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 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라지만 왕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주제는 다른 법이다. 멍하니 굳어있는 토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국가의 중대사들이 이리저리 오갔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믿기지 않아 뇌내부정중인 토르의 귓가로 단어들이 스쳤다. 묠니르..계승..혼례.. 분명 저 단어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것들일텐데 왜 이리 남의 이야기 같을까. 당사자를 빼고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서? 딱. 손가락이 눈앞에서 튕겨지는 소리에 토르는 현실을 다시 직시했다.




"듣고 있어, 토르?"




손가락의 주인을 돌아보자 보기에 매우 그럴듯한 얼굴을 한 로키가 그를 보고 있었다. 의아함과 걱정이 섞인 표정이 로키의 얼굴 가득 떠올라 있었으나 토르는 속지 않았다. 로키의 표정에 속아 당한 게 어디 일이백년 일이던가. 뭐라 쏘아붙이려다 가까스로 곁에 있는 부모를 떠올린 토르는 절로 새오나오는 한숨을 집어삼켰다.



"대강은 이해했습니다. 묠니르를 받는 것과 혼인을 같이 하고 그 후에 왕위를 물려주실 생각이란 이야기죠."




휘파람 소리와 함께 나직한 웃음이 흘렀다. 시선을 흘리자 찻잔으로 웃음섞인 입매를 가린 얄미운 얼굴이 보인다.



"안 듣는 것 같더라니. 중요한 건 들었네."



토르는 무어라 더 항의하려다가 고개를 젓고 오딘과 프리가를 보았다. 그는 이전에 다시 없을만큼 진지한 얼굴로 그들을 보면서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게 있습니다."

"말해보렴."



프리가가 온화한 웃음으로 그의 말을 재촉했다. 토르는 곁의 로키를 흘끗 보았다. 당사자를 앞에 두고 할 말인가 싶지만 어차피 더한 악다구니도 서로에게 퍼부은 사이에 새삼 삼갈 게 있을까 싶어 그는 물었다.



"왜 숙부가 제 혼인 상대입니까? 언제부터 정혼자로 정해져있던 거죠? 무엇보다 숙부지 않습니까. 이미 가족이라고요."

"서로 잘 알고 있으니 아예 모르는 타국의 왕족보다는 낫지 않느냐."



오딘이 덤덤하게 답했다. 토르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논리란 말인가. 오딘이 말을 이었다.



"또한 내 의형제이므로 숙부로 대접한 것이지 실제론 피가 섞인 사이가 아니란 걸 너또한 잘 알지 않느냐."




잘 알다마다. 토르는 어린 시절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날 저랑 키가 그리 차이 나지 않는 검은 머리에 푸른 피부의 낯선 소년을 데리고 오더니 내 의형제니 오늘부터 네 숙부다, 그러니 예의를 갖춰서 대하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리던 아버지의 목소리를 말이다. 어딜봐도 오딘보다는 저와 나이가 더 맞을듯한 로키의 모습에 숙부요? 제 형제가 아니라?고 묻자마자 나직한 웃음과 함께 나긋한 목소리가 떨어졌더랬다.



-왕자님, 아니 조카께서는 서리거인을 처음 보나 봅니다.




웃는 목소리로 하는 말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소년은 생긋생긋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 숙부는 요툰 태생의 서리거인으로서 서리거인과 아스가르드인은 성장의 속도도 방식도 완전히 달라 외양으로 나이를 판단하기는 매우 어렵지요. 아홉 왕국을 다스리셔야할테니 앞으로 커가면서 차차 배우게 될 겁니다.




