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의사생활 OST Part 4] 규현 (KYUHYUN) - 화려하지 않은 고백


W. 하늘령




보름동안 작성했던 레포트가 날아가 버린 건 마감 기한 하루 전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 하루를 꼴딱 새고 난 뒤, 겨우 수업 시작 오분 전에 과제를 출력하기 위해 달려간 학교 앞복사실은 오늘따라 문을 닫았다. 허겁지겁 몇 계단씩 가랑이가 찢어져라 한꺼번에 뛰어올라 문을 박차고 들어간 전공 과실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양치는커녕 세수도 못하고 야구 모자를 대충 푹 눌러쓴 채 들어온 이와이즈미를 녀석은 바로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백스텝해서 사라지고 싶었지만, 이 레포트는 전체 성적 50%을 차지하는 중요한 과제고. 이 수업은 심지어 재수강 과목이다. 즉, 이와이즈미는 이번 학기에 꼭 졸업을 해야만 했다.




“ ... 어 오랜만이네 ”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기로 했다. 밤을 꼴딱 새고 비몽 사몽한 정신으로 종이에 무슨 소릴 이렇게 많이 지껄였던 건지, 뒤에서 녀석의 빤한 시선을 느끼며 툭툭 종이를 뱉어내는 프린터를 노려보기를 한참이다. 겨우 마지막 장을 느릿하게 토하는 걸 낚아채 달깍, 집게를 끼운 시간이 수업이 시작 한지 3분이 경과한 뒤였다. 튀어 나가려는 이와이즈미의 뒷통수에 능글맞은 한마디가 꽃힌다.




“ 이와쨩 프린트 값 안냈어! ”

“ ..! 나 나중에 ”

“ 앗 먹튀 ”



우라질 급해서 그래! 이 똥같은 놈아. 쾅, 닫히는 문 사이로 장난스레 휘어진 녀석의 눈이 마주친 거 같다. 쭈욱-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이 길게 느껴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예전 그 때처럼. 심장이 죄인다. 이렇게 다시 보고 싶지 않았는데.  오이카와 토오루.



...



다행히 교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보다. 강의실 뒷자리 창가에 겨우 앉아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이와이즈미가 숨을 고른다. 그래 뭐 앞으로 어떻게든 피해야지, 무서워서 피하는 건가 뭐.


“ ... 똥이네. ”


중얼거린 이와이즈미의 말에 앞자리에 앉은 히피펌을 한 여자 후배가 움찔거리며 돌아본다. 얼른 고개를 숙여보지만. 정말 일진 더럽다. 피하려던 똥이 강의실 앞문을 당당하게 열고 들어왔으니 말이다. 꾸욱, 아랫입술을 물며 이와이즈미는 방싯 거리고 웃는 오이카와 토오루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질끈 눈을 뜬다.



“ 이번 학기부터 조교를 맡은 오이카와 토오루입니다. 오늘 교수님께선 개인 사정으로 수업진행이 어려우셔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



그래 몇 번이나 휴학을 하고 돌아온 학교에 진작 졸업했어야 할 저 녀석이 왜 있는 건지 진지하게 좀 생각해봤어야 했다. 지난 학기에 한 학번 위였던 아츠코 누나가 조교였다고 했으니, 이번엔 뭐 동기들 중 하나가 조교 를 맡을 순번이겠거니 생각은 했다.


“ 과제는 모두 앞으로 모아서 내주시구요. 다음 시간까지 ... ”


.. 이 수업은 과제 포함해서 제가 주요 공지 자주 확인해 드릴 테니까,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꼭 학과실에서 잘생긴 조교씨를 찾아주세요. _< 앙큼하게 윙크 하는 저 새끼를 또 봐야한다니. 이와이즈미는 비명대신 끙끙 앓으며 강의실 책상에 몸을 수그렸다. 앞자리에 거대한 히피펌을 한 여후배 머리칼 속에 제 모습이 가리길 바라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서 뒷문으로 빠져나가가려는 순간. 한웅큼 레포트를 들고 옮기던 긴 팔과 탁- 하니 부딪혀버렸다.



으악, 휘청거리는 허리를 얼른 받쳐 안는다.


“ 우와 이와쨩 여전히 힘 좋네. ”


탁! 금방 손을 놓았지만, 중심을 잡은 오이카와가 레포트의 절반을 떠넘긴다.


“ 뭐냐? ”



아까 프린트값 대신 좀 들어줘. 나이 먹으니 계단 오르내리기도 힘드네. 아참 이와쨩 점심은 먹었어? 같이 먹을래? 이번 학기엔 늦게 복학한 사람도 없고.. 아마 동기들 중엔 우리 둘뿐인거 같더라. 이와쨩 이번 학기 마지막이지? ... 종알종알, 3층까지 학과실 가는 길이 이렇게 길었나. 반대쪽 귀에서 흐르는 게 피 아니면 저 녀석 침방울 일거 같은데.


“ 나 바빠. ”


에 졸업반이라 수업도 별로 안듣잖아. 볼을 부풀리며 하는 오이카와의 말은 가볍게 무시한다. 스터디, 알바. 시간 없어. / 그렇다고 밥 먹을 시간이 없어? / 애써 말을 끊어보려 해도 끈질기게 말꼬리를 붙잡는 오이카와의 집요함에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굳는다. 야 너, 아무리 오랜만에 봤어도.



“ 우리가 마주보고 밥 먹을 사인 아니지 않냐? ”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끔한 저 표정을 보라지. 까끌하게 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이와이즈미는 큼. 기침을 삼킨다. / 우리 굳이 친한 척 하고 그러지 말자 새삼스럽게. / 동기끼리 밥도 못먹어? 이와쨩은 참 예전에도 그랬지만 여전히 냉정하네.., 삐죽 입술을 내미는 오이카와를 보니 다시 부아가 치민다.



“ 나는 너랑 밥 먹기 싫어 ”

“ 우와.. 상처다. ”



상처받았대. 우라질 똥덩어리 같은 새끼 웃을 뻔했네. 눈을 부라리며 이와이즈미는 쾅- 과실문을 닫고 계단을 뛰어내려온다. 쾅쾅- 심장이 아프게 조이고 등줄기로 다시 싸한 식은땀이 흐른다. 우엑. 먹은 것도 없는 속이 울렁거리기 까지 한다. 또다. 저 녀석 옆에서면 머릿 속이 노래지다 못해 세상이 빙빙 돈다.




...



“ 2000엔입니다. ”


삡- 철컹 소리와 함께 따각 거리는 구두소리가 사라지고 나니, 조금 정신이 드는 거 같다. 익숙한 일터인 아르바이트 장소에서 기계적으로 바코드를 찍고, 매대 물건을 채우고, 사람이 한적해질 만한 새벽 시간.. , 짧은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훑고 쓸며 이와이즈미는 조금 꺼진 눈 아래를 꾹 눌렀다. 작게 틀었던 매장 라디오 볼륨을 약간 키우고  등받이가 낮은 의자에 앉아 발끝으로만 빙글 몸을 돌리다. 멍하니 이와이즈미는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본다. 지독한 악몽을 꾼 것이 아닐까 스스로 위로 해보고 싶었지만 녀석의 존재감이 너무 막강했다.


“ 한 학기만.. 참으면 되겠지. ”


수업을 같이 듣는 것도 아니고, 불편하긴 하겠지만 졸업반인 저와 학과실 조교인 녀석이 마주칠 일이 얼마나 더 있겠는가. 또 있다고 해봤자 한 학기. 불과 몇 주만 더 참으면 되는건데. 용기를 갖자 희망을...! 띠딕, 도착한 문자음에서 희망의 불씨가 꺼지는 걸 느낀다. 우라질.



[ 모레 수업은 휴강이야. 이와쨩 우리 놀러갈래? ]

[ 뭐야. 내 번호 어떻게 알았냐? ]

[ 학과실 학생명부! ]

[ 개인정보를? 조교가? ]

[ 수업공지 알려준 건데?! ]

[ 누가 공지를 개인적으로 날려? 미친 거 아냐? ]

[ 특별관리♥ ]

[ 지워. ]

[ 그럼 누가 수업공지 해줘? 이와쨩 친구 없잖아 ]



“ 누가 친구가 없어 !!! ”



휴대폰에 소리를 질러도 닿지 않을테니. 갑자기 화를 내며 일어서는 통에 휘청거리며 의자 아래로 떨어질뻔 했지만. 냉정함을 잃어선 안된다. 후웁.. 진정해 이와이즈미. 크게 숨을 고른다. [ 사적인 문자 하지마라 ] 상대하지 말자. 그래. 괜히 말 섞어서 좋을 일이.., 울리는 벨소리에 이번엔 혈압이 올라 숨이 멎을 뻔했다.



" 미쳤냐? "

" 문자 말래서 통화한건데 "

" 전화도 하지마 새끼야! "

" 이와쨩.. 귀 아파... "

" 진짜 정상이 아니구나? "

" 아까 이와쨩이 같이 점심 안먹어줘서 나 배고프다구 "

" 내 말 안 들리냐? "

" 뱃 거죽이 등에 달라붙어서 .. 채점하다 쓰러질 뻔 했어 "

" 끊어라 "

" 밥 싫음 술? "

" 끊었어 "

" 밥을 술을? "

" 너 "



물렁한 대답이 나오기 전에 서둘러 끊었다. 꾹 눌러 전원도 껐다. 혹시나 싶어 휙휙 편의점 유리문 밖까지 내다 본 뒤 지끈 거리는 이마를 짚어본다. 유치하게.. 말싸움이라니. 왜 그 녀석이 하는 헛소리는 받아치지 않으면 속이 부글거리고마는지, 끊었던 담배 생각까지 다시 나는 이와이즈미다.



...



싸하다. 뭔가 이상하다. 시간을 확인하고 한참이나 적막한 빈 강의실에서. 두리번거리던 이와이즈미가 베낭을 어깨에 메고 드륵- 의자를 밀었다.


