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날도 어김없이 머큐시오와 티발트는 추격전을 벌였다. 늘 그랬듯이 머큐시오가 조롱했고 티발트가 쫓아왔는데 두 인간 다 어찌나 빠른지. 시종들은 진작 나자빠졌는데 그 둘만 숲속을 여전히 질주했다.
- 뻑하면 발작 일으키는 미친 개가 지치지도 않냐!
- 네놈의 멱을 따는 날까진 숨이 붙어있을 거다. 머큐시오. 
 그들은 숲속 깊숙히 들어갔고 버려진 폐허, 요새라기엔 작았고 성전이라기엔 기괴한 그곳에 도달했다. 머큐시오는 재빨리 문속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고 티발트는 갑자기 닫힌 문에 코를 맞아 자빠졌다. 이자식이. 코에서 피를 뚝뚝 떨구며 티발트는 문을 열어 재꼈다. 그런데 시야에는 머큐시오가 안 잡혔다. 티발트는 코를 움켜쥔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기묘한 벽화와 이상한 문양, 무슨 의식을 치른 것처럼 바닥에는 누군가가 휘갈긴 기하학적인 무늬가 보였다. 그 때 문 옆에 숨어있던 머큐시오가 냅다 티발트를 밀쳤다. 티발트는 바닥을 짚으면 자빠졌고 펑 하는 아주 요란한 굉음과 함께 먼지구름이 치솟았다. 

머큐시오는 낄낄대며 다시 도망쳤는데 뒤를 보니 티발트가 따라오지 않았다. 문밖으로 심상찮은 먼지구름인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는데 머큐시오는 티발트 놀리는걸 좋아할 뿐이지 딱히 그의 죽음을 바라는건 아니어서 머뭇거리다가 그쪽으로 도로 돌아갔다. 행여 저녀석이 죽으면 삼촌에게 혼날 것이다. 이봐 티발트, 죽었냐? 먼지구름이 심했다. 그는 손을 저으며 시야를 확보하려 했다. 문을 열어두었기에 먼지구름은 점차 빠져나갔다. 티발트는 여전히 자빠진 듯 했다. 어렴풋이 형체가 보였다. 근데 이상하네. 왜 저렇게 납작하지. 곧 그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옷만 남아있었으니까. 그럼 지금 알몸으로 날 노리나? 머큐시오는 사방을 훑어보았으나 그런 장신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연기가 더 걷쳤다. 머큐시오는 그제야 상의쪽의 덩어리를 확인했다. 웅크린 짐승같았다.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가보니 검고 작은 머리통이 눈에 띄었다.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솜털같은 머리카락이 손에 잡혔다. 머리에서 조금 손을 내리니 티발트의 검은 옷 속에 웅크리고 있는 따끈한 몸통이 잡혔다. 조심스레 토닥이다가 머큐시오는 그것을 들어올렸다. 

 히이잉, 칭얼거린다. 아기였다. 티발트의 상의로 몸이 가려지는 아주 작은 아기. 이제 막 돌을 지났을까. 불그스름한 볼과 꼭 쥔 작은 손. 은은하게 나는 아기냄새. 아기다, 진짜 아기. 애가 깰까봐 머큐시오는 속삭이듯이 티발트의 이름을 불렀다. 야 티발트 어딨어어.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옷으로 아기를 감쌌고 쩔그렁 떨어지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목걸이였다, 티발트가 절대 떨어뜨려놓지 않는 목걸이. 갑작스러운 소리에 아기가 결국 눈을 떠버렸다. 

티발트와 같은 눈이었다. 아기여도, 알 수 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아기가 크게 울어재꼈다. 머큐시오는 얼른 아이를 들쳐안고 어르고 달랬다. 햇빛이 스며들고 모든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떨어진 목걸이와 바지만 남은 티발트의 흔적. : 발자국은 티발트와 머큐시오가 그쪽으로 향한 자국뿐이었다. 티발트가 제발로 일어선 흔적 따윈 없었다. 머큐시오는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아기가 티발트라는 것을.


2.

로렌스 수사는 누군가가 냅다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황급히 수도원 밖으로 나갔다. 문을 여니 머큐시오가 사색이 되어 문앞에 서있었다. 도와주세요 수사님. 
무슨 일인가 머큐시오. 로렌스는 자연스레 머큐시오가 품에 안고있는것을 확인했다. 아기였다. 필사적으로 머큐시오의 손가락을 앙앙 씹어재끼는 아기. 머큐시오 너 설마,
- 티발트입니다.
- ...티발트의 애를 네가 왜
- 티발트라고요!
- 그래 네 애라기 보다는 티발트의 애처럼 생긴
티발트라고요 티발트! 얘가 티발트! 뭔 헛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로렌스 앞에서 머큐시오는 품에 안은 아기의 따끈한 배 위로 머리를 풀썩 박았다가 고개를 들며 따라오세아아악 아기가 그의 붉은머리를 잡아당겼다. 로렌스가 황급히 아기의 손에서 머리카락을 잡아빼려고 했으나 아기는 까르르 웃으며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렇게 머큐시오는 앞머리를 한웅큼 뽑히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수사님 말고는 아무도 못 믿을 거예요.
 그들은 폐허로 걸어갔다. 머큐시오는 상황을 설명했고 로렌스는 믿지 못하는 눈치였으나 사건이 일어난 건물의 내부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이건 우리가 이교도로 배척한 곳의 사원같구나. 이런 곳이 남아있을 줄이야. 
여기 티발트가 자빠졌어요. 머큐시오가 아기를 안아든 채로 턱짓을 했다. 로렌스는 곰곰히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가져온 종이에 문양을 배껴그렸다. 조사가 필요할 것 같구나. 이곳에서 무슨 의식을 치뤘던 것 같은데 티발트가 뭔가 조건을 충족시킨 듯하다.
- 얼마나 걸릴까요?
- 글쎄, 무슨 종교인지부터 알아야..
- 네.? 얜 어쩌구요.
로렌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캐퓰렛 가에게 이런 상황을 알릴수는 없는데.. 몬태규쪽도 마찬가지야. 차기 가주가 이꼴 난걸 알면 균형이 깨지잖니. 
얜 원래 모습이어도 별로 도움되지아아아악! 아기가 머큐시오의 손을 깨물었다. 이걸 쥐어박을수도 없고 으아아. 머큐시오가 빡쳐서 손을 흔들 때 로렌스가 머큐시오의 손을 잡고는 잇자국을 확인했다. 그는 아이를 들여다보더니 머리를 다독이고는 아가 잠깐만 이 좀 보자 하고는 아 하는 시늉을 했다. 아기도 따라서 아 했다.어금니까지 났군. 아가 걸을 수 있지 않니? 아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뭐? 걸어?? 너 이새끼 그걸 왜 이제아아아아악!
아기가 다시 와앙 물었다. 미안하다 아가, 형이 이제 나쁜 말 안할거야. 그지? 라고 로렌스가 말했고 머큐시오가 억지로 웃으며 그으럼요! 형이 잘못했어! 고운말만 쓸게! 라고 하자 아기는 퉤하고 입을 뗐다. 니가 걸어 이제. 머큐시오는 아기를 앉혔으나 아기는 계속 앉은 채로 뚱하게 있었다.
- 치아갯수를 보니 14에서 16개월 정도 되었을게다. 이상하군 아까 네가 처음 안고 있을 땐 갓난아기로 보였는데.
- 애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 뭐, 지금 나이이면 걸음마는 가능해도 걷는 건 힘들어. 네가 안고 다녀야 해.
- 그렇군요..제가요? 제가 왜요?
- 네 책임 아니냐.
쟤 책임이죠. 머큐시오가 티발트를 가리켰다. 아냐! 아기가 빽 소리쳤다.
- 말도 하냐 너?!
나빠! 하고 아기가 다시 소리쳤다. 이건 영주님께도 가문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혼란을 빚을게다. 너도 영주님께 혼나고싶진 않겠지. 으음 그건 그렇지만, 머큐시오가 망설였다.
- 티발트와 너의 행방에 대해선 내가 둘러대마. 둘 다 수도원에서 반성시킨다고 하면 다들 믿을게다.
- 저까지요?
- 그럼 너까지지, 저 어린애를 혼자 두려고?
- 쟤가 왜 얘랑요? 싫어요!
나도 너 싫어! 아기가 외쳤다. 오 그럼 됐네 혼자 살아라 땅꼬마아아악 아기는 머큐시오의 다리를 물었다. 로렌스가 한참만에야 떼어놓았다. 난 애 돌볼 줄 몰라요! 로렌스는 단호히 말했다. 갓난쟁이는 아니니 할 수 있다.
- 어디서 지내라고요.
- 수도원의 별관을 빌려주마. 
- 시종이라도 제발, 
음식정도는 조달해주마. 머큐시오는 웅크리고 오열했다. 운대요 바보. 티발트의 말에 머큐시오는 더 크게 으아아악 절규했다.

 로렌스의 안내로 별관에 도착했을 때였다. 짐짝처럼 짊어지는 동안 머큐시오의 등을 퍽퍽쳤던 티발트는 바닥에 자빠져서 대뜸 배고파라고 말했다. 나도. 머큐시오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근데 뭐 먹냐, 우유? 아기는 도리질쳤다. 
- 난 젖 안 나와.
안 먹어. 아기가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빵이나 처...먹자 그래. 별관이라고 해봤자 침대 하나 탁상 하나 의자 하나가 다였다. 입힐 옷이 없어 티발트의 옷을 둘둘만 아기는 칭얼댔다. 딱딱한 빵을 먹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 진짜 어쩌라는 거지, 스튜는 먹니? 아기는 가만히 있었다. 그게 뭔지 몰라? 어휴 이리와. 머큐시오는 문을 열고 바깥에 놓인 화덕 쪽으로 갔다. 주방 비스무리하게 딸린 그 작은공간에는 냄비나 칼같은 기본적인 도구가 있었다. 아기는 아장거리며 따라가다가 머큐시오가 이것저것 꺼내는걸 빤히 쳐다봤다.

