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둠 속, 비로소 뜬 눈



매장소가 길게 꼬래를 내빼다 그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방 안. 엉망진창 색사의 흔적이 어지러이 남아있는, 짙게 깔린 어둠 속. 소경염이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온기라고는 남아있지 않은 텅 빈 방 안에는 생각에 잠긴 그의 숨소리만이 가끔 들릴 뿐이었다.

마음을 얻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매장소를 멋대로 굴려버릴 생각은 그닥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아는 체 하는, 능숙한 체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디에선가 치밀어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하였다. 소경염이 지닌 상처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한 매장소를 단지 밑도 끝도 없이 미워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만 평소의 소경염 답지않은 가혹한 짓을 해버렸다. 분노가 이성을 가려 흉폭한 본능이 치고 나와 버렸다. 세 치 혀로 세상을 농락하는 책사 따위에 매령의 악령이 어깨너머로 쏟아져나와 그를 깔아뭉개 버렸다.

너따위 존재 때문에 내 소중한 이를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어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임수가 마지 매장소 때문에 그리 된 것인 양, 구석으로 내몰아 짓밟아 버렸다. 12년전 입었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소경염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외로이 울고 있는 소년이 그리하라고, 기꺼이 매장소를 망가트리라고, 잔인하게 상처입히고 부셔버리라고 몇 번이고 충동질하였다.


"나 답지 않군..."


몸을 일으켜 그제야 옷을 하나씩 끼워맞춘다. 측비들과 밤을 보낼 때에도 이런 기분이 든 적은 없었다. 그를 손 안에서 마음대로 굴리는 것은 소경염 자신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망가지는 매장소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더욱 부서지는 것은 소경염이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상처입히려는 자와, 기꺼이 그 상처를 입으려는 자 모두 패하는 이상한 시합이었다. 본디 소경염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을 좋아하였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인생에서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느끼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더욱 흔들리는 자신의 여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흥분으로 쿵쾅거리는 심장이 그가 유일하게 세상에 발붙이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헐떡거리는 숨결과 흘러내리는 땀방울들이 아직도 임수 없는 세상에 빌어먹게도 살아있음을 알려주었다.

기분이 더럽다. 한없이 추락한다. 버틴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12년이었다. 행복하였던 10대를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행복하다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는 소경염이었다. 죽지 못해 산다. 그를 바라보고 있는 단 한 사람, 어머니를 생각하며 죽지 못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 밤 매장소가 가슴 속 어딘가를 살짝 건드리고 달아났다.  괘씸하게 은근슬쩍 상처입은 구석을 떠오르게 만들어놓고 내빼버렸다. 이런 기분을 만들어낸 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런 추악한 기분이 들게 한 그 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쫓아가서 박살내어 산산히 찢어 날려버릴 것이다. 이제는 지쳤다. 버티는 것도, 이런 삶을 살아가는 것도. 


"...그럼 어디 마음껏 휘둘려 볼까. 운명이라는 것에."


흔들리던 눈동자가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흘러가는대로 살기 싫으면 제 멋대로 역류하면 된다. 어차피 한 번 뿐인 인생에 후회는 한 번이면 족하다. 그 날, 떠나기 전 그의 손을 잡았더라면. 차마 붙잡지 못하였던 그 손을 다시 잡을 수 있다면. 임수와의 마지막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후회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어금니를 꽉 깨문다. 자신를 택하겠다는 매장소를 이용할 것이다. 모두를 부수어버릴 것이다. 왕권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복수만이 하고 싶을 뿐이다. 과정은 필요없다. 오로지 결과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위해서 소경염은 이제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지옥불에 삼켜저 새빨간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임수를 위하여. 그리고 기왕과 억울하게 죽어나간 모든 이들을 위하여.

어둠 속에 비로소 떠진 눈이 달빛도 없는 밤에 자신의 빛만으로도 크게 반짝이기 시작한다.



*



소택의 문이 닫혔다. 표면상으로는 매장소가 환절기에 감기가 심하게 걸려 앓아누웠다 하였다. 하지만 소택 식구들은 얼굴빛이 검다.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기별도 없이 나타난 린신이 매장소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도 그의 병증이 얼마나 깊은지를 짐작할 수 있는대목이었다.


