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즈.”


커크는 본즈 팔을 베고 누워 있었다. 커크는 그렇게 부르면서 시선을 살짝 위로 올렸다. 본즈는 말없이 진득하게 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커크의 부름에 살짝 입맞춤을 해줬다. 커크는 민망해져서 괜히 웃기만 했다. 처음이랄 것도 없었지만, 본즈 앞에서는 모든 게 부끄럽기만 했다. 이렇게 품 안에 안겨있는 것도 그랬고, 깨어나자마자 본즈 얼굴이 바로 보이는 것도 그랬다. 본즈는 이미 깨어난 지가 꽤 된 것 같은데도 팔 저린 티 한 번 안내고 커크를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도 그랬고.


“잘 잤어?”


본즈는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주면서 한 번 더 입맞춤을 했다. 커크는 몸을 비척비척 움직여서 본즈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커튼을 쳐뒀는데도 햇빛이 들어오는 게 벌써 해가 중천에 뜬 모양이었다. 오늘은 주말이었다. 그리고 이곳은 커크의 방이었다. 물론 본즈의 방이기도 했다. 그러니 둘 모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커크는 이런 나른한 아침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남친 방에서 밤을 보낼 때면, 아침이 되는대로 허둥지둥 방에서 빠져나와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는 남친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지만, 있더라도 그는자느라 손 한 번을 흔들어주질 않았다.


“오늘 뭐해?”

“글쎄. 네가 하자는 거.”


커크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았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이렇지. 커크는 괜히 본즈의 코를 살짝 물어봤다. 본즈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게 진짜 사람은 맞는 것 같았다. 전남친은 사실, 좀 바빴다. 커크는 항상 남친의 시간에 맞춰가며 연애를 해야 했다. 다른 일정이 있더라도 급한 약속은 미뤘고 수업은 쨌다. 당연히 하루 종일 붙어 있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난 집착하는 애들이 제일 이해가 안 가더라. 너는 안 그래서 좋아. 남친이 그렇게 말하면 커크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는 없었다.


“너는 뭐하고 싶은 거 없어, 본즈?”

“뭐... 그냥.”


본즈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또 결정권은 커크한테 넘어왔다. 커크는 혀로 입술을 쓸면서 고민에 빠졌다. 이런 걸 해봤어야 알지. 애인이랑은 밤에나 만나는 줄 알고 있던 커크가 무슨 괜찮은 생각이 날 리가 없었다. 사귀는 척을 할 때는 오히려 해보고 싶은 것도 많고 그랬는데, 본즈가 이걸 좋아하려나 하고 생각하다보면 그냥 머릿속이 텅텅 비었다. 본즈와는, 이제 안 그러면 허전할 정도로 끈덕지게 붙어 다닌 줄 알았는데 막상 생각을 깊게 해보면 자기가 본즈에 대해 아는 게 얼마나 있나 싶었다.


“먼저 씻을래, 짐?”


커크는 자동적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본즈는 허리를 받쳐서 커크를 일으켜 앉혀줬다. 그리고 서랍에서 속옷까지 척척 꺼내서 손에 쥐어줬다. 이건 둘의 습관이었다. 아침마다 커크가 일어나기 귀찮다, 씻기 귀찮다 해대는 바람에 생긴 습관. 커크는 가만히 앉아서 모이를 받아먹고 있는 아기새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본즈는 커크의 몸에 감겨 있는 더러워진 이불을 걷어내서 팡팡 털었다. 커크가 생각에 빠져서는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본즈는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서 커크를 일으켜 세웠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거세게 쏟아졌다. 커크는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행히 물이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그걸 묻어줬다. 맥코이 걔는 니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남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커크가 그와 헤어진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아마도, 본즈와 사귀게 된 것도 똑같이 며칠이 지났다. 하지만 커크는 아직도 모든 게 불안하기만 했다. 물론 본즈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게 동정이래도, 이 정도의 동정이라면 커크가 되레 감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마음이 그렇게 되질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제가 복에 겨운 모양이었다.