 가까이 오진 마, 칼 있으니까 위험해. 아기는 손가락을 빨며 멍하게 머큐시오가 불을 피우고 이것저것 써는것을 보았다. 자 이거 저 통 속에 넣을 수 있지? 아기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가만히 있었다.  ....저 통속에 넣어줄래? 아기는 야채와 고기를 받고 아장아장 걸어가 통 속에 넣었다. 
- 불 있으니까 저기 떨어져 있어.
- 싫어.
- 씁, 위험해서 그래. 말 들어. 
- 씨이... 
이럴 땐 어른말 들어야지. 알았어? 아기는 삐죽거리며 멀찍이 떨어졌다. 기름을 두르고 야채와 고기를 볶는다. 물과 우유를 섞어 뭉근히 끓여냈다. 
- ...아까 도와줘서 고마워 티발트.
삐죽거리는 아이에게 그렇게 한마디 던졌다. 아이는 슬쩍 머큐시오를 보더니 딴청을 피웠다. 완성된 음식을 그릇에 담았다. 아이는 숟가락질을 하며 탁자를 더럽혔으나 그럭저럭 잘 먹었다. 아이가 씹을 수 있도록 재료를 아주 잘게 다졌으니 먹는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이는 의자에, 머큐시오는 바닥에 앉았다. 먹을만해? 아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
- 근데 나 화장실.
.....그거까지 해야 해? 밥 먹을때 그런 얘긴... 됐다... 머큐시오가 수저를 놓고 이마를 짚었다. 예고해줘서 다행인건가. 싸재낀 것보다 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할 찰나에 아이는 응가 마려워. 한마디를 더 했고 머큐시오는 아이를 들쳐업고 뛰쳐나갔다. 


밤은 더디게 왔다. 촛불 하나를 켜둔 채로 머큐시오는 아기가 침대 위를 뒹굴거리는걸 힘없이 바라봤다. 화장실 데려다주고 씻기고 먹이고 이제 재워야하나. 쟤가 침대면 난 어디서 자나. 바닥이라니. 왜 티발트 새끼에게...
잠 안 와. 아이가 말했다. 애새끼가 말을 너무 잘한다.
-  밥 다 먹고 잤잖아, 그러게 누가 목욕물 데우는데 그새 자래.
몰라 히이잉 아이가 칭얼거렸다. 머큐시오는 아이의 배 위에 손을 얹고 토닥거렸다. 자라 응? 나도 자게. 아이는 맑은 눈을 끔벅였다. 도무지 잘 생각을 안한다. 이럴 때 유모는 뭘했지. 자장가....는 낯간지러워서 싫고 그는 고민에 잠겼다.  
- 옛날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어요.
- 누구?
- 머리는 붉고 잘생긴 남자가 있었어요.
- 머리가 붉어?
- 응 나처럼.
- 안 잘생겼어.
뭐가. 아기는 머큐시오를 손가락질했다. 머큐시오는 냅다 그 손가락을 물었다. 으에엥. 세게 문 것도 아닌데 애가 기겁했다. 한번만 더 건방지게 말야, 어? 이야기 안 들려준다. 이이익 아기가 인상을 찌푸렸다.
- 잘못했어요하면 해주고.
- .....
- 아니면 난 잘거야.
- ...잘못했어요.
 머큐시오는 왕이 되고 싶으나 될 수 없던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남자는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깨달았다. 바로 꿈속의 왕이 되는 것. 하지만 꿈에는 원래 주인이 있었다. 맵여왕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맵여왕에게 왕좌를 걸고 거래를 했다. 그 자리를 주면 당신이 바라는것을 들어주겠다고. 맵여왕이 말했다. 꿈의 주인의 자리를 넘겨줄게. 대신 네 깨어있는 나날들을 내게 줘. 
-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 어떻게 했는데?
나도 몰라. 이제 자라 꼬맹아. 뭐야아아 아이는 찡찡댔다. 너도 만날수있어 맵여왕. 잠들기만 하면 돼.
- ..진짜?
- 응 그러니까 이제 코 자자.
- 대신 여기서 자.
같이 자자고? 아이가 끄덕였다. 왜. 무서워? 아이가 가만히 있자 머큐시오는 긍정의 의미임을  알고 끙 소리를 냈다. 아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티발트다. 영 내키지 않는다. 그러다가도 얘 화장실 뒷처리까지 했는데 이정도야 별거아니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머큐시오는 침대에 누웠다.  아이가 작아서 둘이 누워도 어려움은 없었다. 자 이제 됐지? 자자.
- 잘자 티발트.
- ...잘자.
5분정도 지났을까. 아이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렸다. 머큐시오는 팔 아래 누워있는 작은 아이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티발트가 옆구리를 찔러도 상관없으니 부디 눈을 뜨면 이 어린애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그는 잠들었다.


3.

어쩐지 답답하다. 머큐시오는 눈을 감은 채로 앓았다. 짓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느끼는 불안이 마치 물리적 힘을 얻어 자신의 배를 짓누르는 듯했다. 

아냐... 이건 진짜 짓눌리는 건데. 머큐시오는 번쩍 눈을 떴고 배 위에 조막만한 머리통이 도롱도롱 코를 골고 있음을 확인했다. 판단력이 돌아오기 전에 스며드는 빛이 아침을 알렸고 머큐시오를 현실로 끌어들였다. 이건 티발트다. 여전히 아이의 모습이었다. 도대체 왜 가로로 자는 거야, 머큐시오는 차마 잠든 애를 밀치지도 못하고 탄식했다.
티발트, 티발트 일어나봐. 머큐시오는 아이를 살짝 흔들었다. 아이는 잠투정을 부리는지 도리질을 쳤고 머큐시오는 배에 구멍나는 느낌에 으어어억 소릴 냈다. 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앉았고 덕분에 아이는 머큐시오의 허벅지 위로 데굴데굴 굴렀다.
- 일어나 임마. 로렌스 수사님 뵈러가자.
- 웅 싫어.
일어나 어서, 머큐시오는 칭얼대는 아이를 억지로 깨워 미리 받아둔 물론 대충 얼굴을 씻겼다. 제 힘으로 걸을 의사가 없어 보여 머큐시오는 아이를 업은 채로 수도원으로 내려갔다.

- 수사님 안녕하세요!
- 오 머큐시오구나. 티발트는 어디있니?
머큐시오는 몸을 돌려 업힌 티발트를 보여주었다. 티발트 잘 잤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안으로 들어오렴. 누가 볼지도 모르니.
- 누가 봐도 그냥 티발트에게 숨겨둔 아이가 악악악 

로렌스가 머큐시오의 귀를 잡고는 수도원으로 끌고 들어갔다. 


- 그래서 진전은 있나요?
- 아니. 
- 그런데 왜 끌고 오셨어요!
티발트 좀 확인하려고. 아가 이리오렴. 로렌스가 티발트를 대신 받았다. 어제보단 컸겠죠, 애니까.
그런게 아냐. 티발트 몇 살이니? 티발트는 손가락을 꼬물거리다가 갸우뚱했다. 나 몇 살이야?
너 스물 컭 로렌스가 머큐시오의 목을 쳤다. 

- 못해도 세살은 된 것 같은데.

뭔소리에요, 14개월이라면서. 로렌스는 머큐시오의 말을 무시했다. 아가. 이름이 뭐니?
- 티발트.
머큐시오는 오! 하고 감탄했다. 저 분은?
- 할아부지.
로렌스는 당황했으나 평정심을 찾았다. 머큐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난?
- 몰라.
- 형이라 불러.
- 이전 기억이 완전한건 아닌가 보군.
- 완전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해요, 난 쟤 대소변도 처리했다구요.
오, 생각보다 책임감 있구나 머큐시오. 머큐시오는 아차했다. 불성실하게 해서 떠넘길걸.
유모는 어딨어? 로렌스와 머큐시오는 서로를 멀뚱멀뚱 보다가 다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집에 있지.
- 그럼 나 집 갈래.
- 으응 아니야 유모 집에 없어, 놀러갔어.
- 티발트 두고?
...유모도 유모의 삶이 있으니까! 어른되면 알게 돼! 애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 기미를 보이자 머큐시오는 재빨리 주저앉아 아이를 달랬다. 티발트 형 없잖아, 그지? 놀 친구도 없고. 유모가 그래서 티발트랑 놀아주라고 형한테 부탁했어.
- 진짜?
- 응 진짜.
근데 형 뭐할 줄 알아. 로렌스가 큽하고 웃음을 참았다. 나...낚시. 물고기 잡자.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의자에 앉혀두며 말했다. 여기 가만히 있어, 할아버지랑 얘기 좀 할게.