“ 어? 선배님 ”



아 .. 안녕, 안면을 튼 히피펌의 후배가 복도를 지나가다 이와이즈미를 향해 갸웃 고개를 흔든다. / 오늘 강의실 변경됐는데 연락 못 받으셨어요? / 아 그 녀석 번호를 차단한다는게  학과실 번호까지 차단했던 모양이네.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히피펌의 후배는 곤란한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 오늘 조별 과제도 내주셨는데. / 나 소속된 조 없는데? / 그러니까요 얼른 학과실가보세요. 조교샘에게 말해보시면? / 아 그냥 교수님께 말씀드리면 돼. / 교수님 안봐주실 걸요, 그나마 그 조교샘 말만 좀 듣는다던데요. /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히피펌 후배가 고개를 젓는다. / 에? 무슨 그런 게 어디있어? / 입을 삐죽거리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후배는 다시 어깨를 으쓱거린다. / 모르셨어요? 그 교수님 엄청 따지잖아요. /


“ 뭘? ”

“ 얼굴이요 ”

“ 내 얼굴은..  안 먹힐 거란 뜻이야? ”

“ 아니 뭐, 굳이 말씀드리자면, 쉬운 길로 가시는 걸 추천 하는 거죠 ”




***



" 때깔 좋네 사회인은 역시 달라 "

" 한낱 학생 나부랭이랑 비교하면 안되지 오늘은 형이 다 쏜다. 마음껏 골라 “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하나마키는 첫 직장에 들어가 이제 좀 적응이 된 건지 이제는 제법 넥타이가 잘 어울렸다. / 음.. 그럼 여기부터 저기까지 / 이와이즈미. 나 아직 신입이다. / 메뉴판 첫페이지부터 손가락을 훑어 끝까지 내리는 이와이즈미의 손을 덥석 잡고 진지하게 고개를 젓는 폼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말이다. 푸핫, 웃으며 그래도 제일 비싼 안주와 학생 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양주 1병을 시켰다. 신입사원으로서의 고충, 이해 못할 직장의 폭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들어주고 나니 얼큰하게 취기가 올랐다.


" 그래도 부럽다, 난 언제 졸업하고 취업 하냐 "


취기가 올라 푸념 섞인 말을 뱉는 이와이즈미를 보고 하나마키가 씩 웃었다. 한때 과 투톱이셨던 분이 엄살은. 그때 내가 장학금 받아보려고 그렇게 용을 썼는데. 너랑 그.. 누구였더라. 오이카와 토오루 개가 탑이었지?, 듣고 싶지 않은 이름에 잔을 넘기며 이와이즈미가 눈쌀을 찌푸린다. 너희 두 놈 때문에 졸업까지 장학금도 못받아보고. 어휴. 손사레를 치는 하나마키의 몸짓에 삐죽-  이와이즈미가 입술을 내민다. 나도 전액 장학금은 못 받았어.



" 그래? 그래도 1학년땐 네가 과대여서 난 네가 과 탑인 줄 알았는데 "



하나마키의 말에 고개를 젓는다. 무슨.. 그 재수 없는 새끼가 졸업 내내 수석에 전액 장학생이었지, 중얼거리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하나마키가 타고난 건 못 이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됐고 다른 이야기 해, 너 저번 소개팅은 어떻게 된 거냐 묻는 이와이즈미의 말에도 아직 하나마키는 추억을 여행 중이다.



" 네가 1학년 때 오이카와 엄청 챙기지 않았냐? 둘이 친했잖아 "



친하긴 뭘. 네 말대로 과대였으니까 챙겨줬던 거지.. 동기로서, 말끝을 흐리며 잔만 바라보는 이와이즈미를 보던 하나마키가 그제야 뭔가 기억이 난 듯 어색하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와이즈미 너 혹시?


" 아냐 "


일자로 입을 다무는 이와이즈미의 딱딱한 얼굴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쉰 하나마키가 양주 1병을 추가 주문했다.



" 월급 통장 얇다더니. "

" 동기 좋다는 게 뭐야. 자 이건 아직 졸업 못한 널 위한 한잔 "

" 이 자식이 "

" 그리고 이건 첫 직장을 무사히 버텨낸 기특한 날 위한 한잔 "

" 자화자찬이 심하다 너 "

" 그리고 이건, .. 그 녀석을 위한 잔 "

" .... "



***




말 없이 잔을 부딪히다 보니, 간밤에 필름을 끊겼다. 그래도 용케 자취방 주소는 기억하고 있었던 건지 하나마키가 택시에 밀어 준 게 마지막 기억이다. ‘끄으...’, 잔뜩 쉰 목에 갈라진 숨을 뱉으며 엉금엉금 이와이즈미가 기어 냉장고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흡사 무인도에 몇 일째 표류한 조난자와 같은 몸짓이었다. 겨우 자취방 냉장고 문을 열고 가장 아래에 놓인 먹다 만 생수병을 입에 꽃아 수액을 맞는 것처럼 그대로 한참을 입구멍에 흘려보낸다. ‘끄어어어...’ , 겨우 개방된 목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뒹굴 바닥에 몸을 굴려본다. 어지러워.., 내가 다시 또 그렇게 술을 마시면 사람이 아니라 개다. 그나마 수업도 아르바이트도 없는 날이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와이즈미가 아직 몽롱한 눈을 반쯤 감는다. 어젯 밤 한참이나 예전일을 떠들어서 일까. 

꿈처럼 스무 살의 기억이 뭉실거리며 떠오른다.



...



스물. 우글거리던 남중, 남고 출신인 이와이즈미의 눈 달라보이던 넓은 캠퍼스. 지도를 찾아 보며 들어섰던 약간은 차가운 느낌의 오리엔테이션 강의실. 평면이 아닌 연단을 향해 기울어져 의자가 놓인 공간에서 아마도 같은 또래이겠지, 하나 둘 떨어져 있던 사람들을 흘긋거리고 눈치를 보고 있을 때. 저 끝 귀퉁이에 반쯤 몸을 쑤셔 구긴 듯 앉아있던 사람. 왠지 모르게 이와이즈미는 꾸물거리는 회색 후드티에 시선을 빼앗겨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 너도 신입생이야?

- .. 어.

- 같이 앉을래?

- 아니



쾌활하게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려던 이와이즈미는 멈칫 공중에서 몸을 굳히고 말았다. 아 나랑 앉기 싫구나. 그랬구나. 머쓱하게 코를 긁은 이와이즈미를 빤히 보는 녀석은 큰 후드모자에 얼굴이 반쯤 가려있었지만 입술은 일자로 굳어있었다. .. 음 많이 내성적인 편인가보다.


- 이와이즈미 하지메야


그래 통성명이 먼저였겠지. 제 이름을 소개하며 한 칸 떨어져 앉은 이와이즈미의 말에, 후드모자는 여전히 답이 없다. 순간 당황한 이와이즈미는 가늘게 눈을 떴다. 뭐지, 이 상상도 못한 비사회적인 몸짓과 태도는. 고등학교 때와 차원이 다른걸. 역시 대학은 넓고 다양한 또라이들이 있는 거구나.



- 이와쨩이네



남자가 중얼거린다. 어? 보통 처음 본 사람, 그것도 남자이름에 짱을 붙이나. 뭐지 이 녀석. 친근감과 거리감이 수시로 바뀌네. 진짜 이상한 놈? 의자에 붙은 엉덩이를 더 멀리 떼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하얗고 긴 손으로 후드 모자를 뒤로 넘긴, 밝은 갈색의 머리칼을 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이와이즈미에게 손을 뻗었다.



- 오이카와 토오루야




...




그 날 이후로 오이카와는 마치 어미오리에 각인된 새끼오리처럼 이와이즈미 곁을 맴돌았다. 사람들을 끄는 화려한 외모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한 분위기 덕에 다가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다가오는 사람들을 피해 그때마다 한발짝 물러나 은둔하는 주제에. 이와이즈미의 부름에는 언제나 제깍 모습을 드러내곤 해서. 과에서는 마치 두 사람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단짝으로 오해하곤 했다. 오늘 오이카와는 모임 나온대? / 오이카와 동아리 어디 가입했어? / 수업 조 구성때 오이카와 주제 정했대? / 쏟아지는 동기들과 선배들의 질문에서 이와이즈미는 가끔 본인이 신입생 과대표인지, 오이카와 전속 대변인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오늘도 역시 오전 내내 보이지 않다가, '4교시 휴강인데 어디냐'는 이와이즈미의 연락에 쪼르르 과실 문을 열고 들어온 오이카와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3학년 선배가 혀를 내둘렀다.



- 오이카와 너 내가 밥 사준달 땐 바쁘다며

- 맞아요. 바빴어요. 이와쨩이랑 밥먹어야 해서

- 내가 먼저 물었잖아 임마

- 무조건 먼저 물어본다고 밥 약속 잡는 거 아니잖아요. 마음이 선착순도 아니고

- 이거 말대답 하는 거봐? 순서가 왜 네 맘대로야?

- 전 왠만해선 이와이즈미가 먼저예요

- 뭐야 그게



입씨름을 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곤란하게 눈을 굴리던 이와이즈미가 선배의 팔을 붙잡았다. 싸움을 말릴 땐 그나마 좀 더 이성적으로 보이는 쪽을 설득하는 게 나으니까. 오이카와 저 녀석이 물러 날 리가 없다. '선배 진정하세요. 제가 모르고 같이 먹자고 이야기해서..', 이와이즈미의 말에 어휴 됐다. 이와이즈미 넌 나중에 나랑 밥 먹자. 오이카와 넌 국물도 없어 임마하며 선배가 먼저 나갔다. 진땀을 닦는 이와이즈미를 오이카와는 멀뚱히 바라본다.



- 이와쨩이 왜 변명을 해?

- 선배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냐?

- 선배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이와쨩이 무슨 상관인데

- 시비 거냐?

- 아닌데. 궁금해서 그런데

- 너 미움 받는 거 싫어 그러지 뭐



밥 먹으러 가자, 에이 .. 먹다 체할거 같네. 궁시렁거리며 이와이즈미가 문 밖으로 나가자 그 등을 보던 오이카와가 쪼르르 따라 나선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 한가한 대학가 앞 식당에서 대표메뉴인 두 가지 덮밥 중 한참을 고민하는 이와이즈미를 보고 오이카와는 그럼 나눠먹자 하며 제 몫까지 두 종류의 덮밥을 시킨다. 이럴 때 보면 배려심도 있고 정상 같은데.., 생각하며 이와이즈미가 한입 가득 뜨거운 밥을 떠 넣고 우물거린다.


- 얌마


커다랗게 한입 떠 먹은 오이카와의 입 옆에 붙은 밥풀을 손끝으로 떼어주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까닥인다. / 매번 안 불러도 모임 좀 제때 나와. 공지도 내가 보내주잖아. / 과 단톡은 정신없어서 잘 안 봐 / 뻔뻔하게 숟가락질을 하며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 거린다. 그래서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 넣어주잖아하며 이와이즈미가 눈을 부라리자 냉큼 그건 맞아,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인다.


