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니는 보이밴드로 데뷔한 뒤 얼터너티브 락 쪽으로 전향한 가수다. 데뷔부터 지금까지 잘생긴 얼굴과 잔잔한 목소리로 인기를 끌었다. 작곡에도 능했으며 안무에도 관여하는 등 여러모로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밴드는 오랜 활동 이후 해산했고, 이후에 그는 침체기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최근 솔로로 다시 데뷔해 그 인기를 되찾았으며 작곡, 작사에 능한 싱어송라이터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 배너는 시내에서 바를 운영하고 있다. 취미는 수학 공식을 푸는 것이다. 이런 취미는 교수를 목표로 했던 대학 시간강사 시절부터 갖고있었다. 당시 대학에서 일하던 무렵, 그는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해 3년 동안 가사상태에 빠지게 됐다. 3년이 흐르고,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배너는 생각이 바뀌어 교수를 목표로하는 걸 그만뒀다. 그는 대학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고, 다른 삶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그는 삼촌이 은퇴하면서 그가 운영하던 바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 배너는 토니의 팬이었다. 보이 밴드 시절부터 노래를 즐겨 들었고, 앨범도 전부 가지고 있었다. 일을 하는 도중에도 즐겨 들었던지라 주변에서도 그가 토니를 좋아하는 걸 알 정도였다. 배너의 지인들은 그를 위해 잡지를 사면 토니의 인터뷰만 잘라주기도 했다. 그런 배너가 토니에 대한 호감이 더 증가한 건 사고 이후였다.


-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배너는 3년동안 가사상태에 빠져있었다. 가사상태에서 깨어난 뒤에야 배너는 토니가 그룹활동을 그만둔데다가 그 사이 침체기를 겪고 막 솔로로 데뷔했다는 걸 알게됐다. 처음에 그는 밴드가 해체하고 토니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자신의 상황과 겹쳐 굉장히 우울해했다. 하지만 솔로로 데뷔한 토니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의 생각은 바뀔 수 있었다. 토니의 솔로 곡은 그룹 활동을 했을 때와는 방향성은 달랐지만 더 공감이 갔고, 배너의 취향에 맞았다. 배너는 다시 토니의 노래를 들었고, 그러면서 재활훈련을 했다. 배너는 그렇게 3년 동안 엉망이 된 주변과 잃어버린 시간을 정리했다.



- 토니의 노래는 배너에게 재시작과 희망에 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교수직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찾기로 결심했다. 배너는 삼촌이 운영하던 바를 이어받아서 해보기로 했다. 그는 스스로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됐다. 배너에겐 매일 일을 마치기 전 토니의 노래를 크게 들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 그러던 어느 날 배너는 토니가 깜짝 쇼케이스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연장은 배너의 가게에서 차로 1시간 반이 걸리는 곳이었다. 거리도 적당했고 티켓값도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티켓은 완매되었고, 배너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공연 사실을 알게 된 배너는 늦게나마 남은 티켓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뚜렷한 소득을 얻지 못 했다. 점점 공연 날짜만 다가왔다.


- 배너는 낙심했고, 눈에 띄게 침울해져서 단골들이 눈치챌 정도였다. 클린트 바튼 역시 그런 우울을 눈치 챈 단골이었다. 그에겐 배너처럼 토니의 팬인 배우자가 있었고, 마침 그녀에게는 여분으로 남은 표가 있었다. 바튼은 배너가 그 표를 살 수 있도록 자리를 주선해주었다. 배너는 바튼과 그의 배우자에게 감사의 의미로 공짜 보드카와 웃돈을 얹어주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인사했다.


- 배너는 공연을 보는 김에 휴가를 계획하기로 했다. 공연장에서 가장 가까운 호텔이 수영장과 카지노도 딸려 있어서 휴가를 즐기기에 적합해 보였다. 배너는 호텔을 예약하고 공연 표를 두꺼운 봉투에 넣어서 침대 가까이에 두고 잤다.





- 공연 전날, 미리 호텔에 체크인 한 배너는 호텔 안내 책자를 보고 1층에 바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1-2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신참 바텐더였고, 술을 즐기지 않아서 메뉴를 개발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자에 나온 오리지널 칵테일이 배너의 관심을 끌었다. 색과 조합이 밋밋하지 않았고 브렌디 베이스라서 배너의 입맛에도 딱 맞을 것 같았다. 검색해보니 리뷰도 매우 좋았다.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면 일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시간을 본 배너는 몇 잔만 마시고 돌아오자는 생각을 갖고 방문을 나섰다.


- 바로 바에 내려간 배너는 카보네라라는 이름의 칵테일을 시켰다. 오렌지 색의 칵테일이 나왔고, 한 입 마시니 상큼한 맛과 향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그 맛이 마음에 든 배너는 그 뒤로 두 잔이나 더 시켜서 마셨다. 간단한 메모를 하면서 세 잔째를 다 비우자 얼굴이 화끈거렸다. 더 마시면 취할 것 같아서 배너는 방으로 돌아가려고 일어섰다.



- 바를 나서는데 로비 쪽이 소란스러웠다. 술에 취한 배너는 들뜬 마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12시가 지난 새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로비는 낮보다 소란스러웠다.


- 로비 쪽으로 나간 배너는 깜짝 놀랐다. 내일 공연의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가 경호원에 둘러싸여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호텔에서 토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던 배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멈췄다. 그리고 토니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당황해서 큰 화분 근처에 반쯤 몸을 숨겼다.



- 그렇게 화분 뒤에 숨고 나자, 배너는 자신이 숨었다는 사실이 황당했다. 토니를 만난 것 때문에 놀랐는지, 평소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했다. 다시 자연스럽게 걸어나가려던 그는 토니와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생각하며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하지만 경호원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말을 걸기가 겸연쩍었다. 아쉬운 마음에 배너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 그러던 와중에 호텔 종업원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고, 그를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요청을 건넸다. 토니는 흔쾌히 사람들의 부탁을 들어줬다. 그 모습을 보고 배너는 다시 사람들 틈에 끼어서 사진을 부탁해볼까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토니는 체크인을 마치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배너는 결국 토니가 로비를 떠날 때까지 화분 옆에 서 있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 사진은 못 찍었지만 토니를 만났다는 사실은 배너를 기분 좋게 했다. 술도 마셨고, 갑작스러운 행운에 훨씬 기분이 좋아진 배너는 방으로 돌아가 냉장고 안의 캔맥주도 마셨다. 적당히 술에 취한 배너는 평소처럼 바가 문을 닫을 새벽 2시쯤 눈을 감았다.





- 그리고 다음 날, 배너는 오랫동안 늦잠을 잤다. 과음의 영향이었는지 그는 공연시작 15분 전에 눈을 뜰 수 있었다. 배너는 일어나자마자 귀신이라도 들린 것처럼 침대에서 뛰쳐나갔다. 입고 갈 옷도 골라뒀지만 바쁜 정신에 그 옷들을 챙길 여유도 없었다. 택시를 잡아 탄 배너는 지치고 초조했다. 자괴감에 속도 탔다.



