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영은수, 황시목


어린 은수의 작은 어깨를 우악스레 잡아 짓누르는 손은 두꺼웠고, 뼈마디가 굵고, 축축한 흙 냄새가 났다. 버둥거리는 몸통을 억지로 붙잡고 밧줄로 묶는 또 다른 사람의 손은 얇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입에 물린 더러운 천 뭉터기에서 퀘퀘한 석유 쩐내를 맡으며, 어린 은수는 버둥거림을 포기하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인질범들이 욕설을 뱉으며 아빠와 전화로 협상하는 소리, 캄캄한 이민가방 안에서 듣던 드륵 굴러가는 바퀴 소리, 옅은 싸이렌 소리와 탕! 총소리, 그 후 긴 정적. 

"흡..."

그리고 이어서 덮쳐오는 구역감. 착실하게도 정해진 순서대로 은수를 할퀴고 나야 끝이 난다. 은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참을 소리 죽여 속을 토해냈다. 겨우 폐부를 비집고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가 느껴질 때면 거의 끝나가는 것이다. 입가에 늘어진 타액을 손등으로 걷어내고 세면대에 물을 틀어 흘려 보낸다. 한동안 잠잠해서 이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어릴적 겪었던 극한의 공포는 이렇게 방심하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와 은수를 괴롭혔다.

컵에 물을 따르고 주방 찬장을 열어 구석으로 손을 넣었다. 없다. 더 깊이 손을 넣고 아무리 더듬어봐도 없다. 분명 여기 뒀는데-

"이거 찾니."

자고 있어야 할 시목이 굳은 얼굴로 흰색 약통을 들어보인다. Zolpidem, 수면유도제. 

"아..."

"계속 말했잖아. 왜 자꾸 약에 의지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게 근본적인 해결책이야."

"병원에 가도 어차피 똑같은 약 처방해 줄 거에요."

대답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시목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약통을 쥐려 한다. 시목은 단호하게 몸을 뒤로 뺐다. 

"언제까지 이렇게 나약하게 회피만 할거야, 영은수."

"......"

"상담센터 예약 해둘테니 꼭 가."

"근데 선배, 나는 진짜 괜찮아요. 빈도수도 훨씬 줄었고, 또, 진짜 이젠 그냥 악몽 수준이에요. 안 가도 돼요, 병원은."

"저번에도 그렇게 얘기했는데. 결과가 이거니."

시목이 흔드는 약통을 잡아채고 싶다. 그냥 빨리 한 알 먹고 잠들고 싶어. 까드득, 엄지손톱을 깨무는 소리에 시목은 눈살을 찌푸린다.

"손톱, 그만."

"예약 안 해줘도 돼요, 선배. 나 병원이든 상담이든 진짜 못 하겠어."

"왜?"

"가면 뻔하다니까요. 자꾸... 내 머리를 쥐어 짜내고 기억하게 만들어서 입 밖으로 꺼내야 하는데, 그게 지금처럼 자다가 토하는 것보다 훨씬 괴로워요."

"상처를 직면해야 낫는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나는 지금도 괜찮은데, 왜 억지로 자꾸 안 좋은 기억을 끄집어내야 해요? 이젠 진짜 예전보다 많이 나았는데-"

"내가 안 괜찮아. 네가 망가져가는 거 싫어."

시목이 다가와 은수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말로는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이면서 손 끝에는 다정을 붙인다. 한 팔을 벌리자 서서히 은수가 그 안으로 들어간다.

"치료 받을거지? ... 대답."

끄덕이는 은수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시목의 단호함이 거역할 수 없는 성문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지금처럼. 은수의 끄덕임을 내려다보던 시목이 그제서야 만족스럽게 긴 숨을 뱉으며 제 품에 더 세게 은수를 가둔다. 거역 못할 성문의 무게가 짓눌러온다. 시목의 체향을 느끼며 안식을 찾으려 숨을 깊게 들이마셔 보지만 희미한 흔적도 거의 없다. 시목은 은수를 조심스럽게 침대까지 이끌었다. 모로 누운 은수가 눈을 감는 것을 확인 한 뒤 어깨까지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자자, 은수야. 

버둥거림을 포기하던 어린 은수처럼 눈물만 줄줄 흐른다. 시목은 말 없이 손으로 눈가를 훔쳐주었다. 훌쩍임이 어느 순간 멎고 은수의 감은 눈 사이 힘이 스르르 풀릴 때까지 시목은 은수를 도닥였다. 