- 선배들이랑 하는 농구도 좀 끼고, 술자리도 나오고.


지금은 좀 귀찮아도 나중에 이게 다 인맥이고. 뭐 나름 사회생활 같은 건데, 중얼거리며 다시 크게 한입 넣고 우물거리는 이와이즈미를 오이카와가 빤히 본다.


- 어떤 여자애가 그러는데 내가 잘생겼대


누구? 되묻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쿡, 손가락으로 오이카와가 머리 위를 가르킨다. 왼쪽 목에 점 있는 노란색 단발머리? 오이카와의 말에 아, 우리 윗 학번인데. 유미선배. 수긍하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와쨩은? 오이카와의 말에 우뚝 숟가락질이 멈춘다. 나? 뭘 물어보는 거지? 끔뻑, 눈을 감았다 뜨는 이와이즈미의 얼빠진 표정에 이번엔 오이카와가 공중에 멈춘 숟가락을 움직여 이와이즈미의 입에 넣어준다.



- 나도 이만하면 뭐 남자답게 생긴 거 아닌가, 호감형?



.. 그거 물어본 거 아닌데, 시무룩한 얼굴로 오이카와가 쿡- 반찬을 찌른다. 뭐야 그럼. 너 잘 생겼다고 자랑하고 싶었냐?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흔든다.



- 이와쨩 눈에도 그러냐구



새삼 뭘.., 하며 그릇 바닥을 보는데 오이카와는 진지한지 움직임도 없다. 또 저러네.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며 바라보는 저 눈. 어쩐지 답답하고 시선 안에 갇히는 느낌이 들어 이와이즈미 역시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어떻게 말해야 바로 알아들으면서 상처를 덜 받으려나. 고민하며 이와이즈미가 미간을 좁힌다.



- 넌.. 얼굴로 쌓은 걸 입으로 까 먹는 타입이지.



이와쨩. 지금 나 성격 나쁘단 소리야? / 눈치는 또 있어요. / 삐죽- 입술을 내민 오이카와를 보고 피식 웃으며 이와이즈미가 놀리듯 묻는다. 유미선배 이쁘지? / 유미? 그게 누군데? / 말끔히 그릇을 비우고 입가를 닦으며 오이카와가 되물었다.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 내가? 언제? / 아, 목에 점 있고 .. / 야 됐다. 말을 말자 이러니까 성격 나쁘단 거다 이 똥같은 놈아. 뭐 관심이라도 생겨서 그딴 거 묻는 줄 알았더니.. 또 쌩하니 잊어버렸네. 여튼 세상사에 관심이 없어 짜식이.


- 모임 잘 나갈게


오냐 / 선배들이랑 운동도 하고. / 왠일로 기특한 소릴 다 하네. 잔소리한 보람 있네.  / 제 그릇도 비우고 씨익 웃으며 어깨를 치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오이카와도 웃어 보인다. 그러니까 ‘ 이와이즈미도 계속 내 옆에 있어야 해’, 어.. ? 방금 그 멘트 뭔가 좀 이상한 거 같은데. 순간 등골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와이즈미는 이제야 변두리를 맴돌던 동기 하나가 사회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다고만 생각했다. 길 잃은 어린 양을 목장으로 인도했다고 생각했었지, 그게 잡아먹으려고 양탈을 빌려 쓴 늑대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



이와이즈미는 다시 목이 타는 기분이 들어 아까 비운 생수 외에 다른 음료가 있는가를 떠올리며 냉장고쪽으로 몸을 튼다. 그리고 시야 끝에 돌아가는 현관 문손잡이를 보고 크게 눈을 떴다. 어 뭐야..?



“ 일어났네 ”

“ ... 네가 왜 ? "


싫은 녀석 생각을 너무 해서 환각을 보는 건가? 


“ 냉장고에 먹을게 없길 래. 이온음료 먹을래? 슈크림 빵도 사왔는데. 난 이걸로 해장하거든. 이와쨩도 좀 먹어봐 "


바닐 봉투를 주욱- 뜯으며 코앞에 들큰하고 반질거리는 빵덩이가 흔들린다. 그저 쓰리기만 했던 속이 그 향을 맡자 뒤집히며 진동하는 기분이 든다. 퍽- 내밀어진 빵을 밀어내고 이와이즈미는 욕실 문을 박차고 변기를 끌어안는다. 간밤 술은 이미 소화가 된 건지, 좀 전에 희멀건 물만 역류하며 쏟아진다.



“ 너 이거 주거 무단침입이야 알아? ”



협박하는 말이라기엔 집주인은 반죽음 상태고, 침입자는 집안 쇼파까지 차지하고 앉아 여유만만이다. 이와쨩이 문 열어줬어.  / 웃기지마 자식아. / 진짠데, 어제 기억 하나도 안나는구나? /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설마 끊긴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웅 울리는 머리만 지끈거린다, 하나마키와 술을 마시며 막판에 복학 후 힘든 학교생활을..., 


/ 이제 막 딱 마음잡으려는데 그 새끼 얼굴을.. 어 학기 초부터..? / 이와이즈미 .. 너 그만 마셔야 될 거 같은데. / 제 술잔을 뺏으려던 하나마키의 얼굴이 흐릿하다.  교수도 혼자 하는 건 안된대고.. 아 그 교수 진짜 얼굴 엄청 보더라고 넌 어떻게 생각 하냐? 내 얼굴은 후지냐? / 무슨 소리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 곤란한 얼굴에 잔뜩 물음표만 낀 하나마키를 붙잡고 소리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 잘생기면 다냐? 응 그 새끼처럼 잘 생기면 전부인거냐? ... / 고래고래 지르던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 불렀지. ‘이와짱..?’ 돌아보면 서 있었던. 하나마키의 얼굴에서 서서히 바뀌었던 게 바로.



“ 저 새끼였네... ”



중얼 거리며 이와이즈미가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얼굴을 쓸어내린다. 어제 이와쨩이 나 붙잡고 그랬잖아. 나땜에 졸업 못하면 다 책임지라구, 어제 이와짱 친구도 거의 맛이 가있어서. 나더러 진짜 책임지라고 억지로 이와쨩 떠맡기고. 그래서 같이 택시 탔었는데. 기억이 없는데.., 택시 안에서 이와쨩 기절해버려서 집주소도 겨우 알았어. 비밀번호 몰라서 그냥 집 앞에 두고 가야하나 했는데 다행이 조금 깨서 이와쨩이 직접 열어준거라구. 그리고 나 진짜 그냥 가려고 했는데.., 오이카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조각난 기억이 맞춰 지며 속이 와르르 무너진다.




“ 내가.. 잡았지 ”




책임질 때까지 못 간다고. 응. 누가 보면 내가 몹쓸 짓한 줄? / 네가 썩을 놈인건 맞지만, 어제 한 짓만 보면 내가 더 몹쓸 짓을 한 거 같다. 끙. 입술을 물며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내쉰다. / 그래. 어젠 내가 너무 취한 거 같네. 폐 끼쳐서 미안하다. / 우리 사이에 미안은 무슨, 살갑게 웃으며 손사레를 치는 꼴을 더 보고 있다간 한번 더 토할 거 같다. 인내심을 발휘하며 이와이즈미는 마른 세수를 했다. / 그래, 이제 그만 나가라. 나가는 문은 안 알려줘도 알지? / 벌써 가라고? 아침도 안먹었는데? / 미친, 네 집가서 먹어 / 우리집은 먹을 거 없단 말야, 이와쨩 집에서 먹고 갈래 / 시끄러 내가 왜 네 밥을 차려줘? / 아니 그냥 내가 차려 먹고 갈게 / 그게 더 미친 소리거든? 꺼지라니까! 당장 나가! / 힝 이와쨩 왜 나 미워해? 잘생겨서 그래? / 



“ 뭐? ”



이건 또 무슨 쉰소리야? 황당하게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는데 오이카와 얼굴은 진지하다. 어제 이와쨩이 그랬잖아. 교수님이 잘생긴 애들 말만 듣는다고. 그거 이번 수업 이야기지? 이와쨩만 아직 발표조 안정해졌던데.. 혹시 내가. / 됐어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 취해서 헛소리 한거니까 신경 꺼. / 벌레를 쫓는 것처럼 휘이휘이, 손짓을 하며 오이카와를 쫓아보려 한다.


“ 잘생긴 애들 다 싫다고 그랬는데.. 혹시 그래서 나 미운거야? ”

“ .. 진짜 머리 울리니까 그만하고 제발.. 사라져줄래? ”



말이 통하지 않으면 결국엔 무력뿐이다. 이와이즈미는 허리춤과 멱살을 잡고 앉은 녀석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무방비 하던 녀석이 순간 휘청거리며 질질, 현관까지 끌려온다. 턱- 이와중에 벽을 붙잡고 오이카와가 버둥대며 버틴다. 이게 진짜, 이와이즈미도 힘을 쥐어짜며 녀석의 허리띠를 마구 흔들어댄다.



“ 이와쨩 나빠! ”



더 험한 꼴 보기 전에 그러니까 꺼져 / 배고파서 못가 / 뱃속에 식충이 들었나. 왜 나만 보면 자꾸 배고프단 타령이야 이 새끼야. 낑낑 거리며 밀고 당기지만 (+/- ) 남은 힘은 제로다.



“ 그 빵 다 쳐먹으면 가라 ”


2차로 변기를 붙잡고 쏟아내고는 힘이 없어 쇼파에 눌러 붙은 이와이즈미와 사온 빵과 우유를 우물거리며 바닥에 앉은 오이카와다. 바닥에 앉은 오이카와가 흘긋 늘어져 있는 이와이즈미를 올려본다.



“ 이와쨩 많이 아파? ”



조심스럽게 부르는 오이카와의 부름에 대답할 힘도 없다. 부신 눈에 팔을 올리고 오이카와의 반대쪽으로 쇼파를 향해 등을 돌려 누운 이와이즈미는 애써 그의 존재를 무시해본다. 내가 어제 과음해서 힘만 빠지지 않았으면 저걸 쫓아냈을텐데. 아쉬워하는 이와이즈미의 마음을 모른채 오이카와는 어쩐지 신나 보인다. /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 생각난다. /  대꾸도 없는 이와이즈미의 곁에서 오이카와는 이리저리 시선을 굴려 자취방을 훑어본다. / 예전에 우리 이렇게 이와쨩집에서 자주 놀았잖아. 그때 이와쨩이 해준 요리들 은근 맛있었는데 가끔 생각나더라. 특히.. 그 두부덮밥! / ‘별걸 다 기억하네’ 대꾸도 않는 이와이즈미의 등을 보며 큭큭, 오이카와가 웃는다.



