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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름지기 일기를 쓰며 살아야 한다.


빼곡히 채운 가죽 양장 수첩을 한 칸씩 쌓아올리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던 경수네 할아버지의 지침을 따른 건 세 형제 중 제일 관심 밖이었던 둘째, 경수네 아버지였다. 맏이는 물려준 땅으로 도박을 하다 말아 먹었고 셋째는 덜떨어진 머리와 호방한 배포의 끔찍한 불협화음으로 여러 사업에 투자하고 실패하고 투자하기를 반복했다. 


무난한 대학에 진학해 무난하게 공무원이 된 둘째는 나눠받은 부동산이 재개발 되면서 가만히 있다 돈벼락에 앉았다. 한 것이라곤 퇴근 후 아내가 문화센터에서 배운 솜씨로 어설프게 만든 선비상 앞에 앉아 일기를 쓴 것 뿐인데 인생이 술술 풀렸다. 때문에 그는 두 자식에게 일기 쓰기를 강권할 수 밖에 없었다. 경수의 누나 가원은 아빠가 검사할까 두려워 거짓으로 일기를 썼고 경수는 대놓고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다. 대단히 반항아여서는 아니었고 누나처럼 되기 싫어서였다.


에프엠 밑에서 난 에프엠. 가원은 아버지와 같은 나이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옛 시절과 달라 그 나이에 붙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주변에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해도 주변 일 뿐이었다. 한 칸을 비우면 또 해내야 마땅한 과업이 쏟아지는 테트리스와도 같았다. 가원은 근무지가 가까운 공무원을 소개 받았고 아버지의 허락을 거친 후 상견례를 마쳤다. 인생의 대소사가 모두 그런 식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테고. 경수는 가원을 병원에 데려다 놓으면 사망 진단을 내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원의 심박수를 재보면 0일테니까. 


결혼 전 날, 경수는 가원에게 진심을 다해 물었다. 스물 여덟 누나에게 아홉 살이나 어린 동생이 묻기엔 좀 주제 넘는 질문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긴 해? 아버지의 속을 썩이는 남자 형제에게 가원은 관용을 베풀었다. 인생에서 비틀어져 본 적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얕고 넉넉한 태도였다. 동생, 때 되면 다 알게 된단다. 경수는 유리알 같이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굴렸다. 그 방면으론 도가원이 한참 젬병일텐데. 경수의 친구들은 온종일 19.9세라는 아슬아슬한 나이를 어떻게 하면 더 짜릿하게 즐길 수 있는지 골몰하는 애들이었다. 무려 9가 하나 더 붙은 19세였다. 국어 교과서도 불온 서적처럼 읽느라 난리였다. 


가원은 경수의 질문에 훈수로 응수했다. 9월 모고 수학 2등급 맞았다며.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넌더리났다. 경수는 일기 없이도 부모의 기대에 맞춰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 달에 몇 백을 쏟아부었으니까. 집중하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요령을 가르치는 도사같은 선생들을 붙여주었으니까. 누나까지 빈틈없이 이어져 온 이 고리를, 어떻게든 끊어 보려고 안달 냈으나 어느 정도는 편승하고 있음을 지각하면 경수는 심장이 마구 짓밟히는 느낌이었다. 아무데나 난입해 삐라를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집안은 미쳤어요. 일곱시에 수저를 들지 않으면 그냥 굶겨버린다고. 번민에 시달리는 경수라도 가원의 결혼식을 망칠 만큼 경우가 없진 않아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걷는 가원의 뒤에서 얌전히 박수를 쳤다. 벅찬 표정으로 입술을 앙 다문 얼간이 쪽, 자신과 정확히 반대편 방향에 앉은 백현을 보기 전까진. 


