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먹어보려느냐.’



  헉, 이것은? 온왕 전하가 알록달록한 오색 설탕이 묻은 윤기 나는 강정을 한 사발 들고 태민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먹고 입는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는 황자 사저에 들어오게 된 지가 6년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하는데다 정해진 진지 외의 군것은 일절 먹지 않는 주인 나리의 식성 덕분에 과자나 사탕 같은 간식을 얻어먹는다는 생각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온왕저에 들어오기 전에도 그런 것들을 돈 주고 사 먹어본 적은 없었다. 여느 어린 아이들이 그렇듯 태민도 단 것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껏 먹겠다는 꿈은 말 그대로 꿈으로만 끝날 뿐이었다. 이리저리 맨발로 시장통을 돌아다니다가 누군가가 흘려 바닥에 산산 떨어진 엿 부스러기를 주워 먹어 본 기억이 다였다. 흙냄새가 버스럭버스럭 나긴 했지만 사르르 혀끝에서 녹는 엿 덩어리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달아 기분이 좋았다. 한 입 입에 넣어보고 너무 맛있어서 집에 있을 누이에게 갖다 줄 생각도 못 하고 죄다 먹어버리고 말았었지. 그걸 본 양민 아이들은 태민더러 거지새끼라 놀렸고……. 태민은 친절한 주인이 내미는 한 사발의 강정을 모두 받아 야금야금 입에 넣기 시작했다. 달다, 달아. 너무 좋아. 연이 안 주고 혼자만 다 먹어야지. 



  ‘그렇게 맛이 있느냐?’

  ‘네! 너무 달아요.’



  착한 주인 나리는 맛있게 먹는 자신의 모습에 흐뭇한 듯 팔짱을 끼고 웃는다. 그제야 혼자 아귀처럼 먹어대는 자신이 면구스러워 조심스레 강정 하나를 그에게로 내민다. 전하도 드실래요?


  

  ‘나는 되었으니 네놈이나 많이 먹어라.’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주인 나리는 최고예요. 태민은 더는 그에게 과자를 권하지 않았다. 야무지게 다 먹어야겠다. 그런데 단 맛이 점점 옅어지는 것 같다. 설탕을 안 좋은 것으로 썼나? 태민은 갸웃거리며 손과 입을 조금 더 빨리 놀렸다. 그래도 단 맛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이상타.



  “이 녀석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아직 자는구나. 깨워라.”



  결국 속절없이. 종현 아저씨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과자가 든 사발을 뺏기고 말았다. 더불어 따뜻한 이불도 허공으로. 눈꺼풀을 직선으로 찌르는 날카로운 햇살에 태민은 신음을 내뱉으며 꿈틀거렸다. 왜 이러세요오. 



  “일어나라. 전하께서 오셨다.”

  “우우웅.”

  “태민이는 무슨 꿈을 그리 달게 꿨느냐. 그만 일어나라. 휴가를 갈 것이다.”



  하늘로 날아가 버린 과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아쉬움에 눈물이 나려 한다. 종현 아저씨에게 엉덩짝을 세게 두들겨 맞기 직전에야 침상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휴가요?”

  “그래. 속히 준비하지 않으면 널 두고 갈 것이다.”

  “…시, 싫어요!”



  데굴데굴 굴러 내려와 잽싸게 옷을 갈아입었다. 휴가라니, 저 앞뒤 꽉 막힌 인간이 무슨 휴가인가.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싶었지만 눈을 제대로 뜨고 바라본 온왕 전하와 호위대장 나리는 농담을 하러 온 것이 아닌 듯 외출복을 단단히 챙겨 입고 있었다. 자신까지 챙겨 가려는 것을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곳으로 갈 모양인 가보다. 안 그래도 심심했는데 이 기회를 발로 차 버릴 수야 없지. 태민은 반의 반각도 되지 않아 준비를 모두 마치고는 생글거리며 온왕 전하의 옆에 낼름 붙었다.



  “태민아.”

  “네?”

  “너…, 소세는 안 하려느냐?”



  아차차.














  “우웨엑.”

  “저런. 괜찮으냐?”



  하늘이 노랗고 천하가 뱅뱅 도는 기분에 태민은 얼마 먹지도 못한 아침거리를 모두 풀밭 위에 게워내 버리고 말았다. 마차에서 따라 나온 진기가 손수 등짝을 두들겨 주었다.



  “전하, 들어가 계십시오. 이 녀석은 저희가 알아 데리고 가겠습니다.”

  “괜찮아. 멈춘 김에 조금 쉬어가자.”

  “시간이 지체될까 저어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리 급하게 갈 생각이었다면 아이를 데리고 나서지도 않았겠지.”



  씨이. 종현 아저씨는 만날 나만 미워해. 눈물이 그릉그릉 고인 눈동자로 하얗게 그를 노려보았더니 이 콩알만한 놈이 어딜. 하며 그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맞서 노려본다. 전하 없을 때에 그 옆에 잘못 알짱거렸다간 또 핀잔을 맞고 갈굼 당할지도 모른다. 웬만하면 전하와 함께 가고 싶지만 이리저리 흔들리는 어두운 마차에는 도저히 다시 들어갈 용기가 없다.



