무어라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죄인은 말이 없는 법이었다.




7.


“히나타, 몸이 안 좋아?”

“으응, 왜?”

“너 얼굴 엄청 빨개.”


세토의 말에 히나타는 두 손을 양 뺨에 가져다대었다. 살짝 열이 오른 뺨을 만지작거리던 히나타는 히죽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냥 뜨거운 히터 바람이 직선으로 쏘아져서 그런 거라며 변명을 둘러대었다. 머리가 지끈 아파왔다. 직감적으로 감기에 걸린 걸 알 수 있었지만 아르바이트 시간을 채우지도 않은 채 조퇴를 할 염치는 없었다. 세토의 집요한 시선이 히나타의 뒤를 끈질기게 따라왔지만 히나타는 애써 무시하며 손님들의 주문을 하나 둘 씩 받아냈다.


“어, 히나타. 저 사람 그 사람 맞지?”

“누구?”

“저기 화면에서 나오는 국대!”


저 사람, 국가대표 우시지마 와카토시 아니야? 세토는 들뜬 목소리로 TV매체에서 나오는 우시지마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히나타도 배구를 했다고 들었는데, 저 사람 유명했어? 키도 엄청 크고 힘도 세다던데…. 히나타의 귀에서 점점 세토의 목소리가 흐리게 들려왔다. 동시에 귓가에 이명이 퍼졌다. 삐이이이이, 소리가 거슬려 히나타는 샷을 내리기 위해 잡고 있던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내 귓가에 가져갔다. 몇 초간 귀를 막고 있자 이명이 줄어들어 손을 떼어내려던 순간, 히나타의 귓가에 작은 속삼임이 들려왔다.


ㅡ 참 잘했어요 히나타 쇼요, 넌 우시지마 와카토시의 앞길을 트게 해준 위대한 인물이 되었답니다.


조롱 섞인 웃음소리를 내며 들려오는 소리는 다름 아닌 히나타의 환청이었다.




8.


펄펄 열이 끓어올랐다. 그래서 히나타는 자신과 다르게 반짝반짝 빛나는 핸드폰 화면에 손을 가져갔다. 아르바이트를 하루 빼야겠다고 연락을 넣은 후 그대로 핸드폰을 엎었다. 이 휴식을 방해받기 싫어 진동으로 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색색 몰아쉬는 숨소리와 차디찬 냉기만 가득한 멘션 안에서 히나타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외로운 타지에서 아플 때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 아빠와 같은 가족들이라는데. 이상하게 히나타는 우시지마가 떠올랐다. 헤어져버린, 더는 이 곳에 찾아오지 않을 우시지마 와카토시. 히나타는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이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그리워하는 이 꼴이 우습기만 하다. 당장이라도 타버려 잿더미가 되어 사라질 것 같은 목을 축이기 위해 손을 뻗어 물병을 들어올렸다. 땀에 축축히 젖은 손가락에 의해 물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탕, 소리와 함께 병 안에 들어있던 물들이 바닥을 적셔갔다. 히나타는 눈을 게슴츠레 떠 저 멀리 뻗어나가는 물 위에 손을 얹었다. 열이 잔뜩 오른 히나타의 오른쪽 손에 차가운 냉수가 닿자, 히나타의 몸이 흠칫 떨리다, 다시 안정을 찾은 듯 축 늘어졌다.


“와카토시.”


이 자리에 없는,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을 우시지마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볼품없기만 했다. 다행이다.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봤으면 얼마나 추한 아이처럼 보였을까?


그의 이름을 나즉이 부르다, 서랍 밑에 보이는 양말 한 짝이 보였다. 자신의 발 사이즈보다 커 보이는 저 하얀 양말은 분명 우시지마의 것이리라. 몸이 다 낫고 나면 저 양말부터 버려야겠단 생각과 함께 두 눈을 몇 번 더 꿈벅였다. 점차 흐려지는 시야와 속눈썹에 들러붙은 눈꼽과 눈물방울들이 거슬려 히나타는 자물쇠를 걸 듯 굳게 두 눈을 감았다.




9.


“쇼요.”


잘못들은 거라 생각하고 싶었다. 저의 손을 맞잡은 커다란 손이 환각이고, 다정히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가 환청이라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 히나타 쇼요의 바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히나타는 베개에 고개를 더 깊숙이 파묻었다. 조금이라도 더 고개를 틀어 눈을 떴다면 우시지마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땀범벅에, 몰골이 말이 아닌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전 애인에게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요.”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서 네가 아프다고 말해주더군.”

