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네요.”

“-그건 그렇고, 일 없어?”


카즈의 질문에 웨슬리가 슬쩍 웃었다. 웨슬리는 소년의 범주에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웃을 때만큼은 아직도 학생으로 보이곤 했다. 이따금 사립학교의 교복을 입고 타깃을 쫓거나 학교로 숨어드는 걸 보며 카즈는 코웃음을 쳤으나 사실 웨슬리의 웃는 얼굴은 정말 달리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게 보였다. 그건 내 기질과 상관이 있을까요? 웨슬리는 그리 물었을 때 카즈는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확실한 건, 웃는 웨슬리의 얼굴은 천진해 보였다는 것이다.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는 푸른 눈이 갸름하게 접히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웃을 때 그는 몸 전체를 떨었다. 보기 좋은 브루넷의 머리칼이 가볍게 흐트러질 때마다 카즈는 잘 자란 도련님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그 어떤 얼룩 하나 보지 못했을 도련님. 하지만 실제로 그는 자신과 같은 조직에서 일하고 있다. 카즈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이따금 교복을 입고 정갈한 차림으로, 탄약 냄새와 피 냄새가 잔뜩 배어 돌아오는 웨슬리를 볼 때마다 카즈는 궁금증이 일었다. 사람을 죽일 때 어떤 생각을 하는지. 카즈는 아주 오래 전에 사람을 죽였고, 보스의 눈에 든 이후로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만두었다. 하지만 웨슬리는 계속해서 사람을 죽인다. 마치 그 일이 천직이라는 듯이. 피에 묻은 교복을 세탁기에 돌리기 위해 수그린 웨슬리의 등, 그리고 그 너머의 창문 밖에서는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카즈는 침대에 걸터앉아, 웨슬리가 가져온 박스를 열었다. 시답지도 않게 예쁘게 포장된 박스 안에는 갖가지의 마시멜로가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를 집어 입안에 넣고 입술을 꾹 무는 카즈의 얼굴을, 웨슬리는 어렴풋이 비친 창을 통해 본다.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 웨슬리의 말에 카즈가 가볍게 픽 웃는다. 킬러가 쉬는 날이 어디 있어. 마시멜로가 입안에서 녹고 있는 탓에 뭉개진 발음이 끈적하게 달았다. 가끔 카즈의 목소리와 말투에는 만져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 느낌은 다시 미각으로 치환되곤 했다. 주로 달고 달았다. 손끝에 닿으면 녹을 것 같은 단맛. 그런 목소리와 발음. 굳이 카즈는 누군가를 유혹하거나 꼬여내려 하지 않아도 그런 느낌을 낼 때가 있었다. 녹진녹진하게 입안에 엉켜드는 단맛, 머릿속이 어지러워질 것 같이 곤란한 그런 끈적끈적한 느낌을 내는 카즈의 얼굴은 지나치게 정갈해서 웨슬리는 이따금 뱃속이 묵직해졌다. 가끔 아무렇게나 넘긴 머리칼 사이로 싸구려 같이 귀를 뚫어 꽂은 피어스 같은 것들. 카즈는 그런 것들이 전혀 제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군다. 오로지 그를 생각하는 것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처럼. 웨슬리는 비오는 날이 되면 카즈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우리 처음 만난 날에 이렇게 비가 내렸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썩 로맨틱하게 들리네. 하지만 넌 피투성이인 채로 죽어가고 있었잖아.”

“죽어가고 있진 않았어요!”


발끈하는 웨슬리를 향해 손가락을 딱, 울리며 웃은 카즈가 요만해진 마시멜로를 몇 번 씹곤 삼킨다. 목울대가 울리는 그 느릿한 움직임을 웨슬리는 바라보았다. 웨슬리의 기질이 기질인만큼, 그의 눈에는 모든 것들이 최소한의 단위로 쪼개져 보였다. 초를 나누고 또 나누어 보이는 그런 움직임들. 카즈의 모든 것들이 웨슬리의 눈에선 느릿하게 돌아가는 필름과 마찬가지였다. 일초에 스물네 번은 달칵달칵 소리를 내며 넘어가는 프레임, 그 속에 카즈가 있었다. 바래지도 않고 그렇게 영사되곤 했다.


“그거나 그거나. 어쨌든 난 수거하러 갔었다고, 너를.”

“첫 임무라 보스가 걱정이 지나쳐서 그래요. 난 멀쩡했다고요. 이 흉터 빼고는.”


웨슬리가 슬쩍 상의를 걷어올려 옆구리께에 난 흉터를 보이며 불퉁거렸다. 카즈는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매번 통통 튀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카즈는 웨슬리와 아직도 잘 지내고 있었다. 이상하지. 금방 질리는 사람인데. 보스 외에는 어떤 것에도 오래 마음을 둔 적이 없는데-보스도 마음을 줬다기보단 명줄이 잡혀 있으니 반쯤은 포기한 채로 놔두고 있는 거고-, 웨슬리는 기이한 면이 있었다.


카즈는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그날을 떠올렸다. 아직 카즈가 완전히 보스의 것이 아닐 때, 그는 주로 ‘청소부’ 일을 담당했다. 다시 말하면, 임무를 수행하다 죽거나 다친 멤버들을 처리하고 정리하는 일을 했었다. 웨슬리도 그중 하나였다. 시답잖은 애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의 오후, 오후 같지도 않게 어둠이 깔려 있던 하늘 아래, 오층 건물에서 아래로 그대로 처박힌 걸 막 본 참이었다. 카즈는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혀를 찼다. 머리 안 터졌나 몰라. 그건 좀 보기 싫은데. 비가 와서 선홍색 우산을 펼쳤고-그건 보스 취향-, 그렇게 시체를 처리하러 갔었던 카즈의 눈에 들어온 건 그토록 푸른색이었다.