- 저걸 언제까지 제가 돌보라고요. 
- 뭘. 형아답게 잘하더구만.
- 아 그게 말이에요 방구예요.
- 아이 입힐 옷들 여기있어. 그런데 자라는 속도가 비정상적인걸 보니, 내일이면 부쩍 커있을수도 있지 않겠어?
- 오 그럼 다행이지만.
- 일단 최선을 다해보지. 영주님과 캐퓰렛 측엔 잘 둘러댔어.
- 그걸 믿어요?
- 너희 둘이 정도껏 망나니였어야지. 자 어서 낚시나 가. 식량이나 물자는 3일에 한번 8시 경에 받으러 오고.
머큐시오는 짐을 받아든 채로 티발트쪽으로 갔다.
- 물고기는?
- 일단 돌아가고.
- 물고기이이.
돌아가고오오오.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칭얼거림을 흉내냈다. 니옷이니까 너도 들어. 머큐시오는 티발트에게 옷을 한아름 안겨들린 채로 성큼성큼 앞서갔다. 티발트는 쭐래쭐래 그걸 따라갔고 로렌스는 저 정도면 문제 없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료를 찾으러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러게 내가 까불지 말랬지! 몇 시간후, 머큐시오가 호통을 치며 물에 흠뻑젖은 티발트를 옷가지로 둘둘 말았다. 티발트는 눈물인지 콧물인지 아니면 계곡물인지 모를 물을 뚝뚝 흘리며 오들오들 떨었다. 간간히 훌쩍거리는것이 조금 운 모양이다. 직접 만든 낚시대로는 지겨워하길래 자리를 옮겨가며 물고기를 찾았는데 아이가 신난 나머지 미끄러운 바위 위를 뛰다가 그만 계곡물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머큐시오가 뛰어들어 재빨리 건져내긴 했지만 물에 빠진 게 처음인지라 아이는 단단히 겁을 먹었고 머큐시오에게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가 잉잉 거리며 품속으로 더 파고들었다. 머큐시오 또한 젖은 상태라 옷을 벗어야 했지만 이 상태로는 불가능했다. 별수없이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매단 채로 불도 피우고 그 앞에서 몸을 말렸다. 아이는 그제야 좀 긴장이 풀렸는지 힘을 풀고 그냥 머큐시오에게 기댄 채로 앉았다. 
- 너 이렇게 떼쟁이였냐. 웃기다 정말.
- 떼쟁이가 뭐야?
- 너같은 거.
- 앞으로 그렇게 함부로 뛰면 안 돼. 알았어?
- 응...
잘못했을 땐 존댓말 쓰는거야 머큐시오가 아이를 상대로 개똥논리를 설파했고 아이는 네 라고 순순히 답했다. 티발트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두고두고 놀릴까하다가도 화장실 뒷처리까지 도와준 걸 생각하면 그냥 뒷통수를 후려갈겨 기억상실로 만들어야겠다고 머큐시오는 다짐했다.


그렇게 그들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머큐시오는 일거수일투족을 티발트와 보냈다. 식사도 목욕도 놀이도 수면도 늘 함께였다. 어린 아이를 돌본 적은 없으나 유모가 동생 발렌틴을 대하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머큐시오는 유모의 모습을 흉내냈다. 그러나 역시 흉내일 뿐이라 서툴기 짝이 없었고 티발트는 그나마 매일 씻겨서 망정이지 귀족집 자제 치고는 꼬질꼬질하고 머리는 산발이 되어갔다. 그래도 꽤 즐거워보였다. 본인도 좀 의아했지만 머큐시오도 이 상황이 썩 나쁘진 않았다. 티발트 주제에 아이는 말을 꽤 잘 들었고 또 잘 알아들었다. 이것저것 묻는게 귀찮았지만 적당히 구라를 치면 곧이곧대로 믿는것도 재미있었다. 
 다만 티발트는 잠들기 전엔 언제나 유모를 찾았다. 밤이 무섭다면서 늘 훌쩍였고 그럴때마다 머큐시오는 아이를 토닥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디 안 갈거지?
- 안 가, 여기 있잖아.
- 무섭단 말야.
하여간 겁은 더럽게 많아서, 그러면서도 머큐시오는 아이를 계속 토닥였다. 이 생활이 며칠째인지 기억이 안난다. 다음날엔 로렌스 수사님께 여쭤야겠다 생각하며 머큐시오는 잠들었다.


4.

턱 끝을 간질이는 느낌에 머큐시오는 눈을 떴다. 또 티발트가 품에 파고 들어가 있는듯 했다. 좀 떨어져. 그는 티발트를 밀어내며 중얼거렸다. 아이를 밀어내면서 어쩐지 좀 쉽사리 안 떨어진다고 느낀 그는 실눈을 뜨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꼬마였다. 그런데 좀 컸다. 아기가 아닌 어린이 정도. 뭐야. 야, 얌마 티발트.
머큐시오가 반쯤 몸을 세우고는 티발트를 툭툭 쳤다. 아이는 부스럭거리며 눈을 비비적거렸다.
- 일어나 봐.
- 싫어어.
- 너 몇 살이야?
...여섯 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아이는 머큐시오를 보다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이 아니네.
- 몇 번째 같은 소리냐, 너 근데 밤사이에 너무 컸다 어째.
- 형아는 똑같아.
- 어른은 다 그래.
그런가. 귀밑으로 흐르는 검은 단발이 티발트의 원래 모습을 연상시켰다. 이 녀석은 그냥 꼬마가 아니라 티발트의 어린 모습이라는것을 새삼 상기할수있었다.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아차했다. 오늘은 보급을 받는 날이다. 티발트, 일어나. 로렌스 수사님 만나러가자.
- 수사님?
- 밥먹으려면 가야해.
- 응.
 두 사람은 휘적휘적 숲속을 걸었다. 머큐시오는 아이가 행여 딴길로 셀까봐 손을 꼭 잡아쥐었다. 이 생활이 적어도 몇개월은 된것 같은데 이렇게 티발트가 갑자기 부쩍 큰건 처음이라 로렌스가 직접 봐야할 것 같았다. 문제는 머큐시오가 너무 오랫동안 틀어박혀있어서 시간 개념은 있어도 요일 개념은 없다는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수도원 옆 성당을 방문한 이들이 있었다. 평소였으면 일요일 정도는 기억해두고 느지막한 시간에 찾아갔을테지만 이번은 그만 깜빡 잊어버리말았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머큐시오는 행여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황급히 티발트를 잡아끌어 나무 뒤에 숨었다. 티발트 일단 돌아가자.
왜?
사람들이 너무 많아. 티발트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일요일이면 예배를 드려야하잖아. 왜 우린 안 가? 티발트는 어찌된 일인지 관례에 대한 것을 어렴풋이 아는 듯했다. 우린 로렌스 수사님 아래 있으니까 매일매일이 예배야.
- 형은 맨날 놀았잖아.
이자식이 키위준 은혜도 모르고, 키우긴 뭘 키우냐는 티발트의 따지는 말투에 머큐시오는 대꾸하지않고 주변을 살폈다. 아는 얼굴, 이를 테면 캐퓰렛을 만났다가는 다 끝이야.
- 여기서 뭐하냐.
- 망 봐.
- 옆에 꼬마는 누구야?
- 티발트.
- 뭐?
- 엥?
머큐시오는 뒤를 돌아보았고 두번째로 만나서는 안 되는 이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몬태규 친구들. 로미오와 벤볼리오가 입을 열어 머ㅋ라고 외치자마자 머큐시오는 이봐 친구들아! 라고 외치며 와락 껴안아버렸다. 나의 오랜 벗들을 만나 무척이나 기쁘구나!!
- 너 말투가 왜 그,
- 유감스럽게도 나는 지은 죄가 있어 저 먼곳에서 수행 중에 있단다. 내 벗이나 가족과의 교류는 금지되어있- 지. 그러니 아쉽지만 작별인사를 해야겠구나.
- 이 꼬마는 누구인,
- 오 잘있게나 나의 친우들이여 이만 가보겠네!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손을 잡고 끌고 가려고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몬태규 녀석들은 순순히 내버려두지않았다. 벤볼리오가 길을 막아섰다. 2개월동안 연락하나 없이 사라졌잖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도 로렌스 수사님은 별다른 말씀도 없으시고.
- 티발트랑 쌍으로 사고쳐서 유배보내다시피 되었다고는 들었는데, 그게 말이나 돼?
안될 건 뭐야. 뻔뻔하게 나오는 머큐시오에 몬태규 친구들은 한숨을 쉬었다.
- 얜 누구야 대체.
- 아까 티발트라고 했었지?
- 뭐? 말도 안돼.
티발트 맞는데. 티발트가 대답해버렸다.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입을 틀어막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그냥 손만 더 콱 움켜잡았다. 티발트라고? 로미오가 의아한 목소리로 아이를 내려다보았고 벤 또한 무릎을 꿇고 아이를 빤히 보았다. 오 안돼, 이 녀석들은 눈치는 없어도 미신은 잘 믿는 멍청한 놈들이라 티발트인걸 눈치챌거야.