08. 우장훈


"와, 돌아삐겠네. 무슨 심리치료 염병인데요? 예?!"

"그러게 누가 대낮에 쌈박질 하고 다니랬냐? 얼굴 팔릴 짓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해도, 쯧."

"내도 당한거라니까요? 다짜고짜 세명이 덤비는데 그라믄 뭐 처맞고 있을까요?"

"야 시끄러. 현행으로 잡혀와서 빼박이야. 유치장에 며칠간 안 처넣고 그걸로 막은게 고마운 줄 알아."

시커먼 남자 둘이서 백화점 화장실 앞 거울에 붙어 수십분째 투닥거린다. 사람이 들어오면 잠깐 대화를 멈췄다가, 나가면 다시 이어졌다가. 장훈은 거울을 보며 아직도 안쪽 상처가 아물지 않은 입술을 쭈욱 늘어트렸다가 아 따가, 중얼거리고 다시 제자리로 조심스레 돌려놨다. 그래도 눈에 든 멍은 이제 붓기가 좀 빠져서 봐줄 만 하다. 색깔이 푸르스름하게 남아있어서 문제지. 

생각할수록 안상구 이 새끼는 싸이코가 틀림없다. 쥐새끼 제보자를 만나래서 나갔더니, 장훈을 기다리는 것은 함정이었다. 신뢰할만 한지, 실력은 어떤지를 살펴보려고 기획된 테스트. 꼭 그렇게 요란벅적하게 확인을 했어야 했나. 연행된 후 원철이 적절히 끼어들어 단순 쌍방폭행에 상호 합의 완료 한 점 어쩌구를 이유로 대충 '폭력 성향 교정을 위한 심리치료 5회 이수'로 틀어막아줬다. 그 대충 이라는게 문제다. 5번 씩이나. 사실 그냥 뒀으면 상구가 어떻게든 해결해 줬을 텐데. 국장님이 괜히 나서서 일이 귀찮아졌다고 지적 하려다가 그냥 참았다. 

"그래서 안상구는 너 맘에 든데? 애를 완전 묵사발로 만들어놨네."

"하이고 내가 더 많이 때렸그든요. 뭐, 서서히 중요한거 맡길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실실 웃으면서 러시아 손님 같이 마중 나가자 카데요. 뱀같은 섀끼, 여까지 오는데 딱 3년 걸맀네. 날짜도 알아냈습니다. 28일. 밤10시부터 대기하고요."

"그래. 수고했다. 나 너무 자리 오래 비웠다. 치료 꼬박꼬박 잘 받고."

"아이 진짜, 거 취소 안됩니까?"

"어, 안 돼. 이번 기회에 너 그런데라도 가서 마음 좀 편하게 쉬라고."

저 양반 진짜 의도가 그거였나, 장훈은 밖으로 나가는 원철의 뒷모습에 대고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직 잘 모르시네. 그런데 가서 나도 모르게 저 속에 있는 울분과 서러움까지 전부 다 끄집어 내기라도 하면 무슨 말이 어떻게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당장 내일이다. 장훈은 짧은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이, 귀찮그로.




이 작은 나라에 정신적으로 쉴 곳이 필요한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슬픈 일이다. 화요일 오후 2시의 심리상담센터 건물 엘리베이터는 만원이었다. 장훈은 정장 재킷을 벗어 들고 셔츠 단추 하나를 더 끌렀다. 장마철 찜통에도 양복을 입어야 하는 직업은 최악이다. 깡패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차려 입냐, 툴툴거리면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퍽, 어깨를 치고 뒤에서 급하게 뛰쳐나가는 여자. 쌍욕이 절로 나온다. 

그마이 급하게 뛰쳐나가더니 멀리 가도 몬했네. 

주차장에서 차 문을 열려고 하는데 옆쪽에 아까 그 여자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우웩 웩 억억 소리를 내면서. 리얼한 구역질 소리는 오랜만이라 비위가 팍 상했다. 하필 내 차 옆에서, 쯧. 장훈의 미간과 눈꼬리가 동시에 구겨졌다. 구토 소리는 이내 끅끅거리는 소리로 바꼈다. 숨을 못 쉬는 것 같다. 등이라도 두드려 줘야하나?

"거, 와그라는데요."

