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잡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채령은 목을 꼿꼿하게 폈다. 지금은 보름달이 높이 올라와 있는 컴컴한 밤. 아름다운 여인들이 후궁으로 간택된 후, 맞는 보름날이었다. 신당에서 점지해준 둥근 달이 떠 있는 밤, 황제는 자신이 원하는 여인의 침전을 향한다. 때로는 처음 선택한 여인이 아닌 다른 여인들을 찾아 다시 발을 나설 수도 있기 때문에, 후궁들은 모두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채령은 떨리는 마음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천에 떠 있던 보름달이 느리게 떨어져갈 무렵, 채령은 언제 긴장을 했냐는 듯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채령은 감기는 눈을 비볐다. 그러나 정신이 맑아지기는커녕, 아예 침대에 누워 잠들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자면 안 돼......곱게 화장한 얼굴이 망가져......치마도 구겨지고....... 채령은 자수정을 깎아 만든 구슬 휘장을 보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여전히 휘장 너머로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된 걸까? 두 시간? 세 시간? 채령은 씁쓸하게 웃ᄋᅠᆻ다. 불안한 예감은 맞았다. 자신이 자신감 있게 선언했을 때의 난처해 하던 황제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채령에게서 아무런 호감을 느끼지 않았다.

채령은 눈을 감았다. 감긴 눈썹에서 물방울이 토르르 떨어져 내렸다. 너무 졸려. 졸립고, 지쳐서......서럽다. 채령은 몸을 뒤척이다 고개를 숙였다. 병든 닭같이 까딱거리던 목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마찬가지로 졸고 있던 궁녀들은 어디선가 인기척을 느꼈다. 무심코 고개를 든 궁녀들은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상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망토를 쓴 사람이었다. 당황해하는 여인들을 향해 상대는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쉿.”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문을 열어라.”


채령보다 높은 사람의 말에 궁녀들은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문이 열리자 상대는 우아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발 밑으로 망토가 흘러내렸다. 상대는 손을 들어 구슬 휘장을 옆으로 젖혔다. 방석 위에 앉은 채로 기다리던 채령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잠들어 있었다.


“귀비.”


채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는 맞은 편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조심스럽게 뺨을 만지니 채령이 ‘으음’하고 손바닥에 볼을 맞대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상대가 작게 속삭였다.


“귀비.”


“......”


“귀비.”


“......”


상대는, 소은은 잠깐 침묵을 지키다 입을 떼었다.


“채령아.”


제 이름이 불리자 채령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러나 흐린 동공은 상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싶었다. 소은은 뒤로 넘어가려는 채령의 허리를 잡았다. 잠든 채령의 몸에서는 화려한 분향이 났다. 지나치게 짙은 향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고소한 냄새도 같이 섞여있는 걸 알아차렸다.


‘이게 무얼까.’


소은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과자를 좋아하면 몸에서 과자 냄새가 나는 걸까.’


그녀는 채령을 부축하며 속삭였다.


“누워서 자자.”


“우응.”


“착하다.”


아이를 어르듯이 채령을 부축해서 침대 쪽으로 데리고 갔다. 채령은 푹신한 침대에 눕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이불을 껴안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소은은 앉아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이 들려던 채령은, 지나치게 모든 게 편안해졌음을 깨달았다. 기분 좋은 침대, 따뜻한 이불, 그리고 아까부터 부드럽게 제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손길? 채령은 졸음을 이겨내고 다시 눈을 떴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지켜보는 소은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채령은 졸음이 싹 사라질 정도로 크게 놀랐다.


“마마!”


“피곤할 텐데 그냥 자요.”


그러나 채령은 벌떡 일어나서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대관절 그대가 왜 여기에 있냐는 눈빛에 소은은 특유의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비를 보려고 왔지요.”


“네?”


“오늘 밤 황제 폐하께서는 다른 여인의 침전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


채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귀비와 함께 들어온 비이지요.”


“도중에 발길을 돌려......”


“제 아래 아이들은 궁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은 벌써 꺼졌고, 시간이 이토록 지났음에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폐하께서는 잠자리에 드신 모양입니다.”


소은은 시선을 떨구고 있는 채령을 향해 말했다.


“해서, 긴장하고 있을 귀비에게 걱정말고 푹 자는 게 좋겠다고 말하려 왔지요.”


“.....”


소은은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모습을 지켜보다 말을 덧붙였다.


“혹, 깨어있으면 남은 사람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것도 괜찮겠고.”


“남은......사람들이라뇨?”


“나 역시 폐하를 기다리다 밤을 지새야하는 몸이잖습니까. 쓸쓸하게 밤을 맞이하는 것보다는 새로 들어온 식구와 허심탄탄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소은은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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