예의를 차린 말을 짧게 줄이면 그런 것도 모르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꼬맹아 정도 되겠다. 그때부터였다. 최악의 첫인상으로 시작된 둘 관계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토르가 하는 말이며 행동은 뭐가 되었든 맘에 안 드는지 로키는 그와 마주칠 때마다 방글방글 웃는 얼굴로 말로 긁고 마법으로 사소한 골탕을 먹였고 토르는 그때마다 넘치는 힘으로 반격을 하곤했다. 둘 사이의 평화는 극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둘은 만났다 하면 백에 아흔아홉번은 둘 중 하나, 혹은 둘 모두 기분을 있는 대로 망치는 걸로 끝맺음을 맺곤 했다. 그나마 토르가 머무는 왕자궁과 로키가 주로 머무는 별궁은 거리가 있고-그런 것치곤 지나치게 자주 만났지만- 로키가 아스가르드와 요툰헤임을 오가며 자리를 종종 비운 덕에 겨우 최악을 벗어나 예의를 차리는 웃음 정도 지어보이는 사이인데, 뭘 한다고? 토르는 제멋대로 날짜와 예식 절차를 정하고 있는 오딘과 로키를 보았다. 로키는, 숙부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로키 역시 토르만큼이나 자신을 싫어하고 있을 텐데? 혀 끝을 달싹거리는 질문은 오딘의 눈빛과 프리가의 미소에 눌려 끝내 나오질 못했다.









겨우 이야기가 끝나고 각자의 궁으로 향하는 긴 복도에 단둘만 남게되자 토르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진짜로 나랑 혼인할 생각이에요, 숙부?"



로키가 짧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가 토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 이런 토르. 여전히 어리석긴."

"장난치지 말아요. 농담하고 싶은 기분 아니니까."

"내 뜻이 아니라 올파더의 뜻이야. 이 미천한 몸이 어떻게 올파더의 뜻을 거스를 수 있겠어?"




과장된 제스처를 취하며 로키가 비꼬았다. 토르는 조금 희망을 찾았다. 역시 그만큼이나 로키도 원하지 않는게 분명했다. 오딘의 뜻이라고 해도 당사자 둘이 진심으로 거부하면 오딘도 조금은 재고할지도 모른다.



"그럼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로키는 한심한 시선으로 토르를 한 번 보고 혀를 쯧, 가볍게 찼다.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한 번 해보던가."



가능할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 말투였다. 입가를 동그랗게 그리는 미소와 함께 로키는 손을 흔들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행운을 빌어, 왕자님."










그길로 당장 달려간 토르의 거부 시도는 단박에 실패했다. 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딘의 눈빛, 그 하나만으로도 이야기는 끝이었다. 토르는 오딘이 제 뜻을 굽히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고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오랜 사냥 중에도 아프지 않던 어깨가 무겁고 욱씬거렸다. 절로 새는 한숨과 함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물론 아스가르드의 하나뿐인 후계자로서 언젠가 감정보다는 다른 이유로 선택한 배우자를 맞게 될 지도 모른다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 선택지에 로키는 없었다. 정도가 있지 않은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서로의 신경을 어떻게든 더 긁어대지 못해 안달 난 둘이서 혼례를 올린다고? 그야말로 헬하임을 맨몸으로 견뎌내는 거에 버금가는 악몽이다. 토르는 제 아비이자 올파더가 도대체 무엇을 계산하고 이 혼인을 지시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로키와 혼인을 함으로서 얻는 이익이 뭐지? 요툰헤임의 완전한 복속? 그들이 로키 하나를 여기로 보낸다고 뿌리깊은 반란의 싹을 접을 왕국이던가? 그들의 기질은 거칠고 싸움과 정복을 즐기니 겨우 혼인따위로 접어질 리 없다. 그러면 대체 왜.. 외부로 열린 복도를 걷던 토르의 눈에 문득, 저 아래 중앙 홀로 향하는 길고 아름다운 계단이 보였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시종들의 손 가득 들려있는 혼인을 준비하기 위한 여러 물품들을 본 순간 그는 걸음을 멈췄다. 이건 더 이상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대로 여기 서 있는다면 당장 눈 앞에 닥쳐올 현실. 토르는 멈췄던 걸음만큼이나 빠르게 제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끝, 영원히 우주로 흘러내리는 폭포 너머로 마지막 빛이 가라앉을 무렵, 충실한 문지기가 왕에게 고했다. 


왕자, 토르 오딘슨이 바이프로스트를 열고 사라졌노라고.



이실is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