“왜요.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비밀번호를 바꾸었더군.”


히나타의 정수리에 우시지마의 손이 닿았다. 히나타는 흠칫, 몸을 떨었다. 동시에 고르게 쉬던 숨결도 엇박자를 이루었다.


“…헤어졌잖아요.”

“왜 아픈가.”

“아플 수도 있죠. 춥잖아요. 감기 걸리기 좋은 날씨고.”


겨울이잖아요. 히나타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앙상해져버린 검지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우시지마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히나타는 손을 내리며 부루퉁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국 갈 준비는 안 하고, 전 애인 집에 와서 뭐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한가하게 지내도 되는 거예요?”

“가지 않기로 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우시지마의 대답에 의해 히나타는 피곤함과 고통으로 무장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꼿꼿이 세워진 상체는 살이 빠져 헐렁해진 후드티의 어깨부분이 살짝 흘러내렸다.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흘러내린 후드티의 목부분을 살짝 부여잡고 똑바로 끌어올려주었다. 히나타는 인상을 가득 찌푸린 채 따스히 다가온 우시지마의 손길을 냉랭히 쳐내었다.


“왜요. 왜 안 가요. 인터뷰에선 가기로 했다고 했잖아.”

“…….”

“벙어리에요? 왜 대답을 못 해요? 왜 안 가냐고요!”

“나는 헤어지지 않았다.”


우시지마의 곧은 시선이 히나타를 향했다. 씩씩대는 히나타의 등에 우시지마의 손이 올라갔다. 토닥이는 손길에 히나타는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별을 고했잖아. 그럼 끝인 거잖아. 왜 헤어짐을 고하던 그 날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나에게 이러는 건데요? 날카로운 독침을 가진 말벌처럼 쏘아대고 싶어 입을 떼었지만 따가운 선인장을 가져다놓은 것만 같은 고통을 느껴 히나타는 오른손을 목젖에 가져다대었다. 따가워, 아퍼. 우시지마는 앙상해져 힘줄만 도드라진 히나타의 오른손을 포근히 감쌌다. 그 손길에 히나타는 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름과 동시에,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히나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린 헤어지지 않았다. 쇼요.”

“아니요, 우린 헤어졌어요.”

“그럼 정정하지. 난 헤어지지 않았다.”


히나타는 우시지마를 밀어내기 위해 잡혀있던 오른손을 빼내려 했다. 우시지마는 더는 제게서 도망치지 말라는 듯 히나타의 손을 놓아주지 않으려 힘을 꽉 주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걸까, 손 뼈마디까지 저려오는 아픔에 히나타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지 말아요 와카토시. 날 흔들지 마.


“오이카와가 말하더군. 내가 잘못한 게 있어서 헤어지자고 말한 거라고. 그래서 물으러 왔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줄 수는 없겠나? 히나타 쇼요.”


당신이 잘못한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내가 걸림돌이니까, 당신의 앞길을 막는 존재니까. 그러니까.


“이러지 말….”

“더 노력하겠다.”


우시지마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왔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열에 달아오른 히나타의 얼굴 전면에 퍼져나갔다. 남은 왼 손으로 우시지마의 얼굴에 가져가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등을 쓸어대던 손으로 히나타의 왼 손마저 깍지를 껴 손을 아래로 내리게 만들었다. 다리엔 신경들이 똑 끊긴 듯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온 몸을 비틀어 우시지마를 부정하고 싶었지만 우악스러운 그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말라비틀어져 각질이 군데군데 일어난 히나타의 입술과 다르게 보드랍고 촉촉한 우시지마의 입술이 닿았다. 깍지를 꼈던 두 손을 풀어낸 그의 손이 히나타의 양 뺨에 닿았다. 아아, 당신의 못난 연인은 결국 당신의 발목을 붙잡고 마네요. 히나타는 꾹꾹 참고, 또 견뎌내려 했던 뜨거운 눈물이 마침내 볼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내렸다. 



*


그냥 진짜.. 진짜 취향 가득 담긴 우시히나입니다

노래도 취향 분위기도 취향..

희희... 즐겁게 읽어주세요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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