- 배너는 택시를 타고 다급하게 목적지를 외치며 최대한 빨리 가달라고 부탁했다. 택시기사는 지치고 초조해보이는 배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신호 위반까지 하며 최대한 빨리 공연장으로 차를 몰았다.



- 하지만 배너가 도착했을 땐 공연장 문은 이미 굳게 닫혀있었다. 갑작스럽게 잡힌 공연이라 안전을 기하기 위하여 입장시간은 철저하게 제한되었고, 공연 스탭은 단호하게 배너의 입장을 거부했다. 공연장이 밀폐형 돔이어서 밖에선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조용한 공연장 밖에서 이마를 짚고 화를 삭이던 배너는 결국 호텔로 돌아갔다.



- 사고 이후로 배너는 자주 만성 빈혈과 두통에 시달렸다. 공연을 놓친 스트레스 때문인지 호텔 방에 도착하자마자 강한 현기증이 다시 배너의 머리를 괴롭혔다. 배너는 공연이 끝나는 시간까지 꼼짝도 않고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 공연이 끝나고 1시간이 지났을 무렵, 배너는 핸드폰과 종이를 들고 로비 쪽으로 나갔다. 공연은 못 봤지만, 호텔로 돌아올 토니에게 사인과 사진을 받아 기분을 달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토니는 해가 저물도록 호텔로 돌아오지 않았다.



- 배너는 속이 상해 목이 탔다. 술 생각이 났지만, 오늘의 실수의 원인은 음주였기 때문에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싫었다. 방에만 있으면 더 우울할 것 같아서 배너는 산책을 하기로 하고 방을 나섰다.



- 호텔은 배너의 생각보다 컸다. 호텔 부지 안에서 크기가 가장 큰 본관과 다른 부속건물들 사이에는 산책로가 있었다. 배너는 산책로를 따라 걷기로 했다. 걷는 와중에 그는 산책로 옆으로 있는 다양한 크기와 깊이의 수영장들을 구경했다. 산책로를 한 바퀴 돌고 본관 쪽으로 돌아왔을 때 배너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멈췄다. 호텔 로비 쪽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는지 불만스럽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배너는 소음을 피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 배너는 작은 유아용 수영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사용한 뒤 정리하지 않은 비치벤치가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그는 그 중 하나에 앉아서 숨을 들이켰다. 주변은 어둡고 조용해서 바람 소리와 벌레 소리만 들렸다.  수영장 조명은 약했고, 그 약한 조명 말고는 다른 빛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배너는 기운을 차렸다. 꼭 가고 싶었던 공연이었지만, 배너는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쉬움을 털어버리기위해 노력했다. 앞으로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배너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고개를 든 배너는 입이 쩍 벌어지도록 놀랐다. 은은한 수영장 조명을 받으며 토니 스타크가 서 있었다. 그는 맥주 세 캔을 트레이에 담아 들고 한 손에는 이미 딴 맥주캔을 든 채, 배너에게 인사를 건넸다. 배너에겐 마치 마법같은 광경이었다.

“안녕하세요.”
“세상에.”



- 배너의 놀란 표정을 본 토니는 익숙하다는 듯,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배너에게서 멀지 않은 벤치에 앉았다.

“혼자 있는 걸 방해하는 거 아니죠?”

토니가 그렇게 물었고, 배너는 고개를 저으면서 더듬더듬 아니라고 대답했다. 토니는 배너에게 맥주를 건넸다.

“맥주 좋아하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받아요.”

배너는 머뭇거리다가 결국 맥주를 받았다. 그는 어안이 벙벙했고, 시선을 어디에 둘 지 몰라서 땅바닥만 봤다. 티나게 당황하는 배너를 보고 토니는 웃었다.

“생각보다 더 놀라네요. 혹시 내 팬? 맞아요?”

토니가 물었고, 배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맥주를 따서 마셨다. 술을 마시면 긴장이 덜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토니는 배너가 팬이라고 밝히자 고맙다고 말하면서 넉살 좋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배너는 긴장을 억누르면서 토니의 말에 대답했다. 처음은 어려웠지만 한, 두 마디 운을 띄우다보니 배너도 점점 토니에게 말하는 데 익숙해졌다.


- 배너는 스피커로 듣던 목소리가 자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다. 그가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준 목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재치 넘치고 말을 잘 했고, 재밌었다. 두 사람은 노래 취향이 잘 맞았고, 수학 공식이나 최신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하루 종일 우울했던 배너의 기분은 정말 좋아졌다.


- 한참 배너와 얘기를 나누던 토니는 근처 유명한 술집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배너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겐 어느정도 거리를 뒀다. 하지만 술기운에 워낙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고, 토니와 좀 더 얘기가 하고 싶어서 그 제안에 마음이 끌렸다. 팬으로서 그를 더 알고싶었으며, 운이 좋으면 더 친한 사이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배너는 잠깐 고민하다가 토니를 따라갔다.


- 두 사람은 호텔에서 조금 떨어진 술집까지 걸어갔다. 그 곳에서 2시간 넘게 잔뜩 술을 마신 두 사람은 만취해서 배너의 방으로 돌아왔다. 잠에 들기 바로 직전까지 그들은 여러 이야기에 신나게 웃으며 쉴 새 없이 말을 나눴다. 침대에 누운 배너는 이미 공연에 대한 아쉬움을 잊었다.





-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난 배너는 바로 화장실로 갔다. 피곤한 얼굴에 물을 끼얹자 흐릿한 눈에서 잠 기운이 사라졌다. 술 때문에 목이 타고 속이 안 좋았다. 멍하니 거울을 보던 배너는 토니 생각이 나서 그를 확인하러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방 어디에도 토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가장 먼저 배너는 자신이 꿈을 꾼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그렇게 의심하는 사이 그는 방금 전까지 그가 누워 있던 자리 옆에서 열린 지갑과 겉과 안이 뒤집힌 재킷을 발견했다. 확인해보니 자동차 열쇠가 없었고, 지갑의 카드와 현금도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포인트 카드도 없었다. 애꿎게도 토니가 냅킨에 해준 사인은 지갑 안에 그대로 있었다. 배너는 한동안 재킷과 지갑을 쥐고 망연자실하게 앉아있었다.


- 배너가 아무리 생각해도 결국엔 토니가 배너의 물건을 훔쳤다는 결론만 나왔다. 그러나 배너는 토니가 그랬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는 계속 자신의 결론을 부정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찾았다. 하지만 그는 간밤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것을 기억했다. 문에는 억지로 열린 흔적이 없었고, 배너의 짐가방에도 누가 뒤진 흔적이 없었다. 결국 굳게 잠긴 방 안에서 배너의 지갑과 차 열쇠만 깔끔하게 사라졌다면 토니가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혹시나 해서 확인하니 방 문고리에는 룸서비스를 거절하는 표시도 걸려있었다.