 사실 머큐시오는 이 모든 일들을 로렌스만이 아닌 주변인들, 하다못해 친구들에게 털어놓을까도 생각해보았다. 그는 친구들을 믿었다. 그러나 몬태규는 믿지 못했다. 베로나의 균형이 깨지는것은 사양이야, 이것은 해결될 때까지 비밀이다. 그게 머큐시오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머큐시오는

- 티발트 아들이야.
라고 말했다. 로미오는 놀랐다. 벤볼리오는 놀랐다. 티발트도 놀랐다.
- 얘 이름도 티발트지.
자식한테 지 이름을 붙여? 그게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이냐고 머큐시오는 물으려다가 때려치웠다. 애 부모는 어디가고 니가 얘랑 있어?
벤볼리오답지 않은 예리한 질문인걸? 머큐시오는 생각했다. 머큐시오는
- 난 이 애의 대부야
라고 말했다.
- 니가?
- 형이???
티발트가 제일 놀랐다. 그렇게 되었어. 머큐시오는 수많은 변명 레퍼토리 대안을 삽시간에 짜기 시작했고
그렇구만! 이라고 부르짖는 몬태규 녀석들의 반응에 생각을 중단했다.
- 아빠랑 똑 닮았네.
- 왜 네가 대부가 되었어?
- 너네가 할 수는 없잖아.
- 그것도 그렇지!
이리도 쉽게 납득하다니 자신의 친우들의 사고회로에 통탄할 노릇이다.
- 그럼 얘도 캐퓰렛이야?
- 당연한 거 아냐?
- 반가워 티발트, 난 벤
이쪽은 벤이고 저쪽은 롬이야. 머큐시오가 선수를 쳐버렸다.
- 롬이랑 벤이라니 그게 무슨,
- 너네 쟤 아빠 알면서 통성명하려고? 당사자 있을 때 해.
당사자 있으면 그냥 죽이려드는거 아냐? 저들끼리 쑥덕대는 모습에 티발트는 미심쩍다는듯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 수사님이 오시는군.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들쳐매버렸다. 우린 이만 간다.
- 야 언제까지 있을건데!
- 얘 아빠 돌아오면.
뭔 소리야! 친구들을 뒤로 하고 머큐시오는 어리둥절해하는 수사를 등뒤에서 밀며 수도원 깊숙히 들어갔다.


- 무슨 일인 게냐.
쟤들은 제가 얘 대부인줄알아요. 제가 티발트 아들이라고 해버렸어요. 로렌스는 대체 일을 어떻게 키울셈이냐고 했고 아 그럼 어떡해요, 어멋 망할 캐퓰렛이 그만 꼬마가 되어버렸,
- 형이 내 대부였어?
- 뭐?
그러면 아버지랑 아는 사이겠네. 머큐시오는 로렌스를 슬쩍 보고는 뭐 그런거지, 라고 말했다.
- 나 형이랑 살면 안 돼?
- 어?
- 예전처럼 형 말 잘 들을게, 나 집가기 싫어.
- 계속 같이 있었잖아.
- 아니야, 형 없었어.
- 얘가 무슨 소릴하는 거야.
로렌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몸을 숙여 아이와 시선을 마주쳤다. 티발트 얘야. 지금 몇 살이지?
- 6살이에요. 며칠 후면 7살이고요.
- 그래, 어제는 뭘했지?
혼자 방에 있었어요. 티발트가 머뭇거리며 대답하자 머큐시오는 당황하며 수사님이 내가 아동을 방치하는 줄 알겠다고 소리쳤다. 너 나랑 토끼 잡을 덫을 설치했잖아. 오늘 그거 확인하러가자고 자기 전에 약속한 거 기억 안 나?
- 그리고 형 없어졌잖아. 날 두고 갔어.
- 내가 언제!
- 그 방에는 왜 혼자 있었니?
- 아 얘 혼자 둔 적 없,
아버지가 있으라고 했어요. 티발트가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잘못한 게 뭔지 알 때까지 나오지 말랬어요. 머큐시오는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애가 갑자기 큰건 그렇다쳐도 이건 뭔 뚱딴지 같은 소리인지. 로렌스는 무언가 눈치를 챈 거 같았다. 티발트, 자. 이제 한동안 그 오두막에서 지내자꾸나. 그런데 내가 너희에게 줘야할 짐을 그만 저 위의 방에 두고 왔는데 가져와주련? 티발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타박타박 계단을 걸어올라갔다.
- 수사님 이게 무슨 일인지?
- 그래 이제 좀 알 것 같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나로서는 저 아이에게 걸린 주술을 풀 수 없어.
- 예에? 그럼 어떻게
하지만 주술에 대해선 이해했다, 이걸 보거라. 로렌스는 품에서 낡은 양피지를 꺼냈다. 양피지는 무언가가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적혀있었고 이전에 보았던 문양이 구석에 있었다. 이 주술에 걸리면 본래의 연령보다 어리게 된단다, 그건 너도 보았겠지. 처음엔 이것이 젊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생을 위한 거지. 그런데 그러기엔 이 부분이 이해가지 않더군. 이건 "변화"를 위한 구절이다.
- 젊어지는게 변화 아니에요?
- 여기엔 이렇게 쓰여있다. "다른 선택으로 변화를 꾀한다"
- 맥락을 모르겠는데요.
- 티발트의 성장이 이상하지 않니? 갓난 아기 시절은 찰나였고, 어느정도의 유년기가 지나자  지금은 7살 남짓의 꼬마가 되어버렸지. 아까 말하는거 들었지 않니? 널 기억하는데 어제 일을 기억하지 못해. 아니, 다른 걸로 기억하고 있어. 저 애는 너와 같은 시간대의 아이가 아냐. 정말 6살이던 때의 티발트야. 내 추측이 맞다면 그 과거의 아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거야.
-말이 돼요 그게?
-그럼 저렇게 어려지는건 말이 되니?
 아뇨. 어느새 티발트가 꾸러미를 들고 낑낑대며 내려왔다. 오 기특하기도 해라. 수고 많았다 티발트. 자 이제 형이랑 돌아가렴.
-형이랑 계속 지내도 돼요?
-그건 형이랑 이야기해보거라
 예? 로렌스는 두사람을 밖으로 잡아끌었다. 주술은 어쩌구요?
중요한 건 변화다, 그걸 상기하거라! 로렌스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젠장 어쩌라는거야! 머큐시오는 속으로 욕을 하며 티발트의 짐을 들었다.
-나도 들래.
-그럼 이 빵을 니가 들어
-응.
 머큐시오는 상황을 곱씹었다. 1. 지금으로서는 주술은 풀 수 없다. 2. 티발트는 자란다. 규칙은 알 수 없음. 3. "다른 선택으로 변화를 꾀한다"


 뭐 어쩌라는거야. 그날 하루종일 머큐시오는 생각에 잠겼다. 덫에 걸린 토끼를 잡을 때도, 최근 가꾼 작은 밭을 확인할 때도, 요리할 때도, 잠들기 직전에도 그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티발트가 얌전하다는걸 깨달았다. 너무나도 고분고분하고, 심지어 약간 주눅들어 있다는것도.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얼굴을 능숙하게 씻기며 물었다.

-당근 싫어하지않아?
-싫어.
-아까 잘 먹던데. 기특하게.
-먹을 수 있어.
- 가리지 않고 잘 먹어야지
-안 먹으면 아버지가 날 기둥에 묶었어.
-그랬구....뭐?
 먹겠다고 해도 하루종일 묶어두셨어, 그래서 이젠 먹어. 머큐시오는 수건으로 티발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난처했다. 일단 자자 티발트.
-여기에서 같이?
왜, 매번 같이 잤.. 아 3살때라 기억을 못하나. 머큐시오는 티발트가 굴러떨어지지 않게 벽 쪽으로 눕히고는 그 옆에 누웠다. 너 세 살때 여기서 나랑 지냈잖아.  이렇게 같이 지낸거 기억 안 나?
-기억나.
-엥? 근데 어제 일은 기억 안 난다며.
-꿈인줄 알았어. 형이 내 상상 속 친구인줄 알았어.
-아 뭐. 그럴 순 있겠네
-그런데 대부라니. 아버지는 왜 말씀 안해주신걸까
 아...음. 많이 안 친해서 그래... 아 그래 내 삼촌이랑 아는 사이라서 여차저차... 그냥 자라.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토닥였다. 자라 자라 자버려 어여 자. 티발트는 눈을 끔뻑이다가 도로롱 잠들었다.


