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60307  / 아느님 리퀘: '매일 당신의 등을 바라보기만 하는 일상이라 울고 싶어요. 

+  작중에서 왠지 사망 처리된 쿠로 아버님은 살아계십니다 설정 착각에 대해 키류 가족에게 진심을 담아 사죄드립니다 



아이돌을 꿈꾸는 유메노사키의 학생으로서는 드물게도 키류 쿠로는 사랑받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사실 그는 아이돌을 꿈꾸었다기보다는, 충동적으로 그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중학교 삼학년 봄 불의의 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어린 여동생과 둘이 남아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반항아들의 대장 같은 위치였지만 그들은 쿠로의 싸움 실력이나 다른 학교 아이들이 지레 겁먹는 인상을 숭상하는 것 뿐 진실한 유대랄 건 없었다. 각별히 신경쓰겠다던 담임은 곧 눈코뜰새없이 바빠졌고 친척 아주머니의 전화도 뜸해졌다. 하지만 주변에 조금이라도 힘든 티를 내면 어딘가로 보내질 것 같았기에, 졸지에 가장이 된 열 다섯 살 소년은 매일밤 늦게까지 묵묵히 가정 책을 펴놓고 손을 베여가며 칼질을 연습하고 반찬을 만들고 물빨래를 하고 여동생의 튿어진 체육복을 수선하다 지쳐 잠들었다. 책임을 진다는 건 외로운 일이었다. 아무와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하루를 보낸 뒤 침대에 누우면 수십장의 벽돌이 가슴에 쌓인 듯 숨이 막혔다. 앞으로도 영영 이런 일상이 계속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아이돌 고등학교의 이야기를 들은 건 봄이 지나고 여름이 가을로 바뀌어가던 시기였다. 그날도 쿠로는 밤 늦게 거실에 다리미판을 펴놓고 앞치마를 입고 두 사람 분의 교복을 손질하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다시마 육수가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끓었다. 여동생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이리저리 채널을 바꾸고 있었다. 한참을 돌아가던 채널이 어느 순간 멈추더니 볼륨이 확 올라가고, 와아- 하는 커다란 함성에 쿠로는 저도 모르게 텔레비전 화면에 눈길을 주었다. 커다란 운동장처럼 넓은 객석을 채운 수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야광봉을 흔들고 있었다. 공연장을 한 바퀴 돈 카메라가 무대를 비추자 화려하게 재단된 의상을 입은 소년들이 땀에 젖은 채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텔레비전 하단에 자막이 지나갔다. ...는 유메노사키 학원 아이돌과의 남성 5인조 유닛으로... 요즈음 가장 사랑받는 그룹의 하나이다... 두 팔을 벌리고 객석의 열광을 만끽하던 소년들은 다시 무대를 뛰어다니며 팔을 휘젓고 노래를 불렀고 그들의 손짓과 목소리에 맞춰 맞춰 관객들은 계속해서 야광봉을 흔들었다. 무대의 화려한 조명. 번뜩이는 야광봉, 끊이지 않는 환호성, 쿠로는 눈을 찡그렸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미에 교복 와이셔츠가 치이익 소리를 내며 눌어붙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여동생이 말했다. "유메노사키래."

"유메노사키?"

"우리집 근처잖아, 바보 오빠. 지나가다 볼 수 있을까?"

무대에서 퇴장하는 아이돌을 아쉬운 눈으로 쫒으며 여동생은 중얼거렸다. "우리 오빠도 아이돌이었으면 좋겠다......"

그 말은 일종의 자비로운 허락처럼 들렸다. 다음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쿠로는 아무도 없는 학교 옥상으로 도망쳐 시간을 죽이다 노을이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빈 컴퓨터실에 들어가 인터넷을 켰다. 사립 유메노사키 학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니 메인화면에 걸린 동영상이 그를 반겼다. 주머니에서 덜렁거리던 이어폰을 스피커에 꽂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학원이 자랑하는 아이돌과의 무대가 나왔다. 드림페스, 매치업, 어제 보았던 텔레비전 프로만큼이나 화려한 S1, 무대 한 가운데에서 특별제작된 의상을 입고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과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과 흔들리는 색색의 야광봉들...