백현은 무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거추장스런 리본이 묶인 웨딩홀 의자에 앉아 불규칙한 박자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무성영화를 억지로 시청하는 현대인처럼 따분한 옆선이었다. 그런 기미를 읽어낼 만큼 오랫동안 봤기 때문에, 백현또한 경수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시선이 잠깐 엉켰다. 포근한 조명의 결혼식장이 신혼 부부를 감쌌다. 경수는 이불을 뺏긴 어린애처럼 앉아 있었다. 다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얼간이가 제 동생이랍시고 백현을 소개했다. 가원은 상견례 날 급하게 탈이 나는 바람에 나오지 못했던(경수는 그날 친구네 집에 신문지를 깔고 삼겹살과 콜라와 소주를 먹었다.) 경수를 소개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동갑이지 참... 얼간이가 대단한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햇빛 아래서 쉴 새 없이 몸을 까딱이는 전자파 인형 같았다. 가원이 돌보기엔 심심하지 않겠다 싶었다. 둘이 친하게 지내면 좋겠네. 얼간이를 매형이라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늘 한심하게 여기던, 여자애들 답장 하나에 죽고 사는 소리를 일삼는 친구들의 작태와 지금의 자신이 똑같다는 건 깨닫지 못한 경수였다. 


누나의 결혼식을 망치지 않은 대신에 제 결혼을 망치게 되리란 걸, 그때의 경수는 몰랐다.


*


액수를 정확히 말해.

경수야, 나 살려줘.

살려달라는 말 지금 열 번째야. 나 너 안 죽였어.

경수 네가 안 도와주면 나 그냥 콱.

끊는다.

이천, 경수야 이천.

나 그렇게 큰 돈 없어.

왜 이래, 우리 사이에. 너 돈 많은 집 귀한 자식인 거 나 다 알아.

귀한 자식도 돈 달라고 하면 썩을 자식 되는 게 우리 아버지야. 그리고 난 원래 귀한 자식도 아니고.

경수야, 나 살려줘.

나 너 안 죽였다니까.

천. 천만 좀 부탁할게. 나도 부랄친구한테 아쉬운 소리 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어. 그런데 사는 게 이렇다. 얄궃어. 사람을 꼭 아쉬운 소리 하게 해. 너 주변에 돈 나올 데 없니. 뒤져보면 있을거다. 내가 전화 번호부에서 기어코 도경수 석 자 누른 것처럼. 급한 불 끄면 나도 숨통이 트여. 네 돈은 내가 죽어서라도 꼭 갚을게. 네가 0순위야. 경수야.

일단 끊어봐.


경수는 병찬의 말을 따라 핸드폰을 눌러 보았다. 병찬의 말이 맞았다. 근사하게 살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인생에 나이테를 두를 때마다 얇고 가느다란 인연만 늘었다. 독립한 후로는 부모님마저 그러한 얄팍한 굴레속의 인물처럼 느껴졌다. 특히나 아버지와는 끊어진 실전화기를 사이에 두고 있는 듯 했다. 경수는 아버지와 예의상 통화를 할 때마다 참을성을 시험받았다. 아버지의 눈엔 스물 한살 이후로 쭉 모자란 경수였다.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쳤다는 소식을 전한 후엔 달마다 세금 독촉하듯 오던 전화도 끊겨 있었다.


친구놈들 자식은 다 현역으로 다녀온 군대를 경수만 공익으로 다녀온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사내 놈은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취지에 경수도 동감했으나 양쪽에 기흉이 생긴 탓에 공익 판정을 받은 것을 경수가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기흉의 원인이 주로 간접 흡연이라는 점을 들어 담배도 피우는 거냐며 역성을 냈다. 경수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긍정의 신호여서 뺨을 얻어 맞았다. 경수는 손바닥이 덮칠때 가만히 있었던 것처럼 공익 근무를 하는 내내 조용히 일하는 의료원을 오갔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일'을 발설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그 일'을 다시 꺼낸다는 건 호적에서 파이겠다는 뜻이었다. 


