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퀘스트 박스로 받았던 리퀘 단문입니다.



아이들은 가끔 자신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키가 크고 골격이 단단해지는 가시적인 변화는 물론이요, 막 싹이 튼 새순처럼 작고 여리던 손이 점점 야물어지고 힘이 붙는 과정을 아이들은 제 경우가 아닌양 굴었다. 말로는 '나 이젠 다 컸어!' 하고 어른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해도, 가끔은 점차 성인의 경계로 향해가는 스스로를 자각하지 못해 멋대로 굴 때가 있는 것이다. 이때 당황해하고 아이의 변화에 놀라워 하는 건 온전히 어른의 몫이다.

명가 삼형제가 잠시 파리에 머물때도 그랬다. 당시 아성은 명루와 같은 길을 걷고 있었고, 두 사람은 상당히 많은 비밀과 사상을 공유하며 명공관에서보다 더욱 가까워졌다. 형과 아우의 관계에서 이제는 동지로까지 그 영역이 넓혀졌으니, 함께 있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고 이제는 서로의 안색과 미세한 눈빛 변화만 확인해도 속내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두 사람의 동생인 명대가 바보가 아니라면 형님들의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빈에서 머물렀던 명대는 학교 진학에 실패한 후(사실 학교가 명대를 거부했다기 보단 명대가 실증이 나서 먼저 공부를 놓아버린 쪽에 가까웠다) 더욱이 명대는 명랑하고 오만한 구석이 있는 도련님이었지만, 아둔하고 제 일에만 관심 있는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그는 쿠션을 꼭 끌어안은 채 소파에 누워서, 두 형님이 자기들끼리 무엇인가를 소곤대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명대의 눈이 샐쭉해지며 흥! 하고 콧방귀를 뀐 아이가 형들이 보이지 않도록 몸을 돌려 누웠다. 천장에 새겨진 문양도, 조개 모양의 등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발을 한번 굴리자 발꿈치에 제대로 얹어맞은 소파가 삑- 하고 불만스런 소릴 냈다.

명루와 아성이 두 사람만의 특별한 유대감과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하여, 그들의 보물은 명대를 등한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 사람은 명공관에 있을 때보다 더욱 명대에게 신경을 썼다. 누이 명경의 신신당부를 편지며 전화로 보고 들어야 했던 것은 물론이요, 파리의 자유로운 공기에 잔뜩 들뜬 동생에게 형들도 꽤나 관대해졌기 때문이다. 특히나 아성의 입당을 알게 된 명루는 아성의 눈부신 청춘을 지켜주지 못하고 기어코 제 손으로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다보니 명대에 대한 명루의 과보호는 점차 정도가 심해졌다. 문제는 아성도 명루를 별로 말릴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통금을 어기지만 않으면 형님들은 명대가 숙제를 게을리 하거나 혹은 과도하게 물건을 사는데 돈을 써도 적당히 눈감아 주었다. 그 사이 파리의 풍족하고 자유로운 공기와 물자 속에서 명대는 더욱 무럭무럭 자랐다. 10대 소년의 명랑하고 설익은 분위기와 더불어 본래 품고 있던 화사한 외모가 점차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명가 삼형제가 머물고 있는 맨션의 거리에는 유달리 맑은 소리로 잘 웃으며 주변을 뛰어다니는 동양인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한번씩은 오고갔다.

명대는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컸고, 팔다리는 길어졌다. 키가 아성과 거의 비슷해졌고 어깨가 벌어지며 목소리가 굵어졌다. 나이에 비해 2차 성징이 느린 편이었지만, 한번 성장이 시작되자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빠르고 경이로웠다. 막상 두 사람에겐 명대는 점차 커가는 소년이 아닌, 명공관의 도련님이자 볼 통통하고 손발 작은 아이일 뿐이었지만. 길어진 머리카락이 눈썹을 넘어 눈가를 찌르면 아이는 후 후, 하고 머리카락을 입으로 불며 더욱 요란하게 파리의 거리를 뛰어다녔다. 명루는 녀석도 참, 하고 웃으면서도 그런 명대에게 혼을 내거나 행동을 제어하진 않았다. 대신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하고 염려 섞인 한 마디를 남길 뿐이었다. 명대는 그런 큰형의 염려를 대충 넘겨버리다가 기어코 한번은 거하게 넘어져 무릎이 깨졌다. 아성은 명대의 바지를 걷어올리며 무릎에 약을 발라주곤 했고 명루는 동생의 복숭아색 무릎에 붉은 피가 송송 새어나오고 시퍼렇게 멍이 드는 것을 보고는 동생의 부주의를 탓했지만, 시무룩한 동생을 위로하려는 생각인지 그 날만은 단골 빵집에서 과자며 맛있는 빵을 잔뜩 사 동생의 품에 안겨 주었다.

본래 누이에게만 유달리 어리광을 부리고 안기는 줄 알았던 녀석이, 형님들의 아낌없는 애정 때문인지 점점 치대는 정도가 잦아졌다. 특히 그나마 나이차가 덜한 아성보다 명루에게 그 정도가 심했다. 명루는 교수 일이며 동시에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 공사 및 중국 쪽 인사들과 긴밀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학회 쪽에서도 꽤 이름이 알려진 재원이었다. 낮에는 물론이요 밤에까지 이런저런 일에 불려다니고 사교 활동까지 참여하느라 점점 동생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날이 적어졌다. 새벽 일찍 나가는 형에게 인사도 제대로 하지 한 명대가 잠옷 차림으로 부산하게 거실을 돌아다니며 투덜대다가 기어코 아성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만다.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에 잼을 발라 우적우적 씹어대며 하루종일 '오늘 밤엔 형 얼굴을 보고 말거야!' 하고 기어코 한 소리를 한다. 하지만 명대의 야심찬 결심은 결국 이뤄지지 못하고 명루는 늦은 시각, 밤공기를 가득 묻힌 코트를 벗은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색색 소리를 내며 잠든 동생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조용한 인사를 남기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명대는 빈 아파트를 뛰어다니며 잔뜩 뿔이 났다.

