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복  숭  아  고  르  기

ㅤ첫 번째로 지망했던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합격한 후 일찍이 대반大般시로 상경하기로 했다. 내 오랜 고향은 시골 중의 시골로, 어머니는 돌밭에 괭이질을 하며 아버지 없이 자란 외아들을 홀로 키우셨다. 기차에 오르기 직전에도 홑이불을 바리바리 싼 가방과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복숭아를 기어코 한 소쿠리 챙겨주시며 있는 자식들처럼 차로 바래다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셨다. 어머니께서는 평생 그게 한이셨는가 보다. “제 걱정은 마세요, 어머니. 나 이제 다 컸어. 자리 잡으면 모시러 올게요.” 어머니의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며 의례적으로 이야기하자, “얘는, 됐다. 나는 도시 가면 가슴이 답답해서 못 살아. 사람이 흙도 만지고 밟고 해야 좀 사는 것 같지. 어서 가렴. 편지 꼭 하고.” 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거짓말. 나는 다섯 살 무렵에 화장대 밑에 묻어둔 일기장을 본 적 있다. 

ㅤ그녀⋯⋯ 나의 어머니는 남들처럼 세련된 옷을 좋아하는 소도시 출신 여학생이셨다. 나를 뱃속에 품기 전에는 제 손으로 풀 한 포기 베어본 적 없었다. 아마 나의 추측은 정확할 것이다. 일기장을 열 장 넘길 때마다 하나씩 껴있던 낡은 사진 속 어머니는 항상 비단으로 된 장갑을 끼고 계셨다. 눈 덮인 산수유 같은 머릿결, 정면을 곧게 바라보고 있는 눈은 목 놓고 울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도도했다. 그래. 어머니는 편지하라는 대목에서 꼭 바람이 부는 언덕 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목소리를 떨었지만, 끝내 울지 않으셨다. 

ㅤ잘 깎은 대추같이 미끈한 도시 남자를 전부 마다하던 이 도도한 여자가 남쪽 끝으로 내려와 볕에 그을린 시골 청년을 처음 봤을 때 얼마나 매력적으로 다가왔을는지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딱딱한 서류 가방을 메고 일 분 간격으로 시간을 체크하면서 젓가락 대신 나이프와 포크를 즐겨 쓰는 도시 남자들. 좀스러운 시골 남자들이 밥알 속 콩을 고를 때 그들은 값비싼 식기를 부딪치며 피가 뚝뚝 흐르는 동물의 살점을 썰어낼 것이다. 눈물샘은 마른 연못이 되어 작은 물고기 하나 살지 못한다고 해도 그들은 억센 것을 먹지 않았다. 천한 것을 먹고 자란 남자는 본성도 천하다. 

ㅤ가엾은 나의 어머니.

ㅤ이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는 여자는 시골에서 보낸 시간이 도시에서 자란 시간보다 긴 데도 한사코 이강二江 말씨를 쓰지 않으셨다. 폐쇄적인 시골 동네에서 어머니의 존재는 이질적이었지만,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동정심 탓이 아니다. 숯처럼 까맣게 타버린 동네 사람들이 보기에도 눈처럼 하얀 어머니는 신성해 보였을 것이다. 시월에도 눈과 얼음으로 덮인 초원에 사는 백록白鹿처럼, 그러기 위해 태어난 생명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무릎에 눕힌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닮아서 그런가, 네가 배 속에 있을 때 달콤한 백도를 밥보다 많이 먹어서 그런가, 있는 해 없는 해 다 받아도 얼굴과 머릿결이 우유처럼 희다. 때깔 한번 좋아라. 어쩜 네 아버지와는 그리 다르니.” 하고. 

ㅤ어머니, 나도 얼굴 까만 사람들이 싫어요.

ㅤ머릿속으로 투정 섞인 대답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잠이 들었다. 나의 자장가였다.