*


담배는 백현이 폈다. 피기 전엔 키스를 했다. 피고 나서는 백현이 침을 섞지 않으려 해서 미리미리 키스를 조르게 됐고 부은 입술에 물린 담배는, 풀린 교복 셔츠는, 그렇게 경수와 접붙을 때면 한쪽에 가지런히 벗어두는 안경은, 더운 숨은, 문만 닫으면 한겨울에서 한여름 가운데로 낙하하던 계절은, 경수를 정신 못차리게 했다. 경수는 추운 줄도 모르고 후드 집업 하나만 걸치고 다녔다. 백현은 차게 얼어 붙은 경수의 쇄골에 입술을 댔다. 백현이 도드라진 뼈를 핥으면 소름이 돋았다. 오소소. 줄기가 으스러져 바람이 제멋대로 드나드는 나무가 된듯 했다. 백현은 악랄한 씨앗이었다. 본체의 밑동까지 갉아 먹어 양분으로 삼을 종자였다. 무서운 힘으로 경수를 붙잡아 두었다. 


가족끼리 묶인 인연을 발판 삼아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메꾸면 좋지 않겠냐는-내로라하는 선생을 붙여줬음에도 수학 등급이 2 따위가 나오는 경수를 갱생하고자하는-아버지의 제안을 순순히 따른 건 백현을 다시 보기 위해서였다. 백현은 전 과목 1등급을 놓친 적 없지만 수시 논술에는 다소 취약하다 했고 경수는 말빨에는 몰라도 글빨에는 자신있었다. 스터디 장소는 경수네 집으로 정해졌다. 관료제의 현신인 경수네 아버지는 모름지기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제 눈으로 관찰하길 좋아했다. 그 증거가 문서로 남는 경우엔 더욱 만족스러워했다. 논술은 이전에 쓴 논술 용지를 보여 드리면 될 테고 수학은 답지를 아무렇게나 배껴쓰면 되겠지. 경수는 백현이 오기도 전에 농땡이 피울 궁리부터 했다. 


오늘의 사소한 일탈을 위해 친구들에게 조언까지 구했다. 백현의 첫인상은 완벽한 모범생에 가까웠다. 경수네 반에도 있는, 98점에 울고 96점에 교무실을 찾아가는 애들 말이다. 경수는 그런 애들과 친하게 지내본 적이 없었다. 경수의 친구들이 '노력'을 하는 인간관계는 이성 한정이었다. 하룻밤 깔아보려고 뱉는 달디단 말들이 술술 나왔다. 백현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결국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채로 백현을 맞았다. 그렇지만 무엇을 준비한단 말인가? 덜 정돈된 외양으로도 또래 중에 으뜸이었던 경수가 백현이 오기 전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하고 거울을 몇 번 이나 들여다 본 것만으로도 경수 인생에선 처음으로 '노력'을 한 셈이었다. 


빤한 낯에 가득한 함의를 긁어낸 건 백현이었다. 무미건조한 말투로 문제를 풀다 갑자기,


사이좋게 앉아서 공부하랍시고 펴놓은 앉은뱅이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 모서리부터 중앙까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꼭 책상이 아닌 경수의 몸을 더듬는 것 같았다. 백현이 작게 율동하는 손가락에 쏠린 정신을 흩뜨렸다. 


시시하네.

어?

너 시시하다고.

...

아니면 점잖떠는 건가.


어느 쪽으로 보나 니트 조끼까지 챙겨 입은 백현보다는 단추 하나 잠그지 않은채로 안에 받쳐 입은 단색 티셔츠를 훤히 드러낸 경수가 불량했는데도, 백현은 그렇게 말했다. 기껏해야 수학 문제 풀고 논술 문제 푸는 가운데 특별히 허세를 부릴 까닭도 없는데다가, 모험담이랍시고 친구들과 담배며 소주를 시도한 것을 꺼내놓았다간 왠지 백현이 비웃을 것만 같아 경수는 진심을 털어 놓았다. 쓸데없이 비장해지기 쉬운 타이밍에 힘을 덜어내는 건 경수의 장기였다. 아득바득 악을 쓸수록 자신만 우스워지고 끝난다는 걸 아버지와의 지지부진한 다툼끝에 배웠다. 변백현. 당황스럽겠지만.