  “제가 말에 태워 데리고 가지요.”

  “그래. 태민이는 종현과 함께 가거라.”

  “…싫어요.”

  “음? 싫어?”



  얄궂은 종현 아저씨 등짝에 매달려 함께 말 타고 가야 하다니. 앞으로 적어도 두 시진(4시간)은 더 가야 한다는데 그 동안 얼마나 저이와 함께 불편할 것인가. 멀미가 더 도질지도 모른다. 무조건 그러기 싫다 고개를 쌀래쌀래 흔들었더니 종현 아저씨가 안절부절 못하며 전하 말씀 따르지 못하겠느냐 윽박질렀다. 



  “…전하랑 갈래요.”

  “하하. 녀석.”



  결국 자신이 생떼를 놓는 바람에 진기가 말고삐를 잡는다.



  “나와 같이 가면 가겠느냐?”

  “네!”



  신이 나서 엉덩춤을 추었다. 종현을 비롯한 시립 무사들이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전하가 그리 하겠다는데 말리고 나설 재간을 가진 이는 없다. 다행이다.



  “전하 자꾸 그러시면 저 놈 버릇 나빠집니다.”

  “괜찮다.”



  잔잔히 웃음 지으며 태민을 들어 먼저 말등 위에 얹어주고 자신도 올라탄다. 높아진 시야에 신이 났다. 머리 위에 느껴지는 진기의 부드러운 냄새도 좋았다. 자신이 떨어질까 봐 단단히 끌어안아 몸 쪽으로 당겨 주는 자상한 손길은 더 좋았다. 고삐를 잡은 종현이 ‘으이구’하며 한숨 쉬었지만 그러던 말던 태민은 마냥 좋기만 했다. 그와 찰싹 앞뒤로 붙어 청량한 봄바람을 들이마시고 오전의 맑은 공기를 쐬는 것은 상상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전하, 어디로 가요?”

  “음. 좋은 곳?”

  


  바람결에 날리는 태민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그는 대답한다. 잔잔한 묵향이 풍기는 손가락이 태민의 목덜미에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튼튼한 근육을 가진 아름다운 흑마는 자신과 진기를 태운 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넓은 초원길을 달리고 있었다. 멀미 따위는 스치는 바람에 이미 멀리멀리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거울같이 맑은 호수와 숲, 들꽃이 핀 들판을 지나 높은 산을 건너 일행은 어디론가 달리고 또 달렸다. 진기에게 안겨 높은 곳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생소하고 또 아름다웠다. 태양이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며 하늘 한 가운데로 떠올랐다. 하얀 햇살에 가득 노출된 따가운 정수리와 목덜미를, 그가 손등으로 덮어주었다. 



  “온왕 전하 납시셨사옵니까.”



  수도를 한참 벗어난 남쪽의 요양지 구양(丘楊)에는 황실 소유의 호화롭고도 아름다운 별궁이 많았다. 신분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건물이 달랐고 온왕 일행은 그 중에서도 축조된 지 오래되어 가장 낮은 등급으로 분류된 동목궁(憧穆宮)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은 여름과 가을에 행해지는 황실 대수렵 기간에 온왕 진기의 처소로 배정되는 궁이기도 했다. 울창하게 우거진 녹림 한 가운데에 자리한 동목궁은 규모가 작고 시설이 낙후되긴 했으나 관리가 잘 되어 단아하고도 한적한 분위기를 풍겼다. 늙어 백발이 성성한 상궁과 박색의 궁녀들이 기별을 받고 나와 진기와 일행들을 맞았다.



  “정말 격조하셨사옵니다. 전하.”

  “오랜만이네.”

  “3년 전에 발걸음 하시고 한 번도 들르지 않으셨습니다. 야속하시옵니다.”

  “하하. 미안하게 되었네. 보름 정도 묵었다 갈 예정이니 잘 부탁하네.”

  “성심껏 모시겠사옵니다.”


  

  진기가 동목궁 상궁과 이야기를 나누고 종현이 시립무사들과 짐을 푸는 동안 태민은 발뒤꿈치를 들고 제일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골방으로 숨어들어갔다. 반나절 동안 계속된 여행에 몸이 온통 곤하다. 커다란 빈 장롱과 장롱 사이에 몸을 낑겨 넣고 그대로 옹송그린 채 꾸벅꾸벅 졸았다. 분주하게 오가는 이들 그 누구도 태민을 찾지 않는다. 조금만 눈을 붙여야지. 나른했다. 조용한 골방 안에는 기분 좋은 적막만이 감돌았다. 



  “…네 이 녀석. 잡았다.”



  까무룩 까무룩 아늑한 꿈속으로 빠져 들어가려는 자신을 휙 낚아채어 올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태민은 화드득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마터면 경기가 일어날 뻔 했다.



  “저, 전하?”

  “이런 곳에 숨어 있었으면 모를 줄 알았더냐. 쥐에게 물린다. 얼른 나와라.”

  “쥐…라구욧!”



  가구 사이에 낑긴 몸을 쑤욱 빼내어 주며 그는 잔뜩 겁을 주었다. 쥐만 있는 줄 아느냐. 이 궁엔 삵도 있고 100년을 산 지네도 있다. 잠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그런 것들은 정말 싫어!