커크는 본즈가 씻는 동안 본즈의 책상을 구경했다. 본즈는 기숙사에 머무는 시간이 긴 편이라 책장이 꽤 꽉꽉 차 있었다. 하지만 정리가 제법 잘 되어있어서 한눈에 너저분하다는 인상은 별로 들지가 않았다. 이건 아직도 있네. 커크는 책상 한 쪽에서 철제 물병을 발견했다. 처음 본즈가 커크와 셔틀에서 만나던 날 들고 있던 그 병이었다. 커크는 그 때 입안에 감돌던 씁쓸한 술맛이 생각나는 것 같아서 피식 웃었다. 그 날이 아니었다면 둘이 지금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이러나저러나 본즈를 만난 건, 커크에게는 꽤 행운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지금이라는 거였다. 지금, 커크는 많이 지쳐있었다. 전남친과의 연애는 갈수록 커크에게는 독이었다. 커크는 이제 혼자 더 많이 좋아하는 연애는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서 커크 앞에 나타난 사람은 본즈였다. 본즈는 항상 커크에게 다정하게 대해줬다. 하지만 본즈는 절대로 확답을 주는 법이 없었다.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먼저 시작하는 건 항상 커크였다. 이게 동정이라면 본즈는 차라리 여기서 그만둬주는 편이 좋을 거라고, 커크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없나? 커크는 복도를 한 번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연구실 문 쪽으로 다다닥 뛰어갔다. 오늘 할 일이 좀 많다며 미안한 표정을 짓더니, 본즈는 연구실 안에서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본즈가 이쪽으로 몸을 돌리는 바람에 커크는 얼른 몸을 살짝 숨겼다. 놀래켜 주려고 말도 안 하고 온 거라 일찍 들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즈는 이상하다는 듯이 문쪽을 힐끗 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서 샘플에 집중했다. 내 남친 섹시하네. 커크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혼자 작게 키득키득 웃었다.


커크는 근래에 생각이 많았다. 이번만큼은 꼭 제대로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생각을 하다 보니 커크가 깨달은 건, 지금까지는 여태 본즈가 자기에게 맞춰주기만 했다는 거였다. 굳이 본즈가 어떤 연인인가를 고민할 것도 없었다. 친구일 때부터 본즈는 커크에게 일방적이었다. 커크는 무의식중에 본즈에게 챙김을 받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면 본즈가 데리러 왔겠구나 하고 문 앞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했다. 물론 본즈도 기대를 저버리는 법이 없었고.


연애에는 영 서툴렀지만, 사랑은 주고받아야 한다는 건 커크도 알았다. 아무리 해도 본즈만큼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커크는 본즈의 반의반만큼이라도 잘해보고 싶었다. 큰 걸 바라는 건 아니었다. 본즈가 그냥, 얘랑 만날 만하네 라는 생각 정도만 해줬으면 했다. 사람의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게 어렵다는 건 커크가 가장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커크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 안을 살폈다. 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게 본즈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누구세...”


본즈는 문을 반쯤 열어놓고는 손이 딱 멈췄다. 본즈의 몸집이 열린 문틈을 꽉 메우고 있었다. 안에서 문 쪽을 본다 해도 커크를 가리고 있는 본즈의 등짝밖에는 보이지 않을 거였다. 본즈의 놀란 표정을 보면서 커크는 입모양을 뻐끔거려서 안녕 하고 인사를 했다. 본즈는 뒤를 힐끗거리더니 한 발자국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한 팔로 커크를 안고서 한 팔은 등 뒤로 뻗어 천천히 문을 닫았다. 커크는 본즈의 하얀 가운 위에 묻은 얼룩을 꾹꾹 만져봤다. 본즈는 소리를 잔뜩 낮춰서는 속삭이듯 말을 했다.


“왜 왔어?”

“그냥.”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아니야. 안에 다른 사람 있어?”

“아... 응, 몇 명.”

“그렇구나.”

“잠깐만. 금방 끝나. 기다리고 있을래?”


본즈는 커크를 모퉁이 뒤로 데려갔다. 그리고 금방 끝내고 오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고서 커크를 꽉 안아주고 다시 돌아섰다. 커크는 모퉁이 뒤에 숨어서 복도 쪽으로 고개를 빼꼼 빼고 있었다. 아직은 들켜서 좋을 거 없다는 데는 둘 다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학교 안에선 커크 전남친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소문이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그냥 조용히 연애하는 게 좋겠다는 게 둘의 생각이었다. 커크는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서서 숨을 죽였다. 차가운 벽에 등에 닿으니 오히려 지금이, 본즈와 연애 중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몰래 만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늦은 시간이었지만 복도에는 간혹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커크는 인기척이 느껴질 때마다 몸에 바짝 힘을 주고 침을 삼켰다. 다행히 발걸음은 항상 커크가 있는 쪽을 멀리 돌아서 스쳐지나갔다. 한참 조용하다 싶어서 몸에 긴장을 풀고 있는데 또 발걸음 소리가 들었다. 커크는 흡 하고 숨을 삼켜봤지만 그 발걸음 소리를 점점 가까워져왔다. 커크는 눈만 살짝 돌려서 밑을 바라봤다. 모퉁이 너머로 발 하나가 턱 나왔다. 아. 커크는 그 정체를 깨닫고 웃음을 터트렸다.


