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퇴근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의 그 일이 있고부터 거의 반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모든 업무를 끝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을 하는 경우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 였는데 그 어렵고 귀한 일을 제가 다 해낸 것이었다. 그 고통의 끝엔 '야오왕과의 두번째 데이트'라는 달콤한 포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팀장을 필두로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왕대리와 부서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봄에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에 안절부절 못하는 저였다. 슬쩍 그가 있을 칸막이 너머를 쳐다본 양예밍은 두근 반 세근 반 하는 설레는 마음으로 짐을 꾸리는 척 일어섰다. 자, 대리님. 전 준비가 됐습니다.

그럼에도 꿈쩍도 않고 모니터에 집중한 그 모습에도 웃음이 나왔다. 아깐 그렇게 적극적이더니 또 깐깐 도도 모드를 시전 중인 야오왕에 섭섭한 마음은 1도 들지 않았다. 푹 패인 보조개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기는 커녕 더욱 깊게 패여만 가고 있었다.

큼큼, 헛기침을 한번 한 뒤 다시 한번 그를 보았다. 그럼에도 모니터에서 시선이 떠나지 않는 그. 이게 아닌데. 이쯤되면 이제 저를 좀 봐줄 만도 한데 그는 한결같이 모니터 화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대리님, 퇴근 안하십니까?

결국 마지못해 먼저 말을 건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넸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내적 양예밍은 어서 데이트 하자고 같이 나가자고 말하라고 신이 나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천천히 가방을 챙기고 코트를 제 손목에 걸치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서 말해, 말하라고 야오왕!

그리고 천천히 열리는 입술. 

- 어디 갑니까?

- ...네?

제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어딜 가냐니. 너랑 데이트 갈건데요... 차마 그 말까진 할 수 없어 말을 삼켰다. 뭔가 상황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천천히 자신을 돌아보는 그의 눈엔 약간의 피곤함이 담겨 있었다.

- 아까 오전에 말한 데이터, 왜 제출 안합니까?

- 네?

그런 건 들은 적이 없었다. 제 기억상으론. 

- 오전에, 정신 팔려서 잘 못들었나본데 데이터 입력이랑 회의 자료 복사 내가 부탁한 걸로 아는데.

- 아...

물론 기억에 없었다. 성희롱이란 단어에 기분이 팍 상해서 회의 자료를 복사하며 야오왕을 욕한 것 말고는.

- 회의 얼마 안남아서 그것부터 하라고 했지 데이터 입력 하지 말라고는 안했잖습니까.

- ...아.

- 남아야 겠죠?

...네. 상황은 이상을 넘어 요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기승전데이트를 꿈꾸던 양예밍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기승전야근이라니, 불타는 금요일 남들은 연인, 친구들과 술이든 사랑이든 무엇으로든 불태우는데 자신은 야근으로 이 한몸 불태우게 생긴 것이었다. 그것도 사랑스런 제 연인이 바로 코앞에 있는 상황에서.

- 많이, 많이 급한 겁니까?

- 많이, 많이 급한 겁니다. 당장 월요일 오전 중에 3팀으로 보내야할 자료니까요.

아. 더듬는 자신의 말을 따라하는 야오왕에 저도 모르게 나온 대답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자료를 왜 이제서야 상기시켜주시는 건지. 

- 자료 자정 전까지 제출 하세요. 

그 말을 하며 야오왕은 다시 정수리를 보이며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그럼...

그 말을 하자 그가 귀찮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다시 자신을 올려다봤다. 

- 뭡니까.

...아닙니다. 차마 우리 데이트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맥이 탁, 풀린 느낌이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지고 있었다. 아까는 볼에 구멍이 날듯 깊게 보조개가 패인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입이 댓발 나온 자신이 불만스럽게 모니터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오왕이 벌떡 몸을 일으킨 것은. 그는 차근히 주변을 정리하고는 의자에 걸쳐진 코트를 제 팔에 잘 걸치고 있었다. 이게 지금 다 무슨 상황인가 싶었다.

- 어디 가십니까?

- 퇴근 합니다.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듯한 그의 반응에 기가 막혔다. 퇴근을, 한다고?

- 저는요?

