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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가락 사이로 上









드디어 이 날이다. 유연은 깊이 심호흡했다. 이미 몇 번이고 했던 점검을 다소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빠진 소지품이 있나 살피고, 티켓의 시간을 확인했다. 웬만한 짐은 이미 부쳐뒀기 때문에 몸은 가볍다. 다만 마음이 무거웠다. 춥지도 않은데 목 뒤가 선득하고 주먹 안에 식은땀이 쥐였다.

그러나 알고 있다. 도망가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내 돌파하는 것이 제 장점이자,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유연은 결심대로 행할 것이다. 필요한 일이었고, 이해받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다. 마지막 한숨을 길게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더이상, 한숨 쉬지 않을 것이다.

그가 오래도록 준비해 온 시작이므로.



「곧 약속한 날이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제가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요.」

「벌써 그렇게 됐군요. 좋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 점심 어떻습니까.」

「토요일 저녁은 안 될까요?」

「상관없습니다. 그럼 그때 보죠.」



이택언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앞에서 보고하고 있던 위겸이 긴장한 얼굴로 제 표정을 살피는 것도 눈에 들지 않는다. 자꾸 들여다본다 해서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은 아니다. 그의 Evol은 시간조종이지만, 시간을 가속하려 해본 적은 없다. 해야 할 일은 많고 시간은 언제나 모자랐다. 시간을 멈추면 모를까, 빠르게 돌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었다. 그는 초조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어딘가 낯이 익은 불안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점검해 보았다. 불안을 느낄 이유가 있는가? 그럴 리 없었다. 이택언과 불안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불안이란 미지의, 확실하지 못한 것이 있을 때 생겨나는 것이었고, 이택언은 무엇이든 철저하게 처리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외부적으로, 다른 문제가 있는가? 아무것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유연은 저와의 약속을 지켜, 2년 안에 회사를 한 손에 꼽히는 기업으로 키워냈다. 그로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유연의 제작사는 이제 다수의 인기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고, 직원도 몇 배로 불어났다. 얼마 전에는 큰 사무실로 이전도 했다. 머지않아 사옥을 지으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며 웃던 얼굴이 마음에 남았다.

회사가 성장하니 유연도 무척 바빠졌다. 이택언은 더이상 예전처럼 사소한 심부름을 핑계로 그이의 얼굴을 보거나, 조언을 주거나 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유연은 괄목할 만큼 성장했고, 그 정도 되었으면 조언을 듣기보다는 스스로 부딪쳐 해결하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자주 만나지 못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지만, 하루하루 성장하는 회사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는 유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택언은 기분이 괜찮았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만 2년째 되는 날이다. 모든 일은 잘 풀리고 있다. 걱정할 필요 없을 텐데. 분명 그러한데.

어쩌면 만난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택언은 곧 납득했다. 생각해보면 유연을 다시 만난 이후로, 이렇게까지 오래 얼굴을 보지 못한 적은 처음이다. 업무적으로도 만날 일이 많았고, 사적으로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간 적도 꽤 있다. 이택언이 해외 출장을 가더라도 통화는 빼놓지 않았으니, 계속 그이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요 몇달 간은 얼굴을 보기는커녕 목소리도 자주 듣지 못했다 . 약속한 2년이 가까워 오니 마음이 바쁜 것인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거나 통화중이기 일쑤였고, 만나자고 말하면 미안하고 곤란한 목소리로 사양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또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사람이니 유연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오늘 만나기로 한 약속까지도 전화가 아닌 메시지로 잡은 것은 조금 서운했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다, 지시할 사항이 있으시냐 묻는 위겸의 목소리에 이택언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다시 한 번 손목시계를 들여다본다. 오 분도 지나지 않았다. 역시 시간을 빨리 감을까, 충동에 휩싸였다가,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이택언의 덕목이 아니다. 근거 없는 예감 따위에 흔들리는 것 또한 정말로 저답지 않다. 설렘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을 가라앉히며 이택언은 위겸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내보냈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언제나 그랬듯 일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은 금세 흘러 있을 터였다.

유연이 지정한 곳은 연모시 중심가의 한 호텔 레스토랑이었다. 음식 맛은 나쁘지 않지만 다소 화려하고 지나치게 점잖다는 인상이 있었다. 그가 아는 유연의 취향과는 조금 빗나가는 장소 선정이라 이택언은 묘한 껄끄러움을 느꼈다.