"종주께서는 왜 깨지 않으시는거지?"

"글쎄."

"린 공자께 물어보면 답을 아시지 않을까?"

"그럼 내 한번 다녀와볼터이니, 계속 정리하고 있게나."


견평이 손을 옷자락에 쓱 문지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려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약초를 재서 나누는 손길이 느슨해진다. 걱정이 산처럼 쌓여있기 때문이다.

이틀전 한밤중에 린신이 종주를 마차에 태우고 왔을 때부터 소택의 분위기는 침울 그 자체였다. 정왕부에 가려 그리 긴장하고 나서는 종주의 모습을 보았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려강은 죄책감에 입술을 깨문다. 종주를 가까이 모시는 자의 책임을 제대로 다 하지 못하여 종주가 그리 된 것만 같다. 마음이 무겁다.


"린 공자. 종주께서는 언제 깨어나십니까?"

"깨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네. 다만..."

"다만?"

"지금의 일은 심리적인 것이기에, 매장소가 스스로 얼마나 떨치고 일어나냐에 따라 달렸네."

"그래도 대강 짐작이라도 해 주셔야지요. 명색이 의원인데."

"음... 아마 오늘 저녁 정도?"

"그럼 그리 알고 있겠습니다."


매장소가 깨어나면 먹을 음식과 탕약을 준비하러 견평이 바쁘게 걸어나가면, 표정이 심각해진 린신이 열에 들떠 입술이 바짝 마른 매장소의 얼굴을 걱정가득하게 바라본다.


"괜찮으니 어서 정신을 차려. 이제 시작인데 자네가 이리 약해지면 어찌해. 곁에서 지켜보는 나는... 어쩌라고."


방안에 피워있는 화로로 열기가 후끈할 정도이만, 깨어나야할 매장소가 깨어나지 않아 마음은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 있는 듯하다. 옅은 바람에 형편없이 흔들리는 초의 심지가 타내려가며 마음 속에 새카만 그을음을 남긴다. 어지러워진 마음을 다 잡으며 린신이 저도 모르게 툭, 투둑 떨어지는 눈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애써외면한다.



*



린신의 짐작과는 다르게 매장소는 저녁이 다 지나가는데도 깨어나지 못하였다. 려강은 그럼 그렇지 저 시골 의원이 뭘 제대로 하겠어라는 표정으로 계속 린신을 째려보고 있었고, 견평은 한숨을 푹 내쉬면서 영혼없이 쓸었던 자리를 계속 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굳게 닫힌 소택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려강이 나가보면, 열전영이 정왕 전하께서 소선생을 급히 찾으신다는 전갈을 가지고 와 있다. 정중하게 사정을 말하고 돌려보내는 려강의 입맛이 쓰다.


"소선생이 아프다고?"

"네."

"그럼 지금 만날 수 없는 것이냐?"

"송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흠."


정갈한 모습의 정왕이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가벼이 말한다. 

그래. 어쩐지 병약해 보이는 모습과 다르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해 보이더만, 실은 그런 것이었군.

급히 의논해야 할 일이 생겨 열전영을 소택에 보냈다. 그런데 황망하게도 그가 필요해진 순간에 만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답지 않게 군 벌이다. 그럼 그 모습 좀 감상하러 가 볼까.

소경염은 행장을 차려 소택으로 향한다. 캄캄한 밤에 숨어드는 것이 마음에 든다.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일을 도모할 때에는 숨소리조차 죽여야 하는 법이다. 달빛도 구름에 숨어버렸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문 앞에 들어서려니 려강과 견평이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정왕 전하."

"소선생을 만나러 왔다."

"지금 몸이 좋지 않으시어 정왕전하를 뵐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자고 있다면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다오."

"아... 전하 그게."

"깨우지 않고 조용히 보기만 하고 가겠다."

"....그러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왕전하."