- 뭐가 말입니까?

정말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묻는 건가. 대답을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필 제가 의자에 앉아 있는 위치에서 올려다 보는 거라 위압감이 없을 듯해 최대한 눈썹뼈에 힘을 주고 눈을 치켜떴다. 그럼에도 야오왕은 제 휴대폰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이 난듯 그가 아, 하며 자신을 보았다.

- 설마 데이트 기대한 건 아니죠?

기대를 안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점심시간에 그가 자신에게 한 행동은 기억도 안나는 건지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데이트를 기대하고 들뜨고 설레한 건 자신뿐이라는 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빤히 올려다 보았다.  실망감, 서운함, 분노 등등 온갖  감정을 잔뜩 담은 눈으로. 때로는 말보다 눈빛이 모든 걸 말해줄 때가 있으니까. 

- 말했잖습니까. 고민중이었다고. 업무 다 끝내고 야근 안하게 되면 데이트를 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 ......

- 그 기회 발로 차버린 건 그쪽이고.

- ......

- 안타깝네요.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는 지금 데이트를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제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가 오늘 일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내일이 없는 것처럼 미친듯이 업무에 몰두했던 자신이었다. 끊임 없이 불어나는 업무에도 불평이나 뺀질댐 없이 일했는데 칭찬은 커녕 야근 이라니.
게다가 그는 전혀 안타깝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무표정이었지만 그간 야오왕을 지켜보며 관심법이 생겨난 자신의 눈에는 보였다. 속으로 이죽이죽 자신을 비웃는 듯한 야오왕이. 

- 그럼 저는 퇴근 하겠습니다. 양이 좀 많아서 자정까지 가능할 진 모르겠지만, 오늘 오후의 양예밍씨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꾸도 하지 않고 야오왕의 얼굴을 보았다. 가? 진짜 가? 나 이렇게 혼자 두고 정말 갈거야? 그리고 쐐기를 박는 그의 한마디.

- 좋은 주말 보내고 월요일날 봅시다.

싱긋. 그는 그 어느때보다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고는 자신의 옆을 스쳐 사라졌다. 

- ......

아아, 님은 갔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님이.
휭하니.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의 뒤통수를 보았지만 똑부러지고 매몰찬 야오왕은 결코 얼굴을 보이는 일 없이 그렇게 사라져갔다. 그 숨막히는 정적을 깬 건 띵, 하고 도착을 알리는 엘리베이터 소리였다.


그가 떠나고 나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설레는 것은 자신 뿐인 것 같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 생각이 확신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이럴려고, 내가 이럴려고 마음을 줬나. 그치만 아까 점심시간엔 야오왕도 나한테 죽을 것 같다고 했는데. 그는, 여전히 어렵고, 너무도 아리송 했다.

- ...좋은 주말 보내고 월요일날 봅시다?

그건 주말도 그쪽 알아서 좋게  보내고 월요일날 회사에서나 보자는 뜻인 것이었다. 

- 주말에도 날 볼 생각은 없다는 거지...

그 생각까지 하니 이가 갈렸다. 아니, 그럴 거면 연애를 왜 하자고 한거야? 정말 나랑 뭐 오피스 와이프 그딴거 하자는 거야? 난 남자니까 오피스 허즈밴드 뭐 그런건가? 그렇다고 회사에서 다정한 눈길 한번을 제대로 안주면서!

한번 열받으니 안좋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생각 할수록 기분이 나쁜 것들 투성이였다. 

한번도 연애를 어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양예밍이었다. 말했지 않은가. 자동문 같은 인생이었다고. 이번엔 좀 진지하게 연애 좀 하겠거니 했는데 이게 꼬여도 너무 꼬여서 어렵기가 그지 없는 것이었다. 아, 그지같네, 진짜... 이쯤되니 이 연애가 어려운지 야오왕이 어려운지 분간도 되질 않았다. 내가 그한테 너무 푹 빠져버린게 문제 같기도 하고. 

- 하여간, 어려운 것 투성이라니까.

이놈의 연애는 언제나 '산 넘어 산' 이었다. 











