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결계가 흔들린 것을 느꼈을 때 위무선은 그닥 큰 변고라 여기지 않았더랬다. 세월이 얼만큼 흐르고 역사가 얼만큼 개찬改竄된단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은 세상에 넘쳐났고 그 중의 몇몇은 인세人世에 사몰되어 적막한 그의 삶에 오히려 영세零細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으므로.

그러니 도리어 위무선의 호기심을 끌어낸 것은 결계가 흔들린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작은 소동물이 한 입 떼어먹은 듯 짤막하니 끊긴 침입자의 소심한 행적이었다. 십수 겹으로 둘러친 금줄 중 기별이 온 것은 가장 바깥의 것이 다였다. 시커먼 사기邪氣에 먹먹하니 가려 곱겐 보이지 않는 하늘로도 얼추 정오를 넘겼다 싶을 때 게으르게 일어난 위무선은 물 한 모금 마시고 죽 한 술 뜨고, 그리고 술만 댓병 비우며 노상 뒹굴다 어스름히 물러간 졸음이 다시 찾아올 무렵에야 구겨진 옷자락 탁 털어 펼치며 슬슬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호기롭게 처들어올 때는 언제고 이리 굼떠서야 언제쯤 그 귀한 얼굴 보여줄런지.


설산雪山의 겨울은 혹독하여 찬바람에 살이 에는 것 같아도 진정 쇠붙이에 생살이 꿰뚫린 과거를 생각하면 이것쯤이야, 하고 퍽 우스이 여겨지는 것이다. 두 겹 옷 너머의 살이 얼음처럼 희게 얼어붙어 파르게 깎이든 말든 위무선은 허청대는 발걸음으로도 잘도 비탈길을 내려갔다. 하여 이쯤일텐데 싶어 세찬 눈바람에 반개한 눈으로 이러저리 둘러보다보면, 아. 이것 참.

평소 성정에 대면 모른 척 발끝으로 톡 걷어차도 모자랄만치 당황스런 일이었으나 그 상대가 이제 겨우 지학志學을 넘겼으려나 싶은 어린아이여서야 뺨 쿡 찔러 놀릴 맘도 들지 않았다. 아마도 두 무릎 모아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었을 작은 몸은 바람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혹은 추위를 이기지 못한 것인지 모로 넘어가 눈밭에 반쯤 묻혀있었다. 

이마 어림께에 단정하게 묶인 비단도, 몸을 가린 옷자락도, 그리고 그 아래로 드러난 손과 목덜미도 저것이 백설白雪인지 사람 겉살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만큼 그저 희고 희었다. 술에 취해 혼몽하고 제 매서운 계절이다 천하에 외치듯 거센 설풍에 삼분지 이쯤 얼어붙은 머리로 슬슬 뒷걸음치며 보아도 온통 검고 붉은 저와는 딱 반대되는 양상의 사람인지라. 

이를 어찌하나. 위무선은 그 앞에 동면할 자릴 잃은 토끼 흉내내듯 쪼그려 앉아 아이를 한참 살폈다. 그 애가 걸치고 가진 것 중 색을 띈 것은 검은 머리카락 하나밖에 없었다. 암만 이 땅이 이릉夷陵이라 불리며 옛부터 온갖 시체 묻힌 곳이라 한들 일부러 예까지 죽으러 오는 이는 처음 보았다. 물론 위무선이 제 손으로 찢어죽인 이는 차고도 넘치나, 그들은 살고자 왔으나 이기지 못해 죽은 것이지 자살을 희망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굳이 날 죽이겠다 온 것부터가 제 스스로 죽고자 함이지.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 바람마냥 킥킥대며 웃던 위무선은 다시 짐짓 미간을 좁혀 고민하는 태를 내었고 검은 목화 안 추위에 곱아든 발가락에 점차 감각이 없어지는 것을 느끼곤 홀로 야트막히 심각해졌다. 이는 아직은 죽지 않았으나 곧 죽을 이라. 그저 걸리는 것은 어리석은 저이의 나이 뿐이었다.