ㅤ나는 기차에 올라 가장 무거운 짐부터 헤쳤다.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가 눈을 떴을 때는 날이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검푸른 능선 너머로 새빨간 화염처럼 타오르는 석양을 한참 보고 있으니 갑자기 목이 말랐다. 어깨 쪽으로 머리를 기대며 자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다가 헤진 보자기에 싸인 소쿠리에서 복숭아 한 알을 조심히 꺼냈다. 그리고는 소매 끝으로 털을 쓱쓱 닦아낸 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ㅤ윽, 떫어라.

ㅤ시큼한 맛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딱딱해서 즙이 흐르지도 않았다. 색만 달처럼 희고 예쁘지, 아직 여물지 못한 복숭아였다. 새벽부터 읍내로 나가 제 아들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을 정성껏 고르셨을 생각에 억지로 몇 입 더 먹다가 못내 소쿠리에 올려놓았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기차와 군데군데 깨물린 복숭아 한 알. 애처롭게 보인다. 물 대신 먹은 건데 입이 더욱 텁텁해졌다. 우리 어머니는 시골에서 그리 오래 사셨으면서 맛있는 복숭아 하나 고를 줄 모르신다. 

ㅤ내가 고른 것은 달랐을 텐데. 




ㅤ나는 대학가에서 꽤 떨어진 신축 빌라에 짐을 푼 뒤로 휴학 한번 없이 학교에 다녔다. 졸업 후 친구들이 하나, 둘씩 직장 근처로 집을 옮기거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거처를 옮기지 않았다. 

ㅤ왜냐하면 이곳에는 고양이가 많거든. 

ㅤ나는 고양이를 좋아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평생을 저 홀로 깔끔하게 살아가는 이 도도한 생명체는 분명 매혹적이지만, 유연한 몸짓과 말랑말랑한 얼굴 뒤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어떤 이는 고양이를 설익은 복숭아에 비유하고는 했었다. 물기 한 방울 없이 보송보송하게 털이 돋은 몸체, 고운 때깔 덕분에 한 번쯤 손을 뻗어 만지고, 입에도 넣어보고 싶지만, 섣불리 다가가면 혼이 난다고. 혀를 할퀴는 떫은맛에 인상을 찌푸리게 될 거라나.

ㅤ그 사람은 우리 어머니처럼 복숭아를 고를 줄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ㅤ내 손을 가장 많이 타는 고양이는 온몸이 검은색이다. 처음 봤을 때는 동네 꼬마들에게 돌을 맞았는지 몸이 성치 않더니 밥을 몇 번 준 뒤로 눈에 띄게 포동포동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몇 발자국 다가서려고 하면 부리나케 하악질을 해 건드릴 엄두도 나지 않았던 녀석이다. 몇 해를 보냈을까, 얼마 전에는 공사장 근처에 살림을 차려 제 새끼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람 손에 닿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아이가 먼저 이마를 기대는 것을 보며 다짐했다. 올해 겨울만 넘기자. 나는 공사장 컨테이너 옆에 물이 담긴 일회용 그릇을 내려놓으며 점퍼 주머니에 있던 복숭아 한 알을 꺼냈다. 

ㅤ흠이 없고 털이 고르게 나 있는 것. 오래 두고 먹을 때는 과육이 단단한 게 좋아도 당장 꺼내 먹기에는 조금 무른 맛이 있어야 한다. 직접 만져보면 어떤 게 적당히 무른 놈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색이 백묵처럼 희기만 해서는 아직 맛이 안 든 복숭아다. 보기에는 안 좋아도 색이 붉게 어두워야 한다. 크기는 탐스럽게 클수록 좋다. 내 복숭아는 설명과 정확히 같다. 설익은 것에 몇 번 속아본 사람들은 결국 ‘고양이 비유’를 꺼내며 지레 피하게 된다. 맛있는 과일을 하나 잃는 건 슬픈 일이다. 나는 이제 같은 실수는 범하지 않는다. 이건 필시 달콤할 것이다. 텁텁한 껍질 속 농익은 과육이 얼마나 향기로울지, 나무에서 난 것은 열매가 아니라 꿀이었나 싶을 정도로 얼마나 시리게 달콤할지, 물오른 복숭아를 한 입 크게 베어 무는 절경을 상상하며 계속 이미지를 쌓아가다 보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순간이 온다. 