  “공부할 시간이다.”

  “네에?”

  “얼른 따라와라.”

  


  그러고 보니 그의 말대로 글공부를 할 시간이었다. 점심을 든 직후의 반 시진 정도, 그는  별 다른 일이 없는 한은 항상 태민에게 글을 가르쳐주고 독서를 시키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별궁이고, 전하 말마따나 우리는 휴가를 온 거고. 게다가 책도 문방구도 가져온 것이 없는데! 진기는 허둥대는 태민을 내려다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뺨을 톡톡 건드리는 손가락이 미지근한 온기를 담고 있었다. 



  “내 그럴 줄 알고 네 것도 알아 챙겼지. 어제 공부한 그대로 펼쳐두었더구나.”

  “하, 하지만…….”



  얼른 따라오너라. 그는 그 말 한마디만을 남기고 먼저 방을 나섰다. 하늘색 옷자락이 숲에서부터 불어 온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저기, 저…, 복습도 예습도 안 했는데요. 



  “이 시는 네가 읽어 보아라.”

  “그, 그. 으음. 비바람 머금고…, 구름도 먹고 배 두드리며 돌아다니다?”

  “…….”

  “만 개의 버들잎이. 천 개의 그림자로 변신해 석양 속에서 날아다니다?”

  “…….”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지를 다 꺾어버렸대요.”

  “뒤에 계속.”

  “절반은 떠난 사람들이 꺾고, 절반은 돌아오는 사람들이…….”



  진기의 입술이 조금씩 얇아진다. 난 죽었구나…, 태민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진짜 어려운 글자들만 가득이야. 하필이면.



  “이 시는 과제라 하지 않았어?”

  “…그게요.”

  “과제가 아니라 해도 이 정도의 시는 이제 읽을 수 있어야 하지 않더냐.”



  그건 전하처럼 공부를 많이 한 선비들이나 가능한 거잖아요. 라고 말대답을 하고 싶었으나 그가 더 화를 낼 것 같아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아, 어떻게 하지.



  “쯧쯧. 온왕의 시동이 이런 쉬운 시도 하나 읽지 못하다니. 남들이 알면 웃겠구나.”

  “…자, 잘못했어요. 전하.”

  “읽고 쓰기 정도는 능히 할 수 있어야지 않겠느냐. 한 번만 읽어줄 테니 잘 기억해 외우고 뜻을 새겨 보아라.”



  그는 천천히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안개바람 머금고 운무 일으키며 항시 너울너울. 만 가지 실버들 천 개의 줄기가 석양 속에 휘날리네. 행인에게 알리나니 가지를 다 꺾지 마시게. 반은 보내는 이 위함이고 반은 돌아오는 이 맞기 위함이니.(이상은, 이별하는 정자에서 절양류 2수를 읊음. 송별시.)”



  어쩐지 슬프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기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했다. 


  

  “절반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으니 오늘은 벌을 주어야겠구나.”

  “벌이요? 으악! 싫어요. 한 번만 봐 주세요 전하!”

  “…회초리를 맞을 테냐, 베껴 쓰기 30번을 할 테냐?”



  그에게 매를 맞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곰팡이 냄새 나는 종이 위에 엎어져 밤이 이슥하도록 시 베껴 쓰기를 하는 것 역시나 끔찍했다. 놀러와서까지 딱딱하게 구는 그가 야속하다. 싹싹 비는 것만으로는 모자라고.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이 위기를 모면해야 할 텐데.



  “저어, 전하.”

  “할 말이 있느냐?”

  “아까 오면서 보니까, 저어쪽 구릉에 봄꽃이 아주 예쁘게 피어 있었어요.”

  “…그래서?”

  “이제 곧 날이 질 텐데. 날이 지면 봄꽃이 밤에 젖을 텐데.”

  “그게 지금 네가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

  “그러니까…, 날이 좋아서…, 제 말인즉슨 야외 수업을 하자는 거죠!”



  피식, 그가 작게나마 웃음을 터뜨린다. 태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의 뜻을 꺾는 게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야외수업을 하면 집중해서 열심히 공부하겠느냐?”

  “물론이죠!”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했다.”

  “그럼요!”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태민은 얼른 의자에서 일어나 진기에게로 달려가 그의 소매를 잡고 매달렸다. 얼른 나가요. 네? 날이 지기 전에요. 히히히.



  “이 쪽에 핀 푸른 꽃의 이름을 아느냐?”

  “이건…, 청초화(淸楚花)라는 꽃이에요. 얕은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방석처럼 피지요. 그리고 저쪽에 흐드러지게 피어 날리는 노란 꽃잎들은 영춘화(迎春花)예요. 원래 초봄에 피는데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들이 있나 봐요.”

  “그런데 두견화(杜鵑花)가 보이지 않아.”

  “여기엔 피지 않는 거 같아요. 저쪽 산등성이에 연홍색 무더기로 물든 게 보이시죠? 저 쪽에 피어 있어요. 가끔이지만 순백색으로 피기도 해요.”