“ 우리집은 멀어서.. 시험 땐 이와쨩네서 거의 같이 숙식하다 시피 했잖아. 나더러 많이 먹는다고 이와쨩이 자취비 보태라고 혼내구, 그러고 보면 이와쨩 그때도 나 구박했었어! ”


‘ 미친, 그때 내가 월세보다 식비가 더 나왔었어 ’ 여전히 이와이즈미는 대답이 없지만 등을 보며 오이카와는 신나게 상상의 기차를 칙칙폭폭 과거로 보내고 있다.


“ 그래도 재밌었는데 그때.. ”





가물가물, 감긴 눈에 오이카와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뒤섞여 이와이즈미는 

꿈처럼, 스르르 눈을 감는다. 예전의 기억들로 의식이 다시 잠긴다.




***



중간고사 끝, 드디어 해방! 

신이 나 자취방 문을 연 이와이즈미는 현관의 익숙한 운동화를 보고, 바닥으로 가방을 던지며 그대로 침대 위로 점프한다.


- 악, 이와쨩!

- 이 자식이 너 시험 먼저 끝났다 이거야?

- 봐줘 나 밤샜어



이와이즈미 보다 반나절 먼저 시험이 끝난 오이카와는 퀭한 눈을 부비며, 돌돌 이불을 만다. 쿵- 그런 이불더미로 다시 몸을 떨어뜨리며 이와이즈미가 그를 침대 끝으로 몰아세운다. 낑낑거리고 이와이즈미에게 밀려 벽에 붙은 오이카와가 낑낑 소리를 낸다. 


- 일어나 씻어 굼벵아

- 아 왜에

- 애들이 술 먹자고 했어. 나가자

- 싫어어, 난 잘래. 이와쨩도 그냥 가지마



이불더미에서 쑤욱- 나온 긴 팔이 꾹꾹 누르던 이와이즈미의 몸을 안으로 끌어당긴다. 어어. 잠깐 사이에 거대한 이불더미안에 쏘옥 빨려들어가듯 오이카와에게 안겨졌다. 사실 막판 벼락치기로 이와이즈미의 잠도 모자랐다. 푹신한 이불이 오이카와의 체온에 적당히 따뜻하게 데워져있어서, 끌어 당겨 등을 토닥이는 오이카와의 손길이 다정해서 그냥 모른 척 눈을 감아버릴까 싶기도 했다. 볼에 닿는 녀석의 머리칼이 간지러우면서도 복슬거린다. 강아지 같아.., 생각하며 머리칼을 쓰다듬으면 마음도 편해지고. .. 음? 뭔가 이상한데. 오이카와의 머리를 툭툭 넘기다 닿은 귀 끝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잠깐 너 이거 놔봐. 허리를 끌어안은 오이카와의 팔을 풀려 이와이즈미가 잡았다. 으응.. 왜에.., 투정부리며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목 사이로 이마를 부빈다. 닿은 이마도, 붙잡은 팔도 지나치게 뜨겁다, 휙. 눈까지 가린 오이카와의 앞머리를 뒤로 제껴 이마에 손을 짚어본다.


- 너 열 펄펄 끓잖아

- 으응.. 아니야..

- 아니긴 무슨, 일어나봐 병원가자

- 그냥.. 피곤해서 그래. 이와쨩 괜찮아



무리한다 싶더니, 걱정스레 눈썹을 찌푸려 앉은 이와이즈미를 누운 오이카와가 올려보며 이리오라- 손짓한다. 나한텐 이와쨩 손이 약손이야 얼른 다시 안아줘. 두팔을 벌린 오이카와를 걱정스레 보는데, 바닥에 던져 놓은 이와이즈미의 가방의 휴대폰에서 한참 소리가 울려댄다. 일단은 전화를 받은 이와이즈미가 한숨을 내쉰다. ‘어, ..나 오늘 못 나갈거 같은데. 그게’, 흘긋 침대쪽의 오이카와를 보고 작게 목소리를 죽인 이와이즈미가 이마를 긁적인다. ‘그래 내가 과대긴 한데, 그럼 내가 모임비는 이체 시키면.. 아 교수님들도 오셔.. 음 그런데 사실. 오이..,’ 어느새 다가온 건지 스윽 이와이즈미의 휴대폰을 가로챈 오이카와가 대신 대답한다.



- 나 오이카와, 응 같이 갈거야, 7시까지 알겠어.


뚝, 전화까지 끊은 오이카와에게 이와이즈미가 절레 고개를 흔든다.


- 얌마 네가 무슨 술자릴 가. 그냥 쉬어야지 아님 너희 집에 가던지.



곤란하잖아 과대인 이와쨩이 종강파티에 빠지면, 난 좀 자고 나니 괜찮아졌어. 같이 가자. 이와쨩, 웃으며 과잠바를 챙겨입고 후드모자를 쓰는 오이카와를 보니 썩 마음이 편하진 않다. ‘1차까지만 같이 있고 넌 컨디션 봐서 일찍 들어가.’ 이와이즈미의 말에 네네, 착하게 대답하며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가방을 챙겨 들어올린다.




...




- 오, 역시 같이 나타나네!



동기들끼리의 모임이 어느새 과모임으로 커져있었다. 함께 나타난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를 보며 3학년 선배가 큰소리로 아는 척을 한다. 생각보다 왁자지껄해진 분위기에 정신없이 빈 자리에 앉혀진 이와이즈미는 술잔을 받는 동안에도 익숙하지 않은 선배들 틈에 앉혀진 오이카와가 신경 쓰여 자꾸만 시선이 간다. / 이와이즈미, 너 오이카와 좀 적당히 챙겨라 / 빈 이와이즈미의 잔에 술을 채우며 동기인 아키가 핀잔을 준다. 내가 무슨.. , 민망해진 기분에 이와이즈미가 얼른 술잔을 입안으로 털어낸다. / 처음에야 겉돌았다 치지만 지금은 오이카와가 너보다 더 유명인산데 뭘 그렇게 신경 써? / 맞아 둘이 같은 학교 나온 것도 아니었다며? 오이카와는 고등학교도 안나왔던데.. 그 뭐더라. / 옆 테이블에 있던 다른 남자 동기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다.


- 홈스쿨링. 


아키의 대답에 기억났다는 듯 손가락을 부딪혀 딱 소리를 내는 남자 동기다.


- 맞아. 그래서 처음에 사회성이 떨어졌나. 


남자 동기의 말에 아키가 한심한 듯 눈을 흘긴다. 야 저 얼굴은 사회성 떨어져도 돼. / 난? / 네 입은 말하지말고 먹는데 써. / 핀잔을 주는 아키의 말에 토라진 듯 남자동기가 입을 삐죽인다. 어쩐지 통쾌하다 생각하며 이와이즈미가 웃었다. / .. 그런데 오이카와가 유명해? / 매일 붙어다니면서 몰라? 오이카와 대학모델 제의도 받았다던데. 그거 촬영하면 전국단위로 홍보된대. / 아 맞아. 들었어. 다음주에 사진 찍는다더라. /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다시 남자동기가 억울하단 듯 말을 보탠다.



- 이와이즈미 넌 뭐 오이카와 매니저냐, 다 알고 있네 



그냥 뭐 .. 넌 화났냐. 왜 그래, 민망하게 머리를 긁는 이와이이즈미를 향해 / 어휴 내버려둬, 이와이즈미 저거 오이카와한테 삐져 그래. / 아키가 손사레를 치며 다시 눈을 흘긴다.



- 사내놈이 쫀쫀하게! 옆 단대에 저가 반한 여자애가 본인은 우리 과 다른 얠 좋아한다면서 거절했대. 




/ 아 그게 오이카와다? 질투한 거네 /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남자동기가 펄쩍 뛴다. / 질투는 무슨! / 어휴 속 좁은 놈, 다물고 그냥 안주나 먹어 / 누나처럼 혼내는 아키의 태도에 시무룩해진 남자 동기의 모습에 이와이즈미가 다시 웃음이 터진다. / 뭐 솔직히 오이카와는 홈스쿨링 없이 고등학교 다녔어도 이런 일은 많았을 걸. 인기인의 숙명인거지, 팬과 안티의 공존이랄까. / 아키 너 엄청 많은 걸 알고 있네. / 이래뵈도 고등학교 기자부 출신이라, 사람 맘은 좀 빤하게 보는 편이지 / 찡긋 윙크하는 아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와이즈미다. / 그런데.. 오이카와는 왜 홈스쿨링한거래? 이와이즈미 넌 혹시 알아 / 소근거리는 아키의 말에는 고개를 젓는다. / 나도 그런건 몰라. 그냥 사정이 있었겠지./ 대답하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그렇게 친하면서 그런 이야기도 안해? 둘이 맨날 붙어다니면서 뭐하는데?/ 아키가 다시 묻는다.


- 뭐 그냥 똑같지 평범하게 놀고, 밥 먹고 


뭐 그런게 궁금하냐는 듯 둥그렇게 눈을 뜨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고개를 숙인 아키가 작게 소근거린다. / 네들.. 좀 소문도는 거 있는데 알고 있어? / 소문? / 뭐, 그냥 저런 속좁은 놈들이 내는 거겠지만. / 뭔데 그래. / 오이카와랑 네가.. 평범한 친구사이가 아니라는 / 무슨 뜻이야 그게? ... / 와당탕- 더 물으려는 이와이즈미의 말이 시끄러운 소음에 묻힌다. 의자가 뒤로 나동그라지고, 누군가 바닥에 주저 앉아있다. 이리저리 흩어진 테이블 위의 음식과 고성으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3학년 남자 선배를 말리는 주위 선배들이 보인다. .. 그리고,



- 오이카와! 



놀란 이와이즈미가 벌떡 일어나 바닥에 주저앉은 사람을 살핀다. 세게 얻어맞은 건지 벌써 볼 한쪽이 부풀어올랐다. 뜨거운 오이카와의 볼을 감싸고, 이와이즈미는 까득 이를 물었다. / 이게 무슨 짓이야? / 사람들에게 큰 소리를 낸 적도 없고, 선후배 사이에 유난히 깍듯하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확인하지마자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여전히 오이카와에게 향해 욕설을 뱉던 3학년 선배를 붙잡은, 주위 사람들이 이제 이와이즈미를 막아선다.