에이씨, 이놈의 오지랖. 어쨌든 차는 빼야하니까. 두꺼운 손으로 살살 좁은 등을 두드려주었다. 여자의 밭은 호흡 끝에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하이고 어제 과음을 하셨나. 술이 덜 깼으요?"

"흑, 그런거, 크흡, 아니에요!"

성깔 부릴 정신은 있네. 장훈은 손을 거두고 쪼그려앉은 무릎을 폈다. 이제 괜찮겠지. 근데 이번에는 대성통곡을 한다.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손도 옷도 온통 오물투성이를 하고서는.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뒷통수가 안쓰러웠다. 이번에는 마주 보고 다시 쪼그려 앉았다. 쿨쩍이던 콧물이 가늘게 늘어지는 꼴을 봤다. 우는 여인을 달래줄 손수건 따위를 가지고 다니는 신사는 아니다. 뭐라도 줘야하나 망설이다가 차 문을 열고 휴지를 꺼내어 손에 쥐어줬다. 기다렸다는듯 받아들더니 휴지를 다 쓸 때까지 야무지게 눈과 코를 닦아대는 모습에 픽 웃음이 났다. 이목구비가 어딘지 낯이 익다.

"어,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멘트 한번 진부하네. 그렇지만 고개를 들어 맞은편 남자를 보니 진짜 딱 저 문장 말고는 이 상황을 적절히 설명할 말이 없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

지난주 식당에서 신나게 맞다가 때리다가 난동부리던 그 남자. 






09. 우장훈, 영은수


장마철의 하늘이 또 변덕을 부렸다. 오전 내 오락가락 하던 비는 그치고 한 줌의 해를 비추었다. 제 양복 재킷을 걸치고 편의점 간이테이블에 앉은 여자에게 포카리스웨트를 내밀었다. 여자의 목에 걸린 공무원증으로 눈길이 갔다. 영은수. 성이 특이하네.

"감사합니다."

단숨에 절반 정도를 들이마시고 다시 침묵. 장훈도 뒤늦게 캔커피를 따고 목을 축였다.

"저... 옷도 빌려주셔서 고마워요.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예에. 그라세요."

"근데 괜찮으세요? 그 때 많이 맞으시던데."

아직도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눈가에 손이 저절로 올라갔다.

"허, 지금은 그쪽이 더 안 괜찮아 비는데. 그라고 내 별로 안 맞았어요. 때린게 더 많구만."

"아아."

"진짠데."

"뭐 하시는 분이세요?"

"나요?"

에이씨. 아까 상담실에서도 그렇고, 오늘따라 제일 싫어하는 질문을 여러 번 듣는다.

"그냥 놉니다. 백수요."

"아닌 것 같은데."

"영은수씨는, 그럼, 공무원?"

"아. 뭐, 비슷해요."

슬쩍 출입증을 뒤집어보지만 이미 늦었다. 말아 깨무는 입술에 여유가 생긴 것 같아 장훈은 분위기도 바꿀 겸 화제를 돌렸다.

"인제 술 좀 깹니까? 와 아까는 진짜 놀랬네."

"아, 술 먹고 그런거 아니라니까요."

"맞는 것 같은데."

"아니... 트라우마가 있어서, 가끔 그래요. 상담하다가 또 안 좋은 기억이 나와서. 근데 그런거 치료 받으러 오는 곳이잖아요, 여기."

동그란 어깨가 다시 처진다. 말을 잘 못 꺼낸 것 같다. 괜히 애꿎은 미간을 긁적였다.

"아... 그... 그래 힘든 기억인데 상담 받는다고 또 떠올리고 할라믄 괴롭겠네요. 내도 아까 받아 봤는데, 계속 끈질기게 구체적으로 질문을 퍼붓더라고. 좀 별로더라고요. 이럴거면 그냥 묻어두고 생각 안고 사는게 최선 아인가 싶고. 꼭 여기 와서 힘들게 털어놔봐야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

맥이 탁 풀린다. 내리깐 눈을 들어 마주한 장훈의 얼굴은 퍽 진지했다. 오늘 처음 알게 된 사람이 더러워진 옷을 가리라고 기꺼이 제 옷을 빌려주고, 등도 두드려주고, 듣고 싶은 말도 해준다. 의도치 않게 못난 꼴을 지나치게 많이 보여준 것 같다. 혹은 내가 너무 안일하게 내밀한 부분까지 드러냈거나. 이쯤에서 그만해야겠다.