머큐시오는 6살 티발트와의 나날에 익숙해져갔다. 아이는 말을 잘 들었고 애여도 3살보다는 일을 잘했다. 그들은 달팽이나 지렁이를 잡기도 했고 계곡에도 놀러갔고 나무 위에 요새를 만들기도 했다. 오두막보단 그쪽이 멋있으니까가 이유였다. 요새가 완성된 날 머큐시오는 아직 나무를 잘 못타는 티발트를 목에 매달고 그 위로 올라갔다. 그들은 담요를 덮고 따스한 스프를 마시며 밤하늘을 보았다. 머큐시오는 별자리들을 보여주며 길을 잃었을때 방향을 잡는 방법과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발트는 머큐시오가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든 잘 들었다. 3살때는 좀 더 정신없던 걸로 기억하는데 애가 이렇게 조용해져서, 머큐시오는 좀 마음이 안 좋았다. 티발트.
-응?
-넌 왜 나랑 지내고 싶었어?
-.....
-말하기 싫어?
-...무서워서
-....아버지가?
아버지도 무섭고... 티발트가 말끝을 흐렸다. 머큐시오는 잠자코 대답을 기다렸다.
-실은..
-응.
-동생이 태어나는데..
-동생?
-응 동생.
아. 줄리엣.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사촌 여동생을 떠올렸다.
- 아버지한테 혼났어. 그래서 방에 갇혔어.
-왜?
-동생이 태어나는게 싫다고 해서.
싫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다. 아니 처음 듣는게 당연하지. 머큐시오는 아이를 너무 채근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궁금증이 일었다.
-왜 싫었는데?
-아버지가 무서워서..
-아버지가 무서운 거랑 동생 태어나는거랑 무슨 상관이야?
-남자애면 나는 끝이래.
머큐시오는 그 순간 모든것을 이해했다. 가문을 이을 사람이 없어 캐퓰렛 가에 입적하게 된 이 아이는 정당한 차기가주가 태어날 때 그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아비가 그런 작자라면 더더욱. 여동생일 수도 있잖아.
-그것도 싫어.
-왜?
-똑같을 거니까.
 그래. 티발트의 말이 맞다. 그의 아버지는 줄리엣이 태어난 후로 티발트를 그녀의 수족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버지가 죽은 뒤 티발트의 애정은 뒤틀려버렸고 줄리엣은 이로 인해 노이로제에 걸리게 되었다는건 베로나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탄생에 그에게 득될 건 없다. 나쁘거나 더 나쁠 뿐.
-티발트, 난 별로 점도 칠줄알거든.
-진짜?
 응. 별이 그러는데 여동생일거래. 티발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되게 예쁜 여동생이 태어날거래. 저 별을 봐. 유달리 빛나지?착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이래.
-그렇구나.
-네가 지킬 필요 없을 정도로 운세가 좋네
-....나는?
머큐시오는 대충 아무 별이나 가리켰다. 저게 네 별이야. 네 아빠 별은 저 흐릿한거. 계속 너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고있네.
-그래?
태어날 동생을 지켜라! 가문의 명예를 지켜라! 목숨을 바쳐라! 보여 저 별무리? 계속 너한테 그러고 있네. 티발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티발트. 저렇게 옆에서 깜빡이면서 간섭해도, 네 별은 혼자서 잘 빛나고 있어. 보이지?
 -....응.
 -다른 별들이 네게 뭐라해도 신경 쓰지마. 안 지켜도 돼. 니가 가문을 왜 세워, 니가 뭘했어? 아무것도 안했잖아.
-그래도 돼?
-응. 동생도 예뻐해주고.
-알았어.
아이는 뭔가 안도한듯, 맥이 빠진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머큐시오에게 기댔다. 머큐시오는 망설이다가 티발트의 어깨를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너 그러고보니 생일이라 하지 않았어?
-이제 지났을텐데.
-으음. 내일 그럼 생일이었으니까 수사님께 맛있는거 달라고 하자. 지났어도 파티해야지.
-.....정말?
-응.
-그럼 이제 내려가자 티발트. 일찍 자야 수사님 뵙지.
-알았어.
머큐시오는 미리 나무에서 내려가 아이를 받아내렸다. 아이는 이제 괜찮아보였다.  잘자라는 인사에 티발트는 배시시 웃었다. 형도 잘 자. 이 나이에 웃는 얼굴은 처음 봐서 머큐시오는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꼬마가 불행하지 않길 바라며 잠들었고 다음날 적어도 9살 정도는 되어보이는 아이가 웅크린채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것을 보았다.


5.
 머큐시오는 아홉살 남짓되어보이는 아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불편하게 벽에 기댄 것이 어쩐지 불안해보여 머큐시오는 아이를 살살 흔들었다. 야 편하게 자. 갑작스러운 접촉에 아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휘둘렀다. 머큐시오는 그 바람에 턱을 맞았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뒤로 자빠졌다.
-누구야.
-나야 나! 아으...
-.....
티발트는  경계태세를 취하다 말고 빤히 자빠진 머큐시오를 보다가 오두막을 휘이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보였다. 
 - 또 이곳이네.
- 또라니? 아.. 그래. 많이 컸구나 못 본 사이에.
머큐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티발트를 살펴보았다. 파리한 안색 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 티발트라 부르면서도 그는 줄곧 이 아이를 다른 아이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꽤 오랜시간 함께 지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티발트와 아주 닮아있었다. 새삼 그는 성인 티발트를 떠올렸다, 언제쯤 다 크려나.
- 집에 가겠어.
- 뭐?
 이곳에 있는 건 의미없어, 난 집으로 갈거야. 티발트는 다짜고짜 오두막을 나섰고 머큐시오는 아이를 붙잡았다. 야 안돼, 못 가.
- 왜. 당신 대체 뭔데. 
- 어?
- 나한테 대부같은 거 없다고 사람들이 그랬어. 상상 속 친구도 아니고 대부도 아니면 몇년에 한번씩 날 여기 끌고오는 이유가 뭐야.

오 이런 상황은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머큐시오는 최후의 수단을 썼다. 로렌스 수사님이 널 내게 맡기신 거야. 
- ..수사님이?
그래, 몇년에 한번씩 로렌스 수사님 아래에 있는 내가 널 돌보는거야. 캐퓰렛 사람들이 그런 일 없다고 했나보구나? 그지? 티발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티발트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짓자 머큐시오는 그럼 확인하자고! 하면서 앞장 서서 수도원으로 갔다. 로렌스는 이빨을 털었고 티발트는 어렵사리  납득했다. 
- 이상하네, 로렌스 수사님 머리가 저렇게 하얗지는 않았는데.
- 평소엔 염색한단다!
로렌스가 다시 이빨을 털었다. 로렌스는 귓속말로 머큐시오에게 이제 애가 많이 컸으니 거짓말로 둘러댈 생각 말라고 다그쳤다. 그들은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 형은 그럼 수도자야?
- 난...난 방랑자야. 가끔 이곳에 머물지. 머무는 동안 널 돌보는거고.
- 너가 갓난아기 때부터 계속 돌봤었어, 기억 안 나지?
- 기억나.
어? 그래? 티발트는 더이상 대화를 잇지않았다. 오두막에 도착한 뒤 머큐시오는 티발트에게 무엇을 할지 물었다. 검술 훈련해야해. 단호한 티발트의 말에 머큐시오는 식칼말고 지닌게 없다고 말했다. 나뭇가지로 하자 티발트. 머큐시오는 티발트가 열심히 나뭇가지로 나무를 후려치는걸 보았다. 머큐시오는 저도 막대기를 주워다가 티발트를 한 대 퍽 쳤다.
- 뭐야.
- 나랑 대련하자 꼬맹아! 검 잡는 법이 엉망이야. 너같은 꼬맹이 정도는 쓰러트릴수 있어!