불금은 늘 술과 여자 혹은 친구로 이 한몸 불태우던 양예밍은 지금 분노의 타이핑으로 그 한몸을 불태우는 중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타자속도를 자랑하며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꽤나 많은 양에 처음엔 혀를 내둘렀지만 잘만하면 자정 전에 끝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속도가 쳐질 때면 자신을 이 외롭고 무서운(전혀 아님) 사무실에 홀로 남겨두고 신나게 떠나버린 야오왕을 떠올리며 스퍼트를 높였다. 사람 마음도 몰라주는 야오왕, 나쁜 야오왕, 못된 야오왕, 매정한 야오왕! 온갖 부정적인 형용사들을 그의 이름 석자 앞에 붙이고 나면 분노게이지는 금새 상승하고 능률 또한 쑥쑥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 후우...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간이었다. 메일을 전송한 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자료 전송 했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말투로. 

'확인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몇분의 텀을 두고 온 답장 또한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 문자를 보자 입이 삐죽 나왔다. 뭐 더 오지 않을까 싶어 한참을 기다렸지만 더이상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그가 없는 그의 빈자리를 말없이 노려봤다. 그래봤자 보이는 거라곤 칸막이 뿐이었지만. 꼭 그 칸막이가 야오왕과 제 마음 사이의 벽만큼이나 크게 느껴졌다. 그 생각이 들자 또 서글퍼진 양예밍이 벌떡 일어나 칸막이를 넘어서 그의 자리에 가 풀썩 앉았다.

이런 물리적인 거라면 이렇게 쉽게 넘어갈 수나 있지... 마음이라는 건 또 그게 쉽지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의자에 몸을 묻고 그의 책상을 살폈다. 빙 둘러본 그의 자리는 그만큼이나 삭막했다. 각 잡혀 정리된 서류철들과 먼지 한톨 용납치 않는 데스크. 그의 시선이 늘 닿아있는 모니터.

- 부럽다. 넌 맨날 야오왕이랑 눈 마주칠 수 있어서...

그런 엉뚱한 생각들을 하며 화면 속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조금 지친 듯한 자신이 비추는 모니터는 제것과 똑같음에도 그를 닮아 조금 외로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1평남짓한 그 공간 속 야오왕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보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부서 사람들이 아닌 업무와 친목을 다지면서. 늘 지친듯한 무표정을 하고. 그가 웃는 모습을 보게된 것도 1년이 넘어서였다. 외롭진 않았을지, 매일 넘치는 업무(그것에 자신도 한 몫하긴 했지만)에 지치진 않았을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감과 피로감들. 어쩌면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벽을 만들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안쓰러웠다. 1년 전의 자신이라면 들지 않았을 생각들.

야박하다, 나쁘다, 못됐다, 매정하다 말한 자신이었지만 결국은 다 진심이 아닌 것들이었다. 제가 그를 너무 좋아해서, 그를 사랑하게 되어버려서 좀 더 그와 함께 있지 못한다는 것이 서운해서 나온 생각들이었다.

- 하여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니까...

저는 지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벽인지 막인지 모를 그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좀 더 그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어쩌면 쉽고 어렵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와는 '진지한' 연애가 하고 싶었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의자에 몸을 더 깊게 파묻고 머리를 헤드에 기댄 채로 천천히 빙그르르 한번 돌았다. 제 세계가 그를 중심으로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얼굴에 닿아오는 차가운 느낌에 화들짝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분명 주말에 그에게 연락을 해서 데이트 신청을 해야지, 뭐라고 문자하지, 그런 생각들을 하던 중이었는데. 

- ......야오왕?

그런 자신 앞에 서있는 건 야오왕이었다. 자신을 보는 그의 눈이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이젠 사수 이름도 함부로 막 부르는 겁니까?

- 아,

- 그것도 내 자리에서.

- 아!

그랬다. 여긴 야오왕의 자리였다.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다리가 풀렸다. 갑자기 일어서 몸이 놀란 모양이었다. 주저앉으려는 자신을 야오왕이 허리를 잡아세웠다. 졸지에 그에게 안기듯 기댄 자세가 되었다. 이젠 심장도 놀라 쿵쿵 뛰어대고 있었다.

- 다리에 힘주세요. 무겁습니다.