"저는 금요일에 다시 오는데, 언제 오세요? 옷 돌려드려야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은수를 따라 일어났다. 여전히 시선은 고정한 채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비뚜름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와 상반된 분위기로 순식간에 전환이 된다. 춥고 배고픔에 바들거리던 새끼 고양이가 상황이 좀 나아지니 다시 잔뜩 솜털을 세우며 갸르릉 거리는 행세랄까. 이게 이 여자의 평소 모습이겠지. 

왜 난리통에 스쳐봤을 뿐인 은수를 기억하는지 이제서야 떠올랐다. 저 눈빛. 경계심, 폭력을 쓰는 한심한 모습에 대한 경멸, 그리고 약간의 호기심. 

'경계심'과 '경멸' 부분이 저와 같아서 마음에 든다. 내가 봐도 내 자신이 낯설고 혐오로 다가오니까. 피식 자조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약간의 호기심'에 희망을 걸고 싶다.

재미있는 여자네.



은수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2부 검사. 떳떳하게 명함을 내미는 손이 단정했다. 장훈이 명함을 받아들자 까딱, 자기도 달라고 재촉하는 손짓마저 여유 넘친다. 씨발거, 인제는 명함 쪼가리도 없어가 서럽네. 속이 뒤틀린다. 

"내는 명함이 없어서."

굳은살 가득한 투박한 손으로 빈 은수의 손을 쥐고 명함 대신 악수나 건넸다. 

"아... 그럼 제 번호로 연락처 남겨주세요."

"금요일에 봐요."

뒤돌아가는 은수의 등에 장훈의 재킷이 루즈하게 걸려 있었다. 끈적한 여름 바람에 조금씩 펄럭이기도 했다. 담배를 꺼내 물고 기어이 해를 마주보며 눈을 찌푸렸다. 회색 구름 조각 사이에 파묻혀 있어도 해는 해니까. 오랜만에 쳐다본 하늘이 맑았으면 좋겠는데.




[ㅇ]

문자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다 어이 없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ㅇ'이 뭔가 한참 생각했네. 아까 본 그 사람이겠지. 그러고보니 이름을 안 물어봤다. 번호 저장 버튼을 누르고 한참을 만지작거린다. 'ㅇ'을 쳤다가, 다시 지우고 '깡패'로 저장했다. 

"접수 되셨고요, 세탁 다 되면 댁으로 가져다 드릴게요. 3동 708호, 맞으시죠?"

"제가 그냥 받으러 올게요. 배달 말구요. 문자연락 주세요. 꼭이요."

은수가 빌려 걸친 재킷에서는 은은한 우드향이 베어 있었다. 아직 여름 초입인데, 묵직하고 안온한 가을 느낌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코 끝에 걸렸다. 잔향이 진하다. 거의 향을 남기지 않는 시목의 재킷과는 전혀 다른. 왜 시목과 비교를 하지. 시목이 이 남자 양복 재킷의 정체를 알면 안될 것 같다. 정확히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싸늘하게 구겨질 시목의 미간을 보는 것이 싫다. 

예전에는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시목에게 조잘거리는게 낙이었는데. 이젠 서서히 말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 땐 풋풋한 사랑이었고, 지금은 좀 더 무게 있는 사랑이니까. 이제 결혼하면 평생 함께일텐데 시간도 여유도 많으니 찬찬히 오픈하면 되겠지. 낯선 이의 우연한 호의에 대해 길게 자기 변명의 논리를 세우는 것도 우습다.



[죄송해요 오늘은 못 돌려드리겠어요. 다음에 연락드릴게요.]

금요일. 문자를 확인한 장훈은 콧등을 슬쩍 긁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상담센터를 향해 모퉁이를 도는데 은수가 안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떤 남자의 팔짱을 끼고. 얼핏 스쳐본 은수는 눈가가 붉고 코를 훌쩍인다. 또 상담을 하다가 한바탕 운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괜찮겠지. 

애인도 같이 왔으니까. 

장훈은 옆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옆에 선 남자의 뒷모습은 당당했고 단단했다. 잘 손질된 머리, 곧게 편 어깨에서 떳떳함이 느껴지는 것은 자격지심일까. 장훈은 가질 수 없는 그 것. 괜히 입 안쪽 살을 씹어보았다. 