나 너랑 친해지고 싶어.

...

그런 것 같아.

아니지.

아니라고?

너 나한테 뻑갔잖아.

...

친해지는 걸로 돼?

...야.

나랑 뒹굴고 싶어서 바들바들 떤 주제에. 친구를 하자고, 나랑.

뭐라는, 미친 새끼야.

내가 손 잡아 주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애들. 아닌 척 하면서 뻔뻔하게 눈빛 흘리는데 다 티나는... 얼빠진 애들. 좀 지겹긴 한데.

너 나가.

넌 좀 색다를 거 같아서. 집으로 오라길래 기대 많이 했는데.

...


셔츠를 풀거면 안에 티를 벗었어야지. 책상 중앙을 머물던 손가락이 불쑥 경수의 가슴팍을 튕겼다. 교묘하게도 솟아오른 돌기 근처였다. 백현이 너무도 뻔뻔하게 나오는 통에 그들의 관계는 나중 문제로 치부될 정도였다. 경수는 백현에게 침을 뱉고 싶었다. 친구들이 아부떠는 뭇 형님들을 흉내내며 욕설을 지껄이고 싶었다. 아는 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구질구질한 어원을 알고 난 뒤론 사용하기를 꺼렸을 뿐이었다. 애들이 장난이랍시고 허리를 간지럽힐때마다 매운 손맛을 곁들여 흠씬 패주었던것처럼 백현도 그렇게.


다음부턴 내숭떨지마. 그거 내 취향 아니야.


백현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정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얼굴 곳곳의 날카로운 선이 드러났다. 경수는 뾰족한 부리에 심장을 쪼인 듯 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러운 부위만 골라서 파먹힌 탓에 남은 것은 경수도 몰랐던 경수의 진심이었다. 잘생겼다든지 기깔나다든지 하는 감상전에, 결좋은 머리칼이 솟아 올랐다가 가라앉는 걸 한번 더 보고 싶다는 충동. 반항 근처를 깔짝거리기만 하던 경수는 덜컥 겁을 먹었다. 원경에서 근경까지. 흐릿해지던 백현의 윤곽을 자세히 보고 싶어 집으로 불렀고 어느 새 상판 구석구석을 살피게 됐다. 열아홉은 자극을 먹고 자라는 나이였다. 센 거, 센 거, 더 센 것을 줘요. 제시문 (가)의 '숙련'이 의미하는 바를 적으시고... 논술 기출 문제를 훑다가 땀이 나다니. 


봐봐,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날 어떻게 하고 싶은 건 너지.


그렇잖아? 갓 상경한 부산 아이가 억지로 올린 끝음처럼 어색한 말투였다. 분명히 경수의 방이었는데도 사물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가져다 둔 검은 숯, 흙이 마른 다육이 화분, 도곡동의 편집샵에서 사왔다는 스테이블체어. 익숙한 것을 톺아보는 경수의 시선에 덜그덕-하고 백현이 걸렸다. 백현이 분명하게 선언했다. 말하자면 네가 범인이지. 네가 나를 여기로 불렀으니까. 그러면서. 날 여기에 데려다놓곤. 내가 먼저 얘길 꺼내게 만들었잖아. 그런데 도경수. 내가 입을 열면 무를 수 없어. 난 그렇게 자랐거든. 


내가, 괜한 짓을 한 것 같으니까.

거울이나 보고 지껄이지 그래.

...

표정이 흐물흐물 하다고.