아니, 이건 욕심 탓이다. 기념할 만한 날인 만큼 좀더 친밀한 만남이길 바라는 마음. 무어 상관없었다. 식사 이후를 사적인 시간으로 만들면 될 일이다. 그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Souvenir를 열고, 케이크와 푸딩에 샴페인을 곁들일까. 클로즈 팻말을 걸고 지배인도 없이, 한밤중의 둘만의 바(BAR)로 만드는 것이다.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이택언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었다.

유연은 그의 푸딩을 좋아하니 분명 즐거워할 것이다. 푸딩을 한 입 크게 떠서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행복하게 웃는 그이의 표정을 상상하니, 이택언은 저가 아까까지 무엇에 그리 초조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불안은 사라지고, 그저 그이를 만난다는 기대만으로 마음이 부풀어오른다.

언젠가의 생일에 선물했던, 아찔한 향을 풍기는 백합 꽃다발을 들고 그는 레스토랑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화예 대표를 알아본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늘 있는 일이라 이택언은 그것을 굵은 신경줄로 무시하고, 웨이터에게 유연의 이름을 말했다. 곧 웨이터가 자리로 안내했다. 테이블 옆의 큰 유리창으로 화려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유연은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조금 어깨가 뻣뻣한 모양으로, 야경이 아닌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야경에 정신이 팔려 있었을 텐데, 오랜만에 그를 만나는 것이 유연으로서도 긴장이 되었던 것일까. 웃음이 나는 입꼬리를 애써 누르며 그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만나자 하다니 좀 의외군요. 당신 취향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중요한 날이니까요.”

‘중요한 날’? 이상한 단어 선택이다. 피어오르던 위화감은 그이가 고개를 들자 단숨에 날아갔다. 유연은 머리카락을 굽슬거리게 말아 한쪽으로 묶어 늘어뜨리고, 단정한 원피스 차림이었다. 깔끔하고 단아한 화장에, 잘 하지 않던 우아한 액세서리도 달고 있다. 이택언은 놀랐다. 그가 유연을 생각할 때 떠올린 인상 - 그러니까, 덜렁대고 거절을 잘 못하는, 그러면서도 할 때는 제대로 해내는,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사람 - 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그랬다. 근 2년 동안 유연은 성장했다. 대단히. 성격 자체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겠지만, 이제 그이는 어설픈 모습 없이 프로다운 일처리를 선보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게 되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이었다. 이택언은 거의, 모르는 사람을 마주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낯설고 어색한 게 아니라 단숨에 매료된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입술에 힘을 주어 일자로 다물었다. 평소의 저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웠다. 애써 눈을 몇 번 깜박이고 괜히 큼, 큼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유연이 작게 미소지었다.

“그렇게 안 어울리나요? 장소가 이런 만큼 격식을 좀 갖춰 봤는데.”

“……. 나쁘지 않군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태연한 체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게 나왔다. 그냥 솔직하게 칭찬을 할 것을, 후회했지만 유연은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여상한 표정이었다. 이택언은 불쑥, 백합 꽃다발을 내밀어 유연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럴 때 할 만한 그럴듯한 말이 있을 텐데, 머릿속이 새하얘진 양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무슨 말인가를 했고, 그이가 꽃다발을 끌어안고 가만히 웃은 것으로 그렇게까지 엉뚱한 대답은 하지 않았으리라 짐작했을 뿐이다.

식사는 그런 식이었다. 조명은 반짝이고, 아름다운 음악이 흐른다. 이택언은 아주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공중을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늘 땅 위에 단단히 발을 딛고 살아가던 그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눈앞의 유연은 마음에 가득 차고 음식은 맛이 있었다. 사실 그는 제가 무엇을 먹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대기업 CEO의 가면은 이런 때에도 견고해서, 평소의 냉정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만은 참 다행이었다.

