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끄물끄물한 것이, 곧 비가 쏟아지려나 보다.


  경이는 잠이 덜 깬 몸을 겨우 일으켜 블라인드를 내리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양쪽 귀에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우고는 여섯 시간가량의 플레이 리스트를 찾아 재생한다. 장르를 불문한 다양한 뮤지션들의 음악이 마구 섞였음에도 경이는 그 순서와 각각의 가사를 몽땅 외워버린 지 오래다. 그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외며 손끝의 거스러미를 뜯는다. 


  경이는 열아홉 살, 다른 말로 하자면 고삼이지만 금요일 오전 아홉 시 반인 지금 학교가 아닌 방 안에 틀어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경이의 이상행동에 대해서는 그의 주변인 모두가 이해해주거나 혹은 그러한 척하며 용인해주고선 조용히 뒷말을 나누곤 한다. 물론 처음에는 모두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경이는 학업은 물론이고 교우관계와 취미생활까지 알아서 척척 잘 관리하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탓에 경이의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시간을 가질 때마다 딸아이에 대한 칭찬을 듣는 것을 당연한 절차로 여겼다. '무엇이든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던 경이는 그야말로 모범생 그 자체였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사연은 경이가 열아홉이 되던 해의 첫 학기에 시작되었다. 


  삼월 언젠가의 목요일 2교시, 세계 지리 시간이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경이는 선생님의 손에 쥐인 분필 끝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쉴 새 없이 필기를 이어갔다. 수업 시간이 반쯤 지났을까, 창문에 물방울이 하나둘 부딪쳐 흘러내리더니 구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은은한 빗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선생님과 그를 따라 창밖을 내다본 아이들 중에는 경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 봄비가 내리는구나."


  선생님이 중얼거리자 딴짓을 하던 아이들도 창가 쪽을 바라보았다. 이내 우산을 안 가져왔다고 중얼거리는 몇몇 목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곧 사라질 이 소소한 평화를 즐기고 싶었던 경이는 잠시 펜을 내려놓은 후 왼손으로 턱을 괴고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과 함께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다가와 코앞에 서 있음이 느껴졌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경이는 곧바로 눈을 떠보았지만,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어디로든 도망치려 온몸에 힘을 주고 입을 뻐끔거리기를 수없이 반복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나, 현실에서의 경이는 교실이 떠나가라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책걸상과 함께 바닥에 쓰러진 채,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선생님은 몸집이 큰 남학생에게 경이를 업어 보건실로 데려가 주기를 부탁했지만, 업히기는커녕 손끝만 데도 더 격하게 몸부림치며 발작하는 모습에 맘이 여린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결국 응급 구조대가 출동하여 장정 여럿이 경이를 겨우 붙들고 교실을 떠나고 나서야 선생님을 비롯한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경이가 병원으로 이송될 즈음 비는 잦아들기 시작했고,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던 경이는 이내 잠들 듯이 정신을 잃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이는 신체적으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병원의 소견서를 들고 떨리는 손으로 교실 문을 열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의 당부대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경이를 맞아주었다. 덕분에 마음이 놓인 경이는 다시 평소와 같이 수업에 열중했으나, 1교시가 끝나갈 즈음 그 해의 두 번째 봄비가 내렸다.


그날 이후로 비 소식이 있는 날이면 창가의 한 자리가 비어있게 되었다.


  경이의 완벽했던 삶은 그렇게 무너지고야 말았다. 이불 속에 숨어 온갖 음악을 귓구멍에 쑤셔 넣는 일상을 몇 달간 지속해왔음에도 지금 이 순간까지 경이는 괴로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 하는 것이, 미묘하게 달라진 친구들의 태도가, 비가 올 때마다 이렇게 처량해지는 제 모습이, 무엇보다도, 이렇게 라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경이를 괴롭게 하였다. 그는 제 앞에 놓인 가장 큰 장벽인 '대학 진학'이 그 후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늘따라 그치지 않는 비에 종일 이불 속에 갇혀있던 경이는 늦은 저녁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가, 눈 감으렴."


  익숙한 목소리가 음악 소리를 뚫고 흘러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인 경이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이불을 걷어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어머니가 곧 문을 열고 들어와 무어라 말했다. 입 모양을 읽지 못 해 이어폰을 빼자 방 안에는 경이의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어느새 비가 그쳤는지 창밖은 고요했다. 경이는 거친 숨을 애써 삼키며 아무 일도 없었다 말하고는 어머니를 방에서 내보냈다. 그리고 방금 들은 그 목소리를 되짚어보았다. 목소리뿐 아니라 그것이 전한 내용도 분명 들어본 적 있는 것이었다. 가래 낀 듯 거칠고 낮은, 흐릿하게 들릴 듯 말 듯 한... 빗소리에 가려져 더욱 알아듣기 어려웠던.


빗소리.


경이는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내며 기억을 되살리려 애썼다.


빗소리.

눈을 감으라는 여자의 목소리.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던가.


"언니도 넘어졌어요?"


문득 떠오른 말이었다. 아마 경이가 했을, 아니, 분명히 경이가 했던 말.

언니도 넘어졌어요, 언니도...

눈을 감고 중얼거리던 경이의 숨소리가 차차 고르게 변했다.



  눈을 뜨자마자 경이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문이었다. 하늘은 맑고 따스한 햇살이 방 안까지 들어왔으나 주말이라 학교에 갈 수 없는 경이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힘없이 방문을 열고 거실에 나서니 어머니가 복숭아를 썰고 있었다. 


"일어났어? 딸, 복숭아가 참 달다. 먹어봐."