몰아붙이는 부친의 아래를 기어 다니며 큰 경수였다. 친구들과 몰려 다니며 교칙을 어겨도 시험지에선 옳은 답을 고르게 됐다. 답지를 뜯어 내키는대로 배끼다가도 한 바닥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흠집이 많은 탈선이었다. 선명한 어긋남과 맞닥뜨리자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공포심이 선득댔다. 그러나 공포스런 가운데 미묘하게 피어 오르는 흥분을, 아마도 백현은 눈치챘으리라.


경수는 간신히, 정말 간신히...


나가, 이 또라이 새끼야.


밀어냈다. 아버지가 원하던 그림이 나오질 않아 미움을 샀다.  웬일로 네가 내 말을 듣나 했다. 무슨 짓을 했길래 그 쪽에서 학을 떼. 우리 집 근처로는 얼씬도 안한다는 걸 내가 살살 달랬어. 밖에서 새는 바가지가 아주 안으로는 박살이 나는 구나. 아버지는 몰랐다. 산산조각 난 건 경수였다. 곳곳에서 굳었다. 덜컹이는 버스 손잡이를 잡다가도, 노트 마지막 장을 찢어 낙서를 하다가도 되새기게 됐다. 그럴 때면 머리 맡에 다시는 열어볼 수 없는 책을 두고 사는 듯 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읽다 뺏기는 바람에, 평생토록 궁금증에 시달릴. 


그렇게 한참을 씹다보면 가족이나 도의같은 거창한 단어는 닳아 없어지고 아무리 짓이겨도 사라지지 않는 본심만이 남아 경수를 꼿꼿하게 응시했다. 한 번만 더 보고싶어. 아주 가까이에서. 얼굴에 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왼쪽 뺨인지 오른쪽 뺨인지 헷갈려. 걜 한번 더 본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이보다 추잡한 관계도 얼마든지 있는 걸. 동성혼이 허용되는 나라라면 고작 겹사돈이잖아? 설사 키스를 하더라도, 키스를 하더라도 말이야. 하겠다는 게 아니라 하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무언가를 하게 되는 상황은 정면이 아니라 후면에서 덮치니까. 아주 깊은 밤에. 거리를 재려면 직접 걸어서 걸음수로 치수를 가늠할수 밖에 없는 시각에. 그런데, 변백현의 매끈한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빛날까.


머리를 싸맸다. 만날 구실은 부족했고 만나고 싶은 마음만 간절해졌다. 그런 경수를 비웃는 듯 백현에게서 온 무심한 연락에 경수는 오전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를 박차고 나갔다. 운동장 한켠에 체육관을 짓던 인부들이 저 녀석 양아치구만, 하고 흘겨보는 것을 견뎠다.  


-깊어 보이지.

-오려면 와.


백현은 무강천에 있었다. 부실 시공으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70억 예산을 들여 자전거 도로와 생태 공원을 조성했는데 문제가 많았다. 설계상의 오류인지 자전거 도로에 물이 자주 범람해 도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곤 했고 생태 공원엔 업적이 불분명한 지역 명사의 조각상이 군데 군데 놓여 있었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 자리한 그것들은 언제 보아도 오싹한 감상을 자아냈다. 특히나 근처에 종합 체육 시설이 지어지면서 무강천엔 한낮에도 사람이 뜸했다. 경수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도착했을 때도 백현 말고는 없었다. 백현은 울퉁불퉁한 노면을 등진채로 강의 하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흘러가는 것. 여러 물줄기로 흩어져 있어도 결국엔 모이는 것. 경수에게도 있었다. 


왔네.

성격이 왜 그래.

내 성격?

걱정되잖아. 

그냥 강이 깊다고.

여길 이 시간에 혼자 오면서. 대뜸 강이 깊어 보인다 그러면, 아무리 따져봐도 이상하잖아.

내가 너한테 그러는 게 이상해?

안 이상해 그럼?

나도 살면서 숨 쉴 구멍이 필요해.

...

그걸 너로 하고 싶어.

...

싫지 않잖아.