지지직거리는 스피커의 잡음 가운데 쿠로는 자신의 빠른 심박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상의 마지막은 학원의 캐치프레이즈였다. 흰 배경에 굵직한 폰트로, '당신의 꿈을 이뤄드립니다, 사립 유메노사키 학원'

꿈.

쿠로는 저도 모르게 입안으로 중얼였다. 그 단어의 기묘한 잔향이 뇌리를 울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의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단어였다. 그는 어리고 부족한 가장이었고 절대로 이기적으로 굴어서는 안 됐다. 어린 여동생을 책임진다는 건 그런 뜻이다. 하지만... 하지만... '여동생에게 멋진 오빠가 되어준다'는 꿈이면 어떨까? 그런 꿈이라면 꿔도 되는 게 아닐까? 마우스를 쥔 열다섯 소년의 손이 조금 떨렸다. 그래, 이건 내 욕심이 아니야. 커서가 저절로 움직여 '입학전형'을 누른다.

키류 쿠로는 유메노사키가 어떤 곳인지, 성공한 아이돌은 얼마나 배출했는지, 자신에게 자질이 있는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충동적으로 입학 원서를 써 넣었다. 무작정 펼친 무예 퍼포먼스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왜 아이돌이 되고 싶냐, 라는 물음엔 교과서적인 답변밖에 하지 못한다. 사실 본심은, 남들 앞에서 말하기 부끄럽다. 스스로 들여다보기에도 부끄럽다. 그저 그는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삶이 싫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주셨던 사랑, 지금 자신이 여동생에게 주려고 노력하는 커다랗고 순수한 사랑을... 자신도 받고 싶었다. 그래 말하자면 그는 사랑받기를 꿈꾸었다. 화려한 무대 한 가운데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아이돌처럼.


하지만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고 다음 해의 그는 생각한다. 명성 높은 유메노사키 학원에는 오직 아이돌을 꿈꾸어 온 별 같은 아이들 천지였다. 순간의 충동으로 입학을 결정한 자신과는 결단의 무게도, 노력해온 시간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자의식을 키워가는 열여섯의 천성으로 그는 주변의 아이들을 계속 곁눈질하였다. 츠키나가는 음악의 천재였고 히비키의 화려함은 누구의 눈길이라도 사로잡으며, 텐쇼인은 제왕처럼 압도하는 힘이 있다. 하카제의 외모는 여동생이 보는 순정만화에서 방금 걸어나온 것 같았다. 모두가 각자의 재능으로 건강하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자신 같은 것은 이 학원의 오점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결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파죽지세로 학원을 제패한 오기인, 그에 도전하는 텐쇼인과 학생회, 매일매일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지만 관객들은 드라마에 열광했고 쿠로는 그 모든 이야기에서 한 발짝 비껴나 있었다. 방학이 지나자 전학을 가거나 중퇴하는 아이들이 생기고, 삼학년을 마치고도 연예계 문턱도 밟지 못한 채 회사원이 되었다는 선배들 이야기도 들린다. 학교는 끝까지 다닐 생각이지만 역시 난, 아이돌은 못 되겠지. 하고 쿠로는, 어느 유닛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일찌감치 귀가하며 그게 제 미래이겠거니 생각한다.

그러나 이학년의 여름, 항쟁의 시기가 저물어가는 때 뜻밖에도 텐쇼인의 오른팔이 그에게 손을 내민다. 왜 나 같은 것을 선택하는지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일본 전통을 컨셉으로 의상이 강점인 유닛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조금 납득한다. 그래, 그는 언제고 바느질에는 재주가 있었다. 매일밤 늦게까지 손가락을 찔려가며 재봉한 의상으로 치른 첫 공연은 생각보다 성황리였고, 학생회의 지원 하에 홍월은 학원의 넘버 투 유닛으로 올라간다. 유메노사키에서의 두번째 해가 끝날 즈음엔 의외로 홍월의 '팬'들도 생기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숨이 차게 달려온 누군가의 향수 뿌린 노트 맨 앞장에 자신의 사인을 해 주기도 하고, 심지어 잠깐이지만 텔레비전에도 출연했다. 여동생이 녹화해둔 비디오를 넣자 거실 텔레비전 가득 키류 쿠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여동생은 홍월의 포스터를 끌어안고 환하게 웃는다. 어라, 뿌듯한가? 나, 조금쯤은 아이돌이 된 건가, 라고 생각하지만 매일매일이 바쁘고 경황이 없어 그저 멍하기만 할 뿐이다.