- 30분 정도 지나고 배너는 결국 토니가 자신의 물건을 모조리 도둑질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무슨 사정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망설였다. 한참 망설이던 배너는 토니가 아직 호텔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방을 나섰다. 만약 토니가 아직 떠나지 않았다면 배너는 그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





- 1층 프론트에 도착한 배너는 토니의 방 번호를 물으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연애인을 쫓아다니는 스토커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토니 스타크씨를 찾는데요. 혹시 방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개인적인 일인데...”

고민하던 배너는 목 뒤를 긁적이며 말했고, 자신의 말에 프론트 직원이 싸늘하게 반응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직원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컴퓨터 옆에 놓인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스타크씨가 갈색머리에 안경 쓴 남자가 자길 찾으면 주라고 하셨는데, 손님이신 것 같아서요.”

배너는 메모를 받아들었다. 메모지엔 배너의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쓰여 있었다. 배너는 불안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그는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 토니가 훔쳐 갔을 거라고 생각한 닛산 자동차는 여전히 처음 배너가 주차했던 곳에 그대로 서 있었다. 가까이 가자, 창문 너머로 토니의 얼굴이 보였다. 토니는 배너를 보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배너는 그의 웃음을 보고 놀림을 받았다는 생각에 차문을 세게 열면서 운전석에 탔다.

“엄청 늦었네요.”

배너의 당황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토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배너는 차키가 차에 꽂혀있는 것을 확인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아보이는데.”
“대체...얼마나 놀랐는지 압니까.”

배너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표정에선 배너가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토니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재킷으로 덮은 오른손을 배너 쪽으로 향했다. 재킷 아래 그림자 사이로 총구 같은 것이 보였다.

“당신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싶지만 우선 여기서 멀어져야겠어요. 가능하면 상당히 멀리. 이걸 보면 상당히 설득력 있을텐데. 안 그래요?”

토니는 여전히 웃고 있었고, 배너는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멀뚱히 있는 배너에게 토니는 어서요, 라고 말하면서 총구를 흔들었다. 배너는 결국 시동을 걸었다.






-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배너는 어쩔 수 없이 토니가 시키는 대로 주 경계선 근처까지 운전했다. 1시간 넘게 운전하면서 배너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술 때문에 머리가 아팠고, 아무리 생각해도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졌는 지 알 수 없었다. 배너는 유명한 가수나 배우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폭력사건을 일으켰다는 얘기들을 떠올렸다. 가장 그럴듯한 가설에 배너의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 배너가 바짝 긴장한 와중에 토니는 여전히 그에게 총구를 향한 채, 차 안에 있던 앨범들을 구경했다. 글러브박스를 연 토니는 휘파람을 불었다. 글러브박스 안에는 토니의 앨범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힘들게 제작한 앨범은 이거라면서 CD를 한 장 골라 튼 뒤, 작은 목소리로 따라 불렀다. 그 앨범은 배너가 가장 좋아하는 앨범이었다.


- 두 사람은 주 경계선 끄트머리에 있는 허름한 식당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배너는 초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요. 우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가진 건 그 돈이 전부고 차도 갖고 싶으면 가져요. 신고도 안 할게요. 약속할테니까...”


배너가 재빠르게 말을 마치자 토니가 소리 내며 웃었다. 배너는 자신이 한 말이 거슬렸을 까봐, 그래서 토니가 자신을 총으로 쏠 까봐 입을 다물었다. 토니는 오른손 위를 덮고 있던 웃옷을 걷었다. 토니가 들고 있던 건 앞만 검게 칠한 권총 모양의 플라스틱 물총이었다. 물총 안에서 물이 찰랑거렸다. 배너는 그걸 보고 창문 밖으로 시선을 한 번 돌렸다가, 핸들에 고개를 묻고 작게 욕을 뱉었다. 토니는 배너가 욕하는 걸 듣더니 더 웃었다.


- “너무 쉽게 믿네요. 내 연기력이 좋았던 건가? 이 정도면 내년엔 영화를 찍어보는 것도 괜찮겠네요. 사실 제의는 몇 번 들어왔거든요.”

배너는 핸들을 내려쳤다. 큰 소리가 났는데도 토니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무슨 몰래 카메라라도 찍고 있는 건가요? 내가 그간 어떤 심정이었는지...”

토니는 권총을 흔들면서 배너의 말을 막았다.

“놀리다뇨.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사정이 있어요. 애초에 일도 이렇게 될 게 아니었는데 나도 술이 덜 깨서 그만... 그러지말고 일단은 내 얘기를 좀 들어주면 안 될까요?”


- 배너는 숨을 몰아쉬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잠시 생각한 그는 한숨을 쉬었다.

“말 해봐요.”

배너는 낮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 했다. 토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하죠. 어제 먹은 술 때문에 커피 생각이 정말, 정말 간절하네요. 오믈렛도 먹고싶고. 아, 나 가진 게 당신 지갑에서 꺼낸 것 밖에 없는데 그걸로 계산해도 되나요?”

속사포처럼 떠들면서 토니는 글러브박스 위로 물총의 물을 흘렸다. 배너는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쳤지만, 결국 토니를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 식당 안으로 들어가 주문을 하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배너는 카메라맨이 등장해 몰래카메라라고 알려주길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니는 정말 배가 고팠는지 오믈렛과 소시지를 열심히 먹었다.


- 식사를 마친 토니는 살 것 같다면서 커피를 들이켰다.

“술 마신 다음 날이면 꼭 이렇더라고요. 엄청나게 배가 고프고. 그쪽은 숙취 없어요?”

토니가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물었지만 배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접시에는 손도 대지 않고 빈속에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침묵을 지켰다.

“하나도 안 건드렸네. 안 먹을 거에요?”
“...생각이 없어요.”

배너가 딱딱하게 대답하자 토니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지 어깨를 으쓱하고 종업원에게 디저트를 추가로 주문했다.

“디저트 먹어도 되죠?”

주문한 뒤에 토니가 물었고, 배너는 미약한 두통 때문에 손으로 관자놀이를 마사지했다.





- 토니는 둥근 접시에 나온 티라미수를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일이 이렇게 돼서 미안하게 생각해요. 정말로. 하지만 원래 그 쪽을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돈이랑 차만 훔칠....아니 빌릴 생각이었죠. 그렇게 보지 마요.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고, 일이 마무리 되면 제대로 배상해줄 생각이었어요. 나도 내 팬이라는 사람한테 이런 일을 겪게 할 일은 없었다고요.”
“…지금 얘기론 일부러 나한테 접근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사실 그냥 지나가던 사람 아무나 잡은 거에요. 그래서 훔친 것 까진 좋았는데…막상 나오니까 당신이 경찰에 신고하면 금방 잡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거기까지 생각을 못하다니, 나도 어지간히 급했던 거죠.”
“어떤 사정인데요.”
“경찰에 말할 수 없는 사정..?”
“그러니까 그 사정이 뭐냐고요.”