많아보았자 지학, 그보다 적으면 열 두엇쯤. 차려입은 옷태 단정하고 바닥에 얼굴 처박아 드러난 것은 목과 귀끝, 오른손 반절이 전부라 해도 아마 날 적부터 품었을 아정雅正한 분위기가 연신 제 주장을 해대었다. 나 좋은 집에서 곱게 자란 귀한 공자님이오, 하고. 허나 그 앞에 나앉은 위무선은 날 때부터 하인의 아들이었고 생애 또한 눈물 줄기가 굽이굽이 휘돌아칠 비극이오니 어찌 이리 맞아 들어가는 구석이 없는지.

실로 안타깝게도 위무선은 세간에 떨친 악명에 비하자면 몹시 소박하고 반듯한 성품의 인물이었고 절 죽이겠다 달려든 이는 웃는 낯으로 오마분시를 해 시체조차 거두는 것을 허락치 않고 난장강의 시귀屍鬼로 만들 위인이었으나 아무런 연고 없는 어린 아이가 설산에서 외로이 죽어가는 꼴은 방치하지 못할 소심한 사내였다. 

반선半仙의 경지에 든 게 언젯적인데 왜 나 아직 추위를 느끼는지. 매 해마다 의문에 고갯짓 갸웃하면서도 옷 제대로 챙겨입는 일엔 생각이 미치지 못한 위무선은 손등 아래로 훌훌 흘러내린 소맷자락 대충 걷어올리고 아이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앉혔다. 그 바람에 아이의 몸 위에 하루낮의 절반을 방해없이 쌓였던 눈더미가 와르르 쏟아져 숫제 눈사람 꼴이 된 위무선은 반은 어이없음에, 나머지 반은 제 우스운 꼴에 비실비슬 헛웃음 베어물며 아이를 양껏 들어 업었다.

시체 업는 일에야 도가 텄는데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이리 업어보는 건 또 생소한 경험이라 괜히 낡은 신발창 아래 뽀득뽀득 부서지는 흰 눈만 탁탁 걷어찼다. 술기운은 진작에 깨버렸고 등골을 내달리는 한기에 몇 번이고 목덜미를 움츠려 파르르 떨면서도 위무선은 아이를 귀찮다 내던지지 않았다. 호기심에 들떠 내려올 땐 홀가분히 죽죽 편했던 것 같은데 도로 기어올라가려니 왜 이리 까마득한지.




-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위무선은, 그래서 내 어찌하란 말인가 멍한 낯색으로 오히려 자신보다 평온해보이는 아이의 얼굴을 두 어 번 훔쳐보았다. 그리고선 한단 말이 '나도 그래' 하는 어설픈 동조였으니 정신 똑바로 박힌 어른이 이 환장할 대화를 들었다면 대번에 위무선의 등짝을 내리쳤음이라.

족히 일주일은 앓지 않을까 싶었던 아이는 단 이틀만에 말짱한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초반, 집주인이자 은인恩人인 저를 몰라보고 고운 아미 살풋 찌푸렸다 애써 펴는 꼴을 보고 오독오독 씹던 생쌀 한 주먹을 탁 토해내며 마구 웃던 위무선은 우선은 일이 이리 된 연유부터 알고자 하였고, 깨어난 이래 삼일밤낮을 내내 입 다물고 묵언수행 하던 아이는 네 아직 어려 원怨은 겪지 못했다 해도 은恩에 답할 바는 알지 않느냐 묻는 말에 마침내 입을 열었더랬다. 물론 그 대답이 위무선의 성에 차는지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앉기는 하였다만.

위무선은 얼마든지 그 뒷태에 대고 부모 잃는 아이가 세상에 한 둘이 아닌데 어이하여 하나의 상실로 죽을 맘을 먹었냐 타박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때로는 단 하나의 사람이 삼천의 세계를 합친 것보다 더 무거울 수 있단 것을 옛적부터 깨우쳤기에.

말을 잃었으니 같은 공간에 사람이 둘이어도 오고 갈 것이 있을리 만무했다. 저장할 곳이 마땅치 않아 맨 땅에 묻어두었던 생쌀은 혹한에 땡땡히 얼어 이따금 내가 쌀을 먹는 것인지 모래알을 모르고 씹는 것인지 끊임없이 흘끔거리게 만들었다. 그러다 문득, 저는 이리 먹어도 죽지 못해 멋대로 산다 쳐도 저 애는 어쩔꼬 싶어지는 것이다. 허면서도 위무선은 또한 넉넉히 억울해졌다. 저이는 날 뒤에 두고도 번민하는 기색이 영 없는데 왜 나만 전전긍긍 걱정이 꼬리를 무나 하여.