- 진정해 이와이즈미 



뭔데 이런 폭력을 쓰냔 말이야. / 이와쨩 나 괜찮아 / 뒤에서 어깨를 붙잡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다시 살피던 이와이즈미를 향해 3학년 남자 선배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꽂힌다. / 아 너도 똑같지. 더러운.. / 뭐? / 꽉, 주먹을 쥔 이와이즈미의 팔을 얼른 붙잡으며 오이카와가 돌려세운다. / 이와쨩 나 다시 열나는 거 같아 그냥 가자. / 그래 이와이즈미 오이카와 데리고 먼저 나가봐, 야 너도 그만해 임마! / 3학년 선배를 억지로 앉히며 다른 선배가 이와이즈미를 막아선다. 어느새 다가온 아키도 어깨를 잡아끌고, 무엇보다 오이카와가 손을 당기는 힘에 입을 꽉 문채 밖으로 나설 수 밖에 없었다.



...



- 피나잖아.. 



편의점에서 아키가 산 연고와 밴드로 급하게 응급처리를 하는 오이카와를 보고 이와이즈미가 다시 꽉 입을 문다. / 그 새끼 내가 똑같이 한대 패줬어야 하는데 / 선배한테 그런 말도 할 줄알아? 이와쨩? / 그딴 게 무슨 선배냐? 누가 사람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야 너 열나는 건? / 괜찮아 그냥 피하려고 한 말이었어. / 이와쨩이 그랬잖아. 굳이 더러운 일에 얽힐 거 같으면 부딪히지 말고 피할 수 있는 건 피하라고. 


-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지, 더러워서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아키의 말에 오이카와가 피식, 웃다 찢어진 입가가 아픈지 찡그린다.


- 고마워 아키 우리땜에 너까지 나오고

- 무슨


이와이즈미의 말에 고개를 다시 손사레를 치며 쾌활하게 아키가 웃는다. 


- 아, 아키. 가방에 오렌지색 고릴라 인형 달고 다니는.

- 오이카와.. 나를 그렇게 기억하다니 충격인데


오이카와의 말에 조금 울적해보이는 아키의 얼굴에 대신 이와이즈미가 변명하듯 웃는다. 이녀석 사람 이름을 잘 못외워서 그래. 악의는 없어.



- 그래서 아까도 그런거야?

오이카와를 향해 다시 묻는 아키의 말에 이와이즈미가 둘을 번갈아본다.


- 아까 그 선배, 오이카와가 평소에 인사를 잘 안하다고 .. 좀 맘에 안들어하긴 했었거든. 오이카와 네가 눈이 나쁜가했는데.

- 일부러는.. 아니었어.



어쩐지 시무룩한 오이카와의 얼굴에 이와이즈미는 저가 더 안절부절해진다. 그래, 저 녀석 일부러 사람 무시하진 않아. 오해야. 오이카와의 말에 덧붙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툭- 아키가 어깨를 친다. 이거봐. 이러니까 소문나는거야 이와이즈미


- 소문?


오이카와의 질문에  별거 아니라며, 이와이즈가 얼머부리지만 아키는 직진한다.


- 오이카와랑 이와이즈미, 너희 두 사람 혹시 사귀는거야?

- 아키!!


오이카와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이와이즈미가 인상을 찌푸린다.



...



오이카와를 먼저 집으로 돌려보내고, 정류장까지 아키를 배웅하러 함께 걷는 이와이즈미는 말이 없다. 아까 무신경했다면 미안해. 궁금하면 그냥 뱉어버리는 버릇때문에, 아키의 사과에 이와이즈미는 씁쓸히 고개를 털어낸다. 아냐 괜찮아 그런 소문이 돌거라곤 상상못해서 좀 당황했어


- 왜그런건걸까


내가 볼땐.., 눈치를 보는 아키에게 말해달라는 듯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이카와가 원래 사람 시선을 끄는 편이잖아. 최근들어선 대화도 잘하고, 웃기도 하고. 그러니보니 곁에 항상 있는 이와이즈미 너에 대한 관심도 같이 커진 거 같아.


- 오이카와는 네뒤만 따라다니고, 이와이즈미 너도

- 내가.. 오이카와를 따라다녀?

- 아니 넌 따라다닌다기보단..

고개를 숙인 아키가 머리칼을 넘기며 말을 고른다. 뭔데. 돌리지말고 바로 말해줘. 이와이즈미의 부탁에 아키가 웃는다.

- 시선이 항상 오이카와를 좇던데. 알고 있어?

- .. 내가?

- 네 일보다 오이카와 일에 더 흥분하고, 아까처럼 말야


그냥.. 뭔가 습관처럼 그랬어. 중얼거리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진지해진다. 의식 못했는데 본인의 과보호적인 행동이 어쩌면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수도 있었겠구나. 그리고 어쩌면 그게 오이카와를 더 불편하게 한 걸지도,


- 좋아하면 원래 지키고 싶어지는 거니까

- 그런 거 아냐 아키


소문처럼 그런 사이 아냐 우리. 고개를 젓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아키는 꾹 입술을 다물며 웃는다. 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은 이름 붙이기 나름이라고 생각해. 여기까지 우정, 그리고 사랑이라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시작은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 연민 또는 호기심?


우리 이제 스물이잖아. 이와이즈미. 조금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을 하기 딱 좋은, 그러니까 너무 사람들 이야기 신경 쓰지마. 어떤 이름이든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거 같아.



...


 .. 아키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어쩐지 더 심란해져버렸다. 술은 진작에 다 깼는데, 자취방 문을 열고 들어온 곳 쇼파에 무릎을 끌어안고 구부려 앉은 오이카와 녀석을 보니 더 그렇다.



- 집에 가라니까 .. 너 여기가 네 집이냐

- 여기가 쉬기엔 더 편하니까. 이와쨩은 왜 이렇게 늦었어?

- 뭐 이야기하면서 걷다 보니까.

- 그 애랑 같이 게속 있었던 거야?

- 어.. 뭐,


어쩐지 추궁당하는 거 같아 언짢아진다. 다시 뒤집어 쓰고 있는 후드모자를 보니,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도 생각난다. 덩치는 산만해서 커다란 녀석이. 처음부터 왜 이렇게 사람을 애잔하게 만드는 건지. 저의 이런 마음이 어쩌면 녀석을 더 섞이지 못하게 했던 걸까 싶어 심란해지는 이와이즈미였다.  /  뭘 꼬치꼬치 묻고 그러냐. /- 이 시간까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했는지 궁금하니까 / 말 하기 싫어 / 어째서? / 

그야 .., 네 이야기만 하고 네 생각에 머릿 속이 복잡하다는 건 어쩐지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라는 말은 꾸욱 삼켜버리는 이와이즈미다.


- 네가 신경쓸 일 아니니까

- 이와쨩 일이잖아


그러니까 내일이니까 그만 캐물어. 거리를 두는 이와이즈미의 태도에 멈칫, 오이카와가 말을 잊는다. 이와이즈미는 무어라고 변명처럼 또 늘어놓게 되고 만다. 그러니까 내말은.. 그러니까 네가 왜 내일을, 나는 왜 네 일을 이렇게 까지 신경쓰여하는 거냔 말이야.  친한 대학동기, 친구라기엔 지금 우리가 조금 이상하지 않은걸까란 다른 사람의 시선, 내 맘을 마구 흔든단 말이야. 뭣보다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 이와쨩은 뭐가 그렇게 겁나?

- 뭐?

- 지금 겁내고 있잖아


말문이 막힌다. 구부린 몸을 펴 제 앞까지 다가온 녀석에게 이렇게 위압감을 느낀적이 있었나. 저도 모르게 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와 사이를 벌려보려 한다. 하지만 꼭 반발짝 씩 더 오이카와는 틈을 좁히며 다가온다. / 소문이 무서워? / 야. 오이카와 / 아니면 소문이 진짜가 될까봐?


- 헛소리하네.


애써 오이카와의 다가오는 시선을 무시하며 이와이즈미가 몸을 비낀다. 사람들 입에 그런 식으로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 너도 오해 받지 않게 조심해 / 이와이즈미를 붙잡으려던 오이카와의 손이 공중해서 멈칫, 거리며 멈춘다. 다만 비켜 돌아서 그런 오이카와를 등지고 있는 이와이즈미는 보지못했다. / 너도 다른 사람들한테 좀 더 신경써.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이잖아.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하더라도. 상처받는다고. / 내가 왜 다른 사람 호의를. 신경써야 하는데 / 임마. 너 그게 무슨 / 원한 적도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호의를 베풀면 난 그저 감사해야해? 보답해야해? / 왜 그런식으로 말해 / 인상을 찌푸린 이와이즈미의 타박에도 오이카와는 못 박힌듯 가만히 자리에서 바라본다. 이와이즈미가 숨 막혀하는 빤하게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다. / 원하지 않은 걸 진심으로 답할 의무 있어? / 비꼬지마 /


- 누군가가 미친듯이 이와쨩을 좋아한다고 해도

- ..

- .. 진심 아닌 친절이 더 잔인한거 아냐?


왜 그래 너, 네가 왜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을 해. 당황한 이와이즈미의 표정에 꾹, 입을 다문 오이카와가 시선을 내린다.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시선을 피하는 일은 드문 일 이었다. 따끔거리는 목안에 뭔가 큰 잘못을 한 느낌에 이와이즈미는 미안-말을 뱉는다. 사실 뭘 잘못한 건지 모르겠지만 오이카와의 저런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쿵. 가슴이 내려 앉는 느낌에 오이카와를 살핀다 푹- 숙인 고개를 다시 들지 않은 채 오이카와가 몸을 돌린다.


-  이와쨩에게 미안하단 말 듣고 싶지 않아

- .. 

- 불편하게 해서 미안, 앞으로 주의할게

꿀꺽, 따끔거리고 아픈 목에 마른 침을 삼켜보지만 여전히 한마디도 나오질 않아, 밖으로 나가는 오키아와를 붙잡진 못했다.




...


- 오늘 점심 뭐 먹을래?



강의실 문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기지개를 펴며 이와이즈미가 묻자 오이카와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나한테 하는 소리야? 라고 묻는 듯한 얼굴에 이와이즈미가 새삼스럽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 나 선약있는데?