명루는 그 날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했다. 동생들과 조만간 함께 나가 연극을 보기로 약속했지만, 학회 일정이 겹쳐서 아예 파리를 며칠 비워야 할지도 몰랐다. 명루는 스케쥴을 머릿속으로 더듬어보며 코트를 입고 머플러를 둘렀다. 회색 머플러가 채 목에 감기질 못해 끝자락이 명루의 앞가슴을 간지럽혔다. 내가 뭘 가져가야 하지..명루는 부지런히 움직이면서도 머리를 굴렸다. 아성에게 모든 일을 공유하기 전에는 혼자서도 스케쥴에 맞춰서 행동하고 제 물건은 알아서 가지고 다녔는데, 아성이 명루의 비서처럼 일하게 된 요즘에는 혼자 하는 일엔 서툴러졌다. 서재에 놔뒀던 서류며 짐을 챙기고 나온 그는 근처 빵집에서 식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외국 생활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는 빵이나 스프, 오믈렛이 익숙했지만 가끔은 고향의 음식이 입에 당길때가 있다. 그것이 아성이 가볍게 만들어놓은 쌀죽이라고 할지라도.

학회에서 돌아오면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중국 식당에 세 자리를 예약해둬야 겠다고 생각한 찰나, 문이 열리더니 '형님!'하고 졸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명대?"


명루가 묻자 실크 파자마차림의 명대가 나온다. 후아암, 하고 하품하는 아이의 머리가 새집을 방불케 한다. 명루가 불을 켜놓지 않아서 아파트 거실은 어둑했고, 희미하게 새어나온 빛이 창을 타고 들어와 거실에 흰 기둥을 세웠다. 아이의 키가 훌쩍 자라다보니, 그림자도 자연히 길어져 명루의 키와 견주어 볼 만 했지만 명루는 여전히 막 명공관에 온 아이를 대하듯 명대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찍 일어났구나."


명루가 웃자,명대는 으응..하고 대충 고개를 주억이며 대답했다.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명루는 명대에게 '더 자라'고 한 마디 한 후 돌아섰다. 하지만 명대는 형님의 짧은 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쌀을 찌푸리며 재빨리 형에게 달려들었다.


"형님!"


명대의 두 팔이 명루의 허리를 감았다. 아이의 상판이 명루의 등을 덮었고 예쁜 코가 어깨를 콕 찔렀다. 명루는 돌아서려던 찰나, 명대에게 붙잡히자 조금 놀라서 평상시와는 달리 살짝 반응 속도가 늦었다. 그는 살짝 비틀거렸고 명대는 명루의 단단한 허리를 끌어안으며 명루의 몸을 억지로 돌려세웠다. 아이의 팔 힘이 생각보다 세고, 명루의 몸은 의외로 명대에게 쉽게 휘둘려 명루는 적이 놀랐다. 물론 명루가 진심으로 명대를 밀어냈다면 명대는 형을 거스르지 못했을 것이며, 명대가 완전히 명루의 신체를 제압할 수 있을 만큼으 ㅣ압도적인 차이가 나는건 아니었지만, 명대의 키와 체격, 약력을 7살 시절과 흡사하게 견주고 있던 명루로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어..명루가 눈을 크게 떴고, 명대는 그 사이 명루를 와락 끌어안았다.


"형님, 요새 왜 자꾸 일찍 나가? 바쁜 척 하는거 아녜요?"


명대는 코맹맹이 소릴 내며 명루의 허리를 꽉 붙잡은 채 애교를 부렸다. 명루는 제 가슴에 맞닿은 명대의 가슴이 꽤 넓어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형님을 마주하는 아이의 눈에서 꽤나 성숙한 티가 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창문에서 새어나온 빛이 점차 각도를 달리하여, 명대의 옆얼굴을 비췄다. 수려한 눈썹 눈커풀의 흉터, 연갈색의 아름다운 눈동자와 쭉 뻗은 콧대. 아름다운 소년이었고, 몇년만 지나면 성인이 될 것이다.


"명대야."


명루는 희미한 당황과 감탄사를 애써 입술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혀가 조금 무거워진 기분이 들었다. 명대는 '오늘은 좀 쉬어. 나 오늘 사고 싶은거 있단 말예요, 형님 나랑 같이 나가요.' 하고 형님 속내를 조금도 알지 못하고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그래서 아이의 성장한 몸은 더욱 큰 충격으로 명루에게 다가왔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중심을 잡았을 때는 아성이 거실로 나와 형님을 그만 붙잡으라며 명대에게 타박을 줬을 때였다.


명루는 후, 하고 짧은 한숨을 쉬며 명대의 머리를 더욱 엉망으로 흐트러트렸다. 명루의 커다란 손에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솟았고 명대는 언제나처럼 귀엽게 투덜거렸다. 명루는 그제야 안정을 되찾고, 평소처럼 큰형의 따사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아직은 아이지. 어린애지.'


그 감상이 언제 바뀔지는, 명루 자신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eiosolu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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