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CU:CA 스팁버키토니 소설 개인지
◈ 전연령
◈ 2017.02.04. 스팁버키토니 교류전 [시빌워]
◈ 전체공개




「네 친구를 도울 수 있는 건 나 외엔 없어」

토니의 첫 마디였다.

「물론 다시 잇는 작업엔 의사의 도움이 필요해, 기왕이면 끝내주는 사람으로, 가능하면 정형외과 쪽에서 신경의를 찾아야겠지. 그렇지만 나머지 영역은 내 전문 분야지. 솔직히 말하면 나 외엔 없을 거라고」

바짝 긴장한 채로 딱딱하게 전화를 받았던 스티브는 토니의 말에 얼굴에 번지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다른 누군가 말했다면 오만하다고 했겠지만 토니 스타크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는 천재, 스티브는 그의 천재성과 자부심을 인정하고 존경했지만, 동시에 그의 천재성이 지나치게 다른 부분을 무감하게 만든다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걷기도 전에 뛰는 아기 같았다.

그래서 스티브는 토니의 진짜 의도를 알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리며 세계 뉴스를 떠올리려 애썼다. 사소해 보이는 일도 곧 일어날 거대한 일의 단초로 볼 수 있다. 별 일 없이 정말로 버키의 팔을 고칠 수 있다는 건 알리기 위해 캡틴 아메리카를 부를 기회를 쓰는 건…… 토니답긴 했다. 스티브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영어를 할 줄 알게 됐군, 토니.”

「문외한들에게 말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는 거지. 괜히 머리 굴릴 필요 없어, 캡틴. 누군가 오버테크놀러지 의수를 만들려고 한다는 소식이 개발자들 사이에 폭발적으로 공유되고 있거든. 하지만 이미 팔에 달려서 잘 쓰이던 완성품이 내 실험실 테이블에 놓여있다고. 해체하든 다시 달든 이걸 모델로 하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어」

“토니, 고마워.”

「그딴 소리 들으려고 전화한 거 아냐. T 본이 외계로 날아가서 잘 알아서 화해하고 자기한텐 그만 좀 귀찮게 굴라고 할 때마다 꼭…… 미친……」 토니가 처음으로 말을 머뭇거렸다. 「마치 계시받는 기분이라 이게 좀 해야 할 리스트에 올라갔을 뿐이야」

“음.”

스티브가 긍정했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스가르드다운 방법으로 연락해오는 게 보통의 평범한 방식이 아니라는 사실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스티브는 이런 제안 자체가 무척 고마웠고, 그리고 그뿐이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받아들일 의사는 없었다. 버키가 옆에서 ‘하자는 대로 해.’ 하고 입 모양으로 속삭이지 않았다면 바로 그 순간 칼같이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잘라냈을 것이다.

“신경, 써 줘서,”

스티브는 자기 옆구리를 콱콱 찔러대는 버키를 팔꿈치로 밀쳐내느라 잠시 말을 더듬었다. 그 사이 토니가 빠르게 말했다.

「난 이제 잘 시간이야.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뉴욕에 오면 전화하고」

그리고 먼저 통화가 끊겼다.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소리를 하기도 전에. 스티브는 약간 성난 채로 방해한 버키를 돌아보았다. 버키는 실실 웃고 있었다.

“토니가 세계 최고인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굳이 갈 필요 없어.”

“지름길이 있다는 데 뭐하러 돌아가. 게다가 스타크한텐 내 메탈암도 있지만 네 방패도 있잖아.”

“그건…….”

“내 팔이야 핑계고 너와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하잖아. 네가 준 셀폰으로 전화한 거고. 그 사람이 협박당하면서 전화하는 건 아닐 테고, 뭐가 문제야?”

버키의 말이 지당했다. 스티브는 토니가 진심으로 흉계를 꾸미는 타입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가끔 그가 옳다고 하는 방향이 자신이 옳다고 하는 방향과 다르다는 사실 역시도 알고 있었지만, 버키는 그런 사소한 일쯤은 어쩌겠냐는 식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의 시선이 아주 잠깐 버키의 왼쪽 어깨에 닿았다가 다시 얼굴로 돌아왔다.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스티브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있자 버키가 스르르 미소를 짓곤 몸을 기울여 그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스티브가 버키의 어깨를 쥐고 품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기며 몸을 겹쳤다. 버키의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혔다. 스티브는 숨을 들이마셨다. 가까이에서 버키의 체온과 냄새가 느껴졌다.