그래도 아직 어린데 뭘 어쩌겠느냐. 이 나간 술잔에 주먹 쥐었던 쌀을 우르르 쏟아놓고 위무선은 또 다리에 휘감기는 옷자락 대충 끌어올려가며 휘적휘적 동굴 밖으로 걸음했다. 어설프게 입구를 가려둔 거적은 다 낡아빠져 바람이 숭숭이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다 여겼다. 다행히 누구 하나 쳐서 죽일 듯 몰아치던 눈발은 말끔히 걷혔으니 마당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살림을 뒤적거리는 것에 적어도 하나의 문제는 사라진 셈이었다.

그나마 민가라고 우길 수 있는 묵은 집의 부엌에 들어가 잿더미를 뒤적거리다 쓸만한 장작 하나 남지 않은 것을 깨닫곤 손가락 탁 튕겨 제 가진 능력껏 불을 붙였다. 새파랗게 타오르는 불꽃은 모르는 이 보았다면 도깨비불이라 도망칠테고 아는 이 보았다면 네 어찌 사이한 불로 요리할 생각을 다 했느냐 칼을 뽑을 음화陰火였다. 어리다곤 하나 선문세가의 공자일 것이 뻔한 아이도 이 꼴을 면전에서 보았다면 진저리를 쳤겠지만 스스로 동굴 안에 틀어박힌 주제에 뭘 불만으로 삼겠는가. 위무선은 재량껏 아이의 심정을 짐작해 가며 히죽 웃었다. 어째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이토록 헛웃음만 찰 일이 는다.

정화한 물에 생쌀 붓고 뚜껑 닫아 끓이다 몇 번 휘적이면 그게 죽이지 뭐겠어. 나태하게 끓인 죽사발 하나를 들고 도로 동굴로 걸어들어가는 발걸음은 또다시 추위에 얼어 달달 떨었다. 나 네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들은 척도 않고 싶다 눈 꼭 감고 벽 보고 꿇어앉았던 아이는 옆에 그릇 들고 선 위무선이 무심코 중얼거린 춥다 소리에 슬며시 긴 속눈썹을 들어올려 눈을 마주했다.


"선인仙人도 추위를 느낍니까."


끝이 올라가지 않은 문장이라도 필령 저것은 질문이라 직감한 위무선은 본데없는 장난기가 들어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어김없이 끄트머리가 깨진 그릇을 손수 쥐여주며 질문을 질문으로 되돌려주었다. 선인이 무엇이기에? 마주 잡은 손끝이 움찔 떨리는 것은 결코 놓칠 수가 없었다. 아직 어려 그런가 감정을 다루는 것이 서툴구나. 답하지 않고 아래로 내리깐 눈동자는 색이 옅어 유리알처럼 맑고 반짝였으나 위무선은 도저히 그것을 두고 곱다 칭찬할 수가 없었다. 무슨 애가 이다지도 시린 눈을 가졌담. 그런 혀끌음은 속으로만 삼켰다.


"공자, 말씀해 보시지요. 선인이 무엇이기에?"


그러면서 자못 짖궃게 높임말로 재촉하자 꿇어 앉은 자리에서 또 사분의 일을 옆으로 틀어앉아 저를 외면한 아이가 두 손으로 죽그릇을 들어 입가에 받쳤다. 내 이것을 먹는 한이 있어도 그 말엔 답하지 않으리라 결연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흰구름처럼 깨끗하고 희었을 옷자락엔 생전 연이 없었을 고생에 군데군데 얼룩이 졌는데 똑같이 고생한 옷주인은 하염없이 바르고 단정하기만 했다.

밍밍하게 아무 맛도 없을 죽을 투정도 않고 묵묵히 삼켜내는 게 귀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여 멋대로 그 까만 머리카락을 한 줌 쥐어 길게 쓸어내린 위무선이 새차게 손을 쳐내는 손길에 제 손등이 다치기 전 훌쩍 몸을 물렸다. 그것 참, 어리고 귀여우면서 사납기도 하여라. 좀전까지 시리다 생각했던 눈동자엔 어느새 새파래보일 정도의 분노가 그득찼다.