  동목궁이 내려다보이는 낮은 둔덕 동산에 올랐다. 녹색 잔디가 깔린 양지바른 곳에 편하게 걸터앉은 진기의 옆에 힘겨워 털썩 주저앉았다. 흥에 겨워 한참 이리저리 구르고 넘어지면서도 사슴새끼처럼 종횡무진 뛰어다녀 덤불과 뿌연 꽃씨들을 가득 머리에 묻힌 채였다. 비스듬하게 내리비추는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이 희게 빛났다. 눈이 부신 듯 살짝 찌푸린 미간조차도 곧았다. 태민은 가슴이 살랑살랑 간지럽고 동시에 조금 갑갑하게 사방으로 옥죄어 옴을 느꼈다. 요즘 들어 온왕 전하를 이렇게 마주앉아 보노라면 자주 그런 증상이 일어나곤 했다. 병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기분이 이상한 건 분명했다. 소리를 크게 질러 노래라도 불러 간지러움을 해소시키고 싶었다.



  “전하. 제가 피리를 불어 드릴까요?”

  “그래. 오랜만에 듣고 싶구나.”



  태민은 얼른 허리춤에 매달고 다니는 옥피리를 꺼냈다. 열 살 생일날 선물로 진기가 준 그것은 풀로 엮어 만든 것보다 훨씬 소리도 잘 났고 음색도 영롱했다.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에게 직접 골라 준 첫 선물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소중한 물건이었다. 작은 피리를 입에 물었다. 적당히 기분 좋은 서늘함과 옥향이 풍겼다. 태민은 마음 내키는 대로 속요와 동요 몇 곡을 연달아 불어 제꼈다. 봄바람을 맞고 있는 진기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이건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오늘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싹 잊을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해 곡조를 뽑아내었다. 나중에는 제 흥에 제가 취해 자기가 제멋대로 만든 노래도 연주했다. 



  “…마지막 곡의 이름이 뭐지?”

  “네?”

  “처음 듣는 곡이구나.”

  “이거 제가 만든 것인데…….”



  다시 연주해 주지 않겠느냐? 그는 정중하게 부탁했다. 상대가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인 자신일 지라도 그는 절대 대충 대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좋았다. 태민은 먼젓번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피리를 불었다.



  “악기 연주와 작곡에 소질이 있구나. 우리 태민이는.”

  “헤헤.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하?”

  “검술도 그냥저냥. 체술도 그냥저냥. 그림도 그냥저냥. 글공부는 낙제 수준에 다도나 예법도 그런데, 음색 하나만은 잘 뽑아내는구나.”

  “…치이.”

  “그 노래에는 이름이 있느냐?”

  “없어요.”

  “건물 뿐 아니라 산과 강과 꽃에도 이름이 있는데 어찌 노래에 이름이 없어.”

  “그냥 온왕 전하와 태민이의 노래라고 해요.”



  글을 쓴다거나 뭔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질색이다. 태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기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의 따뜻한 손이 정수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간지럽고도 기꺼워 몸을 살짝 웅크렸다.



  “온왕과 태민이의 노래라. 좋은 제목이구나. 앞으로는 다른 곡도 만들어 보아라.”

  “만들어 봤자 들어 주는 사람이 없는걸요. 태연이나 종현 아저씨, 주위 형님들은 제가 피리를 불 때마다 시끄러운 풍각 놀음이라고 욕이나 한단 말이지요.”

  “흠. 그랬어? 이리도 고운 노래를 공짜로 듣는 것도 모자라 핀잔을 준단 말이냐.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구나.”



  앞으로는 내가 언제든 들어 줄 테니 걱정 말고 연습해라. 그가 다정하게 말해 주었다. 진심이 가득한 진기의 말에 너무도 기분이 좋아져 태민은 피리를 손에 꼭 쥔 채로 함박 웃었다. 진기가 태민의 피리를 쥔 손을 겹쳐 잡아 왔다. 그는 크고 둥그렇고 따뜻했다. 피리를 쥔 손아귀에 힘을 풀어 그것을 풀밭 위로 굴렸다. 그리곤 아직 다 크지 않은 자신의 빈 손끝에 힘을 꼭 주어 그를 마주잡았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의 품이 열렸기에 재빨리 굴러들어가듯 안겼다. 뒤에서 부드럽게 안은 채 양 팔을 태민의 어깨로 비끄러 내려뜨려 깍지를 낀다. 그가 태민의 어깨에 턱을 괸다. 누구보다도 더 가까이 붙은 이 자세가 참 좋았다. 



  “…우리 태민이, 이제 다 컸구나.”

  “그럼요. 열네 살이나 먹었는데요.”

  “이제 장가를 보내야겠구나. 혹여 네 마음에 품은 여아가 있느냐.”



  괜히 엉뚱한 소리를 하며 태민의 뺨과 어깨, 겨드랑이와 맞닿은 여린 팔 안쪽의 살을 천천히 매만져 준다. 장가라니. 장가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울컥 뭔가가 올라오는 기분에 뾰족하게 대꾸해 버렸다.



  “사양할래요.”

  “응? 왜 안 가겠다 하는 것이냐.”

  “전…, 전 장가 안 갑니다.”

