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었다. 태양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까만 새벽.

잠에서 깨어난 레이븐은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는 것을 인지한 뒤에야 옆자리가 허전한 것을 깨달았다. 오늘도 역시 에녹이 잠드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잠자리에 함께 들어도 거의 매번 자신이 먼저 잠들어버리므로 에녹의 자는 모습을 지켜본 일은 매우 드물었다. 오늘도 역시 그랬다.


‘잠이나 푹 자면 좀 좋을 텐데.’


요즘 에녹에게는 고민거리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레이븐 앞에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지만 에녹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의 찰나의 표정에서 레이븐은 그것을 찾아냈었다. 하지만 자신이 먼저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묻기에는 주제넘은 일이 아닐까 하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었다.


침실이 있는 위층을 둘러본 레이븐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위의 어둠에 익숙해질 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거실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에녹을 발견한다. 소파 테이블에는 빈 술잔이 하나 놓였다. 레이븐이 바로 곁까지 다가온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에녹은 어떤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왜 불도 안 켜고….


그제야 레이븐이 곁에 있다는 걸 깨달은 에녹은 우울하던 표정을 금세 날려버리고 환한 미소로 맞이했지만 레이븐은 그 미소 뒤에 앙금처럼 깔린 우울을 알아챈다.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으나 괜한 참견에 그가 곤란해 할까봐 이번에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대신 그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가 입 밖으로 말하지 않더라도 그 속에 있는 말을 이해하고 어루만지고 싶었다. 듣지도 않은 말에 동조하고 싶었다. 당신이 모두 옳다고, 당신 말이 모두 맞다고.

하지만 어떻게?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레이븐에겐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위로를 하려니 막상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다. 다정하고 따뜻한 말로 능숙한 위로를 건네고 싶은데 말로 표현하는 건 언제나 어렵기만 하다.


대신에 말없이 에녹의 머리를 껴안았다. 제 품에 동그마니 들어온 머리가 포근했다. 도리어 레이븐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얌전히 자신에게 머리를 내맡기고 안겨 있는 에녹이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고. 

그래서 레이븐은 에녹의 부드러운 귀를 살짝 깨물었다. 이로 잘근잘근 부드럽게 씹으며 본심을 전부 내비치지 못한, 다소 장난스러운 말로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한다.


“에녹이 들었던 안 좋은 말들 내가 다 먹어버릴 거예요.”


레이븐이 잇새로 말을 할 때마다 귓가에 불어오는 따스한 입김에 에녹의 귀가 저절로 파닥였다.

에녹이 웃으며 대꾸한다.


“아무거나 함부로 먹지 마요. 어떤 무섭고 끔찍한 말일 줄 알고. 겁도 없네.”


그러면서도 에녹은 간지러워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레이븐이 그의 목덜미를 꽉 껴안고 있어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레이븐의 치명적인 약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운 좋게도 레이븐은 지금 맨손이다.

에녹은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레이븐의 허리를 안아 당겼다. 그 바람에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린 레이븐이 쓰러지지 않으려 급하게 한쪽 무릎을 소파에 꿇었고, 드디어 에녹을 안고 있던 팔이 풀어져 에녹의 어깨를 짚는다.

풀려난 에녹은 레이븐의 팔 위에서 손끝을 느긋이 끌어내리다 그 끝에 있는 손등을 붙잡았다. 순간 레이븐이 움찔 놀라는 게 느껴졌지만 두 사람 모두 거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조용하지만 치열한 알력 다툼이 일었다. 

거기서 에녹은 나아갔고 레이븐은 버텼다. 버티려고 했다. 깃털로 간질이듯 손끝으로 손등을 살짝살짝 스치는 예상치 못한 에녹의 공격에 그를 붙잡았던 레이븐의 손가락은 힘을 잃고 말았다. 