버키가 바짝 볼을 맞붙여오며 스티브의 볼을 따라 입술을 움직이다가 그의 입술에 짧게 키스했다. 촉촉 소리를 내며 닿았던 입술들이 조금씩 깊이 서로 빨아올리며 젖은 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막상 스티브가 턱을 들어 올리고 바짝 붙으며 깊이 키스하려고 하자 버키는 얄밉게 몸을 뒤로 뺐다. 그를 따라가던 스티브는 마침내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는 눈길을 보냈다. 버키가 나른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놓으며 속삭였다.

“넌 멍청이 같은 너한테 잘해주는 친구한테 좀 더 잘해줘야 돼, 인마.”

“벅.”

“진심이야.”

“나도 토니가 좋은 친구인 걸 알아, 하지만……. 또 네가 다치게 될 일이 생기면 난 그걸 참을 수 없을 거야.”

스티브가 흐릿하게 말했다. 말 안에 불안이 가득 담겨있었다. 버키는 스티브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내가 널 두고 또 어떻게 그러겠어.”



*




토니 스타크가 버키를 앉혀두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메탈암의 뚜껑을 열고 들여다볼 때마다, 버키는 숨을 쉬기 어려웠다. 누군가 메탈암을 수리한 후에는 냉동된다는 두려움, 브레인워싱의 고통이 폐를 찌그러뜨리고 손발을 떨게 했다.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해도 학습된 고통은 몸에 남는다.

그리고 아이언맨으로 봤을 때보다 야릇한 무늬의 티셔츠를 입고 연장과 기름때, 베어링, 나사 따위가 널려진 테이블 앞에 있을 때 토니는 아버지를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는 사실 역시도 버키의 몸을 죄어왔다. 잰 체하긴 했지만, 하워드의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온갖 기계부품들이 수없이 돌고 있었다. 지금의 토니처럼. 둘 다 약간 버키가 서 있는 곳보다 한 단계 높은 계단에 올라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니와 하워드의 비슷한 부분을 발견할 때마다 막대한 부채감이 등을 짓눌렀다. 마리아 스타크의 부분은 어디일까? 버키는 어렴풋이 미션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마리아가 무엇을 좋아했을지, 무엇을 싫어했을지, 살아온 날들이 어땠는지, 하워드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얼마나 아들을 사랑했을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미션이었다. 성공했고, 그 결과가 지금이었다. 끔찍한 성공.

토니의 태도는 시베리아와 비교했을 때, 놀랄 정도로 매우 다정했다. 스티브의 기대 이상이기도 했다. 물론 스티브의 기대란 아주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토니가 때때로 날 서고 짜증스럽게 굴어도 어깨만 한 번 으쓱하고 너그럽게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곤 했다. 토니도 아마 비슷한 기대 수준인 것 같았고, 그 사이에서 버키는 가능하면 아무 말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는 아직도 토니 스타크와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준비는 자신보다도 피해자의 가족인 토니에게 더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그런데 토니는 생각보다 빠르게 전화해왔다. 버키를 마주하기, 단둘이 보기엔 더욱 끔찍할 텐데 그것마저 감수할 만큼 토니 스타크에게는 그만큼 스티브 로저스가 소중한 모양이었다. 정작 스티브는 돌아온 뒤 마리아 힐, 닉 퓨리에 이어 자신이 진행하던 프로젝트를 넘겨받은 사람들에게 불려다니느라 정신없었다. 혹은 심장마저도 히어로들은 더 단단하거나.

토니가 등에 꽂히는 시선을 느꼈는지 큰 동작으로 몸을 돌려 등 뒤의 테이블에 두 팔을 얹으며 버키 쪽을 향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만든 듯한 미소가 토니의 얼굴 위에 떠올랐다. 버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너무 고마워서?” 토니가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역시 잘생겨서인가?”

“……시간이 많이 지났다는 생각.”

“그래, 잘생겼다는 말은 넘길 줄 알았어. 옆에 금붕어 똥처럼 붙어 다니는 금발벽안의 미남만 보다가 보니 눈이 상향조정이라도 됐겠지.”

버키는 조금 생각하고 난 후에 ‘금발벽안의 미남’이 스티브 로저스를 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그 놀람에 토니가 바로 이죽거렸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소중함을 모른다니까.”