- 어? 그런 말 없었잖아

- 물어본적 없잖아


그야... 항상 둘이 같이 먹었으니까 란 말이 어쩐지 낯간지러워서 이와이즈미는 그저 뒷목만 긁적였다. 그래 뭐 항상 함께 먹기로 약속한 건 아니었으니까. / 그래, 그럼 오늘은 딴 사람이랑 먹지 뭐 / 응, 나중에 봐 이와쨩 / 오이카와의 등을 보는 때는 자꾸만 늘어났다. 한번, 두번- 당연스러웠던 서로의 옆자리가 다른 사람들과 약속으로 채워졌다. 



- 야 오이카와 수업 끝났지? 오늘 공대 기계과랑 풋살하기로 했는데

- 아 미안, 난 모임이 있어서


무슨 모임? 너 귀찮다고 동아리도 안들었잖아- 말을 걸며 다가오는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앞에 서기도 전에, 처음 보는 검은 가죽 재킷을 입은 짙은 눈썹의 남자가 오이카와의 어깨에 팔을 두른다.


- 오이카와!! 형님이 직접 마중왔다

- 무슨 마중이야 내가 길 못찾을까봐?

- 네가 딴길로 샐 까봐, 오늘 밴드 보컬 오디션이니까.. 음? 여긴 누구? 오이카와 네 친구?


친근하게 오이카와의 어깨를 두르고 있는 남자는 딱 봐도 일반 학생이라기엔 튀는 모양새다. 뭐야. 밴드? 오디션? 이와이즈미는 전혀 모르는 말이다. 설명을 바라는 이와이즈미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도 오이카와는 그저 무심한 시선을 돌린다. 

- 어 우리 과.

- 오, 안녕 난 마티라고 해.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가 코를 찡긋하며 이와이즈미에게 손을 내민다. 너도 공연 보러 올래? 오늘 재밌을텐데. 남자가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보다 작은 성냥갑을 꺼낸다. 탁, 그런 마티의 어깨를 치며 오이카와는 그를 돌려세운다. / 가, 쟨 이런데 관심없어 /이와이즈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빨리 걸음을 옮기는 오이카와다. / 뭐야 안친한 사이냐? 민망하게.., 중얼거리며 그런 뒤를 따라가는 마티라는 남자와 함께 사라지기 전까지. 이와이즈미는 며칠 새 느꼈던 찝찝한 기분을 다시 느낀다. 오이카와 자식, 날 따돌리고 있잖아. 모르는 사람들, 약속, 모임.. , 언뜻 보았던 검은색 작은 성냥갑에 날카롭게 새겨졌던 붉은색 글씨를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어쩐지 아쉽다. 치사한 자식. 유치하게 사람을 따돌리고. 사춘기야 뭐야. 사라진 뒷꽁무니에 퉷- 침을 뱉고싶어지는 이와이즈미다.


-뭐해? 오이카와 데려온다더니


경기복을 갈아입은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감싼다. 됐다 그래. 뭐 나도 아쉬운거 하나 없거든. 솔직히 옆에서 귀찮기만 했지 뭐. 나 싫다는 친구 나도 싫다. 여기 이렇게 너 말고도 놀잔 사람 많다구.


- 안한대, 우리 끼리 가.

- 에? 그 녀석 골 잘넣어서 선배들이 데려오랬는데

- 내가 전반 후반 다 뛰면 되잖아

- 아니 뭐.. 너 왜 이렇게 골이 났냐?


그러게, 왜이렇게 골이 나는걸까. 요즘 같아선 제 맘을 제가 제일 모르겠다. 


...



아 죽겠다며 벌렁 뒤로 드러누운 하나마키는 헥헥 거리며 혀를 내밀고 있다. 여자 아이들이 사온 이온음료를 받아서 고개를 꾸벅 거리고 마시던 이와이즈미는 묵묵히 속눈썹까지 대롱 거리는 땀을 훑어 닦았다. /  하나마키 얼른 일어나 연장전 가야지 / 툭툭 발로 차는 이와이즈미의 발짓에도 하나마키는 고개를 절레 젓는다. / 아 나 죽어도 못해 기계과 저것들 뭐야 몸이 기계인가, 아님 밥 먹고 맨날 공만 찼나. 어우 때려 죽어도 난 못나가./  사지를 쭉 펴고 드러누운 하나마키를 향해 혀를 차며 일어서던 이와이즈미는 쿵- 보지 못한 찰나 사람과 부딫힌다.


- 아 죄송..

- 씨- 어딜 보고 다녀 임마

- 못봤습니다.

- 재수 없게


탁, 탁 이와이즈미가 닿은 부분을 털며 남자가 욕설을 지껄이고 멀어진다. / 뭐야 저 인간, 연장전 교체 뛰려나 본데.. /  선배들이 알아서 하겠지 /저 인간 그때 그 선배지? 술자리에서 오이카와한테 주먹날린? 평소에도 남자 후배들한테 쓸데없이 기강잡는다고 시비던데 대학와서도 저런 인간이 있냐./ 눈을 흘기며 중얼거리는 하나마키 대신 이와이즈미는 묵묵히 앉은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푼다.



“ 야 너 일부러 그랬지? “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리자 마자 이를 꽉 물고 다가온 선배는 당장에라도 이와이즈미의 멱살을 틀어쥘 기세였다. 골 올때마다 저 새끼가 가로채는 거 네 들도 봤잖아! 험악하게 소리지르는 남자를 보고 어이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는 하나마키와 구경하던 여자 아이들의 인상도 찌푸려진다. / 야 무슨 다른 애도 아니고 이와이즈미가.. / 맞아요 선배! 왜 트집이세요? / 그래, 그냥 애가 슈팅을 더 잘하니까. 그리고 이와이즈미가 두골이나 넣어서 우리과가 이겼는데, 그런 후배한테 너 화를 내냐. / 주변 여론이 나빠지자 이와이즈미를 몰아세우려던 3학년 선배는 주춤, 눈을 돌리더니 됐다. 너 앞으로 주의해! 하는 일갈만 한 후 제 점퍼를 챙겨 먼저 벗어난다. 으휴 저 성격 진짜.., 이와이즈미 네가 이해해라. 같은 3학년들이 이와이즈미의 등을 토닥이지만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고개만 까닥인다.


- 야 괜찮아?

묻는 하나마키의 말에 그제야 씨익 웃어보이는 이와이즈미다. 그럼 괜찮지 당연히

- 너 설마...

- 사실 한대 얻어 맞을 각오로 한건데.


이거 만만치 않게 또라이네. 절레 고개를 흔드는 하나마키를 보고 조금은 후련한 기분으로 다시 이와이즈미가 씨익 웃었다. 복수는 유치한 맛이지. 나 좀 씻고 갈게 먼저 가. 땀을 너무 흘려서. 대충 닦고 뒷풀이에 가자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이와이즈미는 경기장 한켠에 마련된 간이 샤워실로 향한다. 아까 오이카와 때문에 찝찝했던 기분까지 씻어낼 요량으로 학생회관 편의점에서 산 간이 샤워키트까지 챙겨 걷는 이와이즈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좀전까지 이와이즈미에게 일갈을 하던 그르렁거리는 목소리. 누구랑 이야기하는거지? 실갱이 하는 듯 한 목소리에 그냥 다른 곳으로 가야하나. 걷더라도 자취방으로 갈까. 고민하여 이와이즈미가 망설이는 동안 쿵 벽으로 밀쳐지는 소리가 들린다. 뭐야.. 저 인간 또 사람패는거? 신고해야하는거 아냐.., 생각하며 이와이즈미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한걸음 조심스럽게 다가선다. 샤워실 뒤쪽 나무들로 가려져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나던 목소리가 잠시 끊겨있다. 그리고 곧 흐느낌이 들려온다. 제발... 좀.., 울먹거리는 목소리는 분명 그 3학년 선배였다. 누군가를 붙잡는 듯 옷끼리 스치는 소리와 바람소리가 들린다. 이건 뭔가 들으면 안될 거 같은데.., 빠르게 판단한 이와이즈미가 발길을 돌렸을때였다.


- 오이카와 제발...,


분명 오이카와라고 했다. 얼마전에 직접 주먹을 날리던 그 선배가 빌며 매달리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게 불렀다. 못박힌 듯 멈춰섰던 이와이즈미가 망설이고 있는 찰나에 다시 한번 쾅- 소리가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얼른 몸을 움직인 이와이즈미가 샤워실 뒤쪽 벽을 붙잡고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흙바닥에 주저 앉은 채 끅끅, 울고 있는 3학년 선배만 보였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함께 있었던 발자국은 흙바닥에 어지러웠지만. 그리고 곧 인기척을 느낀 건지. 얼굴을 떨구고 있던 3학년 남자 선배가 이와이즈미를 발견 하고 흠칫, 몸을 떨더니 얼굴을 구겼다. 왠지 죄스러운 기분에 그를 발견한 이와이즈미가 먼저 시선을 떨군 사이 3학년 선배는 빠르게 이와이즈미를 어깨를 강하게 스쳐 운동장 끝으로 걸어간다. 뭐라 묻기도 전이었다. 그리고 이와이즈미는 발끝에서 채이는 아까 그 선배가 스쳐 지나갈때 떨어뜨린 듯 싶은 것을 조심히 집어들었다.


- 이건 아까..


익숙한 것이다. 오전에 만났던 오이카와의 옆에 있던 미카라는 남자가 잠시 꺼냈던, 검은색 배경에 붉은 색으로 <베르테르> 라고 쓰여진 그 성냥갑이었다.




...




- 이와쨩이 .. 여기서 뭐해? 

- 누구 얼굴이 연예인만큼 보기 귀해서 직접 왔다. 왜 

- 할 이야기 있음 전화 하지 

- 네가 요즘 내 전화 받기나 하고 하는 말이냐? 

- 좀 바빠서

 

어이 거기! 다음 차례니까 얼른 준비해요! 곤란한 듯 이와이즈미를 보는 오이카와의 시선에 가보라며 손을 젓는다. 최근들어 이와이즈미가 유일하게 알고 있던 오이카와의 스케줄은 이것뿐이었다 무슨 연예인 보려고 공식 스케줄 확인하는 사람도 아니고, 전화도, 문자도 바쁘단 핑계로 SNS 확인도 하지 않는 오이카와였으니. 직접 대화를 하려면 이렇게 찾아오는 수 밖에. 어쩐지 내가 되게 아쉬운 사람이 된 거 같네. 전국적으로 홍보되는 대학생 모델이라 그런지. 교내촬영때보다 전문가 수준으로 촬영팀이 늘어나보였다. 거기다 평소 입던 사복촬영이 아닌, 마치 프로모델 처럼 가을 분위기에 맞춰 트렌치코트에 세팅된 머리를 한 오이카와의 모습은.