어떤 울렁이는 것이 피부를 타고 오르고, 간질간질한 향이 코끝을 스친다. 몸 안에 기분 좋은 열기가 가득 차 둥둥 떠오를 듯했다. 차를 몰고 왔기에 술을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마신 것도 없이 취한 기분이었다. 음식을 먹는 그이의 내리깐 속눈썹이라든가, 제 말을 듣다 곱게 접히는 눈꼬리라든가, 그런 것을 언제까지라도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사로잡힌 상태라, 그는 어떤 것을 간과했다. 혹은 일부러 외면했다. 불안은 설렘과 공조하여 쿵, 쿵, 큰 낙차로 심장을 떨어뜨린다. 익숙한 맛의 불안은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눈치채기 어려운 법이다. 사소한 의문은 싹을 틔우자마자 베여나갔다. ‘이 사람이 사적인 축하 자리에서도 이렇게 공적이고, 어른스럽고,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나?’ 유연은 그에게 음전한 태도로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그이의 성격상, 의기양양해서 온갖 무리한 요구들을 해대며 그를 도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그런 기미가 조금도 없는지. 눈 앞에서만 치우면 없는 것이라 자위하는 어린아이처럼, 빈 땅으로 만들어 놓고 애써 안심했다.

그렇게 이택언은 스스로를 속이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래서 식사가 끝난 후 화장실을 다녀온 그이가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캐리어를 끌고 나타났을 때, 그저 의아한 마음으로 물을 수 있었다.

“출장이라도 잡혀 있습니까? 지금부터는 내가 대접하려고 하는데.”

“그럴 시간은 없겠네요. 지금부터 국제공항에 가야 해서요.”

국제공항? 해외 출장인가? 하지만 그가 알기로 유연의 회사는 연모시 안의 프로그램만을 담당하고 있었고 해외 제휴사도 없었다. 유연은 딱히 설명할 생각이 없는 듯 그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대체 어디로 가겠다는 걸까. 짚이는 곳이 없었다.

부드럽게 구르던 캐리어 바퀴가 호텔 현관의 턱에 걸려 투둑, 튀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는 급히 그이를 쫓았다. 몇 걸음만에 유연을 따라잡아, 팔을 확 잡아챘다. 유연의 몸이 중심을 잃을 만큼 뒤로 당겨져 넘어질 뻔했다. 그제야 이택언은 제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이를 잡아끌었는지 깨달았다. 황망하게 손을 놓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였는지, 순간적으로 저도 저를 제어할 수 없었다.

“미안, 미안합니다. 하지만 설명이 부족하네요. 당신이 해외 출장을 간다는 보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택언 대표님께 굳이 알려야 할 사항은 아니니까요.”

조금은 한숨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잘라내는 듯한 어조였다. 춥지도 않은데 온몸이 덜덜 떨리는 느낌이었다. 오늘 내내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던 것이 단숨에 그를 점령했다.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듣고 싶지 않았다. 아, 이 불안의 정체는. 그는 이 감정을 알고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지금까지도, 사무치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느닷없이 뒤로 당겨져 놀랄 법한데도 유연은 비명 하나 없이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를 향했고, 도리어 이택언이 눈길을 피했다. 그가 아는 눈인데, 하나도 다를 것 없는데. 소름끼치도록 낯설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며 간절히 호소하던 눈이 아니었다. 지적을 들으면 분해하면서도 의지를 불태우던 눈이 아니었다. 몇 번의 수정 끝에 통과 사인을 받으면 기쁨과 성취감으로 뿌듯이 차던 그 눈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그이에게서 볼 수 있을 거라 여긴 적 없던 냉정한, 흔들림 없는 눈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물리적으로 틀어막힌 것처럼 호흡이 가빠와서 그는 조금 휘청거렸다. 그때, 이택언의 뺨에 미지근한 온기가 닿아왔다. 유연이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그 작은 접촉만으로도 놀랍도록 진정이 되어, 그는 다리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섰다. 다만 불안만은 어찌 해결되지 않았다. 정말로 그럴 작정인가? 또 다시 내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애원이 머릿속에 시끄럽게 울렸다.

이택언은 천천히 양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가려 해서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까처럼 그이를 아프게 할 수는 없었다. 손 안에 잡히는 가냘픈 몸. 손등에 스치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이것은 익숙했고, 그가 알던 것이다. 그는 거의 평정을 되찾았다. 유연이 선고하기 전까지의 아주 잠깐이었지만.

“출장이 아니라 유학이에요. 언제 돌아올지는 정하지 않았어요.”

순간 시간이 멈추었다. 이택언도 의도하지 않았던 듯, 함께 멈추었던 숨을 애써 몰아쉬며 눈썹을 찡그렸다. 진정해야 했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연의 어깨를 틀어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이는 아픈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의 손을 떨쳐내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이택언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스스로가 천치처럼 느껴졌으나, 도무지 멈출 수도, 평소처럼 말할 수도 없었다.