- 아, 네! 죄송합니다!

- 그땐 취해서 다리 풀린 줄 알았는데, 설마 지금도 술 마신 건 아니죠?

그가 자신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는 킁킁 댐에 화들짝 놀라서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방금은 좀, 위험했다.

- 술냄새는 안나네요. 보기보다 하체가 부실한가 봅니다.

그 말을 하며 야오왕이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 아닙니다! 저 완전 하체 튼실합니다! 제가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데요! 

발끈해 허벅지를 치며 말하자 그가 싱긋 웃었다. 그런 그에 또 민망해져 큼큼, 헛기침을 하는 자신이었고.

- 저녁은, 먹었습니까?

- ...아니요.

그러고보니 아직 저녁도 먹지 않고 있었다. 시계를 힐끗 보는데 벌써 두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잠깐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숙면을 취한 것이었다.

그때 그가 말없이 봉투를 건넸다. 자신이 받지 않고 벙쪄 있자 봉투를 든 손을 한번 더 흔들어 받으라 한다. 마지못해 받아든 봉투 안에는 초밥이 있었다. 그것을 한번, 야오왕을 한번 보았다.

- 이게, 뭐에요?

- 보면 모릅니까? 초밥입니다.

- 아...

박 터지는 소리를 하며 봉투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회사 앞에 위치한 고급 초밥집의 것이었다. 비싸서 몇번 먹어보지 못한 그 초밥집. 그에 대한 서운함이 눈 녹듯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물론 비싼 초밥 때문은 아니었다. 이 새벽에 자신을 보기 위해 다시 회사에 와준 야오왕 때문에.

- 저 때문에, 다시 오신 겁니까?

초밥에 파묻힌 고개를 들어 야오왕을 보고 묻는데 그는 자신의 자리 서랍을 열고는 뒤적이다 USB 하나를 제 코트 주머니에 쏘옥 넣었다. 그럼 그렇지, 그 야오왕이 저를 위해 왔을리가. 김 샜다.

- 밥은 집에 가서 먹고 일단 퇴근 하죠. 데려다 줄게요.

- 괜찮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먼저 들어가 쉬세요. 저는 알아서 가겠습니다.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휴대폰을 자켓 주머니에 넣고 가방과 초밥을 챙기고 코트를 팔에 걸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야오왕이 그런 자신의 옆으로 다가왔다.

- 뭐 이런 걸 사오십니까. 

그냥 USB만 챙겨가면 되지. 뭐 얼마나 중요한 게 들었다고 이 늦은 새벽에 굳이 회사에 와서.
고기에 이어 USB에도 우선순위가 밀린 것에 잔뜩 속상해 전하지 못할 말들이 주저리주저리 쏟아져나왔다. 물론 마음 속으로만.


- 야근 시킨 게 마음에 걸려서요.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있었네요.

- 대리님이 마음에 걸릴 게 뭐가 있습니까. 다 일 못하는 부하직원이 문제인 거지.

서운함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삐뚤어지게 나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야오왕은 꽤나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그는 일관된 무표정이었으나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 도대체 USB에 무슨 중요한 게 들어 있길래 이 새벽에 가지러 오십니까?

그러고보니 옷도 아까 그대로 양복차림이었다. 자료 챙겨가는 걸 보니 주말에도 일할 셈인가.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 아무것도 안 들어 있습니다.

네? 아무것도 안든 USB 가지러 이 새벽에 왔다고? 그렇다면... 그의 말에 또 금새 진실의 보조개가 움찔움찔 존재를 알리려 하고 있었다. USB vs 양예밍. 어쩌면 이건 명백한 양예밍의 승리일지도.

- USB는 핑계고, 기다렸습니다. 그쪽 퇴근.

- ......아

- 그러니까 내 차 타고 가. 데려다 줄게.

- ......네.

얼굴로 열이 확 몰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그는 앞장서 걸어갔다. 그런 야오왕의 뒷모습을 보며 양예밍은 심호흡했다. 방금 전의 그는 숨 막히게 섹시했으니까.






- 솔직히 아깐 서운했습니다.

- 뭐가 말입니까?