본즈는 벽에 손을 짚고서 진하게 키스를 해왔다. 그건 긴 시간을 기다려온 게 결코 서운해지지 않을 정도로는 좋았다. 커크는 쪽쪽 소리가 나게 요란하게 본즈의 입술을 빨아댔다. 조용해진 복도에 둘이 키스를 하는 소리만 울려댔다. 볼 테면 보라지. 나 본즈랑 사겨. 키스도 해. 아니, 짧은 거 말고. 그건 뽀뽀잖아. 사실 더한 것도 했어. 커크는 짐짓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본즈와 코를 부벼 댔다. 그리고 본즈는 진득하게 키스를 끌어갈 줄 알았다. 솔직히 그런 입맞춤은 자기 취향이 아닌 줄로만 알았는데, 커크는 그 생각을 완전히 수정해야 했다.


“오래 기다렸어?”

“응.”

“미안. 내가 빨리 끝낸다고 했는데...”

“다리 아파.”

“어? 어, 업어줄까?”


커크는 웃음이 터지는 바람에 고개를 살짝 돌려야 했다. 조그만 엄살에도 되레 펄쩍 뛰며 반응해주는 본즈가 귀엽게 보였다. 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거 몇 분 기다렸다고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했을까봐. 커크는 진지하게 등을 돌리려는 본즈를 얼른 만류했다. 본즈 허리를 부러뜨릴 순 없지. 허리는 소중한 거니까. 커크는 본즈 목에 매달려서는 입맞춤이나 몇 번 더 했다. 본즈는 벽에 기대어 있느라 차가워진 커크의 등을 감싸주며 같이 입을 맞춰왔다.


“들어가도 돼?”

“어딜? 연구실?”

“응. 누구 있어?”

“아니, 이제 아무도 없긴 한데...”

“들어가 볼래.”


본즈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겨 있는 연구실 문을 다시 열어줬다. 생도들이 다 빠져나간 연구실은 불이 다 꺼져있었다. 커크는 불을 키려는 본즈를 그냥 말렸다. 본즈는 하얀 가운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뒀다. 커크는 한 쪽 서랍장 위에 뚜껑이 잘 덮여 정리되어 있는 샘플들을 구경했다. 그 중엔 수업 시간에 이름을 한 번쯤 들어본 것도 있었지만, 보고도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커크는 일렬로 쭈욱 걸어가다가 의자를 하나 빼서 걸터앉았다.


“나 진찰해줘.”

“...왜? 어디 아파?”

“농담도 못해.”


커크는 투덜거리며 의자를 빙글빙글 돌려댔다. 본즈는 팔짱을 끼고 커크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평소에는 트라이코더를 들고 쫓아와도 도망만 가던 커크였으니 이렇게 변덕을 부리는 게 수상하게 보일만도 했다. 본즈는 그러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트라이코더를 들고 와서 병원놀이에 장단을 맞춰줬다. 본즈는 커크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뺨에 트라이코더를 대어 가며 진찰을 했다. 커크는 그냥 손을 모은 채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제가 어디가 아픈가요, 닥터?”

“글쎄요. 하이포 한 대 맞아야겠는데.”

“뭐야! 그건 동의 안 했어.”


커크는 얼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커크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고서 경계하는 눈으로 본즈를 내려다봤다. 본즈는 양손을 펼쳐서는 트라이코더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확인시켜줬다. 알았어, 안 해. 장난이야. 커크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본즈를 흘겨보면서 팔을 아래로 내렸다. 본즈는 커크의 손을 잡아서 천천히 다시 커크를 앉혀놓았다. 커크가 아직 토라진 표정을 하고 있으니, 본즈는 눈을 찡긋하더니 트라이코더를 뺨에 대었다. 수치를 읽어서는 옆에 적어놓는 게 – 의사는 맞지만 – 제법 진짜 의사 같았다.


“상태가 심각하네요.”

“거짓말. 닥터 돌팔이이신 것 같은데요.”

“정말인데. 의사 말을 안 믿네.”

“알았어. 그럼 치료해주세요.”

"치료?"


커크는 얼굴을 확 들이밀어서 짧게 입맞춤을 했다. 본즈는 놀라서는 트라이코더를 커크 뺨에서 천천히 떼어냈다. 커크는 민망함에 괜히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 발을 앞뒤로 흔들어대며 마주앉은 본즈를 툭툭 쳤다. 본즈는 망부석처럼 굳어서는 커크만 가만히 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애교였는데, 본즈가 저렇게 아무 대꾸도 없으니 커크는 더 부끄러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 갔나. 커크는 본즈의 눈치를 보며 일부러 웃어 보였다. 커크는 트라이코더를 쥔 본즈 손을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와서 대게 했다.


"이제 건강해졌지?"

"실없기는. 그래, 멀쩡하네."

"진찰 끝났어요, 닥터?"

"네, 지미 어린이."

"그럼 이제 상 줘."

"상?"

"어린이는 상이 필요하단 말이야."