  “하하. 어찌 그래. 설마 부끄러워 그러느냐.”



  심통이 나 등을 팩 돌려 그를 빳빳하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아버지 같고 스승 같은 그였지만 어쨌든 주군에게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버릇없는 짓이다. 그러나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머리의 뚜껑이 활짝 열릴 정도로 열불이 났다.



  “평생 전하가 절 곁에 둬 주신다 하셨잖아요.”

  “음. 그랬지.”

  “그런데 어째서 장가가란 말을 하십니까?”

  “장가를 가도 내 수하가 될 수 있는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



  그렇지만, 뭔가 싫다. 



  “그래도 싫어요. 다른 이의 사내 같은 것은 안 될 거예요.”

  “어찌 고집을 부리느냐. 사내가 나이가 차면 짝을 만나 제 갈 길 가는 것이 순리인데.”

  “그러는 전하는 왜 춘추가 훨씬 늦도록 장가를 안 드셨어요?”

  “…….”

  “전하도 장가를 안 가시는데 제가 왜 갑니까? 흥.”



  이 녀석 보게. 그가 작게 웃으며 태민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마주 대었다. 이렇게도 전하의 품이 기분 좋은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있겠는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황족이라 하나 내 몸에 흐르는 절반의 천한 피를 누군가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구나.”

  “전하가 어째서 천해요?”

  “천한 어미에게서 난 자식은 궁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고 다닐 수도 없단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그런 것이 있단다. 아주 복잡하고, 거추장스럽지만 쓸데없는 어른들의 약속이지. 너는 몰라도 된다. 진기의 포근한 숨결이 가볍고도 아련한 목소리를 묻히고 귓가에 닿는다. 



  “게다가…, 이건 비밀인데.”

  “…네?”

  “나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단다.”

  “중요한 거요?”

  “그래. 모두가 이루고 싶어 갈망하는 것이지. 성공하면 천하를 얻지만 그렇지 못하면 싸늘한 삼도천으로 가게 된다.”

  “…….”

  “곧. 그 날이 머지않았단다.”



  삼도천. 죽음 이후 건너게 되는 망자의 강 아닌가. 아름다운 그에게 그런 무서운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갑자기 무서워져 고개를 떨어뜨렸다. 훈훈하고 따스하게 불어오던 춘풍이 일순 멎어 버린 것도 같았다.



  “물론 나는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너라도 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된다.”



  얼마나 큰일이기에 그는 혼기가 넘치고 넘치도록 피붙이 하나 곁에 두지 못한 채 아직까지 홀로 있는 것일까. 얼마나 위험한 일이기에 금이야 옥이야 품에 끼고 아끼는 애동조차도 빨리 장가를 보내어 그늘에서 내보내려 하는 것일까. 그 사연이 너무도 궁금했지만 분명 어린 자신으로써는 도저히 감당해 내기 어렵고 무거운 이야기일 것임에 분명했다. 침울해져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다시 한 번 쓰다듬으며, 진기는 담담하게 웃었다.



  “젊고 어린 너의 평탄한 삶을 위해 빨리 내 품을 떠나라 하는 말이니. 허투루 듣지는 말아.”

  “…전 그런 거 잘 몰라요.”

  “…….”

  “그래도 가라고 하지 마세요.”

  “태민아.”

  “그리고 어쨌든 부인이 더 필요한 건 제가 아니라 전하이신걸요.”



  팔을 뻗어 단정히 빗어 내린 진기의 짧은 머리를 살살 매만져 보았다. 기분 좋게 부드러운 감촉에 딱딱하게 굳었던 입이 조금 풀렸다.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웃었다.



  “주군이 품은 뜻이 얼마나 크신지 어린 태민이는 몰라요. 그렇지만 장담하건데 전하는 꼭 이룰 수 있어요.”

  “…그래. 고맙구나.”

  “꼭 이뤄야 해요. 그래야 제 주군이시죠.”



  그가 웃는 틈을 타 살짝 엉덩이를 들어 올려 청수한 황자님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살거렸다.



  “언젠가 모두 성공해서 달님처럼 예쁜 경국지색의 비 마마를 맞으시기 전까지는 제가 전하의 옆에 있어 드릴게요.”

  “…뭐?”

  “여기 앉아 계세요!”

  “태민아. 대체 어디를 가느냐?”

  “볼 일이 있어요.”

  “나 혼자 두고 놀러 가느냐?”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무튼 심심하면 시라도 읊고 계시고요. 절대 어디 가시면 안 돼요!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등성이로 나는 듯이 기어 올라갔다. 연홍색 비단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난 두견화를 꺾어 한 아름 품에 안고 꽃방석이 가득 우거진 곳으로 내달렸다. 그의 눈빛처럼 화사하게 핀 금잔화를 여러 움큼, 그리고 푸르게 피어난 청초화 한 다발, 소박하고 야트막한 노란 빛을 띈 영춘화가 가득 핀 덤불 한 가운데로 들어가 곱게 뻗은 가지들만 걷어내었다. 하얗게 피어난 이름 없는 들꽃도 걷었다. 바위 숲을 지나치다 보랏빛으로 예쁘게 핀 산란(山蘭)도 찾아낼 수 있었다. 품 속 가득 꽃이 만개했다. 엉겅퀴 가시에 마구 찔리고 긁혀 팔뚝과 뺨에 생채기가 났지만 마음이 급해 아픈 줄도 몰랐다. 나뭇가지 위로 기어 올라가 튼튼한 풀줄기와 유연하고도 얇은 나뭇가지들로 뼈대를 만들었다. 알록달록한 꽃들이 다치지 않도록 이리저리 재빨리 엮어 솜씨 좋게 목걸이를 빚었다. 꽃보다도 고운 자신의 임금, 그를 위한 것이다.