에녹은 레이븐의 힘이 느슨해지는 걸 느끼곤 그의 손바닥 아래로 재빨리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손가락으로 얽었다. 기다란 손가락 옆쪽 피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의 연한 살, 손바닥의 손금, 굳은살이 작게 박인 사랑스러운 곳, 손바닥과 손목의 경계. 에녹은 레이븐의 그 모든 곳을 손끝으로 느리게 덧그렸다. 에녹의 손끝이 그의 손 곳곳을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고 레이븐의 손은 완전한 폐허처럼 의지를 잃었다. 


레이븐이 떨고 있었다.

감각에 둔한 에녹의 손은 레이븐을 만지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거친 강도로 어루만지는 자신의 손길만으로도 레이븐에게는 큰 자극이 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최대한 부드럽게 다루고 있지만, 화상 자국과 상처들로 인해 거칠고 까슬해진 자신의 손이 극도로 예민한 레이븐의 손을 얼마나 자극하고 있을지 넌지시 헤아려 보는 것만으로도 꽤나 짜릿했던 것이다.


평소에도 이런 장난을 종종 걸었다지만, 그때마다 얼른 손을 거두어갔던 것과는 달리 오늘은 처음부터 레이븐이 버티기로 작정한 것이 뻔히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끝이 덜덜 떨릴 정도로 이미 선을 넘어 무리하고 있다. 레이븐의 얼굴을 바라보니 입술이 하얘지도록 깨물고 있다가 에녹의 눈과 마주치고선 태연해진다. 아니, 태연한 척 가장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은 것을 안다. 에녹은 그런 레이븐이 안쓰러우면서도 버티는 게 귀엽기도 하고, 또 이것보다 더한 자극에는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하기도 해서.


그래서 그는 레이븐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레이븐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레이븐의 심장이 덜컥, 불안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을 때, 에녹은 자신의 입술을 떨리는 손목에 갖다댔다. 손목의 맥이 뛰는 부분에서부터 검지와 중지가 갈라지는 길까지 느리고 깊숙하게 손바닥을 핥았다. 레이븐의 소리없는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들리지도 않는 그 비명이 자신을 부추겼다. 손가락 사이를 핥던 혀가 그의 가운뎃손가락으로 옮겨갔다. 막대사탕이라도 먹는 양 천천히 공을 들여 빨다가 입 속으로 삼켰다. 그러면서 레이븐의 얼굴을 힐끗 살핀다. 내리깐 속눈썹이 떨리고 이미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에녹의 까슬한 혀가 닿는 곳마다 레이븐의 전신에는 소름이 돋았다. 소스라치며 손을 빼려고 하면 에녹의 손아귀에는 더욱 힘이 들어간다. 결국 레이븐의 입에서 약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싫은 거예요, 아님 좋은 거예요?”

…….”


레이븐은 몰아치는 감각에 몸서리치면서도 이 느낌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분명 소름이 돋고 차라리 눈을 감게 되고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게 되는데도 말이다. 일차원적으로 마주하는 감각 아래에 숨어있던 다른 차원의 감각이 에녹에 의해 일깨워지고 있었다. 간지럽기도 하고 짜릿하면서 설레는 것 같기도 한 생경한 느낌. 허리 뒤쪽이 뻐근해져 오는 이 느낌이 분명 싫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순간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찬물을 끼얹은 듯 급격히 머리가 차가워졌다. 그 누구에게도 손을 핥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그런데 눈앞의 이 사람이 하는 일이라면 이런 짓까지도 좋은 건지. 자신의 머리가 드디어 고장나버린 게 아닐까 레이븐은 생각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은 분명 자신의 속에서 가장 특별한 범주에 드는 사람일 것이다.


레이븐이 딴 생각을 하느라 잠시 손의 감각에 집중하는 데 소홀해진 것을 알아챈 에녹은 아까 레이븐이 가장 크게 반응했던 손목과 손바닥의 경계를 송곳니로 살짝 깨물어 레이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내게만 집중해달라구요.’


그리고 다시 그 자리를 진하게 핥아올린다. 


!”