“유학……. 이라고 했습니까? 어째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내가 가르쳐 주겠습니다.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나보다 더 제대로 가르쳐 줄 스승은 없을 텐데요. 그리고 이제야 궤도에 오른 당신 회사는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그러니까 당장, 당장…….”

말문이 턱 막혔다. 유연은 말없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 눈은 익히 알던 대로 유순했으나, 또한 가차없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알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는 스스로 깨달았다. ‘이택언에게는 유연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

유연의 회사는 화예의 투자금을 상환할 만한 수익을 냈고, 앞으로도 전망이 상당히 좋다. 굳이 그이가 대표로 남아 계속 경영할 필요는 없었다. 꾸준한 자기계발을 통한 발전도,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한다는 것도, 이택언이 언제나 강조하고 실천해오던 일이다. 그러니까 그이는, 그의 조언에 충실한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 슬픔은, 배신감은 어떻게 해야……. 격렬한 감정 때문에 열이 오른 그의 뺨에 닿아 있으면서도 유연의 손은 여전히 미지근해, 도리어 차갑게까지 느껴진다. 그는 서러워졌다. 그럴듯한 말로 어떻게 포장해 볼 수도 없는 날것의 감정이었다. 화가 나는 동시에 마음이 너무 저며 와서 그는 어느 한 쪽의 감정만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소용돌이치듯 뒤섞인 마음으로, 애원하듯 속삭였다.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통보할 수가 있습니까. 간다고 하면, 내가 못 가게 할 줄 알았나요.”

“지금 그러고 계시는걸요.”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며 그렇게 말하는 유연은 살짝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 해사한 표정에서 그는 어떤 가능성을 찾았다. 아무리 차분해졌다고 해도, 유연은 기본적으로 제 감정을 숨기고 가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쥐듯 절박하게 움켰다. 어깨를 잡았던 한 손을 들어 뺨에 닿은 그이의 손 위에 덮었다. 가두듯 그러쥔다. 그의 어두운 눈동자에 한층 더 짙게 그림자가 지고, 다른 손은 유연의 귀 뒤쪽, 도톰한 부분을 간지럽히듯 쓸었다.

유연은 맞받아주지 않았으나,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 부동(不動)에 약간의 희망을 얻어, 이택언은 그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제 떨리는, 뜨거운 숨이 유연의 머리카락을 흐뜨러뜨리는 모양이 눈 안에 선하게 그였다. 그가 속삭였다.

“……. 유연. 유연. 당신도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함께 찾아보죠. 분명 회사 일 때문에 준비 시간도 짧았을 텐데, 좀 더 준비해서 갈 수 있도록 내가 지원하겠습니다. 그 편이 당신 유학 생활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이는 미동도 없이 그의 애원을 듣고 있었다. 이택언은 기대를 품고 유연과 눈을 맞추었다. 둥근 눈은 미소짓는 것처럼, 혹은 눈물짓는 것처럼 약간 이울어 있었다. 그러나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유연은 거절을 말했다.

“아뇨, 사양할게요. 오래 생각하고 준비한 일이에요. 지원도 필요하지 않아요. 사실 이미 대표님 도움은 받았거든요. 그때 제가 안내했던 프랑스측 인사가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까요.”

이택언은 거칠어지는 숨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다. 이 사람은 결정했다.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동안, 유연은 가만가만 그의 뺨을 쓸었다. 미지근한 손길은 관자놀이를 거쳐, 그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한 가닥 한 가닥 흘러내렸다. 눈물 나도록 상냥한 손길이다. 이렇게 갑자기, 여지도 주지 않고, 떠나는 주제에, 어째서.

찰칵.

어디선가 셔터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되는 양 유연은 미련없이 이택언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미소를 지으며, 지극히 공적인 태도로 작별을 고했다.

“대표직은 안나연 씨가 임시로 수행할 겁니다. 인수인계는 완벽히 마쳤으니 현재 진행중인 프로젝트는 차질 없이 진행되리라 생각합니다. 늘 그래주셨듯, 제가 없더라도 공평하게 도움을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친절한 배웅 감사합니다, 이택언 대표님.”

그리고 유연은 뒤돌아 걸어갔다. 호텔 앞에 서 있는 택시를 잡아, 기사의 도움도 없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넣고, 뒷자석에 올라탄다. 너무도 산뜻한 모양이라 순간 이택언도, 사진을 찍은 파파라치도, 그들이 아까까지 거의 껴안고 있었다는 사실이 실제 아닌 농담처럼 느껴졌다. 그들 사이에 어떤 사적인 관계도 없었고, 그저 멀리 떠나는 동업자를 좀 더 친밀하게 배웅한 것뿐이라는 듯.