ㅤ어느새 컨테이너 밑에서 나와 혀끝으로 물을 핥는 검은 고양이를 보면서 이로 과육을 뭉갰다. 사방으로 터지는 과즙이 황홀했다.

ㅤ이것이, 나의 복숭아 고르기다.



2장,
검  은  고  양  이

나는 올해 열일곱이 된, 한 학급의 반장이다. 이름은 사필안. 어머니께서 너는 남에게 반드시 편안한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어서 그런지, 나는 정말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불평을 하지 못하는 성격은 조금 골치다. 

ㅤ우리 학교 교복은 재미가 없다. 하복만 해도 카라가 달린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가 디테일의 전부다. 교복 치마도 같은 색이었는데 우리 학교 애들은 남녀 구별 없이 대부분 바지를 입었다. 시골 학교라 야외 활동이 많아서였다. 해가 좋은 날이면 선생님과 함께 운동장에 나가 밑동이 가장 굵은 나무 그늘 밑에 모여서 공부를 하곤 했다. 

ㅤ계절이 바뀌어도 교복에 변주는 없었다. 가을이 오면 검은색 조끼를 하나 덧입고, 날이 더 추워지면 쥐색 재킷을 걸쳤다. 오죽하면 동네 어른들이 우리를 보고 까마귀 온다며 놀려댈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평범한 이미지가 교복에는 퍽 어울렸는지 어른들은 나에게만 한 마디를 꼭 덧붙였다. 필안이 너는 얼굴이 희어서 그런지 네가 입은 것은 참 예뻐 보인다, 하고. 

ㅤ나는 여느 이강 사람들과 달리 말투에 성조가 없다. 이 단조로운 화법은 어머니에게 받았는데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의외로 인기가 좋았다. 텔레비전에서나 본 도시 남자들 분위기를 풍긴다는 게 그 이유였다. 나에 대해 오가는 말들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도화지처럼 하얀 얼굴과 머리카락은 촌에서 튈 수밖에 없고 사투리를 쓰지 않아 눈총을 받을 법도 한데 나의 평이한 성격 덕분에 배로 호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골 남자 같다는 말⋯⋯ 누가 좋아하겠어? 물론, 내 이미지가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니다. 

ㅤ하루 수업이 전부 끝났다는 것을 알리는 종이 울려 퍼졌다. 나는 종례 시간 전까지 자습하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내린 분부였다. 하지만, 이 평화도 얼마 안 가 깨질 것이다. 

ㅤ“아, 형! 저한테 맨날 왜 그러세요.”

ㅤ“⋯⋯그냥 형 줘. 젠장, 자다 깼잖아.”

예상은 빗나가지 않는다. 나는 교탁을 목전에 둔 자리에서 뒤를 돌아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주시했다. 뒷문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세 자리. 가장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분류해놓은 곳이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는데도 자리의 주인이 바뀐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윌리엄과 나이브, 그리고⋯⋯.

“치하한 해끼.”

윌리엄에게서 뺏은 빵을 입 안 가득 물고 있는 까만 남자. 범무구다. 


나는 저 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마 알고 있는 사람이 더 드물 것이다. 형은 말수가 지나치게 적어서 불량스러운 복학생 무리나 저 둘이 아니면 다른 사람과 말을 섞는 일이 없었다. 오죽하면 수학 선생님이 일어나서 문제의 답을 말해보라고 하셨을 때도, 다시 앉으라는 말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우리보다 두 살이나 많은 특이한 형에게는 여러 풍문이 돌았다. 