“생각해본 적이 없어.” 골똘한 투로 버키가 이어서 말했다. “근데 가끔 걜 보다가 다른 사람을 보면 내가 그린 그림 같긴 해.”

“엉망이란 소리지?”

“비슷해.”

토니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직도 뒤로 감춘 토니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버키는 눈치챌 수 있었다. 토니 역시 버키처럼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고, 감추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버키는 자신의 부담감과 토니의 부담감을 동시에 느끼며 거대한 손가락으로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막혔다.

“내가 나갈까?”

“……신경 연결 때문에 있어야 돼. 뭐가 문제야? 그 의자 아주 괜찮은 거라고. 일부러 가져온 거란 말야. 당장 앉아있어. 알겠어?”

이로 아랫입술을 뜯으면서도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토니가 오히려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고분고분해?”

짜증 내는 말투였다. 버키는 잠시 곧이곧대로 대답해도 되는지 생각했다. 그 짧은 순간에도 토니의 짜증이 에스컬레이트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고, 버키는 더는 토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솔직하게 대답했다.

“앉아있으라고 했잖아.”

“참나, 내가 죽으라면 죽겠어?”

버키가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 봐.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있어.”

“누군가를 죽이는 건 다시 하고 싶지 않아.”

버키는 단호하게 대답한 다음에 입을 다물었다. 토니가 뚫어져라 버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니의 갈색 눈동자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로 광채가 흘렀다. 단순한 짜증이나 화가 아닌 더 깊이 숙성된, 그렇다, 한 20년쯤 뚜껑을 덮어버린 항아리 안쪽을 보는 듯한 깊고 어두운 심연의 광채. 버키는 꼼짝하지 못하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음 안쪽이 마치 아주 연한 고깃덩어리가 된 듯했다. 토니의 눈빛이 닿는 곳마다 두들겨 맞은 듯 무지근하게 아팠다.

토니가 아주 천천히 낮고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걸 더 먼저 결심했어야지.”

내뱉듯이 말한 그는 입을 꽉 다물었다. 그 순간 버키는 토니 역시 거의 자신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버키는 두려워지고 동시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왜 벌써 스티브와 나…… 를 부른 거야?”

버키가 물었다. 토니가 거의 사이를 두지 않고 되쏘았다.

“넌 왜 왔고?”

“네가 불렀으니까.”

“그렇게 무기력하게 굴지 마! 아직도 다른 사람한테 네 결정을 미루려는 거야? 그런 식으로 ‘선택’을 다른 사람한테 미루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네 친구가 너한텐 설교 안 하냐? 아주 좆같아지는 거라고 말야! 어떤 식으로 좆같아질 건지는 네가 선택해야지, 안 그러냐고!”

버키는 그런 게 아니라고, 무기력하게 구는 게 아니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여기까지 모두가 버키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매끄러운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감정을 눌러 죽여야 했던 긴 시간이 스스로를 둔감하게 하고 혀를 묶었다. 자신의 마음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는 단어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까지 꽉 막혀버린 답답한 기분 속에서 버키는 속으로 몸부림쳤다.

“난 네가 원하는 걸 하겠다고 선택한 거야. 네가 뭘 원하든 뭐든지 하겠다고……” 버키가 헐떡이며 덧붙였다. “내가 죽인 사람들의 가족이니까.”

그 순간 토니의 눈동자에서 번개가 쳤다. 버키는 그 번개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의 멱살을 들어 올려 바닥에 내팽개치는 그 순간까지도.



*




“뭐든지 하겠다고?”

버키의 목을 조르는 토니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손가락 바로 아래에서 연한 핏줄기가 파닥거리듯 뛰는 진동이 느껴졌다. 경동맥. 여기를 조금만 더 누르고 있으면 의식을 잃고 뇌 손상이 시작된다. 단 몇 초면 윈터 솔져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슈퍼 솔져라고 해서 핏줄까지 강화되는 게 아니니까. 단지 신진대사가 더 빠를 뿐이다.

토니는 새빨갛게 붉어졌다 서서히 창백해지는 버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오싹한 고양감을 느꼈다. 버키는 손쉽게 목을 내주고 있었다. 토니를 밀어내지 않았다. 팔이 하나뿐이라도 버키는 얼마든지 힘으로 토니를 떼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밀어내지 않았다. 토니가 그를 죽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토니 스타크가 버키 반즈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고.

토니는 비웃었다. 죽이지 못한다고, 왜 죽이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웃기고 있네. 세상일은 모두 내 마음대로야. 뭐든 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지.