*


처음으로 '아이돌'로서의 자신을 실감한 건 그 다음 해, 삼학년의 사월이다.

아직 입학식의 벚꽃이 다 지지 않은 봄날, 올해 '홍월'에 신입생은 없다는 하스미의 공지를 듣고 학생회실을 나오던 차였다. 새학기의 첫 드림페스 의상을 구상하며 걷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딱 눈이 마주쳤다. 넉넉하게 맞춘 듯 품이 큰 교복을 입은 일학년이었다. 까만 머리엔 붉은 브릿지를 넣었고 손엔 구겨지다시피 한 서류 한 장을 들고 있었다.

"'홍월'의 키류 쿠로 선배, 아니심까...?"

"...나다만."

"저, 저 지금 꼴로는 염치없지만, 저, 그래도, 아... 전 신입생 니구모 테토라임다!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인사를 받아보는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처음이다. 어쩔 줄 몰라하며 손을 가만 두지 못하던 그 애는 심호흡을 하고서야 제대로 말을 잇는다.

"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셔. 그냥 인사드리고 싶었음다, 일본 전통의 '홍월'은 정말 멋지고, 그 중에서도 키류 선배는 최고임다!"

쿠로를 올려다보는 그 애의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고 바늘로 찌르면 톡 터질 것만 같다. 쿠로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사이 그 애는 얼굴을 붉히며 도망가버렸다. 복도에 혼자 남은 쿠로는 자신의 뺨이 화끈거리는 걸 느낀다. 부끄러워하는 와중에도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맹렬한 금갈색 눈.
그런 시선을 받아본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그 애는 쿠로의 주변을 맴돌았다. 시선을 숨기지 못하고 어디서든 쿠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알고보니 그 날 그 애가 들고 있던 종이는 홍월 서류 불합격 통보서였다. 어디로 갈 지 방향을 잃은 걸 치아키가 데려갔단 얘길 들었는데 어찌나 쿠로만 쫒는지 유성대 사람들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폐부 위기이던 가라데부에도 들어와 단 둘만의 부를 이루게 되었다. 초심자의 흰 띠를 매고 기세좋게 발차기를 내지르다 뒤로 자빠지는걸 받아주니 예의 울먹거리는 얼굴로 '대장처럼 멋지게 하고 싶었음다' 한다. 그 애는 쿠로를 '대장'이라고 부르고 핸드폰으로 가라데와 홍월 동영상을 보며 복도를 걷는다.

이 학원에서 먼저 두 해를 보낸 선배의 눈으로 쿠로는 그 애가 좋은 아이돌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야성미와 화려함이 있고, 거침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솔직하고 자신만만하다. 대중에게 사랑받을 사람의 자질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가 어째서 쿠로를 따르는지?

왜 저를 사랑하는지?


두 사람의 일과가 일상으로 자리잡은 여름의 오후, 가라데부 활동이 끝나고 그 애는 꾸벅 인사하고 유성대 연습실로 향했다. 부실 문에 기대서 저만치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어느새 등 뒤에서 다가온 케이토가 그의 등을 두드린다.

"좋은 후배가 생겼구나, 키류. 저 녀석 너를 무척 따르는 것 같던데."

"...그래."

너를 동경하는 후배도 생겼으니 이제 좀 아이돌로서의 자각을 가져 보라고 예의 설교조로 타박하는 케이토의 말을 들으며 쿠로는 멀어져가는 일학년 아이의 등을 말없이 바라본다. '대장은 너무 멋있음다...' '최고의 남자임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저를 우상삼아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은 햇빛 같고 쿠로는 늘 눈이 부시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이 눈부신 감각이 좋았다. 조금 인상을 찡그리고, 점차 작아지는 그 애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그는 기도한다. 절대로 절대로 돌아보지 마라. 우상의 이런 얼굴을 봐버리면 그 애의 이유모를 사랑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
idol: (많은 사랑을 받는 대상인) 우상
우상 偶像: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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