  “…태민아?”

  “가만히 계세요.”



  정말 시를 읊고 있었던 것일까. 여유 있게 기대어 먼 곳 어느 지점을 응시하던 그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그의 곧게 뻗은 목에 꽃으로 엮은 목걸이를 살짝 걸어주었다. 이게 다 무어냐는 듯 의아한 눈동자로 그는 상념에서 깨어나 태민을 올려다보았다.



  “증표예요.”

  “뭐?”

  “꽃은 금방 지지만요. 어쨌든 제가 만들어 온 거니까 질 때까지라도 간직하셔야 되요?”

  “무슨 증표인지 말이나 해 주어야지. 이 녀석아. 갑자기 이게 다 뭐냐.”



  꽃이 가엾잖니. 앞으로는 이런 거 만들지 말라. 그는 나무라듯 말했다. 그런 그의 뺨 위에 가볍게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그는 놀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온왕 전하의 곁을 평생 지켜주실, 세상에서 가장 곱고 착한 비 마마가 오시기 전까지, 전하는 저 태민이의 것.”

  “…뭐라고?”

  “그리고 제게 허락을 받고 장가가실 것. 혹시 싫으세요?”

  “하하하.”



  이리 오렴. 그는 꽃목걸이를 목에 건 채 태민에게 손을 내밀어 자신의 무릎을 톡톡 쳤다. 흙투성이가 된 손을 바지춤에 슥슥 문질러 닦고, 그의 비단 무릎 위에 살며시 앉았다.



  “내가 네게 청혼을 받았구나.”

  “싫으시면 도로 돌려주세요.”

  “어찌 하려고.”

  “저 아래 계시는 상궁마마에게나 걸어 드리게요. 아니면 종현 아저씨한테 확.”

  “하하하. 그래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가시에 다친 뺨과 손가락과 손등을, 진기는 부드럽게 매만져 주었다. 한동안 웃음만 지을 뿐 그는 깊은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었다. 



  “…네 작은 손이 이렇게 열심히 엮은 정성을 어찌 늙은 상궁이나 종현이 갖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느냐.”

  “…….”

  “네가 조금 더 크면 그때 생각해 보마.”

  “지금은 싫으세요?”

  “생각해 본다고 했지 언제 싫다 했어. 어쨌든 고맙다. 하하.”



  꽃물이 가득 든 생채기투성이의 입술 위에, 그가 자신의 입술을 마주대어 주었다. 가벼운 찰나의 마주침이었지만 그것은 그 어떤 과자보다도 더 달았다. 












  아무리 허름한 별궁일지언정 자신들의 주인인 온왕을 위해 궁인들이 정성껏 준비해 둔 침실은 아늑했고 따뜻했다. 가장 내밀한 곳에 안전하게 자리 잡은 그곳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고 편안히 쉬다가 갈 수 있을 만큼 쾌적했고 고요했다. 온왕의 침실 바로 위 아래로 밀실이 장치되어 있었다. 태민은 계단을 밟고 위층에 있는 밀실로 올라갔다. 두 사람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작은 틈이 뚫려 있어 아래에 진기가 눕는다면 그가 남김없이 내려다보일 것 같았다. 밀실을 구경한 후 아래층에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 곳은 훨씬 공간이 좁았다. 한 사람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 뚫린 곳은 없지만 진기의 숨소리까지 모두 들릴 만큼 장치가 잘 되어 있었다. 대수렵 기간에는 각 황자들끼리의 신경전이 무척 치열하여 암살이나 암습 같은 불상사도 자주 일어났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 별궁에는 이렇게 치밀한 공간이 곳곳에 많았다. 종현은 진기와 태민이 자신 몰래 꽃놀이를 반나절이나 나갔다 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먹은 것 같아 보였다. 거듭거듭 종현에게 사과하는 진기를 보고 나서야 장난이 아니구나 싶어 후다닥 도망쳐 온 길이었다. 평소 진기에게 무척 정중한 종현이 역정을 낼 정도면. 으윽, 자신은 걸렸다 하면 반죽음일 것이다. 도망치는 길에 진지를 준비하는 부엌에 들러 무사들을 위해 준비해 둔 주먹밥도 몇 개 몰래 훔쳤다. 종현이 자신의 존재를 잊을 때까지는 어디에고 숨어 있을 작정이었다. 아래층보다는 그래도 위가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태민은 지체 없이 위층에 뚫린 밀실로 몸을 숨겼다. 세 끼 잘 챙겨먹긴 했지만 또래보다 키가 잘 크지 않아 고민이었다. 작고 빼빼마른 몸을 이불뭉치처럼 돌돌 말았다가 쭉 펴 보았다. 다행히 몸을 쭉 펴고 잘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이번에야말로 꼭 편안하게 자야지. 종현 아저씨에게 바쁜 일이 많이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재 재정으로 공화(共貨) 상단에 투자를 늘린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는데. 특별히 위협이 되는 요소라도 있는 것인가?”