아직 안 죽었네. 카즈는 혀끝에 남은 아몬드를 굴리며 명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그리 말했었고, 눈가를 경련하며 겨우 숨을 달싹이던 웨슬리는 그제야 카즈를 알아차렸다. 똑똑한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머리를 감싸 다행히도 머리가 터지지 않은 웨슬리는 어깨가 탈골된 상태였다.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포즈를 하고서, 웨슬리는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눈꺼풀을 타고 빗물이 흘렀고, 숨을 마시기 위해 겨우 벌어진 입술은 터져서 피가 섞여 흐르고 있었다. 그 보기 사나운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카즈는 웨슬리의 눈을 발견했다. 푸른 눈. 두고두고 말했지만 카즈는 그 눈의 색이 아니었다면, 웨슬리의 머리통을 걷어차 죽여버리고 그냥 시체를 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웨슬리가 내 눈 색이 어때서요? 라고 물었을 때 제대로 대답해준 적은 없다. 카즈는 그것을 그냥 모호함으로 두었고, 웨슬리는 그것을 어떤 ‘가능성’이라 두고 있었다. 누가 정답일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그게 벌써 얼마나 된 일인데 아직도 생각해?”


카즈가 떠오르는 잔상을 치우며 묻자 웨슬리가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웃었다.


“그럼요. 카즈를 처음 만난 날이잖아요.”


카즈는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그걸 웬만한 여자애들한테 했으면 먹힐 멘트였겠지만, 나한텐 별로 안 통해.”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웨슬리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금세 볼에 물이 든 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손등을 덮는 교복 소매와, 곱게 자란 다른 세계의 도련님이 떠올랐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저만큼 혹은 저보다도 지독한 바닥을 경험했을 것이다. 믿기지 않을 푸른 눈이 카즈를 곧게 바라보고 있었고 또 웃고 있었다.


“그날이 딱히 특별하진 않았는데, 비오는 날마다 그 말을 꺼내는 건 뭐야.”

“말했잖아요. 카즈를 처음 만난 날이라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그리 말하며 마시멜로를 집어드는 기다란 카즈의 손가락을 바라본다. 마디마디가 굵지 않아 날씬하게 뻗은 손가락과, 단정하고 동그랗게 마무리된 손톱의 끝. 달디 단 마시멜로를 집어들어 입안에 넣고, 그리고 입술을 가볍게 누르며 떨어지는 손에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웨슬리는 가볍게 웃음을 물었다. 빗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날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 웨슬리는 겨우 성공했었고, 그리고 곧바로 예상 외의 위치에서 덤벼드는 경호원을 피해 아래로 떨어졌었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땐, 눈앞에 남자가 있었다. 선홍색 우산을 들고, 답지 않게 단 초콜릿 냄새를 풍기며, 피어스를 낀 묘한 얼굴의 남자가. 안 죽었네. 심드렁한 말투로, 하지만 어쩐지 입에 넣으면 단맛이 날 것 같은 그런 묘한 목소리로.


그리고 그 직후의 순간을 웨슬리는 잊지 못한다.


천천히 우산을 기울여, 웨슬리의 얼굴 위를 덮어주던 그 손가락. 그때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화려하고 반짝거리는 반지가. 웨슬리의 얼굴 위로 쏟아지던 빗방울이 가리어 토독토독 소리를 내며 그를 이루는 바깥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 빗방울 대신, 화사한 선홍색이 얼굴 위로 드리워지는 온기의 순간. 남자는 그때까지도 심드렁한 얼굴로, 하지만 명백하게, 웨슬리를 향해 우산을 기울여 주었다. 그 순간의 온기. 그 어떤 순간을 웨슬리는 다른 어떤 날과도 바꾸지 못했다.


“글쎄요.”


웨슬리가 모를 얼굴로 웃어 보인다. 고요하고도 장난스러운 그 표정에 카즈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웨슬리는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웨슬리는 그날에 있을 때가 있었다. 힘들고 괴로울 때, 외로울 때, 지칠 때, 혹은 그냥 이유 없이. 남자가 무심한 얼굴로 제게 우산을 기울여, 비를 막아주던 그 순간으로. 그 우산 속으로. 웨슬리는 그러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가장 따뜻한 안식처를 얻은 것처럼 안정이 되곤 했다.


웨슬리는 가만히 카즈를 바라보았다. 푸른 시선에 담긴 제 모습이 익숙하지 않은 카즈는 입안을 우물거려 마시멜로를 도르륵 굴렸다. 혀끝에서 녹아내리는 마시멜로. 보스의 반지를 낀 손가락. 침대에 느릿하게 기댄 마르고 단단한 몸선. 그 모든 것을 웨슬리는 기억하기로 다짐한다. 누구보다도 순간을 나누고 또 쪼개어 간직하는 것만큼은 웨슬리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웨슬리는 순간을 또 순간으로 분절해 간직할 수 있었다. 그 능력을 가진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순간이 카즈를 떠올릴 때라는 건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중요한 날이에요.”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라디오나 틀어.”


우웅거리며 세탁기가 돌아갔고, 빗소리가 울리고, 그리고 웨슬리는 라디오의 전원을 켰다. 느릿한 재즈가 울리면 카즈는 눈을 갸름히 감으며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웨슬리는 어떤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오는 날이 그에게 가지는 의미를, 카즈가 제게 번진 그날의 의미를, 전달할 그 순간을.


카즈의 손끝에서 습기로 눅눅해진 마시멜로가 끈적하게 녹아가고 있었다. 그때는 매 시간, 매 순간마다 웨슬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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