- 꾸며놓으니까 더 잘났네.


쳇, 재수 없어. 삐죽 입술을 내민 이와이즈미는 편한 청바지에 과 잠바를 대충 입고 온 자신이 어쩐지 이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게 진짜 대학생은 이런 모습 아니냐고 저게 무슨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이냐. 한껏 꾸며서는, 과잠바 주머니 속 작은 성냥갑을 만지작 거리며 이와이즈미는 자연스레 포즈를 취하는 오이카와에게 닿는다 카메라 바로 뒤쪽으로 서 있어서 일까. 렌즈를 응시하는 오이카와의 갈색 눈동자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오랜만이다. 오이카와와 이렇게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것조차. 지금은 카메라 뒤에 숨은 신세지만 정신없이 터지는 조명 사이에서 이와이즈미는 부신 눈을 깜박거리다. 문득 이렇게 오이카와를 렌즈 뒤에서, 한발짝 뒤에서, 그저 아는 사이로, 이제는 지내며 거리감을 둬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곁에만 맴돌지 말라고 밀어내고선, 너무 멀어지지 말라고 당기기 위해 쫓아온 듯한 자신의 변덕, 스스로도 납득이 되질 않는데. 그나저나 오이카와 너는 참 무탈해보인다. 심지어 더 잘 지내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와 성냥갑에 얽힌 사연이든, 네가 누군가와 생긴 일이 무엇이든. 내가 궁금해하고, 걱정하고, 답을 요구할 위치가 되는 건가.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어? 끝..났냐?

- 응. 할 말 있다면서. 이와쨩

- 그게.. 별거 아냐


뭐야 그게. 여기까지 찾아와선. .. 그러게. 괜히 우물쭈물 성냥갑만 만지작 거리는 이와이즈미와 그런 그를 빤하게 바라보는 오이카와의 어깨를 툭- 누군가 친다. 돌아보는 두 사람을 행해 사진 작가로 보이는 브이넥을 입은 여자가 손짓한다


- 너희 둘- 키, 바디, 얼굴 좋은데

- 네?

- 한장 찍어줄게


아니 전 괜찮.., 손사레를 치려는 이와이즈미의 팔을 잡고 오이카와가 그러지말고 찍자며 고개를 다시 까닥인다. 뭐야 이 자식 갑자기. 의아하게 올려보는 이와이즈미의 시선에도 오이카와가 팔을 잡아 끈다. / 왜 이래 임마 / 그러고 보면 이와쨩이랑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 / 사내놈들끼리 무슨 사진이야 / 사진에 남여노소가 어디있어. 기억하고 싶은 걸 남기는건데. / 오이카와가 자연스레 미소를 짓는다. 어느 새 이렇게 가식적인 웃음도 잘 짓게 된 거냐 너. 내가 아는 오이카와 맞는거야. 그런 오이카와의얼굴에 벙찐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이와이즈미다. 


- 그렇게 얼어 있지말고, 자연스럽게 이야기해봐 평소처럼 


사진작가의 조언에도 어색한 표정은 풀어지지 않는다. 요새 이 녀석과 자연스럽게 이야기 한적이 없는데요-라고 대꾸할 순 없는 노릇아닌가.


- 우 뭐야 둘다 표정, 서로 사랑 싸움이라도 했어? 


농담을 던지는 사진작가의 말에 오이카와의 웃음이 터진다. 아까 혼자 사진 찍을 때처럼 잘도 웃는다, 이 가식적인 놈. 넌 지금 이상황이 웃기냐. 삐죽 입술을 내민 이와이즈미가 자연스레 오이카의 목에 팔을 두른다.


-  좋네. 친근해 보이고. 자기야 더 장난스럽게 


어느새 사진작가의 자기가 된 이와이즈미는 열심히 조언에 따라, 이..이와쨩 나 숨막혀, 작게 중얼거리며 오이카와가 탁탁, 이와이즈미의 팔을 때린다. 너..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 안하면 진짜 숨질줄 알아라, 억지로 웃음을 끌어올린 이와이즈미가 작게 오이카와에게 속삭였다. 뭐야 나 협박하러 왔어? 겨우 팔을 풀어낸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 앞에 오랜만에 투정부리 듯 볼을 부풀린다.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낸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손에 올려둔다. 앞에선 세상 사이 좋게 어깨동무와 허리를 붙잡은 두 사람이지만, 손 끝에서 매만져지는 익숙한 크기의 성냥갑에 오이카와는 분명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이걸.. 이와쨩이..

- 주웠다 그 선배가 너랑 이야기하고 지나갈때


“ 오케이! 사진 다 잘나왔네. 수고했어 “

달싹거리던 오이카와의 입술이 촬영 종료를 알리는 말에 다시 닫힌다.



...



- 언제 말해줄래


대학 캠퍼스를 한참이나 걷던 오이카와 곁에서 침묵을 참지 못한 이와이즈미가 먼저 또 입을 뗐다. 그런 이와이미를 보던 오이카와가 제 손바닥의 성냥갑을 굴렸다. 결심한 듯 다물었던 오이카와의 입술이 떼어진다. /  여기 내가 자주 가는 클럽이야 / 그래? 저번에 네 친구 미카인가가 말한 그 곳이지? / 맞아. / 그럼 그 선배는 왜 이 걸 / 그 선배랑은 여기서 만난 적이 었었거든. /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심각해보였는데, 꾸욱 입술을 다무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오이카와가 다시 성냥갑을 손바닥에 굴렸다. 단순히 클럽에서 만났다는 우연만으로는 그때의 분위기가 이해 되질 않는다. 의구심을 담은 이와이즈미의 표정에 오이카와는 씁쓸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 이와쨩 여기 게이 클럽이야

- ... 어?

- 그 선배는 거기서 나 보고, 당황한 거 같더라. 소문이라도 낼 줄 알았는 지. 여튼 전전긍긍하더라구



그럼.. 그 선배는.. 아니 그러니까.. 오이카와 너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게 바라보는 이와이즈미 대신 오이카와는 제 주머니로 성냥갑을 넣었다. 난 사실 그 선배가 난리치기 전까지는 그 클럽에 왔었는 줄도 몰랐어. 내가 선 무대에 있으면 관객석 쪽은 잘 안보거든. /  ...무대? /  응 나 거기서 노래해. / 그.. 그럼. / 그렇구나 그러니까 오해를 한거네. 그 선배가.., 횡설수설하는 이와이즈미를 빤하게 바라보던 오이카와가 말한다. / 이와쨩은 남의 비밀에 대해 쓸데없이 소문 낼 사람 아니니까 말한거야, 그럼 더 궁금한 거 있어? / 아.. 아냐. 이제 없어. / 나에 대해서는 안 궁금해? / 주머니에 손을 넣은 오이카와가 어깨를 으쓱한다. 꿀꺽, 다시 마른침을 삼키며 이와이즈미가 그의 시선을 마주한다. 


- 난 말해줄 수 있는데


한발짝 다가오는 오이카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와이즈미는 저도 모르게 흠칫, 뒷걸음질을 쳤다.


- 안잡아먹어 이와쨩

- 그.. 그런 게 아냐

- 뭐.., 여튼 이와짱이 관심 없을 것 같았어.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오이카와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슬퍼보였다. 

얼마전에 보았던 그 표정처럼 말이다.




...



과실이 오랜만에 시끄럽다. 누가 누구랑 사귀고, 헤어진 당사자간의 일들이 때로 이렇게 소문이 나고 귀에 들리게 된다. 하지만 유난히 이와이즈미는 아키의 이야기를 듣고 멍해졌다. / 진짜야..? 그러니까 아키랑 / 그래, 그 선배랑 아키랑 사귄다니까.  동기라 하는 말 아니지만 아키가 아깝긴 하지? / 되묻는 하나마키의 말에도 조금 멍해진다. 하지만.. 그 선배는 그러니까. 순간 시선이 오이카와와 닿은 이와이즈미는 꾹 입을 다물었다.


- 반응이 왜 그래? 이와이즈미 너... 혹시 아키 좋아했냐?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좀.. 놀라서 그래.

- 남여관계란게 참 신기해, 언제 둘이 가까워진건지.


아 외롭다 우리도 미팅 다시 해볼래 이와이즈미? .. 중얼거리는 하나마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과실을 나서고 망설이며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이와이즈미 앞에 그림자가 진다. / 괜히 끼어들지마 이와쨩 / 그때 이후로 이렇게 단둘이 대화하는 건 처음이다. 그치만 이와이즈미는 꾹 휴대폰을 쥐며 오이카와에게 고개를 저었다. / 너도 알고 있잖아. 거기다 아키는.. 내친구인데 / 그래서? 네남자친구는 사실 게이라고 말할거라고? / 오이카와 넌 아무렇지도 않냐? 그 선배가 아키를 속이고 있는 거잖아. 나중에 아키가 얼마나 상처받겠냐? /솔직하게 사는 인간이 몇이나 된다고. /무신경한 오이카와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와이즈미가 인상을 찌푸린다. 


- 물론 비겁하지. 그 선배는. 순진한 1학년 후배를 꼬여 방패막을 삼다니. 그래도 네가 아키를 위해 한 일이 그 애한테 더 상처가 될 수 있어. 그러니까 나서지 마.


최근 서먹해졌던 오이카와와 다시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와이즈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 이와이즈미를 보고 작게 한숨을 쉬는 오이카와다.


- 네가 정 맘에 걸리면.. 내가 도와줄까?



...


아키가 행복해보인다. 끄응..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깨물며 3학년 선배와 나란히 벤치에 앉은 아키를 바라본다. 그런 그를 발견하고 아키가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그 옆에 앉은 3학년 선배는 이와이즈미를 발견하고 못마땅한 듯 얼굴을 굳히더니 아키와 인사 후 사라진다. / 수업 같이 가자 / 툭, 어깨를 치는 아키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와이즈미는 머리를 긁적인다. 그 선배가.. 잘 해줘? 묻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아키의 귀끝이 조금 붉어진다. / 응, 우리끼리 말이지만.. 보기보다 귀여워. /그것 .. 참 다행이네. 어색하게 웃으며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달싹인다.


- 아키, 혹시 말야

- 응?

- 아냐..