배너는 찻잔을 내려놓고 단호하게 물었다.

“어.. 이걸 말로 설명하려니까 힘드네요. 아마 말 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난 지금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설명이 필요해요."
"그건 그렇겠네요."

토니가 이해한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배너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내가 몸담고 있는 프로덕션은 러시아 마피아 및 서아시아 카르텔이랑 유착관계를 갖고있다는 소문이 무성한 곳인데 거기랑 사이가 안 좋아졌거든요.”

토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마피아, 카르텔?”

예상 못한 이야기에 배너가 어이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영화 같은 얘기 아녜요? 하지만 아마 사실일 거에요. 업계에선 유명하거든요. 소속 연예인이 불공정계약으로 고소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거나 맘에 안드는 영화사를 불법자금으로 말아먹게 했다던가. 그런 가벼운 얘기부터 누구 손가락이 몇 개 잘렸다는 둥 무서운 얘기까지 다양하죠. 뭐 어쨌든, 짧게 얘기하자면 건드려봤자 좋을 게 없는 곳이라는 거예요.”
“그래서요?”

토니는 다시 티라미수를 떠먹고 숟가락을 입에 문 채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내가 솔로로 데뷔하겠다고 했을 때 날 받아준 건 그 곳뿐이었어요. 사장도 개인적으로 오래 알았고... 그래서 그 땐 몰랐지만 정말 큰 실수였다는 걸 이제야 알게됐죠. 이미 일은 저질러졌는데 속은 쓰리고.”
“그래서요.”
“다 재계약 때문이에요. 내년에 계약이 끝나는데 그쪽에서 내민 재계약조건이 정말 형편없더라고요. 애초에 난 재계약은 아예 생각도 없었고요. 회사를 떠날 예정이었으니까.”
“.....”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눈치채고 하루도 빠짐없이 날 닥달하더라고요. 당장 사장은 별 말이 없구만 주변에서 난리를 치는데, 원. 하지만 곧 계약 기간도 끝날 거라 별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산이었던 거죠. 어떻게 알았는지 내.....약점을 알아서 갑자기 그걸 가지고 협박을 하더라고요.”

토니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배너의 표정을 살폈다. 배너는 그 표정을 보고 토니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아한다는 걸 알았다.

“...요령좋게 요양원에 처박아둔 우리 아버지를 찾아서.”


- 토니는 숟가락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쪽으로 눈을 내려깔았다.

“...당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알고있는데요.”

토니는 양친을 모두 잃었다고 알려져 있었고, 배너도 그렇게 알았다. 토니는 잠시 말하길 주저하다가 식탁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아니, 살아있어요. 그리고 그건 큰 문제죠. 난 그 양반이 죽거나 혹은 죽은 거나 다름없는 상태였으면 했는데... 왜인지는 묻지 말아요. 그건 이 일이랑 상관 없으니까. 어쨌든 난 지인에게 부탁해서 그 양반에게 그럴싸한 사망신고를 선물한 뒤에 콜로라도에 있는 요양원에 보냈어요. 근데 회사에선 이번에 재계약이 물건너가면 그걸 문제삼겠다고 은근히 암시했죠.”
“…음.”
“이 바닥이 그래요. 피라냐 떼에 둘러 싸여 사는 것 같죠. 아마 그래도 이것보다 덜 긴장하며 살 걸요? 왜냐하면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난 시체도 남지 않고 사라질 거니까. 말 그대로요. 이 일이 알려지면 사정이야 어떻건 사람들은 이 스켄들을 물어 뜯을 거고, 아마 이걸 계기로 다른 문제들도 터져나올 거에요. 나는 은퇴할 뻔 했다가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잖아요. 평소에 그렇게 이미지가 좋은 편도 아니고. 재계약 시즌에 그런 스캔들이 터지면... 내년엔 라스베가스 근처에서 입장료 2불에 불도 안들어간 마이크를 잡고있을 지도 몰라요.”


- 토니는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LA에 돌아가면 나에겐 더 이상 기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정말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가 될 지도 몰라요. 하지만 난 그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렇게 된 거고요.”
“도둑질과 납치 말이죠.”
“도망이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내 변호사랑 친구들이 방법을 찾을 때까지 내가 그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기 위한 도망이에요.”


- 배너는 잠자코 토니가 한 얘기를 속으로 되뇌었다.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비밀까지 얘기해줄 정도면 아마 대부분의 얘기는 사실일 거라고 생각됐다. 그렇게 궁금증은 풀렸지만 그 대신에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뭐 더 궁금한 거 있나요?”
“...그래서 난 집에 갈 수 있나요?”
“그거 정말 똑똑한 질문이네요. 그리고 대답은 ‘아니오’죠.”

토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내가 당신한테 이 모든 사정을 얘기한 데는 이유가 있었지 않겠어요? 이 얘기가 다 해결되기 전까진, 당분간 나랑 같이 다녀주면 좋겠어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만요. 부탁 같지 않겠지만, 정말로 부탁이에요.”
“...이젠 가짜총도 없는 당신한테 내가 따라 줄 이유가 있나요?”

배너가 도전적으로 말하자 토니는 웃었다.

“당신이랑 내가 같이 호텔에서 떠나는 장면이 CCTV에 찍혔겠죠. 난 잡히면 당신이 날 납치했다고 할 거고요. 당신 차에 태워져서 억지로 끌려왔다는 디테일을 덧붙여서. 경찰이 안 믿더라도 당신은 최소한 마피아나 카르텔이랑 관계가 있는 곳을 화나게 만들겠죠. 누구도 그러고 싶진 않잖아요? 사실 당신을 위해서 한 말이기도 해요. 물론 대부분은 날 위해서지만.”

토니의 말에 배너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배너도 토니가 자신을 곱게 돌려보내주지 않으리라는 걸 일찍 예상해서 당황하지 않았다. 질문을 던진 이유는 확인을 하고싶어서였다. 



- 배너도 토니에 관한 기사를 통해 그가 소속한 회사가 고압적인 곳이라는 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토니의 이야기로는 그곳은 단지 고압적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불법적인 일을 행하고 있었고 토니도 그 피해자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에 대한 토니의 행동이 극적이고 선을 넘기는 했지만, 당사자가 그만큼 급하고 정신없었다는 걸 온 몸으로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냥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다. 아마 회사에 배너를 고발한다는 얘기도 그런 다급함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 배너는 여전히 마음으론 반발심이 들었지만, 머리로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토니의 부탁을 들어주기엔 배너에겐 배너의 생활이 있었다. 오랫동안 호감을 갖고있던 사람이라지만 결국엔 어제 처음 만난 타인이었고, 배너는 이런 일에 발을 들이밀고 싶지 않았다. 토니가 안쓰럽긴 하지만 그는 거절하려고 입을 뗐다.