왜 내가 숨는건데? ... 떳떳한 사람들끼리의 연애가 부러워서? 한 줌의 희망을 가졌던게 그런 쪽이었나.  

명함도 감히 못 내미는 새끼가 희망은 무슨.

장훈은 [예] 하고 짧게 쓰던 답장을 지우고 상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또 무슨 거짓말을 해야하나. 






10. 황시목


컨테이너로 위장한 작전 유닛이 트레일러에 실려 평택항으로 이동 중이었다. 흔들리는 중에도 시목은 곧은 자세로 여러 모니터를 보며 프로그램을 셋팅했다. 귀에 꽂은 인이어에서 본청의 모니터링이 계속 흘러나와 집중이 어렵다.

"황경감이랑 처음 손발 맞춰보네."

원철이 다가와 방탄조끼를 건넸다.

"러시아어도 할 줄 안다면서?"

"초급회화 수준입니다."

"현장 직접 뛰는걸 더 선호하나? 요즘엔 다들 경위만 달아도 현장은 기피하던데."

"저는 현장에서 제 눈으로 직접 보는게 좋습니다. 국장님께서도 아직까지 현역처럼 현장 뛰시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속 시원하게 바로바로 앞에서 보는게 편해. 게다가 오늘은-"

허리에 손을 얹고 주위를 둘러보는 원철의 눈매가 긴장으로 번뜩였다.

"-그 안상구잖아. 안상구랑 나랑은 또 역사가 꽤 깊거든."

"실수 없이 잘 하겠습니다."

"근데 황경감, 작전 중에 또 다른 업무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한데."

원철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시목은 업무 지시를 메모하려고 수첩과 펜을 꺼내 들었다.

"정보원에 의하면 곧 레이븐쪽 안상구하고 폭스, 피콕이 대대적으로 뭉칠 것 같다는데. 통칭 연합 말이야. 그 자리에 아직 정체를 모르는 최고 스폰서까지.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야겠어?"

"...오늘 작전에서 레이븐이 빠져나갈 구멍을 줘야 합니까?"

"그래. 위에서 원하는게 바로 그거야. 여기 오기 직전에 날 부르더니 그렇게 지시하더군. 다 같이 모였을 때 한 방에 몰아치자고, 오늘은 살살 하라는거지. 황경감 생각은 어때."

"글쎄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어째서?"

"범죄조직에게 내일이, 미래가 있습니까? 하루아침에 길에서 칼을 맞아 죽어도 아무도 신경 안 쓸 사람들 입니다. 오늘만 사는 그런 놈들이 다음을 기약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상당히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저는 항상 모든 작전에 최선을 다해서 임해 왔습니다. 비단 오늘뿐만은 아닐 겁니다."

"내 생각도 그래. 같이 항명 할까, 황경감?"

원철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시목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그래. 경감으로 특진한 사람 실력 좀 보자고."

시목은 원철의 신뢰가 닿았던 어깨를 잠시 내려다본 후, 다시 화면으로 집중했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하!"

뒷좌석에 앉아있던 상구가 조용한 차내에서 별안간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장훈은 무슨 일이라도 있나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아아, 아무 일도 아니야. 볼일 봐, 우실장."

"예, 회장님."

"근디 우장훈아."

"예."

"자네는 미래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거, 뭐, 나중에 하고 싶다거나 그런거 말여."

"아... 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건 또 뭐여. 그럼, 내일은?"

"예?"

"내일 니 삶의 목표가 뭐냐고."

"그것도 잘..."

"아따, 너도 진짜 오늘만 사냐? 나도 그런디."

상구의 맥락 없는 말에 어떻게 장단을 맞춰야 할 지 모르겠다. 

"장훈아, 나가 만약에 길에서 칼빵맞고 뒤지면 꼭 찾으러 와서 거둬 가야 한다. 알았냐?" 

"갑자기 뭔 그런 숭한 말을 하십니까."

상구는 알 수 없는 말을 몇 마디 더 던지더니 낄낄거리던 웃음기를 싹 뺐다.

"...그나저나 이 쥐새끼, 상당히 거슬려... 빨리 처단을 해야쓰겄어."

"......"

다 왔습니다, 회장님. 타이밍 좋게 도착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장훈은 차에서 내려 뒷좌석 문을 열었다.




잡식에 죠필을 곁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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