정왕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린신이 분함에 이를 간다. 하지만 나서면 안된다. 나설 수 없다. 매장소가 바라지 않는 일은 차마 할 수가 없다. 해서는 안 된다. 조용히 발걸음을 죽인 채 매장소가 누워있는 방 밖으로 나간다. 방문을 넘기 전 다시 그의 얼굴을 돌아본다. 그를 방 안에 홀로 두고 가고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제 처지를 안타까워한다. 존재가 작아진다. 아쉬움 가득한 발걸음을 내디뎌 훌쩍 몸을 숨긴다.

이와는 반대로 매장소의 방으로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조심스레 소리를 죽여 소경염이 몸을 움직인다. 화로가 몇 개나 활활 타고 있는지 방 안이 온통 열기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혈색이 하나도 비쳐보이지 않는 매장소가 죽은 듯이 누워있다. 그제야 정말로 앓아 누워있는 모습을 실감하는 정왕 소경염이다. 


"정말 아프기는 한 모양이로군."


이제서야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소경염이었지만, 워낙 그가 괘씸하였기에 그의 곁에 잠시 앉아 그의 모습을 바라보기로 한다. 책사를 바닥에 내쳤던 지나간 밤에는 왜 임수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내가 미친 것 같군. 전혀 닮지 않은 자에게서 임수를 찾다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구려는데, 열에 들뜬 매장소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염. 경염."

"소선생, 지금 뭐라.. 정신이 드오?"

"그러지...마 경염. 그...러면.. 안돼."

"소선생, 내 듣고 있소. 뭐라 한 것이오?"

"미...미안해. 내...내가 너무....."


소경염은 매장소가 깊은 잠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말들을 쏟아낸다 생각한다. 별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 치부한 채, 그저 그를 바라보기로 마음먹는다.


"...늦어...서.....미..안해."

"소선생이 많이 아픈가보오. 내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그럼 몸조리 잘하시오."


그때였다. 매장소가 소경염의 옷자락을 잡은 것은.


"가지마. 나만 홀로 두고 가지마."


갑자기 분명하게 들려오는 또렷한 목소리. 하지만 흐릿한 눈을 뜬 채 누구를 보고 말하는지 모르겠다. 어디를 응시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이윽고 소경염의 눈과 마주친다.


"혼자는 싫어."


일어서서 나가려 하였는데 그대로 붙잡힌다. 경염의 머릿속에 의심이 싹튼다. 이 자는 내게 왜 이러는 것이지. 마음 속에 든 의구심과는 다르게 잡힌 옷자락을 풀어내지는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핏기가 없는, 하얗고 작은 손. 다시금 수마(睡魔)가 스쳐간 것인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소경염의 옷자락을 꾹 쥔 채 미동도 없다. 숨결이 잦아든다. 체구에 비하여 작은 손에 경염의 시선이 머문다. 웃기게도 이 자는 사소한 것으로도 임수를 떠오르게하는 기막힌 재주가 있다. 닮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작은 손발 뿐인데 말이다. 생김새도 목소리도 행동거지도 하다못해 흉터가 있는 자리까지도 무엇하나 꼭 같은 것이 하나 없는데 말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한 자다. 그런데도 더 어이없는 것은 갈수록, 자꾸만 하얀 얼굴의 그가, 매장소가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수도 키는 거의 나만한게 손발은 무척이나 작았었는데..."


소경염이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뻗었던 손을 걷는다. 화들짝 놀란다. 무심결에 그의 눈 위에 난 상처를 만져보려 하였던 것이다. 꽤나 깊고 크게 흉이 져 있다. 검이라고는 잡을 수도 없는 자가 눈위에 왜 저리 큰 상처가 남아있는 것일까. 그의 사연이 궁금해지려는 찰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젓는다.

이 자는 위험하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휘몰아치게 만든다. 벗어나야한다. 더 얽히기 전에 떨쳐내 버려야 한다.

옷자락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빼낸다. 구겨진 자신의 옷자락을 외면한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선다. 하지만 정왕부로 돌아가는 내내 소경염은 매장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미 늦었다. 어둠은 여전히 끝없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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