이택언은 생각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사이로 그이가 탄 택시를 바라보며, 치열하게 생각했다. 택시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연이 떠나간다. 어두운 눈빛은 형형하게 빛난다. 이해하려 노력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택언은 물론 자기연민에는 흥미가 없지만, 때로는 북받쳐 올라오는 것이 있다.

그는 어째서 자신이 늘 남겨지고, 기다려야만 하는 역할인지 납득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떠난 어머니와 유연을 겹쳐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그들을 떠올리면, 그때의 자신에 대해서도 저절로 생각하게 된다. 어릴 때의 그는 어쩔 수가 없어 그저 그리워했고, 어른이 된 후에는 가진 모든 것을 다해서 찾아다녔다. 그렇게 해서 겨우 다시 기적처럼 되찾았는데, 이제는 스스로 그를 떠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이택언은 유연을 강제할 권리가 없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이택언은 유연을 강제할 권력이 있다.’

그는 자신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유연도 그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는 것이리라. 붙잡을 경황이 없도록, 막을 방법도 없도록. 하하. 이택언은 웃었다. 잔꾀는 부렸으나, 가소롭다. 이택언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2년 간 옆에서 지켜봐놓고도, 일단 손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울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순진하게도.

물론 이택언은 스스로 정한 기준을 철저히 지킨다. 그 기준에는 범법행위를 지양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준은 변할 수 있고, 그것을 바꾸는 건 전적으로 그의 손에 달려 있다. ‘믿겠습니다’라고? 그런 알량한 말 한 마디로 나를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안이하기 그지없는 판단이다. 아직 멀었다, 당신은. 그걸 똑똑히 깨닫게 해주리라.

그런 충동에 사로잡혀, 이택언은 차로 다가갔다. 스스로 저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음에도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호텔의 발렛 담당 직원은 이미 그의 비싼 차를 꺼내두고 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직원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 차에 올라타 거칠게 문을 닫았다. 액셀을 밟는다. 으르렁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차가 급하게 출발했다.

늘 부드럽게 운전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람 하나를 끝장낼 듯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서 유연이 타고 간 택시를 쫓았다. 위겸에게 전화를 걸어, 멋대로 사진을 찍은 파파라치에게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도 잊지 않았다.

미친 듯이 밟아댄 덕에, 그는 금세 택시를 따라잡았다. 택시는 누군가 저들을 쫓아왔을 거란 생각도 하지 않는 듯 평온하게 주행하고 있다. 추월해서 앞을 가로막을 요량으로, 그는 택시의 옆 차로로 들어섰다.

운전 중에 한눈을 파는 건 위험하다. 그런데도 고개를 돌려 택시 뒷좌석의 그이를 살핀 것은, 그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이었다.

순간, 엑셀을 밟던 그의 발에서 힘이 빠졌다. 갑작스러운 앞차의 서행에 기겁한 뒷차가 다급하게 경적을 울려댄다. 얼얼하도록 시끄럽다. 그는 핸들을 꺾어 차를 길가에 세웠다. 택시는 뒤쪽의 소란에도 멈추는 일 없이 유유히 공항 방면으로 떠나간다.

이택언은 핸들에 팔꿈치를 대고 고개를 숙였다. 되새겼다.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쉬었다. 끓어오르던 충동은 여전히 뜨거웠으나, 아까처럼 넘쳐흐르지는 않았다. 그 하얀 장면이 그를 온통 압도했기 때문에, 그는 한동안 꼼짝하지 못하고 엎어져 있었다.

먼지 낀 창문 너머의 유연은, 하얗고 눈부신 백합 꽃다발을 끌어안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계속 생각했습니다. 휴가까지 내고, 당신이 살던 텅 빈 집에 가만히 앉아서요. 간절하고 비참하게, 어째서 당신이 그래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나는 당신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솔직히 대단히 화가 나고, 상처받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내 앞으로 끌고 와, 납득할 만한 변명을 대 보라 윽박지르고 싶을 만큼.」

「그러나 그러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내게 상처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단지…….」

「당신이 내게 믿는다 말했으니, 나도 당신을 믿어 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늘 말했죠. 나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내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습니다. 반드시, 내 곁으로 돌아오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너무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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