  “…….”

  “보왕(寶王)께서는 의견을 말씀해 주시게.”

  “지금부터 바짝 투자를 해야만 합니다. 경왕(敬王)파의 움직임이 점점 치밀해지고 있습니다. 형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장정 이백여 명이 특별한 이유 없이 어딘가로 차출되어 가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이 경왕이 장악한 하운(何澐) 상단의 어음을 받은 이들이지요. 그들이 비밀리에 사병을 양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요성은 체감하지만 피해를 완전히 복구하기 전까지 금전에 관한 것은 심사숙고해야만 한다.”



  무슨 소리지……. 시끄러워. 태민은 인상을 쓰며 뒤척였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귀를 가렵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들은 여간해서는 조용히 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적어도 다섯 명이 모여 끊임없이 떠들고 있었다. 잘 수가 없잖아. 조용히 좀 해요.



  “경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인가?”

  “예. 게다가 문왕(門王)과 추왕(推王)은 영련 장군이 장악하고 있는 동 군부 세력을 흡수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척 호전적이고 잔인한 여인이지요. 묘족(苗族) 전형의 여걸입니다.”

  “그렇다면 영문호 대장군이 벌써 은퇴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 영련 장군은 그의 딸입니다.”

  “단독 세력으로는 이목을 끌기가 힘드니- 일단 뭉치고 보자는 식이군.”

  “예. 이제라도 그들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이는 명백한 위협이니 묵과할 수 없다. 대응책은?”

  “우선…….”



  정신은 더더욱 또렷해졌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태민은 입가에 쭉 흐르는 침을 닦으며 뒤척였다. 



  “보왕의 건의사항을 수락하겠다. 어쨌든 적이 될 자들은 빠르게 파악하고 싹이 자랐을 때부터 잘라 내는 것이 중요하지. 경왕이 가장 위협적이니 그곳에 가장 많은 이목을 집중하도록 하고, 문왕은 연합 작전을 쓰는 등 많은 애를 쓰고는 있으나 가엾게도 얼마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중요한 것은…….” 



  끼익, 끼익. 낡은 나무가 태민이 움직이는 대로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운호 장군과 양서문 장군과 연락은 제 때 되고 있겠지?”

  “각각 도용부(度踊府)와 염황부(焰荒府)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령을 내리시는 대로 지체 없이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 합니다. 경운국(耕雲國) 출신의 무사들 이백여 명이 더 합류할 예정입니다.”

  “…군비 지원이 시급하겠군. 잠깐. 어디서 소리가 나지 않는가.”

  “…….”

  “종현.”

  “예, 전하.”



  - 콰장창!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가 싶더니 쾅, 하는 굉음이 울리며 태민을 덮쳤다. 끄악 소리도 내지 못할 짧은 시간에 천장이 박살나고 태민은 그대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누구냐!”

  “아야야…….”

  “저놈을 포박하라!”



  검은 옷을 입은 무사들이 달려와 눈 깜짝할 사이에 태민을 잡아 금강으로 만든 수갑으로 결박해 꿇렸다. 굴러 떨어진 아픔도 아픔이거니와 기습을 당한 턱에 너무나 놀라 제대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지? 너무 놀란 나머지 몸에 쥐까지 났다.



  “태민아.”

  “전하!”

  “풀어주어라. 내 애동이다.”



  몇 개의 초만을 켜 둔 채, 너 다섯 명의 사람들이 둘러서서 무언가를 논의 중이었다. 흑의 무사들이 태민의 손을 묶은 수갑을 풀어주었다. 가운데에 서 있던 진기가 몸을 굽혀 태민에게로 다가왔다. 겁에 질려 울음이 입술을 타고 흘러 나왔다.



  “태민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흐읍, 전하아.”

  “어찌 이리 추운 곳에서 자고 있었어. 봄이지만 아직 밤이 찬데.”



  다정하게 품어주는 진기의 체온에 창피함도 잊고 목을 놓아 울어 버렸다. 종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를 간다.



  “전하. 특급 기밀을 엿들은 자입니다.”

  “…아무리 애동이라 하나 비밀 회합에 허락도 없이…….”

  “입막음을 위해 죽이셔야 합니다.”

  “만에 하나 경왕부에서 저 아이를 잡아 고문이라도 한다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태민을 무섭고 차가운 눈길로 주시하고 있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있었던 중이었다. 자격 없이 기밀사항을 엿들은 자는 처형하여 후환을 막는 것이 군율이었다. 그렇지만…, 전하 살려주세요.



  “그만해 둬라.”

  “전하. 사사로운 정으로 대업을 그르치실 작정입니까?”

  “그 말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기범.”

  “…….”

  “내가 아끼는 아이이니 불상사는 없을 것이다.”