자고 일어난 후 다시 묶지 않아 어설프게 틀어진 허리끈이 금방이라도 아래로 뚝 미끄러질 것 같아 설렁설렁 옷자락을 여미며 위무선은 그 매서운 앙탈에 대고 선인이 무엇이기에, 혼잣말 중얼거리다 돌연 가늘게 웃었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말하길 나는 사마외도邪魔外道의 창시자요, 마도조사魔道祖師 라 하는데 너는 어찌 날 두고 선인을 운운하는지. 그러나 제 서러운 속 이해 못할 어린애에게 한기 어린 말을 던질 정도로 정신머리 없는 것은 아니라, 그냥 반쪽짜리라 그렇다 눈높이에 맞춘 설명만 친절히 들려주었다.

"내 비록 본의 아니게 인세를 떠나 자연과 벗하며 살게 되었으나 여전히 세속世俗에 구애받고 질병에 고통받으니, 반선半仙이라 부르는 것이 옳지."


그리고 이름 모를 아이야.


다음 말을 하기 직전, 위무선은 이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을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그러나 또한 참을 수 없을만큼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기어이 세 치 혀 끝을 가볍게 움직였으니.


"나는 완전完全이 되지 못한 반쪽인 만큼,"


네 당연히 날 죽일 수도 있단다.






그냥 나도 죽을 수 있다 말할 것을 그랬나. 새벽 아득히 깊어 슬금 눈두덩이를 무겁게 짓누르는 졸음에 굴복해 아무렇게나 동굴 바닥에 누워 몸을 말며 위무선은 황망히 지나간 제 발언을 곱씹었다. 그러면서 아이만 들쳐업고 올라가려다 갑자기 든 생각에 발로 땅을 헤치고 끄집어냈던 빙하氷河처럼 새하얀 선검을 떠올렸다. 이름이 무엇일까. 아이의 이름을 묻는지 검의 이름을 묻는지 제 생각인데도 닿은 곳을 짐작키가 어려웠다.

그저, 기왕이면 그 검으론 날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소원했다. 그토록 투명하고 맑은 검에 가슴팍을 찔리어 죽게 된다면, 이 삶, 마지막조차 너무 시릴 것 같아서.


너 나를 죽이려거든 차라리 그 작고 따뜻한 손으로 내 목을 졸라주련.

나 역시 남은 미련이랄 것이 적은 삶이라 어디든 푹 꼬구라져 눈 감고 싶을 때가 많으니.


그런 생각을 하다 까무룩 잠든 날이었다. 연중 한기를 잃지 않는 바닥은 눈물조차 얼도록 차고 하필 대강 누운 자리가 입구 근처라 내뱉은 숨결이 고스란히 희게 번지는 밤. 죽는 생각을 하며 잠든 위무선은 다음날 아마도 사들고 올 땐 이불이라 쓰임받았을 천쪼가리가 제 몸을 어설프게 가리고 드리운 것에 그만 웃음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이야, 네 어쩌자고 이러니.

한 번 죽을 마음을 먹었던 네가 내 맘 모를 바도 아닐텐데.


그러면서도 사는 이 혼자라 아마 이불도 하나밖에 없었을텐데 간밤 너는 어떻게 잠들었나, 그께로 굴러가는 제 생각이 지독하게 우습고 바보같아 한참 폭소했다. 나야말로 무얼 고민하나. 어차피 곧 떠날 이인데.





그러나 설경雪景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고되어 내 집 터를 잘못 잡았다 생전 않던 자책을 해가며 집주인이 몸소 업어 온 이 어린 불청객不請客은, 대체 어찌 된 일인지 본래 하룻밤만 뉘여주고마 했던 생각과는 달리 뜻밖의 객客이 되어 난장강 복마동의 두 번째 주민이 되고야 말았다.

사계四季의 끝자락이 광포히 몰아치던 십이월 중순의 일이었다.







信誓旦旦 : 나 진실로 맹세하노니.


한자어 병기는 그냥 마음에 드는 단어에 씁니다.


잔불의 기사 / 마도조사 (프로필 사진 - 배추님)

Roof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