ㅤ한 번은 부모님이 안 계셔서 감자만 먹고 다니는 거라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우리는 항상 도시락을 들고 다녔는데 저 형이 감자 말고 다른 음식을 꺼낸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도 키는 우리 반에서, 아니, 전교에서 가장 컸다. 몸도 뛰어나게 좋았다. 형을 보고 있으면 잎을 길게 늘어뜨린 버드나무가 떠올랐다. 몸집은 서양인처럼 거대한데 뼈대가 동양적으로 낭창낭창해서 버드나무가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범무구 형 때문에 우리 반에서는 한때 감자 붐이 일어났다.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도시락으로 감자만 싸 오기 시작했는데 성장기의 학생들에게 배고픔을 참는 건 역부족이었는지 일주일 천하로 끝이 났다. 

ㅤ대도시에서 모델 일을 하다 온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인기가 너무 많아서 학업을 병행할 수 없어 입학을 제때 못한 거라고. 주로 텔레비전 속 잘생긴 가수를 좋아하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었다. 형에게는 소규모 팬클럽도 있었다. 그 아이들 입에서 범무구 형이 잘생겼다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나는 문제를 풀다 말고 뒤를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이마를 덮은 짧은 흑발. 금색 홍채를 감싸고 있는 나른한 눈매는 눈썹 가까이 올라가 붙어 날카롭게 보였다. 얼굴형은 부드러운 편이었는데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성숙한 분위기가 남자답게 느껴졌다. ⋯⋯아. 

황급히 앞을 바라보면서 다시 연필을 쥐었다. 방금 저 형이랑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고 했는데 심장이 잘게 요동쳐서 흑연이 문제집 위로 자꾸만 미끄러졌다. 엮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부가 지나치게 어두워서 싫었다. 꼭 밤을 떠오르게 하는 색이었다. 이강 사람들이 한여름에 밤을 패며 통발을 건다고 해도 저렇게까지 타지는 못할 것이다. 형은 그 정도로 까맸다.

하지만, 종례가 끝나면 형과 대면해야 한다.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방과 후 학습 지도를 맡겼기 때문이다. 반 일등과 반 꼴찌를 묶어놓은 것인데 일등은 나, 사필안이었고 꼴찌는 범무구 형이었다. 이 새로운 강령이 내려오자 윌리엄은 한 문제 차이로 남는 걸 면했다며 속도 없이 웃었고, 자고 있던 나이브에게 뒤통수 한 대를 세게 맞았다. 덩치는 범무구 형 다음으로 큰데 나만 한 나이브에게 얻어맞는 꼴이 때로는 희한했지만,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ㅤ마지막 경례를 마치자 아이들은 빠르게 교실 밖으로 내달렸다. 곧장 읍내로 가서 오래된 계란 전병을 나눠 먹거나 돈이 조금 웃도는 아이는 옆 가게 화궈 빵집으로 가 커스터드 빵을 사먹을 것이다. 나는 문제집을 열심히 풀면서 여전히 목석처럼 굳어 있었다. 이제 곧 둘만 남을 것이다. 불안감은 점차 증폭되어 언젠가 한 귀로 듣고 흘렸던 나쁜 소문이 떠올랐다. 

이강인들은 시골 사람들답게 미신을 섬겼다. 특히 검은 고양이를 보면 “에이, 재수다. 퉤!” 하고 바닥에 침을 한 번 뱉는 게 일종의 관례였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들어온 액운을 쫓는다고 믿었다. 고양이를 무척 좋아하는 나도 까만 녀석을 만나면 가던 길을 빙 둘러서 피했다. 길쭉하고 까만 몸에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슬처럼 검은 줄이 박힌 노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정말 저 작은 몸에 도깨비가 살고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는 흘려듣던 이강 어른들의 말인데 무서운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 쏙쏙 박히는지 모르겠다. 몇몇 남학생들은 범무구 형을 보며 저 악한 도깨비 이야기를 했다. 노란 눈과 까만 피부는 확실히 길에서 봤던 검은 고양이와 닮아 있었다. 