  “전하. 아니 형님.”

  “어리긴 하나 내게 해를 줄 아이는 아니다.”

  “…….”

  “내가 믿는다.”


  

  진기는 덜덜 떨리는 태민의 몸을 가볍게 쓰다듬어 진정시켜 주었다. 풍랑을 만난 듯 거세게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있던 손끝과 눈, 심장이- 그를 마주하니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괜찮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저씨들이 다만 조금 놀라 저러는 것이다. 중요한 회의를 하고 있었거든.”

  “전하. 흐읍. 무서워요.”

  “잠시만 나가 있어라. 밖에 상궁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그네들과 함께 있어.”

  “…….”

  “그럴 수 있지? 너는 나를 지켜 줄 용감한 아이가 아니더냐.”



  그의 부축이 없었더라면 기가 질린 채 걸어 나가다가 꼴사납게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진기가 문 밖까지 태민을 데려다 주었다. 비록 당장 죽여 없애겠다는 듯 태민을 거세게 노리는 험상궂은 사내들의 기운에 오금이 후들후들 떨렸지만 진기의 부드러운 손길은 그들의 살기로부터 태민을 지키고 흔적도 없이 그것들을 눌러 무효화하는 힘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장승처럼 꼿꼿하게 서 있는 상궁과 시녀들 틈바구니에서, 태민은 오랫동안 숨어 있었다. 다리가 저리고 손톱 끝까지 쥐가 날 정도로 아팠지만 알 수 없이 가라앉은 공기와 진기를 둘러 싼 위험의 냄새에 안심하고 어딘가로 다시 자러 갈 수 없었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기원으로, 태민은 자정의 종이 희미하게 울려 퍼질 때까지 서 있었다. 



  “…그럼 이만 소신들은 물러가 보겠습니다. 전하.”

  “무운을 비네.”

  “다시 뵈올 때까지 무사히 계시옵소서.”

  “평안히.”



  그들의 비밀 회합이 모두 마무리 지어진 때는 자정이 훨씬 지나 부엉이조차도 침묵을 지킬 깊은 밤이었다. 붉은 횃불에 물든 그들의 얼굴은 괴수처럼 기이하게 일그러져 본 모습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두려움에 태민은 몸을 떨었다. 



  “태민이 거기 있느냐.”

  “…전하.”

  “이리 온.”



  모든 것이 불타올라 일그러진 붉은 밤 한가운데에 오롯이 선 그는 그의 맑은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을 부르는 잔잔한 목소리에 주문에서 깨어나듯 정신이 들었다.



  “어디 보자.”

  “…….”

  “아까 호되게 굴러 떨어졌던데 다친 곳은 어떠냐.”



  그는 바스락거리는 옷자락을 걷고 태민을 부드럽게 품어 따뜻한 방 안으로 이끌었다. 아까보다 더 많이, 더 환하게 밝혀진 촛불 아래에 앉은 그는 차가운 바닥에 사정없이 부딪쳐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은 어린 몸을 천천히 주물러 주고, 긁히고 멍든 곳을 찾아내어 정갈히 연고를 발라 주었다. 새끼 짐승처럼 훌쩍이며 태민은 아야야, 소리만 낼 뿐이었다.  



  “방금 보았던 이들은 내 사람들이다.”

  “그 무서운 아저씨들이요?”

  “그래. 짐작했듯이 내가 하려는 일은 몹시 위험한 일이란다.”

  “…….”

  “친우, 형제, 가족, 부하, 사랑하는 이, 모두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썩은 가지 치듯 잘라내야 하지. 부나비처럼 뛰어들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긴 여정의 끝이 불바다가 될지 금강석 옥좌가 될지. 그저 끊임없이 이어진 가시밭길만을 걸어야 한다. 그만큼 비정(非情)한 길을 나는 걷고 있지. 그리도 위험한 길을 어찌 아무와 걷겠느냐.”

  “…전하?”

  “대답해 보아라. 네 비록 어리다지만 그렇다 하여 네 언약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테니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말해 봐라.”



  따뜻한 불빛이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다. 그가 내뱉는 말은 만년설산보다도 더 차갑고 무쇠철산보다도 더 무거웠다. 그러나 태민은 샘처럼 솟아오르는 두근거림을 내리눌러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온 몸 동맥 깊은 곳에 불씨를 심은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의 천하를 담은 눈동자가 덜 자란 소년의 영혼을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함께 가주겠는가. 그대 내 사람이 되겠는가. 그는 묻고 있었다. 심장의 거센 고동이 소년을 뜨겁게 달궜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화산의 용암처럼 목을 타고 튀어나올 것 같았다. 



  “네 나를 따르겠느냐?”



  이제 그가 없는 자신은 상상할 수 없었기에. 어쩌면 그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이미 명백히 쓰인 6년 전의 답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이 뜨겁게 메여 대답할 수가 없었기에 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진기는 웃음 지었다.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숨을 더 몰아 쉴 틈도 없었다. 끊임없이 굴러가는 거대한 바퀴 소리가 들렸다. 아무것도 측량할 수 없는 어둠이 그들 앞에 펼쳐져 있었으나 더 이상 털끝만큼도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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