3분후에 머큐시오는 항복했다. 머큐시오는 장난이었고 티발트는 인정사정 없었다. 그날 밤 머큐시오는 까진 부위에 직접 만든 연고를 발랐고 티발트는 그걸 흘끗거리며 침대 구석에 몸을 둥글게 말고는 잠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경계하는 티발트의 모습에 머큐는 다소 의아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머큐시오는 다소 따분했다. 티발트는 대체로 알 수 없는 검술 훈련을 했고 머큐시오의 일을 돕는 것 외에는 자발적으로 뭘 하려하지 않았다. 말이라도 걸면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게 전부였다. 사춘기야 뭐야. 머큐시오는 투덜거렸다. 너 몇 살이더라 티발트.
- ...12살.
 그나이면.... 뭐? 머큐시오가 당황했다. 9살 아니야? 마지막으로 본 게 6세 즈음이니 분명 9살이라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너무 왜소하잖아. 이게 나보다 큰다고? 머큐시오는 어째서인지 티발트가 세 살씩 나이먹는다고  생각했다.
-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해?
- 어?
이곳은 훈련하기엔 좋은 곳이 아니야. 티발트가 단검을 손질하며 말했다. 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 음... 훈련만큼 마음 다잡는 것도 중요해.
-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야?
왜 지가 찔려서? 티발트가 입술을 꽉 깨물며 머큐시오를 노려봤다. 머큐시오는 원래 그가 아는 티발트를 대하듯 또 한 마디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는 손짓으로 자기 옆자리를 툭툭 쳤다. 
- 여기 앉아봐.
이불 들고 있어봐. 꿔매야 하는데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 티발트는 머뭇거리다가 머큐시오 옆에 앉아 이불을 들어올렸다. 머큐시오는 꽤 능숙하게 이불 속을 새로 채우고는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  ....
- 동생이 태어났겠네, 그 애는 이름이 뭐야?
줄리엣 캐퓰렛. 티발트가 담담하게 답했다. 여섯 살인데 글도 읽고 쓸 줄 알아. 
- 뭐 진짜? 그렇게 똑똑했어?
머큐시오가 진짜 놀라서 되물었다. 나랑은 달라. 걘 행복할거야. 행복해야하고. 나쁜 건 내가 다 할 거야. 머큐시오는 어딘가 단호한 아이의 목소리에 입이 썼다. 이 아이가 자신이 알고 있는 티발트가 될 거라는 것이 아니 애초에 티발트라는 사실에 다소 우울했다. 검술 연습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뭐야?
- 아버지가 시켰으니까..
- 뭐, 또 가문 지키래?
- .....
그때 내가 말했잖아 신경쓰지말라고. 의미없는 거, 어 야! 티발트는 갑자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덕분에 머큐시오는 손가락을 바늘로 찌를 뻔했다. 
- 없었잖아!
- 어?
형 그때 없었잖아! 그래놓고 안 왔잖아! 티발트가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뭐라해도 괜찮다고 했잖아!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줄리엣이 태어나고 똑같았어! 더 나빠졌어! 내가 줄리엣을 지켜야한댔어! 그런데 뭐로부터? 뭐로부터 지켜? 몬태규 본 적도 없는데! 형 아무도 기억 못하고 로렌스 수사님도 지난 몇 년간 아무것도 모른 척 하셨는데 내가 어떻게 형 말을 듣고 형 말을 믿어?! 똑같다고! 달라지는 거 없어! 티발트는 악을 지르다가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머큐시오는 놀라서 티발트에게 달려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티발트는 몸부림치다가 주먹으로 머큐시오의 얼굴을 가격했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고개가 돌아갔지만 머큐시오는 뒤로 물러서지 않고 티발트를 안아주었다. 경련하던 아이의 몸이 잦아 들고 이내 흐느낌 소리로 바뀌었다. 생일 파티하자고 했잖아.  왜 날 버리고 갔어.
- ....미안, 미안하다 티발트.
아이는 계속 울었다. 머큐시오는 난감해하며 도닥이다가 아이를 일으켜서 침대에 앉혔다. 그래 내가 약속했었는데,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머큐시오에겐 불과 일주일 전의 일이지만 티발트에게는 6년 전 일일 것이다. 티발트가 걸린 저주의 정체를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이건 티발트만이 아니라 머큐시오에게도 그리 좋은 건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유년에 너무 많이 개입되어버렸다. 티발트가 원래대로 되었을 때 도대체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 거지. 더 난처한 것은 머큐시오는 이제 더 이상 티발트를 예전처럼 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머큐시오에게 티발트는 자신보다 너댓살 많은 성질더러운 남자가 아니라 이 아이였다. 
- 지금이라도 할까, 생일파티?
아니. 티발트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 나한테 갑자기 왜 잘 해주려고 하는 건데.
- 야이, 너한테 잘 해주고 싶으니까 그렇지.
- 왜. 왜 나한테 잘해주는데?
- 어?
- 왜 형은 날 돌보는 거야? 수사님이 시켜서? 내가 아버지 말씀처럼 문제 있어서?
물론 수사님이 시킨 건 맞다. 그런데 그렇게 대답할 수도 없을 뿐더러 지금 유효한 답변도 아니었다.
- 넌 줄리엣에게 왜 잘 대해줘?
- 아버지가 시켜서.
- 그게 전부야? 가족이니까? 그리고?
- ...착한 아이니까. 행복했으면 하니까.
- 나도 그래, 티발트. 네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미안, 네 곁에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고 약속하진 못할 거야.
- 또 떠나? 언제?
-  나도 몰라.
- 왜 매번 내가 잠들 때만 사라져? 왜 그때 마다 난 다시 집에 있어? 형이랑 있는 게 다 거짓말 같아. 내가 어떻게 믿어 형을.
- 야 진짜, 이건 약속한다. 설사 내가 사라진다해도 반드시 널 만나러 올 거야.
-  ....
- 진짜야, 언제나처럼 저 오두막에서 널 기다릴게. 
- 왜 또 안 지킬 약속해? 나 잠들면 또 사라지려고?
- 아 이 자식 못본 사이에 사람 말 참 안듣는 인간이 되었네.
어떻게 믿어 내가. 그러나 티발트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졌다. 수사님 이름을 걸게. 신의 이름도.
- 그런 거 함부로 걸어도 돼?
- 상관없어.
티발트는 눈썹을 치켜떴으나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약속 못 지킨 거 용서해줄래?
- 형 하는 거 봐서.
티발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을 잡았다. 난 다시 연습하러 갈 거야. 야 여기선 대충 살라니까. 티발트는 콧방귀를 뀌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12살이 되고 나서는 단독행동을 하게 내버려두고 있다,  숲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캐퓰렛의 누군가가 발견했다가는 곤란해지겠지만 여긴 워낙 깊은 숲속이라 그럴 염려는 없을 것이다. 머큐시오는 10분정도 가만히 있다가 로렌스 수사님께 다녀오겠다는 메모를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그는 홀로 수도원을 찾아갔다. 수사님, 로렌스 수사님.
- 귀청 떨어지겠구나 무슨 일이냐 머큐시오.
- 티발트가 열 두 살이에요.
- 뭐? 열 두 살? 벌써 그 나이였나?
- 수사님은 계속 티발트를 보셨죠, 저때 모습 기억 안 나세요?
- 기억하지 물론, 그런데 그게 뭐 어쨌다는 게냐.
- 전 티발트가 세살씩 나이 먹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6살에서 12살이 되었구요. 주술이 너무 제멋대로잖아요. 
- 뭐 그렇게 규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닌
변화, 변화라고 하셨잖아요. 머큐시오는 막대기를 들어 바닥에 숫자를 적었다. 이게 티발트의 나이라고 해요. 처음엔 갓난아기, 그 다음엔 뭐 20개월 정도? 세 살. 여섯 살, 그리고 열 두 살. 다섯 번의 시기가 있어요. 이때의 티발트를 기억하세요?
-내가 티발트를 만난 건 그애가 세 살 정도였을 때야, 그때 캐퓰렛 가문에 받아들여졌으니까.
-예?
- 티발트가 캐퓰렛 가문으로 들어온 것은 레이디 캐퓰렛이 캐퓰렛 경과 혼인하고 난 뒤란다. 레이디 캐퓰렛의 오라버니 되는 이가 자신의 사생아를 데려왔지. 후사가 없었으니 그 애는 그때 양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캐퓰렛 가문에 들어왔어.
- 사생아인건 들었어요, 그런데 정확히 어떤 식이었던 거죠?
- 내가 듣기로는 티발트가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때 어머니가 죽었고. 그 애를 가엾이 여긴 어느 수도사가 돌보다가 아이를 수소문하던 티발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러다가 세 살 즈음에 캐퓰렛 가문의 자신의 아버지와 고모와 함께 들어간 거고.
 자 보세요 수사님. 머큐시오가 막대로 숫자를 동그라미쳤다. 갓난아기. 보호자를 잃었죠. 아버지를 만난 게 15-20개월이었다고 쳐요. 들어보니 그 즈음인것 같고. 캐퓰렛 가문에 들어간 게 세 살. 그리고 여섯 살에. 줄리엣이 태어났죠. 로렌스는 숫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시겠어요? 변화의 분기점들이에요. 수사님이 그러셨죠. 이렇게요. 다른 선택으로 변화를 노린다는 거. 여전히 모르겠어요 이 주술의 목적은. 적어도 변화의 시기에 나이가 멈춘다는 건 알겠지만요.  그래서 여기서 나오는 의문은 열두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  전혀 모르겠는데.
- 기억해보세요, 전 티발트 스무살 넘어서 만났어요. 쟤 과거 모른다구요. 그리고 쟤한테 미안해서 미치겠어요, 속이는 것 같고! 그리고 머리통 슬슬 굵어지는데 나중에 절 알아보면 어떡해요.
- 그래서 책임 안 지겠다는 거냐.
- 아니 그게 아니잖아요 나 원!
- 네가 알아서 하렴, 열두살까지 키웠으면 저 알아서 하겠지.
- 와 수사님 왜 그렇게 무책임하세요.
머큐시오가 따지든 말든 로렌스는 머큐시오를 떠밀었다. 곤란해지거든 오거라, 애 혼자 두지 말고. 메모두고 왔으니 괜찮아요.

그리고 안 괜찮았다. 티발트는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오두막 옆에 서있었고  머큐시오는 앗 젠장 뭐지 하고 뛰어갔다. 안 간다며!! 티발트가 단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모른다고는 했잖아! 야 그게 아니라, 메모 두고 갔잖아 못 봤어?
- 못 봤어!
그럼 니 실수.. 야 칼 내려놔. 티발트는 씨익씨익 대며 칼을 계속 잡고 있었다. 메모는 탁자 위에 뒀는데 티발트가 지레 사람 없는거 보고 겁먹은 듯했다. 아직은 어디 안 가니까 진정해 임마. 티발트는 메모를 들여다보고 눈물을 훔쳤다. 쉽게 발작일으키고 히스테릭해지는 게 티발트의 익숙한 모습인건 알지만 원인이 자신이라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머큐시오는 그렇게 티발트를 달래가며 조심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계속 저 애의 나이가 열두살인 까닭을 궁금해하면서. 