운전에 집중한 야오왕이 정면을 본 채로 물었다. 정말 뭔지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 대리님 진짜 뒤도 안돌아보고 휭 가셨잖아요. 심지어 좋은 주말 보내고 월요일날 보자니. 사람 간보는 것도 아니고.. 그럴거면 점심시간에 그렇게 사람 유혹하지나 말던가.

한번 터지기 시작하자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운전에만 집중하며 이쪽은 한번도 봐주지 않는 야오왕에 또 서운해지려는 그때, 때마침 신호가 걸렸다. 부드럽게 멈춰선 야오왕이 핸들에 기댄채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았다.

- 유혹?

영문을 알수 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힌 채 되묻는 그에 기가 찼다. 정말 이 인간이 몰라서 묻는 건가 싶기도 하고.

- 대리님이 이렇게, 이렇게 가까이 얼굴 들이밀고 막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저 유혹했잖습니까, 화장실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며 하는 말에도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건 양예밍씨가 한 행동 똑같이 따라한 겁니다. 정말 유혹 한 번 해봐요?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자신의 목 뒷덜미를 잡았다. 차가운 손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더니 조물조물 목덜미를 마사지 해주는 것이었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뭔가 간지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고 있었다. 

- 내가 좋은 주말 보내라고 남처럼 얘기해서 서운했습니까?

네에...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진짜 서운해서라기보단 목을 조물조물 마사지 해주는 손길에 기분이 좋아 무의식중에 한 대답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뒷목을 느긋하게 주무르던 손길에 힘을 확 주더니 잡아당겼다. 너무 놀라 부릅뜬 눈앞엔 코가 맞닿을 거리에 야오왕이 있었다. 휘어지는 눈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 좋은 주말은 애인 야오왕이랑 보내고,

쪽, 하고 가볍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 월요일엔 사수 야오왕이랑 보자는 거였는데.

초옥. 다시금 깊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술.

- 말했잖아. 공과 사 구분 하겠다고.

그 말을 하며 야오왕이 웃었다. 

- 같이 있자, 주말에.

방금 건, 명백한 유혹이었다. 언제나와 그랬듯 자신은 홀딱 넘어간 것이었고. 그가 열번을 찍으면 열한번이고 넘어갈 것이었다.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이번엔 자신이 먼저 그의 목덜미를 붙잡고 입을 맞췄다. 깊게 입술을 묻고 혀를 옭아맸다. 그의 말은 백번 옳았다. 자신은 말보단 행동이 앞서는 타입이라는 말.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트렁크를 열어 짐을 꺼냈다. 저를 기다리는 사이에 장을 본건지 큰 봉지를 바리바리 꺼내는 그에 얼른 짐 하나를 나눠 들었다.


- 뭐가 이렇게 많아요?

- 그냥 이것 저것 사다보니 좀 많아졌네요.

- 보기보다 경제관념이 없으신가 봅니다.

- 애인 집 정식으로 방문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이것저것 잘 보이고 싶어 욕심 좀 부리다보니 양이 많아졌네요.

괜히 웃으라고 건넨 농담을 진지하고 설레는 말로 받아치는 야오왕에 말을 잃고 말았다. 꼭 제 집인양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는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았다.

- 아, 집에 가면 티엔나도 있습니다.

- 알고 있습니다. 

- 대리님 개 좋아하신다고 했죠?

- 네.

- 우리 티엔나 사람 엄청 잘 따라요. 

-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저번에 산책도 시켰는데.

- 네?

- 주인이 고주망태가 되서 쓰러져 자니까 하도 풀이 죽어있길래 주인 대신 산책 좀 시켰습니다.

- 아,

- 참고로 양예밍씨가 들고 있는 짐은 티엔나 선물입니다.

- 네? 이렇게나 많이요?

- 더 사고 싶었는데 참은 겁니다.


아...... 누가 봐도 자신이 들고 있는 짐이 야오왕이 들고 있는 짐보다 묵직하고 빵빵했다. 이건 뭔가 애인집에 놀러온 게 아니라 티엔나 보려고 놀러온 것 같은 느낌인데... 아까는 USB 더니 이번엔 티엔나 인가.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고 있었다. 