“...다시 말 하지만 당신한테 이런 일을 겪게 할 의도는 정말 없었어요. 난 급했고... 어쨌든 일이 다 잘 끝나면 꼭 보상 할게요. 약속해요, 배너. 내 팬이라면서요. 한 번만 날 도와줘요. 네? 난 정말 이렇게 부탁하는 사람 아니에요, 진짜. 이번에 날 도와주면 평생 은인으로 생각할게요.”

그 순간, 토니는 배너의 속내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과장된 표정이었지만 일견 진심이 느껴지는 얼굴이기도 했다. 



-  배너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 표정을 보면서, '은인'이라는 말에 자신이 입원했었을 때 토니의 노래를 들었던 걸 떠올리고 말았다.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쇠약해져 있을 때 그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감정을 상기시켜준 건 토니의 노래였다. 토니가 벌인 극단적이고 범죄나 마찬가지인 무례한 행동이 눈 앞의 표정과 함께 배너의 머릿속에서 버무러졌다. 어쨌거나 토니는 배너에게는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 거절하려던 마음은 어느새 약해지고, 토니가 이 일을 해결할 때까지만 도와주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 지 몰라요. 말로 한 것 보다 훨씬 더 지독한 놈들이라니까요. 당신이 날 도와주면, 진짜 생명을 살려주는 거나 다름 없어요."


- 토니는 계속해서 처절하게 말했다. 연극조로 보일정도로 극적인 어투였지만 처량한 얼굴과 합쳐져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그 얼굴을 보면서 갈등하던 배너는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같이 다녀주는 거라면 도와줄 수 있겠죠.”

토니는 그 말에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말을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사실 끝까지 거절하거나 한 대 칠 줄 알았어요.”
“대신 난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봐야 할 가게 일도 있어서 이렇게 계속 집을 비울 수는 없어요”



-  토니는 처음엔 배너의 집으로 가는 걸 반대했다. 그는 호텔 CCTV 얘기는 괜히 한 게 아니라면서 회사에서 배너 신상은 물론이고 금방 주소까지 알아 낼 거라면서 가능하면 도망자 영화처럼 여러 주를 차를 통해 돌아다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얘기를 들은 배너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다닐 수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은 영화를 너무 많이 봤고요.”
“뭐든 계획할 땐 그럴싸해 보이잖아요.”

토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고, 배너는 그에게 가게와 집이 모두 삼촌의 이름으로 되어있다는 걸 설명했다. 그는 삼촌에게 바와 2층에 딸려있는 집을 물려받은 후 명의를 변경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었다. 배너는 그 일이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세상 일은 모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설명을 들은 토니는 반색하면서 모텔비도 아낄 수 있겠다면서 결국 배너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당신을 만난 건 정말 운이 좋았네요.”

토니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나했지만 배너는 어색하고 피곤하게 따라 웃을 뿐이었다.






- 토니는 다 먹은 그릇을 앞으로 밀었다. 그러곤 손으로 턱을 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팬이라고 했을 때 도와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그러면 귀빈 대접을 받았을 텐데. 안 그래요? 공연을 보러오고, 차에 앨범도 많고...”

싱거운 농담이었지만, 배너가 돕겠다고 말한 이후로 토니는 안심한 눈치였다. 농담을 하는 그의 표정은 긴장이 풀어져서 지쳐보였다. 배너도 마찬가지였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토니를 따라 농담조로 말했다.

“귀빈대접은 어렵고, 가게에서 일손이 필요하던 차니까 파트타임으로 고용해 줄 수도 있어요.”
“...신세지는 입장이니까 어쩔 수 없죠. 설마 막 부려먹진 않을 거죠?”
“걱정 마요. 장사가 그렇게 잘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제서야 배가 고파진 배너는 쉐이크를 주문했고 토니도 디저트를 추가주문했다. 새로 나온 음식을 먹으면서 두 사람은 어제 술을 마셨던 때처럼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 두 사람은 식당에서 나와 다시 배너의 차에 올라탔다. 호텔에는 가지고 나오지 못 한 짐이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중요한 건 없었다. 배너는 운전하는 내내 토니가 했던 얘기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토니는 가는 길에 잠이 들었다. 스피커에서는 그의 노래가 나왔다.





- 해가 질 무렵 두 사람은 배너의 바에 도착했다. 목조건물 1층에 자리 잡은 바는 배너의 삼촌 이전에도 3명의 주인을 거쳐 간 오래된 바였다. 낡은 나무 냄새가 났고 조명이 켜져 있지만 여전히 어둡게 보였다. 하지만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멋이 있는 장소였고, 토니는 바가 마음에 들었는지 카운터를 정리하는 배너를 내버려두고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 바의 2층은 방이 3개 있는 가정집으로, 배너가 사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바를 뒤로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배너는 쓰지 않는 방을 토니에게 보여주고 그곳을 쓰라고 얘기했다. 그 후에 두 사람은 창고에서 먼지가 앉은 매트리스를 꺼내 창문을 열고 먼지를 털었다. 토니가 연신 기침을 했고, 결국 배너 혼자 침대 커버를 씌우고 방 안으로 옮겨야 했다.


- 토니는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어서 주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설거지를 자처했다. 그래서 요리도 배너가 도맡았다. 식사를 마친 토니는 재차 일이 잘 해결되면 자기가 다 보상하겠다며 눈치를 봤다.

“그리고 괜찮으면 내일 선불 폰 하나만 개통해줄래요? 변호사랑 연락을 해야하는데 그게 제일 안전할 것 같아요.”

토니는 또 괜히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배너는 웃으면서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 날 배너는 쉽게 잠들지 못하다가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다.





- 다음 날 일어난 배너는 하루를 더 쉬기로 했다. 그는 가게를 열지 않고 간단한 발주 작업만 마친 뒤에 토니를 깨워 아침을 먹였다. 토니는 배너의 남방을 빌려 입으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배너의 옷은 토니에겐 품이 컸다. 아침을 다 먹은 후에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토니의 핸드폰부터 개통했다. 핸드폰을 받자마자 토니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배너가 ATM기기에서 돈을 뽑는 사이 토니는 통화를 마치고 후련한 얼굴로 배너에게 은행에 가자고 했다. 배너가 ATM기기를 가리키자 토니는 ATM기기는 쓸 수 없고 은행에 가야한다고 했다. 배너는 토니가 말해주는 은행지점까지 운전했다. 은행에 도착한 토니는 배너를 기다리게 하고 창구로 향했다. 20분 정도 기다린 후 토니는 두툼한 봉투와 함께 배너에게 돌아왔다.


- 차에 탄 토니는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돈이 가득했고, 그렇게 두꺼운 돈뭉치를 본 적 없는 배너는 깜짝 놀랐다. 토니는 돈 뭉치에서 돈을 대충 집은 다음, 자신이 있는 동안 자기 몫의 생활비로 써달라고 배너에게 건넸다.

“...일이 끝나면 갚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건 다른 거고, 이건 같이 사는 사람으로서 해주고 싶은 몫이에요. 받아 둬요.”

떨떠름했지만 솔직히 두 명이 생활할 자금을 걱정하고 있었던 배너는 돈을 받아서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 토니에게 돌려주었다. 토니는 안 그래도 된다고 말했지만 배너가 한사코 돌려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도로 받았다.