토니는 문득 손에 힘을 탁 풀고 주저앉았다. 머릿속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지껄였다. ‘이런 식으로 그를 괴롭히는 건 아무런 소용 없는 짓이야.’ 세상에, 머릿속에 캡틴 아메리카 나셨군. 하지만 토니의 머릿속에서도 캡틴 아메리카는 옳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버키 반즈를 괴롭혀봐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키는 간신히 이어진 호흡에 콜록거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저건 그냥 도구야. 알고 있잖아, 중요하지도 않다고. 총에 맞았다고 총에 화를 내나? 총을 쏜 사람에게 화를 내야지.

토니는 마찬가지로 숨을 헐떡거리면서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총에게 화를 내나? 하지만 자신의 몸을 찢어발긴 총탄에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지? 피해자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토니는 벌떡 일어나 테이블 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메탈암과 부품, 도구들을 양손으로 거칠게 쓸어 바닥으로 모두 내팽개쳤다. 온갖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거대한 실험실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토니는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날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손바닥이 날카로운 도구와 전선에 찔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고 그 상처로 쿡쿡 욱신거리는 고통이 타고 올라왔다. 토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아직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버키의 멱살을 다시 잡아 끌려 올렸다.

힘없이 끌려오는 얼굴이 휙 가까워졌다. 토니는 응어리진 눈으로 버키를 노려보다, 키스했다. 버키는 움찔하며 굳었지만 토니의 혀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자 순순히 입을 열었다. 버키의 입술도, 혀도 불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험악하게 숨을 막고 혀를 빨아올리며 제멋대로 안을 휘저어도 버키는 눈썹을 조금 움찔거릴 뿐 거부하지 않았다. 맞닿는 곳은 혀뿐만이 아니었다. 입술 주변과 뺨의 다듬지 않은 짧은 수염이 느껴졌다. 뺨은 거칠었지만 입술은 부드럽고, 입안은 달콤하며 씁쓸했다. 토니는 제멋대로 시작할 때처럼 또 제멋대로 뚝 끝냈다.

거의 입술을 떼지 않고서 토니는 말했다.

“너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다녔지.”

자신의 입술을 통해 버키의 입술이 굳어가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숨이 좀 더 가팔라지고 가슴이 쌕쌕 소리를 낸다. 토니는 자신의 말이 버키에게 깊이 영향을 주고 있음을 음미하며 한 글자 한 글자 새겨질 수 있을 만큼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피해자의 가족들에겐 모두 똑같이 말할 거잖아. ‘내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 당신을 위해 뭐든지 하겠어.’ 그래, 그건 네 진심이겠지. 하지만 몇백분의 일밖에 안 되는 진심이야.”

토니가 버키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버키가 움찔 떨었다. 단단한 이 사이에서 찢긴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토니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렇지만 캡틴에게는, 캡틴의 누구도 해치지 않았는데도 넌 그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하잖아. 그게 진심이야. 그게 중요한 거라고.”

토니의 손이 멱살을 놓고 버키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스타크 부부를 암살하지 않았더라도 네가 날 위해 뭐든지 하겠다고 말했을까? 이 토니 스타크에게? 말해 봐, 아니겠지. 넌 그냥 캡틴 아메리카 뒤꽁무니에만 붙어있을 거고 난 네게 약간의 동정만 느낄 거야. 놀랍지? 난 널 동정했어. 가장 오래된 전쟁 포로, 고문, 세뇌, 캡틴 아메리카의 오랜 친구가 말이야……. 그런데 네가 결국 동정을 느낄 새도 없이 만들어. 네가 한 일이…… 네가…… 날 비참하게 만들어.”

“토니.”

“내가 준 만큼의 절반이라도 받아 보고 싶어. 내가 캡을 존경했던 마음의 절반, 그 절반, 아니, 아주 손톱만큼이라도 그 미스터 퍼펙트가 날 존중했으면 좋았겠지. 그리고 내가 널 불쌍하게 동정했던 만큼, 그만큼, 절반이라도 네가 날 동정해야 해. 네 주제에 감히 날 동정해야 해.”

토니가 비웃었다.