“저기.”

바로 옆에서 그늘진 목소리가 들렸다. 음습한 그림자처럼 살이 드러난 팔뚝부터 반대쪽 어깨까지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낮은 음성. 나는 비어 있을 옆자리를 향해 뻑뻑한 고개를 돌렸다. 있다. 언제나 뒷자리에 있던 형이 지금은 내 옆에 있다.

ㅤ가까이에서 본 그는 멀리 있는 발치에서 가늠하던 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벽면의 창 하나가 넓은 어깨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단정하지 못하게 교복 단추를 풀어 건강하게 드러난 목젖과 쇄골이 보였다. 어른⋯⋯ 같았다. 형은 자신이 가지고 온 종합 문제집을 내밀었다. 책을 두 손으로 쥐고 얼굴에 붙여서 가늘게 뜬 눈만 내밀고 있었다.

“이거 풀면 된다고 선생님이 주셨어. 여기에 앉으면 될까.” 형이 조용히 말했다.

“그, 그럼요. ⋯⋯형.”

나는 선풍기에 입을 대고 말하는 것처럼 흔들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무서운 외모와 반대로 조심스러운 성격인 것 같았다. 말투도 그렇고, 상상하던 것과 달라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분명 자기 친구들과 있을 때는 거칠게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착각이었을까. 

형이 가져온 문제집은 난이도가 기초적이어서 시험에 중요한 문제는 찾아볼 수 없었고 같은 문제에 약간의 변형이 반복되는 얇은 책이었다. 이건 방문 학습지를 풀기보다 쉽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학 과목을 풀고 있는 형을 바라봤다. 

도깨비다. 소문이 맞았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필통이 없다고 해서 빌려줬던 연필은 어디에 둔 건지, 범무구 형은 어느새 팔짱을 끼고 문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콧잔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열렬하게. 눈매가 더욱더 매섭게 올라가서 사람이 정말 악해 보였다.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피부색과 대비를 이루어서 더욱 선명히 빛났다. 원래 저렇게 뾰족했던가? 

고장 난 시계처럼 잠시 멈춰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대체 왜 저러고 있는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수학 선생님이 답을 구하라고 했을 때 칠판을 보면서 서 있던 그때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심하던 찰나에, 형이 다가왔다. 재빠른 고양이처럼. 나는 고개를 들었다.

팔월 중순의 해가 뜨겁게 저물고 있었다. 창가에서는 토마토 스튜처럼 녹진한 볕이 쏟아져 교실 전체가 주황색이었다. 오전 내내 햇빛을 반사하며 산뜻한 초록빛을 내던 벚나무는 이제 그림자에 먹혀 바람이 불 때마다 까맣게 흐늘거렸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등지고 있는 형이 허리를 숙여 얼굴을 내게 붙이고 있다. 형은 연필을 두툼한 아랫입술 밑에 붙이고 고개를 모로 눕혔다. 매섭던 눈매는 어느새 나른하게 풀려서 기묘한 빛을 냈다. 석양과 섞인 눈동자는 노랗다기보다는, 붉었다. 고개를 꺾은 방향으로 까만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필안아, 나 이거 모르겠어.” 

ㅤ형이 나의 이름을 입에 올린 건 처음이다. 똑같은 저음인데, 왠지 다정하게 들렸다. 어머니가 나를 부를 때 느꼈던 애틋한 감정이 배 속을 간지럽혔다.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도, 애초에 형이 던진 질문도, 모두 흐물흐물한 반죽처럼 녹아 내려 기억으로 남지 못했다. 

기억하는 것은 오직 그날의 절경뿐이다. 형, 나무, 석양, 바람 냄새 따위가 혼합된 그날의 절경.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타인에게 이강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품었다. 여느 이강인보다 더욱더 이강인다운 남자에게.

나와, 어머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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