본즈는 피식 웃고는 트라이코더를 내려놨다. 그리고 굳게 쳐져 있는 커튼을 바라봤다. 연구실 안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들리는 소리는 둘의 숨소리밖에는 없었다. 커크는 발 끝으로 괜히 바닥을 긁었다. 어차피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누가 갑자기 들어오거나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보안 상의 이유로 연구실에는 감시카메라도 안 돌아간다던데. 커크는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매만졌다. 본즈는 문득 커크의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진득하게 빨아올렸다. 커크의 손가락이 매끈한 책상 위에서 쭉 미끄러졌다.





"다음에 봐, 짐."


생도들이 손을 흔들며 커크를 스쳐 지나갔다. 커크는 마주 인사를 해주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왔다. 오늘은 아무리 고개를 빼고 기다려봐도 본즈는 없었다. 일주일 중에 유일하게 둘의 쉬는 시간이 겹치지 않는 때였기 때문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종일 붙어있고는 싶었지만, 그렇다고 본즈더러 수업을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였다. 커크는 아쉬움에 입술을 안으로 꾹꾹 밀어넣고는 길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어차피 짧은 쉬는 시간이라 금방 다음 강의실로 이동해 봐야하기 때문이었다. 커크는 아무도 없는 샛길을 따라 걸었다.


"지미."


커크는 어깨를 짚는 익숙한 손길에 온몸이 쭈뼛 섰다. 커크는 놀라서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다시 내뱉었다.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커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굳이 보지 않더라도, 저런 목소리로 자기를 부르고, 저런 손길로 자기를 세워놓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커크는 앞을 본 채로 억지로라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간 지난 시간은 모든 기억이 미화되기엔 너무 짧았다. 커크는 살짝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되었나 싶었다.


"이거 놔."

"지미, 제발..."


커크는 손을 확 뿌리치고 뒤를 돌았다. 그는 상처를 주다못해 그 자리를 아예 후벼파놓고 가놓고는, 이제 와서 뻔뻔스레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 그는 손이 뿌리쳐진 그 반동만으로도 크게 휘청거렸다. 그럴 정도로 그는 몸이 꽤 수척해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불쌍하게 보이는지를 연구라도 했나 싶었다. 그는 잔뜩 생채기가 나 있는 팔을 커크에게 뻗었다. 커크는 얼른 한 걸음 물러서서 그 팔을 피했다. 영원히 그를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런 모습으로 구질구질하게 굴지만은 않기를 바랐다. 커크는 그나마 있었던 한줌만큼의 좋은 기억도 다 바스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안 그쳐?"

"왜 그래, 짐. 나 정말..."

"나 본즈랑 사겨."

"알아."

"그럼 좀 비켜."

"그런 거, 그런 거 아니야."


전남친은 또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커크에게 닿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커크는 그 자리에 서서 헥헥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일부러 독한 말을 내뱉어놓고도, 커크는 머릿속이 온통 윙윙 울리는 것 같았다. 그에게는 한 번도 이렇게 말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팔을 휘젓더니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벽에 고개를 기대고서는 흐느끼는 모습이 자뭇 처량하게 보였다. 긴 한숨이 나왔다. 지금 등을 돌려 뛰어가버리면 그가 어떻게 붙잡겠냐만은, 커크는 그렇게까지 그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지미. 미안해."

"...."

"난 그냥, 니가 떠날까봐 불안해서."

"그만해."

"내가 뭘 몰라서 그랬어, 응? 넌 알잖아. 이해하잖아."


"야!"

"...."

"왜 왔어. 용건만 얘기해."


커크는 일부러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그의 눈물에 홀딱 넘어가버릴 것 같았다. 그래, 남친이 정확하기야 했다. 커크는 마음 한켠에서는 그가 정말로 변했단 걸 믿고 싶었다. 그는 원래 커크의 시간표나 동선을 외우고 있는 사람도 아닌 줄로만 알았으니까. 커크는 애써 눈을 감고서 본즈를 떠올렸다. 커크는 조금 어렸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어리숙하다고 해서 전남친처럼 행동하는 게 아니란 것쯤은 알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에게 갖는 감정도, 아마 사랑은 아니라는 것도.


"지미. 나 좀 도와줘."

"뭐를."

"도와줘, 응? 나 좀 도와줘..."

"그니까 뭐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커크는 결국 턱턱 걸어서 그 앞까지 다가갔다. 커크의 전남친은 원래가 불안한 사람이기는 했다. 그는 감정기복이 심했다. 그리고 기분이 나쁠 때면 정말 미친 사람같이 굴 때도 있었다. 그런 모습은 커크가 가장 많이 봐왔으니 커크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떠난 것 때문일까. 커크는 그런 생각에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남친은 종종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커크는 그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커크는 옆에 서서는 계속 다그쳐서 말을 캐물었다.


"뭘 말하는 건데. 어?"

"...."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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