“사실 동정이란 건 남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는 걸 알고서 일어나는 감정이지. 내가 너보다 어려운 처지인가? 내가 세뇌당했나? 내가 고문당했어? 내가 별것도 아닌 멍청한 새끼들한테 휘둘리면서 사람을 죽이고 다녔나? 아냐, 부모님이 그런 암살자에게 죽었을 뿐이지. 나는 털끝 하나 안 다쳤잖아. 응? 그런데도 암살자는 아들에게 들키자 뭐든지 하겠다고 하지. 난 필요 없어. 그따위 공평한 몇백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진심은 필요 없어. 아주 공평해. 넌 나를 동정하는 게 아냐.”

“넌 지금 다쳤어.”

“내가 어딜 다쳤다는 거지?”

토니가 일어나며 팔을 넓게 벌렸다. 손바닥에서 또다시 피가 스며 나와 붉었지만 토니는 무시했다.

“네가 벌인 일이 내 연약한 심장이라도 찢은 것 같아? 아멘. 웃기지 마. 내 심장은 이미 텐 링즈가 망가뜨려 버렸거든. 누가 먼저인지는 모르겠군.”

토니는 팔을 넓게 벌린 자세 그대로 몸을 빙글 돌려 버키에게서 멀어졌다. 버키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헐떡거렸다. 그 소리마저도 토니의 귀에는 너무 뚜렷하게 들렸다. 모든 감각이 예리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입술과 혀에는 아직도 버키의 느낌이 남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머리는 전혀 돌지 않았다. 몇십 수 앞까지 모두 계산하고 움직이는 토니 스타크였지만, 이 순간 그는 판이 뒤집혀졌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자신의 패가 아무 쓸모 없었다.

무시무시한 정적을 찢은 것은 가벼운 노크 소리였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실험실 문이 열리며 노크를 한 사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피곤하긴 했지만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들어온 스티브는, 버키가 바닥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곧바로 얼굴이 굳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 다발을 내팽개치고 거의 뛰어들어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버키를 부축했다. 버키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은 스티브는 바로 토니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토니는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토니 스타크.”

버키가 재빠르게 스티브의 손목을 낚아챘다. 스티브는 벌떡 일어서려다 버키가 손을 꽉 잡아 오자 일어나지 못한 채 턱만 악다물었다. 버키가 빠르게 뱉어내듯이 스티브를 잡았다.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마, 스티브.”

스티브가 격렬하게 대꾸하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는 사이 토니가 말을 가로챘다.

“그래, 그분은 네 말씀만 듣는군! 귓구멍이 있는 사람인지 늘 의심스러울 정도였는데 말야.”

버키는 짧게 기침을 했다. 토니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두 사람이 세상의 파도에 휩쓸리는 양 붙어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스티브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버키 반즈고 버키에게도 단 하나뿐인 존재가 스티브 로저스였다. 그 사이엔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좋은 관계는 이미 스티브가 모두 다 차지해버린 뒤였다.

“토니.” 버키가 여전히 스티브가 일어서지 못하게 손목을 꽉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까 한 말은 진심이야. 그게 몇백분의 일이라고 받아들여도……. 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

토니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몸을 그 둘에게로 돌렸다.

“내가 원하는 건 단 하나야! 둘이 꺼지는 거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야. 알겠어? 너희 둘이 그렇게 서로를 아끼면 아낄수록 난 더 미칠 것 같으니까. 둘이 나가서 붙어먹든지 사랑을 하든지 맘대로 하라고.”

순간적으로 버키의 눈과 토니가 마주쳤다. 가장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 토니는 눈을 돌리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녹색이 섞인 푸른 눈이 물기로 젖은 종이처럼 가라앉은 채 토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토니는 한순간 진 기분이 들었다. 두 손 들고 백기라도 휘두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를 마음껏 원망하고 싶은 감정과 그를 원망할 이유가 없다는 감정이 계속해 충돌하며 마음속에서 폭탄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 이런 식이어야 하지? 왜 모든 게 이런 식이어야 하지?

캡틴 아메리카가 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자신을 멀리하며 미친 것처럼 그를 찾아 헤매는 아버지를 보면서, 수없이 캡틴 아메리카가 되고 싶다고, 차라리 그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랑받을 수 있을 테니까.

지금도 그래. 언제나 그렇지.









END


교류전 즐거웠습니다:) 


스팁버키토니 의 연성 문장 : 2017-01-07
내가 준 만큼의 절반이라도 받아 보고 싶다.
https://kr.shindanmaker.com/679163


책에는 공간이 없어 미처 못 실었는데 저 연성 문장에 탄력을 받았어요!



MCU:CA STUC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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