결혼식장에서도, 경수네 집에 왔을때도, 그리고 뿌연 강물을 배경으로 삼을 때에도, 백현의 셔츠는 끝까지 잠겨 있었다. 다른 사람이 풀어줘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경수는 단언했다. 안경으론 차마 가려지지 않는 이면이 궁금해 발을 구른 사람이 여럿일 것이라고. 다들 눈치는 챘을 것이다. 이 안에 말도 못하게 위험한 것이 있어. 


허나 속수무책으로.


뒷머리가 잡혔다. 으슥한 곳에서 은밀히 시도하려던 경수의 계획이 틀어졌다. 한낮이었다. 강물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입술을 부딪히는데 아래가 섰다. 판판하게 달라 붙은 교복 바지가 불편해졌다. 앞으로 모든 것이 그보다 곱절로 불편해 질 예정이었다. 


가원은 백현네 가족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려주는 편이었다. 시댁 식구들의 고매한 인품을 에둘러 칭찬했다. 반듯하고 인사성 좋은 도련님과 사고뭉치 남동생은 판이하게 달랐다. 철없는 남동생이 됐음직한 롤모델로서 백현을 골랐으나 경수는 가원이 말을 걸라치면 도망칠 작정이었다. 달아나지 않으면 백현이 말했듯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가원에게 백현의 얘기를 더 들려 달라고 조를 것 같았다. 


누나, 걔 수학 성적 말고. 학습 태도 말고. 좌우명 말고. 좋아하는 색깔. 싫어하는 옷차림. 그런 걸 알아와줘.


경수는 그 날 처음으로 일기장을 폈다. 아버지가 보지 않으리란 걸 아는데도 전부 적을 수가 없었다. 하필히면 유난한 성씨라 그랬다. 앞 뒤로 의미 없는 자음을 추가했다. ㄱㄴㅂㅂㅎㄷㄹ. 적는 순간 보였다. 똑같은 필압으로 기록했음에도 양각을 입힌듯 툭 불거진 이름이.


*


경수는 병찬의 애달픈 부탁에 전화 번호부를 켰다. 병찬이 경수를 찾아냈듯 익숙하고 먼 이름을 짚어냈다. 의지만 있으면 남처럼 지낼 수 있는 관계였다. 이름만 외워도 신기한 게 사돈지간이었다. 


왕래를 그만둔지 8년. 경수가 기흉으로 공익 판정을 받고 의료원에 근무하는 동안, 복수전공으로 제때 졸업을 하느라 바쁘게 사는 동안, 아버지의 기준에 흡족한 직장에 붙었다가 신입을 상대로 한 실적 압박과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람을 내리 누르는 분위기를 못견디고 퇴사를 결심하는 동안, 백현은 얼굴만 아는 동창처럼 놀라운 사건-이를테면 수석 졸업을 했다던가, 로스쿨에 합격했다던가, 검사가 되었다던가 하는-이 아니면 가족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았다. 그마저도 경수가 집에서 나온 후엔 한참 뒤에 다른 소식에 섞여 곁다리로 등장하곤 했다. 사돈 총각도 결혼 생각이 없나 보더라. 좋은 선자리 많이 들어올텐데. 


경수의 전화 번호부에 저장된 사람 중 백현만이 병찬의 부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병찬은 경수의 오래된 친구였다. 배꼽빠지게 웃은 기억은 높은 확률로 병찬의 작품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식이 끝나곤 병찬의 주장으로 양복을 맞춰입고 이미지 사진을 찍으러갔다. 병찬의 자리는 중앙이었다. 아마 병찬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누렸을 호사였을 것이다.


다 죽어가던 병찬의 목소리. 살려달라던 애원. 부랄친구. 0순위. 얄궃은 인생.


그렇지. 언제나 구실에 목말랐지. 열아홉에도, 스물 여덟에도.


-혼자 살기에 넓어.

-돈 받고 싶으면 들어와.


경수는 여전했고,

백현은 청유대신 명령을 쓰는 남자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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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한 편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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