그리고 답은 어느 오후 아주 쉽게 얻어버리고 말았다. 티발트의 단검 훈련을 보던 어느 날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이야. 아버지가 매일 하랬어?
- 응.
- 누굴 찌를건데.
- 몬태규였나?
- 몬태규면 몬태규지 몬태규였나는 뭐야.
- 몰라, 본 적 없단 말야.
- 본 적 없구...뭐?
거긴 가주가 없어서 고모 같은 분이 가주래. 티발트가 단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들린 바로는 차기가주인 애가 이제 열 살이라서 수도원에 세례 받을 거라는데 처음 보는 거라 무서워.
- 무섭다고? 왜?
- 아빠가 몬태규는 악인들이라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해코지하고 위험하대. 방심하면 날 찌를지도 몰라, 그러니까 대비해야해. 티발트는 엉망이된 나무 토막에 다시 칼을 휘둘렀다. 6년간의 세뇌. 그러니까 요컨대 티발트와 몬태규가 만나는 게 변화의 분기점이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몬태규 친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6.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데리고 수도원을 향해 갔다. 그곳에서 그는 몬태규 친구들을 만났다. 머큐시오. 로미오가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편지 봤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근신 중이라며.
근신 중은 맞지. 머큐시오가 답했다. 티발트가 저주에 걸렸다는 건 무슨 소리야. 이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말하자면 너무 길어, 말 못한 건 미안하게 생각해.
-이해가 가질 않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머큐시오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가 티발트에게 느끼는 유대감에 대해서는 생략한 채 지금 12살에 멈춰있는 티발트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그걸 어떻게 믿
머큐시오는 창 사이로 로렌스 수사랑 함께 있는 티발트를 가리켰다.
-티발트네?!
-티발트여!
몬태규 친구들은 놀라 소리쳤다.
-아니 잠깐, 아들이라고 하지않았어, 꼬마를 봤는데.
-걔가 큰 거야.
- 그새?
-저주라니까.
-캐퓰렛은 이 사실을 알아?
-아니. 관심도 없는 것 같던데. 미친놈이 발악하는것보다 어디 짱박히는 게 그들 입장에선 낫다는 거지.
-그럼 우리에겐 왜 알려줘?
-이젠 너희에게 확인할게 있으니까.
우릴 믿어서는 아니군.. 벤이 시무룩해졌다.
-티발트를 만났을 때 어땠는지 말해봐.
10년도 더 전 일인데, 그들은 생각에 잠겼다. 아 맞아 티발트네 아빠 무서웠다.
- 그게 지금 생각해보면 사이가 안 좋은 원수 가문이니까 인사해도 뭐, 격식만 차리는 수준이 한계였는데.
-우리가 캐퓰렛이랑 다르게 걍 그런 위선 다 무시하고 반갑다! 하고 인사하려했는데 티발트가 칼을 휘둘렀지?
-칼이 벤볼리오를 거의 스칠뻔해서 놀랬는데, 그보다는 걔네 아빠 때문에 놀랐지. 애 멱살 잡고 소리를 지르는데 그거 때문에 우리가 울었어.
- 멍청하다는 식으로 티발트에게 소리질렀었지? 그래서 어른들 때문에 어떻게든 무마되었는데, 이후로 티발트를 만나는 일이 생길때마다 우릴 죽일듯이 싫어해서.
-발작도 심해지고.
-우린 처음에 잘 해보려고 했어, 베로나에는 또래가 드물잖아
-바꿔볼 생각없어?
-뭘?
-과거를.
-뭔 소리래.
머큐시오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이어 이렇게 답했다. 애가 과거에서 왔는데, 좀 잘 대해주자는거지
-아, 뭐. 저주가 어린시절 티발트 만나서 하하호호하는 거야? 이상한 저주네.
-그런데 본인이 끔찍하게 싫어할테니 저주는 맞을듯
-그건 그래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머큐시오는 작전을 간단히 설명했다.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불러세웠다. 낯선 이들 앞에서 티발트는 눈을 가늘게 떴고, 몬태규 친구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네가 6살 때 만났던 형들이야.
그랬나.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머큐시오는 재촉하듯이 친구들에게 고개짓을 했고 두 사람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린 몬태규야.
그 말에 아이는 당황해 뒤로 물러섰다.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뻗은 것으로 봐서 칼을 뽑으려했던 것 같은데, 그럴 줄 알고 머큐시오는 수도원으로 오기 전 티발트의 허리띠에 칼 대신 나무 판자를 끼워넣었다. 아이는 당황하여 나무판자라도 휘둘렀는데 로미오와 벤이 덩달아 당황하여 손을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머큐시오로서는 다소 우스워 보였다. 머큐시오가 말려볼까 했는데 벤볼리오가 알아서 판자를 뺏어들었고 로미오가 티발트의 손등을 찰싹찰싹 때려버렸다.
-날 때렸어!
티발트가 놀라 소리쳤다.
- 니가 먼저 판자 휘둘렀잖아!
벤이 응수했다.
-어른 둘이서 편먹고!
티발트가 손등을 잡고 소리치자 로미오와 벤볼리오는 아니 이런 경우 없는 꼬맹이가 다 있나하고 진노했으나 적당히 넘어가라는 머큐시오의 손짓에 화를 억눌렀다. 벤볼리오가 이를 악물고 티발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 몬태규가의 벤이 캐퓰렛 가의 티발트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티발트가 멀뚱하게 서 있자 머큐시오가 호들갑을 떨었다.
-뭐해, 악수 안 하고.
-내가 왜 몬태규랑..
-베로나의 예절 몰라? 악수를 청하면 가문 불문하고 악수하는 거야.
-어째서?
-악수해서 내가 너보다 더 고귀하다는걸 보이는거지. 먼저 악수 청하는 쪽이 한 수 위고, 그거 받지 않는 쪽이 무례하고 천박한거야.
-아버지는 그렇게 안 가르치셨어.
-니 애비는 베로나 출신 아니잖아
-야 벤 말 좀 곱게 해.
티발트는 마지못해 벤볼리오의 손을 잡았다. 그는 위아래로 두 번 손을 흔들었다. 티발트는 로미오를 멀뚱히 보았고 로미오는 일부러 과장되고 느린 동작으로 손을 내밀었다.
-모온태애규가아의 로옴...이....
그는 점점 더 느리게 말했고 티발트는 아차 하더니
-캐퓰렛 가의 티발트가 몬태규 가의 로옴에게 악수를 청합니다
라고 선수를 치고는 그 손을 잡아버렸다. 됐지?됐지? 티발트가 고개를 돌려 머큐시오의 얼굴을 쳐다봤고 손이 잡힌 로미오는 발연기를 하며 선수를 쳐버리다니, 과연 어린 캐퓰렛은 다르군! 하고 이마를 쳤고 벤볼리오는 두고보자 롬의 복수를 하겠다라고 헛소리를 했다. 머큐시오가 어떻게 복수할 거냐고 묻자 벤볼리오는 조카인 로미오와 벤볼리오를 사주하겠다고 선언했다. 로미오는 맞장구쳤다.
-티발트 네가 방심한 사이 먼저 악수를 청할 것이다!
-둘 다 연달아서 악수를 청하겠지!
-넌 양손을 다 써야할걸!
-무시무시하군!
 머큐시오는 훌륭하게 어린이용 악당 노릇을 하는 친구들을 보며 감탄했다. 두...두고보자..! 티발트가 분에 차서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실로 어린이용 악당의 퇴장같은 모습이었다.
-티발트가 귀엽다니.
벤볼리오가 입을 틀어막았다.
-저런 티발트라면 친구가 되고싶
-애다, 애라고!
머큐시오가 로미오의 등짝을 갈겼다.
-수고많았다, 그럼 난 갈게.
-이게 끝이야?
 어. 그 정도면 됐어. 애잖아.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쫓아갔다. 야 머큐시오 너 대체 언제 돌아올건데! 그러나 머큐시오는 대답도 하지않고 가버렸다.

-티발트 같이 가!
아이의 걸음치고 퍽 빨라서 머큐시오는 쫓는데 꽤 애를 먹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손에 잡힐 정도까지 따라와 아이의 어깨를 잡아챘다. 천천히 가 임마. 아이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야 설마 울어?
 -안 울어!
-얼굴 빨가신대요?
 -힘들어서 그래!
-분해서 우는 게 아니고?
-아냐!
아이가 씩씩대다가 풀썩 주저앉았다. 으윽으윽 소리를 내는 것으로 봐서 딱 어린애가 분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티발트, 뭣 때문에 화났어? 어른들이 놀려서? 야 쟤들은 너 못 건드려. 아니면 몬태규 애들이 겁나? 너보다 빠를까봐?
-아냐!
-야 걱정마. 몬태규 꼬마들 띨띨해서 지들 삼촌이 시킨 거 다 까먹을거야. 니가 선수 처버려. 화풀어 티발트.
-형
-어?
-형은 몬태규랑 친구였어?
-어?
머큐시오는 말문이 막혔다.
-아까 그 사람들이랑 얘기했잖아. 몬태규 사람이야? 
 -아냐. 나는 방랑자라고 했잖아.
-방랑자는 아무랑 다 친구되는 거야? 나도 그런 거야?
-에이, 아니래도
-착한 아이라서 행복했으면 하니까 나랑 다닌댔지. 나 착한 아이 아니면 가버릴거야?
 걔들 안 착해, 티발트 머큐시오는 그때 티발트가 원하는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 말을 해줘야 하는 건가. 내가 해도 되는 말인가. 망설였지만 머큐시오는 말해주었다. 넌 내게 특별하고 소중한 사람이야.
 -.....
 -난 네가 기억하지 못한 어린 시절부터 너랑 같이 있었어.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일으켜세웠다. 내가 너의 곁에 있는 건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서야.
-왜? 
-네가 행복해지면, 많은 것들이 바뀔 수 있거든.
의도없이 한 말이지만 머큐시오는 순간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제껏 머큐시오는 티발트가 겪을 선택의 순간에 개입했다. 그때마다 아이는 컸다. 그게 다인 줄 알았다. 그런데 티발트가 줄리엣을 동생으로 인정하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오늘날의 캐퓰렛 가문은 어떻게 되는 거지? 티발트가 몬태규에게 칼을 휘두르지 않고 악수를 청한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한 거지? 오늘 밤이 지나면 아이는 커버릴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줄리엣을 만나봐야 하나? 몬태규 친구들은? 기억이 달라지는 건가? 그러면 그건 언제? 지만 머큐시오는 그런 변해버린  무언가보다는 눈앞의 티발트에게로 모든 상념이 쏠렸다. 마지막으로 볼 열 두 살의 티발트. 나에게 실망하고 그가 기억하는 티발트처럼 어둡지만 그래도 아이의 모습이 남은 티발트. 평소처럼 그는 티발트와의 하루를 보냈다. 그날밤 머큐시오는 평소처럼 바닥에 눕고 티발트는 침대에 눕혔다. 아이가 커서, 더 이상 침대를 공유하기가 벅찼다.
- 티발트.
-응?
-오늘 밤이 아마 마지막이야.
 -뭐?
아이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마 오늘밤 떠날 것 같다. 
-아마는 뭐야. 왜? 갑자기?
 -그냥 그러려니해 임마. 한두번이야?
-안 잘 거야
-왜? 
-형 갈 때까지, 사람들이 다시 날 저택으로 몰래 데려갈 때까지 깨있을 거야
-왜 떼를 쓰냐
-안 잘 거야.
-얼른 자.
-형 안 가면 안 돼?
-....
 -가지마 형. 여기 며칠만 더 있어. 하루만. 응?
티발트가 침대에서 내려와 머큐시오에게 간청했다. 미안, 그런데 어쩔 수 없어. 저번에 말한 것처럼 다시 만나러 올게. 응? 아이는 상심한채 고개를 푹 숙였다. 어서 올라가서 자. 응? 착하지?
-대신 형도 올라와서 자.
-침대에? 에이 좁아.
올라와. 티발트가 단호하게 명령조로 말했다. 간만에 보는 귀족적인 언사에 머큐시오는 마지못해 침대로 올라갔다. 역시나 둘이 눕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야 좁잖아. 티발트는 꼼지락거리면서 몸을 둥글게 말아 머큐시오의 상체쪽으로 붙었다. 그 모습이 아직 어린 애였던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머큐시오는 이번만 봐준다고 말하고는 아이의 등을 다독였다. 
-꼭 와.
-알았어.
-약속이야.
약속. 아이는 잠들었다. 머큐시오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머큐시오가 진심을 다해 빌었다. 티발트가 발작할 때마다 말하던 15살의 일이 거짓이길. 설사 진실이라할지라도, 변했을지도 모르는 과거로 인해 없던 일이 되길. 이제 외면할 수는 없다. 머큐시오는 다시 만날 티발트를 생각하며 잠들었다.