- 티엔나! 아빠왔다.


부르기가 무섭게 달려오는 티엔나를 안으려 양팔을 벌리는데 스치듯 지나간 티엔나는 야오왕에게 달려들었다. 


- 티엔나... 아빤데...

자신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야오왕에게 달려들어서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티엔나와 그런 티엔나가 귀엽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쓰다듬는 야오왕. 누가 보면 내가 객식구인줄 알겠네. 이래서 자식새끼 키워봐야 다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거다. 기가 막힌 상황에 신발을 대충 벗고 짐을 챙겨 거실로 왔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거실로 왔음에도 거들떠도 보지 않고 둘만의 세상에 빠진 모양새에 헛웃음이 나왔다.


- 대리님, 그만 하시고 들어오시죠.


그런 자신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아주 배를 까뒤집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는 티엔나의 배를 연신 쓰다듬어주는 야오왕이었다. 명백한 자신의 패배였다. 이젠 하다하다 티엔나한테도 밀리고 있는 것이었다.


- 산책 갈까?

야오왕이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티엔나가 거실을 가로질러 방에 들어가더니 제 목줄을 물고 나왔다. 그 모습에 야오왕이 웃으며 티엔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대리님,

- 산책하고 와도 되죠?

- ...네?

- 보니까 저쪽에 공원 있던데. 

공원이 있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이었다. 벌써 세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 피곤하면 집에서 쉬고 있어요. 티엔나 산책은 내가 시키고 오겠습니다. 

- 네?

- 아, 쉬기 전에 장 봐온 거 정리 좀 해줄래요? 산지 좀 되서 냉장식품들은 얼른 냉장고에 넣어야 될 것 같은데. 

- 에?

- 그럼, 다녀올게요.


그러더니 정말 현관문을 열고 사라지는 야오왕이었다. 실화냐. 진짜 가버린 거?

그때였다. 천천히 닫히려는 문 사이로 빼꼼 야오왕의 얼굴이 들어온 건.

- 하는 김에,

-......

- 샤워도 깨끗이 하고 기다려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끝으로 정말 문이 닫혔다. 티엔나의 성화에 못이겨 뛰어가는 그의 구둣발 소리만이 그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은 온전한 자신의 몫이었다. 아닌가 설레임인가. 한가지 확실한 건, 


- .....야근하길 잘했어.


어쩌면 가끔 이렇게 야근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함께 퇴근을 하고. 밤을 함께 보내고..자꾸만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비록 티엔나에게 순위를 뺏기기는 했지만 그 다음이 저라는 것은 누가봐도 뻔한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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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너무 오랜만이라 다들 저 잊으셨을까 걱정되지만, 또 이렇게 죽지도 않고 찾아왔습니다.


그간 혐생의 많은 고통들과 직면하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려버리고 말았네요ㅠㅠㅠㅠ


그래도! 저는 옵니다! 죽지도 않고 또! 올겁니다!


오랜만에 써내려간 글이라 뭔가 엉망인 느낌이지만(언젠 안 그랬던 것처럼 말하는 뻔뻔함)


그래도 마무리까지 잘 하고 싶은 욕심에 다시 찾아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글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고, 게다가 무려, 후원까지 받다니...! 이래도 되나 싶을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부끄럽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밍왕하는 소담소담이 되겠습니다!


언제가 마지막이 될진 모르겠지만 마지막까지 잘 완결 짓고 싶은 게 제 욕심이에요. 


가능하다면 야오왕 시점으로도 글을 한번 써보고 싶은데, 제 미천한 글실력으로 가능할 진 모르겠네요!


드디어 맨정신의 양예밍 집에 야오왕이 오게 됐어요(짝!짝!). 매번 고기에 USB에 티엔나에게까지...생물과 비생물을 넘나들며 질투를 느끼는 양예밍. 그런 예밍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귀여워하는 야오왕 되시겠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진 실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뻔뻔함)


뿌려놓은 것들을 다 마무리 하려면... 음...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저는 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시면 좋겠어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어요! 다같이 밍왕하면서 더위도 힘차게 이겨내셨으면 좋겠습니다 ^_____^


오늘도 역시 읽어주셔서 무한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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