- 돌아가는 길에 둘은 마트에 들러 토니가 쓸 생필품이나 과자를 샀다. 두 사람은 큰 봉투를 네 개나 가득 채워서 집으로 돌아왔다. 배너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토니는 서투른 손으로 생필품을 놓아두고 쓰레기를 정리했다. 그는 정리를 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최근에 발표한 곡을 허밍으로 불렀다. 배너는 새삼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던 가수가 자기 집에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토니의 허밍을 듣다 배너는 실수로 와인 잔을 깼다.





- 다음 날 배너는 가게를 열었다. 점심부터 단골들이 휴가가 길었다는 인사와 함께 가게로 찾아왔다. 토니는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아볼까 싶어서, 마트에서 산 뿔테 안경과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배너는 단골들에게 그를 사촌이라고 소개했다. 토니는 넉살좋게 웃으면서 배너의 옆에서 자잘한 일들을 도왔다. 일손이 필요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고 배너는 토니에게 일을 시킬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토니는 놀고만 있을 순 없다면서 배너가 말려도 한사코 일을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손재주가 없어서 곧잘 카운터에서 쫓겨났다.


- 저녁 늦게 배너가 표를 구할 수 있게 도와준 단골, 바튼이 찾아왔다. 바튼은 맥주를 시키고 배너에게 공연은 잘 보고 왔냐고 물어봤다. 배너는 뒤쪽에서 토니가 듣고 있는 줄 모르고, 여행 도중 일이 생겨서 호텔에만 묵고 왔다며 표를 날려서 미안하다고 바튼에게 사과했다.

“공연 못 봤어요?”

갑자기 뒤에서 토니가 얼굴을 들이밀며 묻자 배너는 놀라서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 그랬다고 대답했다. 그러는 사이 바튼이 토니를 가리키며 누구냐고 물었고 배너는 바튼에게 토니를 소개시켜주었다. 진짜 이름 대신 클리프라는 가짜 이름을 댔다.

“사촌분이 토니 스타크를 닮았네요. 로라가 봤으면 여기 단골은 내가 아니라 로라가 됐을 것 같네.”

바튼의 아내 로라는 토니의 팬이었고, 그때문에 바튼은 바에 찾아오는 누구보다도 토니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바튼이 알아보지 못 하면 바의 손님 누구도 그를 못 알아본다는 것이므로 배너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다. 토니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 많이 듣는다면서 웃고는 물류 창고로 가버렸다. 다행히 바튼은 더 이상 그에 관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화제를 돌려서 공연도 못 본거 노래라도 마음껏 틀어야하지 않겠냐고 말한 뒤 주크박스로 가서 토니의 앨범을 틀었다.

“로라가 이 노래를 좋아하더라고. ”

바튼이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 앉았고, 배너는 왠지 민망했다.





- 새벽 2시가 되어서 가게 문을 닫았고, 토니와 배너는 2층으로 올라가 각자의 침실로 들어갔다. 씻고 나서 침대에 누운 배너는 토니가 도울 수 있는 쉬운 일들을 준비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벽까지 가게를 열어둬서 점심쯤에 일어나야 했지만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다보니 쉽사리 잠들기 어려웠다. 그런 배너의 방에 토니가 찾아왔다. 토니는 노트북이 있으면 빌려달라고 했다.

“뭐 하려고요?”
“포르노 시청.”
“...아무거나 클릭하지만 말아요.”
“거짓말이에요. 시간이 남으면 또 모르지만요.”

토니는 그렇게 말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배너는 고개를 저으면서 협탁 안에 넣어 둔 노트북을 꺼냈다. 토니는 노트북을 받고 바로 나가지 않았다. 그는 문지방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배너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공연을 못 봤어요?”
“별로 재밌는 얘기도 아닌데.”

배너는 망설였지만, 토니는 어떠냐면서 대답을 재촉했다. 그는 표를 잃어버린 것인지 오다가 일이 있었는지 배너가 왜 공연을 못 본 건지에 대해 추측했다. 혹시 중간에 마음을 바꿨냐는 질문에 배너는 고개를 저었다.

“늦잠 잤어요.”
“늦잠이요?”
“전날에 과음을 했거든요. 술이 약해서 늦잠을 잤어요.”
“나랑 마실 때도 별로 안마셨는데 엄청 취했죠.”
“그땐 그래도 잘 마신 편이었는데요.”
“난 술 약한 바텐더는 처음 봐요.”
"은근히 많아요.”

배너가 조용히 대답하자 토니는 웃으면서 잘 자라고 인사한 뒤 노트북을 들고 방을 나갔다. 배너는 복잡한 심정으로 안경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마법처럼 잠이 쏟아졌다.





- 두 사람은 금방 이 공동생활에 익숙해졌다. 얼마 안 돼서 그들은 서로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말도 편하게 하게 됐다. 하지만 모든 점이 다 잘 맞는 건 아니었다. 토니는 배너가 자기랑 너무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고 배너는 토니가 가끔 너무 제멋대로라고 생각했다. 특히 토니가 배너에게 묻지도 않고 일을 벌여서 배너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토니는 배너의 아이팟을 빌려가서 300불 이상 mp3를 결제해버렸고, 방에 맞지 않은 가구를 주문하기도 했으며, 손님용 와인을 따 마시기도 했다. 작곡을 한다고 영업시간에 스피커가 터져라 노래를 틀어서 손님들에게 불평을 듣기도 했다. 그 때마다 배너는 곤란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나기보단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토니는 아무 말도 안 하는게 더 불안하다면서 그 때마다 사과 대신 청소나 설거지 등 배너가 기뻐할만 한 일을 했다. 그 모습이 먼 친척 꼬마를 연상시켜서 배너는 항상 웃어넘겼다.


- 어느 날 토니는 하루만 쉬겠다고 말하고는 외출했다. 보름 가까이 외출도 않고 지내면서 토니는 좀이 쑤시다는 티를 팍팍 냈었기 때문에 배너도 놀라진 않았다. 외려 평소 알고있던 연예인들의 모습과 달리 외출도 없고 조용히 지내는 토니가 신기했었다. 토니는 신난 얼굴로 배너의 아이팟을 빌려서 나갔고, 배너는 잘 갔다 오라는 말과 함께 혼자 가게를 봤다. 함께 지낸 지 보름밖에 안됐는데 토니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단골들도 그 넉살좋은 사촌은 어디갔냐고 물었다. 배너는 외출했다고 대답했다.