경이는 어머니가 내민 복숭아 조각을 입으로 받아먹고 우물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나 어릴 때 친한 언니 있었어? 이웃이나, 뭐... 엄마 아는 분 딸이나..."

"언니? 글쎄, 너 유치원 다닐 적에 앞집 유연이가 가끔 돌봐주긴 했지."


  유연 언니.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그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무슨 일 있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경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복숭아 한 조각을 집어 들며 살짝 웃어 보이고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침대에 풀썩 앉아 복숭아를 먹으며 눈을 굴리다가, 제 다리에 시선을 두었다. 한창 뛰어놀던 때에 자주 넘어지는 바람에 생긴 자잘한 흉터들을 찬찬히 관찰해보았다.


"언니도 넘어졌어요?"


스쳐 지나가는 어린 목소리가 한 조각의 기억이 되어 머릿속에 그려졌다.


상처투성이의 팔다리.

그것은 넘어져서 생긴 타박상이 아니었다.


  경이는 뒤통수로부터 시작되어 정수리까지 울리는 두통에 잠시 눈을 감았다. 굵은 빗줄기가 닫힌 눈꺼풀을 관통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마구 쏟아지는 장대비가 경이의 각막을 긁어댔다. 경이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뜨고는 책상 앞에 앉았다. 학교에 자주 나가지 못 하는 장마철에는 진도를 따라잡기 위해 제힘으로 새로운 것을 익혀야 했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대여섯 가지 참고서와 문제집을 훑고 나니 시계는 어느새 저녁을 알리고 있었다.


  일기 예보에 의하면 다행히도 내일 아침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단다. 이 기회를 놓치기 싫었던 경이는 저녁을 먹기 전에 잠시 산책을 다녀오기 위해 급히 슬리퍼를 꿰신었다. 그런 경이의 뒷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걱정이 잔뜩 서려있었지만, 경이는 알지 못 했다. 그는 이어폰을 끼고 익숙한 음악을 들으며 느긋한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돌아다닐지, 큰 길가로 나가 들어오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지 고민하던 경이는, 문득 한강을 떠올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그의 두 발은 이미 한강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걷다 보니 거실의 큰 창에서 내려다보던 대교에 이르렀다.


  선선한 강바람은 경이의 하얀 피부에 돋은 보드라운 솜털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기분이 들뜬 경이는 춤을 추듯 가볍게 뛰어오르며 다리를 건넜다. 대교의 한가운데에 가까워질 즈음, 왼쪽 발로 바닥을 밀어내며 몸을 공중에 띄우던 그때, 무언가 자신을 통과하여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경이는 급히 두 발을 땅에 딛고 반동에 앞으로 약간 고꾸라졌다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난간을 꼭 쥐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뒤늦게 숨이 가빠오자 경이는 이것이 쉬지 않고 달려서인지, 하늘이 점점 흐려져서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잿빛으로 덮여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거친 숨을 내뱉다가 고개를 내려 정면을 보았다. 그리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두 눈의 동공이 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깨닫기 무섭게 경이는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언니."


키도 크고 머리카락도 기다란 언니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니도 넘어졌어요?"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넘어져서 이렇게 다친 거예요?"


"응, 많이 넘어졌어."


언니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안 아파요?"


"이제는 안 아파."


감기에 걸려서인지 언니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언니는 왜 집에 안 가요?"


"......"


"추워 보여요."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언니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너는 왜 여기 있니? 길을 잃었니?"


"아니요. 저기가 우리 집이에요. 비 그치면 달팽이 보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그렇구나. 재밌겠다."


"재밌어요. 언니도 같이 볼래요?"


"아니야, 나는 못 가. 미안해."


언니는 난간을 더 세게 쥐고 놓지를 않았다.


"왜요? 저쪽 풀숲에 달팽이 엄청 많아요. 엄청 귀여운데."


"나도... 갈 곳이 있어. 너무 아쉽다."


"아쉽다..."


나는 언니의 손가락을 잡아보았다.

언니도 손톱을 뜯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나처럼.


"그럼 오늘 달팽이 잡아서 다음에 언니한테 보여줄게요."


언니는 또 아무 말이 없었다.

대신 내 손을 감싸 쥐더니 쭈그려 앉아 나와 눈을 맞추었다.


"오늘 꼭 재미나게 놀고, 집에 가서 맛있는 간식도 먹고, 푹 자고..."


"언니, 왜 울어요?"



언니의 코끝이 빨개져서 마치 루돌프 같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반짝이는 것이 참 예뻤다.


"...언니는 이제 그런 거 못 해."


"왜요?"


언니는 내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언니는 그럴 자격이 없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언니가 살짝 웃었다.

그런데 하나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아가,"


언니가 눈을 감고 말했다.


"눈 감으렴."


나는 언니를 따라, 언니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빗소리가 더 잘 들리는 것 같았다.

우비에 후두두 부딪는 빗방울을 느끼던 차에,


강물이 깊이 밀려들어 가며 출렁이는 소리가



  바닥에 누운 경이의 두 눈에는 흐린 하늘이 가득 비쳐 보였다. 경이는 급히 일어나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물은 아주 고요하고 또 평온하게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두 눈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강물에 섞여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천둥소리가 도시를 울린다. 하늘은 그새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경이는 눈물을 훔치며 집을 향해 달렸다.


언니, 언니의 말을 이제는 알 것도 같아요.

언니, 미안해요.

무엇이 그리 미안하냐 묻는다면 사실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미안해요.


미안해요.


경이는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진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내달렸다.


아가,

눈 감으렴.


어둠 속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코끝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비명은 하늘이 울부짖자 그 속에 섞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날 저녁 서울에는 유독 거친 소낙비가 내렸다.






짧은 글을 씁니다.

작짐비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