다리의 힘이 풀려버린 레이븐이 그만 에녹의 무릎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에녹은 여전히 한쪽 팔로는 레이븐의 허리를 감고 한쪽 손으로는 레이븐의 손을 붙잡은 채였다. 자세의 변화로 잠시 멈추었던 움직임이 다시 이어졌다. 에녹은 레이븐의 반응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혀로는 레이븐의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손을 구석구석 핥으며, 눈으로는 레이븐이 짓는 모든 표정을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흐느낌을 참아내면서 레이븐은 엉뚱한 곳에서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손이고 혀고 왜 이렇게 까끌까끌한 거지. 나는 이 느낌의 좋고 싫음조차 구분하기 힘든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여유로운 걸까.

그리고 엉뚱하게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매몰차게 뿌리치지도 못하고, 초조하고 무력하고 무방비하고 흐트러진 모습밖에 보이지 못하면서도 기분 좋다고 생각해버린 자신에게.


손바닥을 공들여 핥던 혀가 이제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손바닥과는 또 다른 새로운 감각이 레이븐의 온몸을 떨게 했다. 레이븐이 흐느끼는 소리는 한층 격해졌다. 살을 에는 듯 날카로운 간지러움이 손등을 파먹는 것만 같다. 그와 동시에 자꾸만 허리 뒤쪽이 저릿저릿해 온다. 아래로 위로, 저릿한 느낌은 등줄기를 따라 위아래로 퍼져나갔다. 전류감 뿐만 아니라 열감까지 더해지며 레이븐은 더 이상 그에게 몸을 맡겨둘 수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뿌리쳐 결국 그에게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에녹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에녹의 어깨를 힘껏 밀쳤지만 에녹은 레이븐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아 두 사람 사이를 더욱 밀착시켰다. 얇은 옷을 사이에 둔 서로의 몸이 가까이 맞닿았다. 마주한 얼굴을 향해 두 사람의 뜨거운 숨이 교차하며 섞여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한다. 상대방의 몸보다 자신의 몸이 더 뜨거운 것 같다고.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하다 에녹이 입을 열려고 할 때 레이븐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에녹은 레이븐을 그대로 둔 채 말한다.


“날 위로하려 했던 거, 알아요.”


그의 말에 레이븐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나도 당신을 위로하고 싶어요. 나에게도 투정부려 줘요.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어.”


아까와는 다른 성격의 눈물이 새로이 차올랐다.


“내가 다 들어줄 수 있어.”


에녹이 레이븐의 얼굴을 잡고 제 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레이븐의 눈가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흘렀다.

에녹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속내를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에 에녹이 서운해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위로를 해주려다 오히려 자신이 위로를 받아버린 것이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그러나 진지하게 대답을 원하는 그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이는 이유는 자꾸만 흘러넘치는 이 눈물 때문이라며 괜한 눈물 탓만 하는 것이었다.

그런 레이븐을 바라보며 에녹은 생각했다.

레이븐이 드러내는 모든 감정, 날것 그대로의 감정까지도 보고 싶다고. 그의 감정을 봉인하고 있는 맑고 잔잔한 물을 모두 말려버리고서 맨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가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본심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러니, 내 앞에선 더 솔직해져도 괜찮아요. 지금처럼 그렇게 우는 모습까지도 나는 전부 알고 싶어.’


한참이나 레이븐의 눈물을 닦아내다 에녹이 부드럽게 말을 꺼낸다.


“나도 레이븐이 들었던 안 좋은 말, 다 먹어버리고 싶은데.”


무슨 말인지 몰라 눈물이 가득한 눈을 어리둥절 뜨고 있으려니 에녹이 레이븐의 귓바퀴를 은근하게 어루만지며 말한다.


“내가 들었던 나쁜 말, 겁도 없이 다 먹어줬잖아요. 나도 먹어줄게요.”


당황한 레이븐이 벌떡 일어났다.


“나, 나는 그런 거, 없어요. 들은 적 없어.”


잠옷 소맷자락으로 남은 눈물을 슥슥 닦아내며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는 레이븐의 등 뒤로 에녹의 웃음기 띤 말이 들려온다.


“침대에서 먹어달라는 거죠?”


얼마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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