 머큐시오는 코끝을 스치는 비릿한 냄새에 꿈 속에서 현실로 서서히 돌아오는 듯했다. 무슨 냄새지. 약간 숨이 막히고 역겨운 냄새였다. 피냄새였다. 머큐시오는 눈을 뜨고 천장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피냄새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의 구석, 벽에 몸을 기댄 티발트가 앉아있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로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한 티발트의 양손은 붉은 피로 젖어있었고 피는 그의 옷, 그리고 하얀 침대보에도 묻어있었다.
 -티발트. 야 티발트.
머큐시오가 티발트의 손을 잡았다. 죽었나? 티발트가 죽었나? 피묻은 손을 잡고 흔들어도 반응이 없다. 이 온기가  피의 온기인지 사람의 체온인지 알 수 없다. 그는 손으로 티발트의 얼굴을 잡았다. 티발트, 티발트! 그가 눈을 떴다. 어딘가 멍하고 흐릿했다. 갈 곳을 잃은 눈은 머큐시오의 눈과 마주쳤다. 검은 눈에 눈물이 고이고 소리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티발트는 그대로 머큐시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어깨가 눈물로 젖어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손에서 옮겨묻은 제 손의 피를 바라보며 그를 부둥켜 안아주었다.



7.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어깨를 잡았다. 흔들리는 몸이 마치 인형과 같았다.
-티발트.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머큐시오는 구석에 있는 수건과 양동이를 가져왔다. 그는 수건을 물에 적셔 티발트의 손을 덮은 피를 닦았다. 손은 상처 하나 없었다. 요컨대 그의 피가 아니었다. 티발트가 사람을 죽였었나?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의 기억 속 베로나는 티발트를 살인자라 부르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손의 크기는 머큐시오와 엇비슷하거나 좀 더 컸다. 앉아있었지만 적어도 티발트가 자신만큼 컸다는 정도는 눈치챌수 있었다. 그의 나이 따위는 신경쓸 수 없었다. 양손의 피가, 낡은 수건을 검붉게 물들였다.
-티발트 누워. 괜찮아.
머큐시오는 티발트를 침대에 눕혔다. 그는 저항없이 밀리는대로 자리에 누웠다. 자고 있어, 수사님 뵙고 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마. 갑자기 티발트가 머큐시오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멍했던 눈에 공포가 서려있었다. 손에서 넘어오는 떨림에 머큐시오는 가만히 서있다가 저도 침대에 누웠다.
-어디 안 갈게. 너 깰 때까지 여기있을게. 그럼 됐지?
티발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비좁은 침대에서 머큐시오는 티발트가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어렸을 때처럼 끌어안아주었다. 티발트가 잠들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고 그가 다시 깨어날때까지 또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 시간동안 머큐시오는 내내 깨어있었다. 


머큐시오는 로렌스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계절을 지나는 동안, 머큐시오와 어린 티발트는 보급품 없이 지내는 법을 터득했었다. 머큐시오는 아무것도 하지않는 티발트를 거의 영유아때 그러했듯이 보살폈다. 먹거나 자거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알아서 했지만 소통하거나 자체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머큐시오는 재촉하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티발트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머큐시오는 별다른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언젠가 티발트가 말해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문제는 다른 것에 있었는데 정말 딱히 상상도 안 했고 하라고 해도 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문제였다. 어느날부터인가 티발트는 아침에 하반신을 적시기 시작했다. 세 살 때랑은 다른 연유로 말이다. 만약 그가 정신이 있었다면 하다못해 열두살 정도의 의식이 있었다면 머큐시오가 지난 몇달간 그러했듯이 지가 알아서 처리를 한다거나 침대말고 바닥에서 자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머큐시오는 꽤 오랜 시간 티발트의 속옷을 이전과는 다른 이유로 처리하며 더럽게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밤이었다. 머큐시오는 뒤척이는 느낌, 그리고 밭은 숨소리에 잠에서 설핏 깨었다. 무언가 허벅지에 닿는 느낌이 들었고 그것이 문지르는 것임을, 그리고 티발트의 것임을 순차적으로 깨닫자 그대로 잠에서 깨어버렸다. 티발트를 등지고 문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티발트가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그가 자신의 옷자락을 붙잡고 마치 발정난 고양이마냥 색색거리며 자신의 아래를 그의 허벅지에 비비고 있다는 정도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떨쳐내지도 못하고 난감해하고 있을 찰나 티발트는 절벽을 오르는 것처럼 머큐시오의 상의를 잡았고 머큐시오는 귓가에 들리는 숨소리만큼은 벗어나고자 상체를 살짝 들어올렸다. 달라진 자세, 몸을 일으켜 다리를 뒤로 빼는 그 자세가 티발트의 아래를 지긋이 눌렀던 듯했다. 티발트는 깊이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젖혔다.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몽정 중이라는 걸, 꿈속에서 가는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감긴 눈 아래 창백한 볼을 물들인 붉은 빛과 살짝 벌린 입에서 내쉬는 한숨에 머큐시오는 말 그대로 굳어버렸다. 한결 편해진듯 티발트는 머큐시오의 상체를 끌어안고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더 깊은 잠 속에 빠졌다. 머큐시오는 다시 원래 자세로 몸을 돌렸다. 
 젠장, 젠장. 그는 문을 바라보며 끝없이 욕했다. 자신을 감싸안은 티발트의 팔때문이었을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그순간 티발트에게 꼴려버린 자신에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다음날은 평온하기 그지없었고 고통스러운건 머큐시오 뿐이었던 것 같았다. 정신머리 나간 티발트가 생각이라는 걸 할리도 없겠지만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계곡으로 가서 함께 물을 떠올릴 때 머큐시오는 티발트의 검은 머리가 산들바람에 뒤로 넘어가는 것을 그리고 들뜬 머리카락 아래 숨겨진 하얀 목을 보았고 그것이 붉어지는 모습을 떠올리자 자기 뺨을 두 번 쳤다. 정신차려 머큐시오. 저건 티발트다. 쟨 니가 키웠다 미친놈아. 

 더 이상 이럴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티발트가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떨어져야하는데, 이제 쟤 날 알아볼텐데. 내가 머큐시오인 걸 알면 어쩌지. 그리고 그 피에 대해서도 알아야만 했다. 사창가에서 사람을 죽인건가? 아마 그것이 이 시기에 멈춰버린 이유일텐데,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가 다시 저물었다. 간청했으나 티발트의 단호함에 머큐시오는 또다시 침대에 누웠다. 깨어난건 어제뿐인거지 어쩌면 지난 몽정의 결과물에 자신의 다리가 동참한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래서 그는 티발트가 잠들때까지 계속 긴장한 상태로 깨어있었다. 하지만 티발트는 곤히 잠만 잤다. 머큐시오마저도 살짝 졸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티발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큐시오는 티발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진짜 제대로 잠든건지 확인차라고는 했으나 좁디좁은지라 몸을 돌리자 티발트의 얼굴이 거의 코앞에 있었다. 키는 머큐시오보다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작았지만 십대치고는 충분히 컸다. 살짝 얼굴을 덮는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러워보였고 머리카락이 드리운 검은 속눈썹이나 티끌하나없는 하얀 피부, 달싹이는 입술 모두 매우 가까이서 보였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아름다운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그 입에서 나오는 헛소리에 가려졌으나 아름답게 생긴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마저도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머큐시오는 손을 뻗어 티발트의 얼굴을 훑었다. 현실이었다면 같이 할 수 없던 그의 과거들이, 머큐시오에 대한 기억과 섞여 그의 머릿속에 담겨있을 터였다. 넌 이제 내게 무엇이지. 머큐시오가 중얼거리며 엄지손가락으로 티발트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티발트가 천천히 눈을 떴다. 몽롱한 눈을 끔뻑거리는 것을 머큐시오는 그냥 바라보았다. 티발트는 입술로 머큐시오의 엄지를 밀어냈다. 머큐시오의 엄지를 사이에 두고 두 입술이 닿았다. 티발트가 고개를 틀어버리려는 것에 머큐시오는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덕분의 티발트의 얼굴은 머큐시오의 손바닥에 덮였다. 
-티발트.
머큐시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말해줄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
-너 말할 수 있잖아.
손으로 덮지 못한 티발트의 두 눈이 감기는 것을 보았다. 
 -들어줄게.
-키스해주면.
-뭐?
티발트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널 키웠어. 이거 사실 저주야, 후회할 거야. 바보같은 소리하지마. 온갖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티발트가 바라는대로 하기로 했다. 그가 바라는대로 입을 맞추었다. 마치 굿나잇 키스를 하듯이. 티발트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딘가 비틀린 것이 있었다.





먼나라 겁나먼나라 뮤지컬 파는 사람

Negin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