토니가 돌아온 것은 가게 문을 닫을 때쯤이었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서 돌아왔는데, 가게로 들어온 건 토니뿐만 아니라 세 명의 여성과 두 명의 남성도 함께였다. 그들은 토니와 오늘 처음 만난 사이였다. 예상치 못한 토니의 일행을 마주한 배너는 당황했다. 그들은 이미 만취해 있었고, 배너가 뭐라 말 할 새도 없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바 안으로 들이닥쳤다. 뒤늦게 배너가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어서 안 된다고 말렸지만, 토니가 그를 붙잡고 박박 우겼다. 결국 배너는 가게 문을 닫고 그들에게 구석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 토니는 마음대로 술을 꺼내들고 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마셨다. 배너는 2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결국 그들에게 붙들려 자리에 앉았다. 배너는 그 자리가 거북했다. 그는 술을 좋아했지만 잘 마실 줄 몰랐고, 과하게 취한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싫었다. 그 와중에 토니는 자신이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한테 은근히 드러내면서 낄낄댔다. 그 꼴을 보면서 배너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토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런 유명인이 이런 데서 뭐하냐면서 사람들이 웃어넘기는 걸 보고 배너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 결국 토니는 싫다는 배너에게 억지로 술을 먹였다. 굳은 얼굴로 앉아있는 배너의 눈치를 보던 사람들도, 그가 토니의 권유에 못 이겨서 마시기 시작하니 자연스럽게 배너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술판이 이어졌다. 결국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건 다음 날 아침이었다. 토니와 함께 찾아왔던 사람들은 새벽에 떠난 것 같았다. 게다가 간밤에 토니는 그들이 떠날 때 가져가라며 보드카를 다섯 병이나 공짜로 건네줬다. 술자리를 정리하다가 이를 알게 된 배너는 토니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다. 토니는 돈으로 갚아주겠다고 하다가 배너를 더 화나게 했고, 결국 아무 변명도 않고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 배너는 숙취에 시달리며 가게 문을 열었다가 결국 자정이 막 넘은 뒤 속이 안 좋아서 토니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 평소보다 문을 일찍 닫고 2층으로 올라온 토니는 배너가 화장실에서 한바탕 토악질을 하고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바로 그쪽으로 가서 배너에게 물을 떠다주고 등을 쓸어주면서 수발을 들어줬다. 배너는 변기 물을 내린 뒤 입을 헹구곤 지쳐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토니는 겸연쩍게 서 있다가 쭈뼛거리면서 그 옆에 앉았다.

“괜찮아?”
"...아니."
"...."
“술 때문에 화낸 거 아냐. 내가 화난 건 그냥 너 때문이지.”

배너가 토니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푸념하듯이 말했다. 토니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다가 손으로 턱을 괴고 한숨을 쉬었다.

“그냥 모텔이나 구할까봐.”

토니가 힘없이 얘기하자 배너는 그제서야 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랑 살기 힘든 거 이해해. 사실 너만 그런 거 아냐. 다른 사람도 그랬어. 그것도 많은 사람들이... 내가 좀...자유분방하잖아. 뭐 어떻게 보면 자유분방하기보단 사교적인거라고 생각하지만....”

토니는 말을 잇다가 배너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배너는 잠시 말이 없다가 괜찮다고 대답했다. 토니는 그 말에 묘한 표정을 하고 빈 컵을 들고 나갔다가 다시 물을 떠왔다.





- 다음 날 배너는 결국 앓아누웠다. 배너는 토니에게 가게 문을 닫아두길 부탁했다. 하지만 자기도 도움이 된다면서 토니는 그를 재우고 혼자서 가게 문을 열었다. 토니는 기억력이 좋았고, 배너가 했던 대로 칵테일을 만들거나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서 대처했다. 몇 번 주문을 틀리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손님이 배너가 아프다는 말에 이해하고 넘어가줬다. 토니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배너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생각했다. 그러자 왠지 더 미안해져서 토니는 괜히 단골들에게 심술을 부리며 술을 더 시키라고 종용했다.


- 토니는 가게 문을 일찍 닫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2층에 올라오자마자 배너의 방으로 들어가 그가 괜찮은지 확인했다. 열은 내렸지만 땀을 너무 흘려서 씻겨야 할 것 같았다. 토니는 욕실 물을 받고 배너를 깨웠다. 처음엔 괜찮다고 말하던 배너도 결국 토니의 부축을 받고 일어났다.


- 배너는 어렵사리 잠옷을 벗었다. 몸에는 교통사고로 남은 흉터 여러개가 등과 오른쪽 옆구리까지 걸쳐 크게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잘한 흉터까지 여럿 있었다. 토니는 커다란 흉터들을 보고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토니는 배너를 욕조 안으로 넣어주고 스펀지로 몸을 닦아주었다. 배너는 혼자 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토니는 자기가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고 억지를 부렸다. 멍한 정신 속에서도 배너는 어색함과 부끄러움에 눈을 감았다.


- 배너는 어느새 자신이 침대로 옮겨진 것을 깨달았다. 배너를 씻기다 쫄딱 젖은 토니는 웃옷을 벗은 채 바닥에 흘린 물을 닦고 젖은 옷들을 빨래바구니에 넣었다. 배너는 목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고 토니의 뒷모습을 봤다. 토니의 등에는 배너만큼은 아니지만 직업에 비해 등이 거칠었고, 자잘한 상처자국들이 있었다. 배너만큼 흉이 지진 않았지만 새 살이 돋아서 그 부분만 하얗게 빛났다.

"뭘 그렇게 봐? 그렇게 노골적으로 보면 부끄럽잖아."

시선을 느낀 토니가 돌아보면서 물었다.

“등을 자주 다치는 것 같아서.”

배너의 말에 토니는 다시 배너의 흉터를 떠올렸지만 그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른 대답으로 말을 돌렸다.

“인기가 많아서 그렇지. 인기가 많아서.”

토니는 그렇게 대답하고 얄밉게 웃었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한 배너는 아, 하고 한숨을 쉬고 베개를 고쳐 누웠다. 토니는 잘자라는 말과 함께 불을 끄고 나갔다. 보드라운 이불에 파묻혀서 배너는 금새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일어난 배너는 한결 몸이 개운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잠옷에 가디건을 걸치고 거실로 나가자 토니가 신문을 보고 있었다. 배너가 옆에 앉자 토니는 아침 인사와 함께 자기가 누구 병수발 들어준 건 어머니 빼고 처음이라고 생색을 냈다. 배너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어깨만 으쓱했다. 하지만 고맙기는 했던지라, 배너는 냉장고를 털어서 토니에게 그럴싸한 점심식사를 만들어주었다. 토니는 팬케이크를 죽 잘라 입에 넣었다. 그는 그렇게 먹다가 포크를 입에 걸고 배너에게 질문을 던졌다. 배너는 그걸 보면서 식기를 입에 물고 말하는 게 토니의 버릇이라는 걸 깨달았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뭘?"
“이런 거 물어보면 불편할 것 같아서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긴 했는데, 그래도 나도 비슷한 질문에 대답 해줬고...”

토니는 한참 웅얼거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뒷쪽을 가리키는 손짓을 하면서 흉터가 많아서, 하고 서툴게 물었다. 그 서툰 물음에 배너도 조심스럽게 대답해주었다. 교통사고를 당했었다고 말하자 토니는 잠자코 배너의 이야기를 들었다. 배너가 이제는 괜찮다고 할 때까지 토니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내가 없애줄까?"

