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20140104 / 수정일 20181006  - 잘못 쓴 부분이 눈에 띄어서 손을 좀 댐 


대학 시절 그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학생이었다. 그는 밑단이 단정한 코트를 입고 한 팔에는 위대한 음악가의 전기나 악보를 낀 채 은행잎이 널린 교정을 걷고는 했다. 그의 반듯한 걸음 곁으로 매캐한 연기에 숨을 헐떡이는 학우들이 찢어진 깃발을 들고 달려갔다.
그라고 불의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세계는 광장보다는 여든 여덟 개의 반질반질한 건반들 위에 있었다. 먼지가 하얗게 내려앉은 아름다운 악보들, 값비싼 기름을 태워 읽는 무용한 예술사학... 수의 신비.
그는 독재자를 위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외면을 받는 노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평생을 상아탑 안에서 살아온 그의 언어는 아름다웠고 강의실 밖으로는 몇백 년도 전에 심어진 은행나무가 내다보였다. 그는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언제고 성실했으며 한 번 배운 바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노교수는 곧 맨 뒷자리에 앉아 오래된 만년필로 글자를 쓰는 훌쩍한 학생을 총애하게 되었다.
그가 피아니스트로서 첫 연주회를 갖게 되었을 때 당에서 인정하는 단 하나의 신문에 추천사가 실린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 글을 써준 교수도 받은 학생도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몰랐다. 크리스마스 시즌이었고 연주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는 조그마한 홀을 빌렸고 가족과 친지, 더 괜찮은 음악회 티켓을 얻지 못한 소수의 기자들 앞에서 공연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단상에 올라간 그 앞에는 금술이 달린 제복을 입은 군인들과 부채를 든 부인들, 값비싼 정장을 입고 시계를 찬 인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가 연주자의 예에 따라 인사하자,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그들 중 한 사람이 딱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쳤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다른 박수들이 이내 물결처럼 뒤따라왔다.

끔찍하게 길게 느껴지던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의 소파에 몸을 묻었을 때 그는 진이 다 빠져 사람을 상대할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시대에는 굳이 자신의 감상을 연주자 본인에게 들려주고 싶어하는 인사들이 흔했다.
"의미심장한 공연이었어."
들어온 남자는 젊었고 제복은 입고 있지 않았지만, 얼핏 문틈으로 그 뒤에 도열한 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권력자였다.
"과분한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내 말이 칭찬이라고 생각해?"
연주자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입안이 말랐고 조금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게 그는 이번 공연 프로그램에 체제가 선정한 '애국' 작곡가의 곡을 단 한 곡도 넣지 않았던 것이다. 조그마한 학생 공연으로 기획한 무대였기에 부려볼 수 있었던 만용이었다. 물론 대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만일 이름모를 젊은 권력자가 그를 괘씸하게 여긴다면, 연주자로서 그의 커리어는 못해도 향후 오 년간은 난항을 겪게 될 것이었다.
뻣뻣한 편백나무처럼 굳어있는 미도리마를 그 자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훌쩍 긴 다리, 기름하고 모양이 좋은 손,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을 내려다보게 되는 높은 얼굴, 샌님 같이 하얀 얼굴과 겉보기보다 굳은 심지를 보여주는 듯 일자로 다물린 입매...
"농담이야." 그 모든 것을 찬찬히 살피는 남자의 표정은 앞발 사이에 포획한 새앙쥐를 들여다보는 고양이 같기도, 그저 호기심 어린 소년 같기도 했다.
"선곡이 순수하던걸."
높게 잡아도 서른 중반은 넘지 않았을 앳된 얼굴에 중키, 편안한 차림을 한 남자였다. 화려한 제복도, 권위를 나타내는 어떤 상징도 없었지만 오히려 바로 그게 진짜 힘을 증명하는 듯했다. 자신의 죄수에게 자비를 베푸는 이야기 속의 왕처럼 그가 빙그레 웃었다.
"아름다웠어."

문이 닫히자마자 미도리마는 다리가 풀려 휘청였다. 복도가 소란스러워졌고, 카메라 플래시 터지는 소리도 들렸다. 모두가 저 남자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연주자에게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첫 번째 공연이 끝났으며, 오늘 그가 최선의 연주를 해내었다는 사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다음 번, 다다음 번 공연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저 밖에서 기다릴 가족을 만나고,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 조용히 귀가하고, 다시 똑같은 일상을 보내며 다음 공연을 준비하고 싶었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음 날 조간 신문을 펴든 미도리마는 일이 그렇게 간단히 돌아가지 않음을 알게 된다. 그는 어제 저에게 찾아왔던 남자가 그와 나이차가 얼마 나지 않는, 젊은 나이로 집권당의 서기장 자리에까지 오른 유망한 권력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후원할 것임을 기자들 앞에서 선언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공연장에 금박이 입혀질 것이고 더 넓은 무대에 서게 될 것이며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 대신 정치 끄나풀들이 객석 가득 들어차게 되고,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오직 제 소임을 다할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는 건 조금 나중의 일이다.
더 뒤의 일들도 있다. 다섯 해도 채 지나지 않아 그 젊은 청년은 집권당의 당수 자리에 오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머리에 스스로 왕관을 씌우리라는 것. 그리고 옛 황제의 궁전에서 거행될 대관식에 자신을 부를 것임을, 자신이 그 부름을 거절하고도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으리라는 걸.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많은 일들. 총통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이름으로 '신타로.' 부르게 될 것이고, 그 뒤엔 그가 자신을 존칭 없이 '아카시.' 부르는 것을 허락하게 될 것이다 둘만 있는 방에서, 그는 총통이 암살자를 경계해 혼자 잠드는 방에 불려가 피아노로 그를 재우게 될 것이다.
(스물 넷의 미도리마는 신문을 넘긴다. 흰빵에 버터를 바르고,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어쨌든 오늘 하루가 예정대로 흘러갈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만족하는 그.) 그가 아직 알지 못하는, 앞으로 일어날 많은 일들. 그는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다. 정체를 숨기고 저에게 접근한 혁명가 '친구'의 총탄에 '아카시'의 왼쪽 가슴이 꿰뚫리고 그는 언제 체제의 부역자였냐는 듯 독재자 암살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자유의 피아니스트로 칭송받을 것이며, 그런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골로 망명한 그는, 몇 년 가지 않아 잊힐 피아노 연주곡을 쓰던 중 군부의 몰락으로 가족을 잃은 장교에게 살해당할 것이다. 차가운 총구가 관자놀이에 닿는 순간 그는 기억 속, '친구'의 총탄에 심장을 꿰뚫리기 직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에서 악보를 우수수 떨어뜨리는 저를 돌아보며 네 탓이 아니라는 듯 너를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던 그 사람의 눈빛을 기억하게 되리란 사실.
그 모든 일련의 사실들을
알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이제 막 첫 번째 연주회를 성황리에 마친 젊은 피아니스트 미도리마 신타로는 딱딱한 소파에 몸을 천천히 누인다. 손수건으로 관자놀이에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고 예정대로 흘러갈 내일의 일정을 생각한다. 대기실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란이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그는 눈을 감는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