토니의 말투에선 최대한 가볍게 이야기하려는 티가 났다. 배너는 식기를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흉터 말이야."
"아니. 괜찮아."
"한 시간만 주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솜씨 좋은 성형외과의 예약도 따낼 수 있어. 게다가 내가 약속했잖아. 나한테 해준 일에 대해서 보상하겠다고."
"...정말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없어."
“왜? 솔직히 말하면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좋잖아.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토니, 난 괜찮아.”
“....”

배너는 웃으면서 거절했고 토니는 포크를 내려놓고 내가 화나게 한 거냐고 물었다. 배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 식사를 마치고 배너는 설거지를 하면서 토니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흉터를 없애겠냐는 제안은 재활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의사에게서도 들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배너는 그 때도 흉터를 제거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배너는 사고 후 자신이 살아온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 그는 사고 전엔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학교일에만 매달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까운 혈육도 없었고 깊게 사귄 애인도, 가벼운 친구도 많지 않았다. 그는 혼자있는 상황에 익숙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사고가 난 이후에 그의 주변엔 먼 친척들만 남아 있었다. 그들은 배너를 돌보는 일을 서로 떠넘기기만 했다.


- 3년의 시간이 흐른 뒤, 눈을 뜬 배너에게 남은 건 철 지난 주제의 논문들과 읽지도 못한 채 쌓인 학술지들, 친척들이 들쑤시고 간 통장들뿐이었다. 그는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분야에 탁월했지만, 이런 일에는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런 일들로 우울증을 앓던 배너는 결국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사고 전엔 강사계약이 끝나면 종신교수직을 약속했던 대학이었지만 사고 후엔 연락을 끊고 그만두라는 압박을 은근히 가하던 터라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건 쉬웠다. 그의 삶은 사고 전후로 크게 바뀌었다. 배너는 자신의 몸에 남은 흉터들도 그런 변화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 토니의 노래는 배너가 그런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지난 일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배너는 사고 이전에도, 사고 이후에도 토니의 노래를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배너도 큰 일을 겪었지만, 토니도 그룹을 해체한 뒤 이런 저런 스캔들과 가십거리를 벗어나 솔로로 데뷔하며 큰 변화를 겪었었다. 고생을 해서인지 그 당시 찍힌 사진은 배너가 알던 얼굴과 많이 달랐다. 그런 변화를 겪은 토니에게 배너는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꼈다.



- 배너는 계기는 다르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결정과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토니에게도 그런 것들이 있었고, 지금 일어나는 일들도 그런 변화의 일환일 지도 몰랐다. 배너는 언젠가 토니에게 그런 것들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얘기를 하기 전에 토니가 떠날 수도 있었다. 토니가 떠나면 두 사람은 서로 말 한마디 나누기 어려운 거리를 갖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배너는 영영 토니에게 이런 고마움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너는 자신이 했던 예상들 중 많은 것들이 깨졌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될지 몰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낙관적인 생각을 하며 접시의 거품을 닦았다.





- 시간이 흐르면서 배너는 토니가 좀 더 편해졌다. 그는 심심해하는 토니를 위해서 같이 낚시도 가고, 이런저런 파티에도 다녔다. 마찬가지로 토니도 무슨 일을 저지르기 전에 열에 세 번 정도는 배너에게 먼저 물어보게 됐다. 토니는 배너가 가끔 지나가는 말로 ‘네가 있어서 편하네.’라는 말을 해주면 뿌듯했고, 배너는 토니가 실컷 비꼬다가 자기가 먼저 ‘이건 말이 심했네.’라며 사과하면 기뻤다.


- 그렇게 별 탈 없이 두 사람은 두 달 정도를 같이 지냈다. 가끔 토니가 초조한 얼굴로 전화기를 붙들고 있거나 새로 산 노트북을 뚫어지게 쳐다보긴 했지만, 대체로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상에 변화가 찾아왔다.


- 두 사람은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었다. 6시 무렵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가 한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이마가 드러난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다, 저녁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오는 손님은 거의 없었다. 그는 토니를 찾았다. 배너가 거짓말을 할까 고민하는 사이 물류창고에 있던 토니가 나와서 그를 알아봤다. 토니는 그를 자기 변호사라고 소개하고는 함께 저녁을 먹고 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문을 나서는 얼굴이 신나보여서 배너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 토니가 돌아온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늦게 왔네. 일은 잘 해결 된 거야?"

배너가 묻자 토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지쳐보였다.

“아니. 워낙 복잡한 일이잖아. 해결되려면 한참 멀었지. 그렇게 생각하니 너한테도 잘 해결된 게 아니네.”
“...무슨 일 있었어?”
“무슨 일은. 괜찮아. 그냥 좀 답답해서 그래.”

그리고 토니는 일찍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누가 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는 반응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배너는 풀이 죽은 토니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그에게 도움이 될 일이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아는 변호사도 없었고, 그렇다고 토니가 일하는 업계에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 토니는 항상 그가 자신에게 도움을 줬다면서 고마워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배너는 자기가 그다지 도움이 된다고 느끼지 못 했다. 토니가 말한 대로 그는 모텔이나 호텔을 잡고 숨을 수도 있었고, 굳이 배너의 집에 있으면서 그의 가게를 도울 필요도 없었다. 처음엔 배너가 그를 밀고할까봐 감시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와선 솔직히 배너는 토니가 왜 아직도 자기 집에 있는 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배너는 다른 방식으로나마 토니를 더 돕고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토니를 도울 수 있을 지 몰랐다.






- 다음 날 배너는 일부러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나갔다. 우울해 할 것 같은 토니에게 좋아하는 와플에 아이스크림을 곁들여서 아침으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부엌에선 이미 토니가 먼저 일어나서 베이컨을 굽고 있었다. 배너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토니는 쾌활했고, 아침을 먹고 나서 설거지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가게로 내려가면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자 배너는 아무래도 자기가 혼자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 게 아닐까 고민하게 됐다.


- 가게 문을 연 뒤, 토니는 단골들이랑 외설적인 농담을 하면서 크게 떠들었다. 잠시 시간이 났을 땐 배너의 도움을 받아서 칵테일을 몇 잔 만들어보기도 했다. 토니는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그 옆에서 배너는 복잡한 심정으로 그런 토니의 모습을 지켜봤다.


- 배너는 아침엔 토니의 반응을 보고 어제 있었던 일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자꾸 지난 밤 토니의 침울한 표정과 목소리가 계속 생각나면서, 토니가 자신의 기분을 감추려고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후 내내 토니의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신경을 쓰는 자신이 이상한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이 그걸 물어본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거란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신경을 끄려고 했지만 쉽게 되지 않았다. 성격상 결단을 빨리 내리는 배너로서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배너는 고민했다.









전에 올렸던 썰을 정리해서 다시 올립니다.

기네요...


잡덕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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