차마 못하겠다. 의아하게 보는 아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수업내내 이와이즈미는 끙끙 속을 끓였다.



...



- 이야기 좀 해


다른 사람과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오이카와를 불러 세운 이와이즈미의 눈이 그새 퀭해져있다. 당황한 얼굴로 이와이즈미를 살피던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여 제 옆친구를 먼저 보낸다. 사람이 드문 한적한 도서관뒤편으로 오이카와를끌고 온 이와이즈미가 결심한 듯 물었다. 


- 저번에 네가 도와준다는거..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데?

- 정말 신경 쓰이나보네 이와쨩

- 당연한 거잖아. 이걸 다 아는데.. 어떻게 아무렇지 않아?


평온한 네가 더 이상해. 이와이즈미의 말에 그저 어깨를 으쓱거린 오이카와다. 이와쨩 혹시 아키랑.., 물으려던 오이카와가 입을 다문다. 뭐, 뭔데 말을 해. 피곤한 눈을 들어 이와이즈미가 묻지만 이내 고개를 저어버리는 오이카와다.  / 그래 네 친구 아키는 모르게, 내가 해결해줄게 / 대답하고 돌아서려는 오이카와를 얼른 다시 붙잡는 이와이즈미다. / 자.. 잠깐. 너.. 무슨 짓 할건데? / 되묻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오이카와가 풋- 웃는다. / 무슨 짓이라니? 이와쨩 오이카와씨 나쁜 사람 아닌데요.., 장난스레 입술을 삐죽거리는 오이카와의 팔을 다시 붙잡으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젓는다. 


- 위험한 건 아니지?

- 이와쨩, 내가 범죄자야?

- 그게 아니고. 너.. 한테 위험하진 않겠냐고.


네가 다치는 거라면.., 이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굳은 표정의 오이카와가 붙잡힌 팔을 떨리는 손으로  빼낸다. 의아하게 떨어진 손을 이이와이즈미가 응시하지만 오이카와의 고개를 푹 순이채로 얼굴을 보기 어렵다. 


- 나쁜 건 이와쨩이야..

- 뭐?

- 쓸데 없이 다정해서.. 사람을 기대하게 하잖아?



무슨.., 다시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술을 달싹이는 이와이즈미를 보고 오이카와가 그의 시선을 피한다. / 걱정마. 그냥. 저번에 말한 클럽에 그 선배 자주오니까. 좋게 이야기 할거야. / 아직도 거길 다닌다고? 아키랑 사귀면서?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분노가 스친다. 그리고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오이카와는 그저 빤히 바라 본다.



...



- 이유를 모르겠어


훌쩍이는 아키의 앞에 쪼그려 앉은 이와이즈미는 그저 아키가 진정할 때까지 묵묵히 본다. / 갑자기 헤어지재. 왜냐고 물어도 말도 안해주고.. 나.. 뭐 잘못한 걸까? / 그런건 .. 아닐거야 아키. 쉽지 않겠지만 잊어버려. 그런 남잔 /한참동안 어깨를 떨며 훌쩍이는 아키를 위로하던 이와이즈미는 하루 만에 이렇게 깔끔하게 그 선배를 정리한 오이카와의 능력에 감탄했다. 대신 고맙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와이즈였다.


- 아키 .. 술이라도 마실래?


위로주, 내가 살게. 달래는 이와이즈미의 말에 코가 빨갛게 운 아키가 고개를 끄덕인다. 1차, 2차. 새벽을 달리는 3차까지.. 의외로 아키는 술에 아주 강했다. 먼저 알딸딸하게 취한 이와이즈미가 휘청이자 대신 허리를 잡아주기까지하며 이와이즈미를 끌었다. / 저기, 우리 저기 가보자 이와이즈미! /왁자지껄한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마링게 질질 끌려 지하로 계단이 난 곳까지 따라 걸어가며 이와이즈미는 졸린 눈을 부빈다.


- 어? 오이카와 친구네?


... 응? 어디서 봤더라. 계단 아래로 돌아가던 코너에서 저를 아는 척 하는 남자를 골똘히 보던 이와이즈미가 겨우 기억했다. / 마티.. ? / 나 기억해? 헤에.  오이카와 보러 온거야? / 여기 오이카와가 있어요? / 불쑥, 두 사람 사이에 아키가 말을 자른다. 어어, 초대 받아서 온거 아니었어? 그게 아니면 좀 곤란한데.., 마티의 말에 얼른 아키가 대답한다. / 맞아요 우리 둘다 오이카와 친구예요! 그치 이와이즈미? / 아.. 그게.., 정신을 차려보니 좌석에 앉아있었다. 기다란 바에 안내를 받아 술까지 대신 주문해준 마티의 친절에, 아키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하지만 이와이즈미는 뭔가. 머릿속에 안개가 낀듯하면서. 여기 있으면.. 안될 거 같은데.. 그 이유가 뭐였지..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 이와이즈미! 여기 분위기 너무 좋다! /하지만 잔뜩 들뜬 아키의 목소리와 시끄럽에 울리는 음악소리에 이와이즈의 머리는 돌아가기를 멈춘 듯 했다. / 헉 저거 설마 오이카와야? /아키의 손끝이 무대를 향한다. 쾅-쾅 거리는 드럼 소리와 함께 무대 높은 쪽에서 드럼 스틱을 화려하게 돌리며 웃고 있는 사람은... 오이카와였다.



/ 보컬 하자고 그렇게 멤버들이랑 설득했는데, 저 녀석은 드럼이 좋대, 그래도 저 녀석이 보컬보다 인기는 더 좋아/ 마티의 설명에 아키는 눈이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밴드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와이즈미는 저 녀석이 저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신나게 웃을 수 있었구나 생각했다. 조명사이로 오이카와의 땀이 드럼을 내리칠 때마다 같이 부서졌다. 무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해서 일까, 조명은 한껏 받아서 일까. 어쩐지 그가 더 먼 사람 느껴지고, 좀 전까지 시끄럽게 들리던 음악소리도,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 저게 마지막 곡인데. 둘이 인사해야지, 같이 가자


대기실로 바로 안내해주겠다는 마티의 말에 아키가 손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아마 한참이나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을 이와이즈미였다. 스테이지와 화장실 복도사이를 가로질러 지나가는 길에, 벽에 걸린 간판을 문득 바라본 이와이즈미는. 따라 읽으며 읊조렸다. 베르.. 베.. 르,  들어봤는데. 여기.., 그리고 순간 번쩍 머리에 불이 들어왔다. / 자.. 잠깐 아키 우리 나가자 / 퍼뜩 정신을 차린 이와이즈미가 급하게 뒤에서 아키의 가방을 붙잡았다. 마티를 따라 좁은 사이를 앞장 서 걷던 아키가 이와이즈미를 의아하게 올려봤다.


- 왜? 오이카와에게 인사하고 가면 좋잖아

- 다.. 다음에 해. 응? 그냥

- 에이 그러지 말고 가서 인사하자


그녀의 가방을 잡고 실갱이 하느라, 가방에 달려있던 오렌지색 고릴라 인형이 달깍이며 떨어진다. 뭐야? 하고 울상을 지으며 인형을 줍던 아키가 순간, 멈칫 멈춘다. 아키의 시선이 닿은 곳에 막 무대에서 내려온 듯한 오이카와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오이카와의 목을 감싸고 깊게 키스하는 다른 남자도.


- 아키..!


도망치듯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아키의 이름을 부르며 이와이즈미가 헐레벌떡 뒤로 돌았다. 1층 밖으로 나가는 아키를 겨우 따라잡은 이와이즈미가 다시 그녀를 붙잡아 보려하지만, / 이거 놔! /날카로운 비명 같은 말에 그녀의 손을 놓아준다. / 이와이즈미, 너도 ..봤지? / .. 아키 진정해 오해일거야. 그러니까.. / 오해? ... 방금 우리 두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이와이즈미. /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아키가 이와이즈미를 다시 밀쳐낸다. 꽈악, 아키에게 잡힌 이와이즈미의 어깨가 구겨진다.


- 키스하고 있었어. 선배와 그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 분명 두 사람이었어. 혹시 ..너도 알았어?

- 아냐... 난.


- 그만. 네가 왜 변명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해 이와이즈미.




***



“ 선배 일어나요 “



으응..., 괴었던 턱에 뭔가 흥건하게 흐른 느낌이 든다. 무거운 눈꺼풀을 끔벅 거리고 뜨니 강의실을 우르르 빠져나가는 사람들 사이로, 커다란 히피펌 머리가 보인다. 아 수업 끝났구나. 찢어져라 다시 하품을 하는 이와이즈미를 보며 후배가 쯧 혀를 찬다.


“ 밤새 뭐해요? "


졸업반이라 수업도 이거 하나만 듣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눈도 퀭해서는.. , 응 맞아 그런데 이상하게 요즘 잠이 쏟아지네.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프린터 뭉텅이를 내어주는 후배다. 이거 다음 주까지 정리할 목록이요. 정말 괜찮겠어요? 제가 해도 되는데..


“ 조에 늦게 끼어든 건데 ”


괜찮아 이정도는 해야 나도 마음이 편하지. 씨익 웃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후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선배가 들어오고나서 자료 퀄리티도 훨씬 좋아지고, 능률도 높아져서 얘들 은근 다 좋아해요. 짐이라고 전혀 생각안해요. 그렇담 다행이네. 베낭 지퍼를 지익 열고 닫으며 이와이즈미가 웃는다.


“ 근데.. 이거 뭐예요? 선배 취향은 아닌 거 같고 ”


베낭 지퍼에 달린 오렌지색 고릴라 인형을 툭- 건드리며 묻는 말에, 이와이즈미는 어깨를 으쓱거린다. 여자 친구가 준거? 묻는 후배의 물음에 대꾸 없이 다시 어깨를 올리며 웃은 이와이즈미가 강의실 밖으로 나선다.


“ 선배 언제 밥 먹어요 우리 ”

“ 그래. 과제 발표 끝나고 먹자. 애들 전부한테 내가 쏠게 ”


손을 흔들고 사라지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아쉬운 듯 히피펌을 한 후배가 손을 흔든다.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똑똑, 누군가와 주고받았던 문자 목록에 다시 답신을 한다.



[선배랑 조 발표 마무리 단계예요. 그런데 시험 족보 정말 주실 거죠?]




...



흐아암, 다시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이와이즈미가 멍한 머리를 양옆으로 탈탈 털어낸다. 터벅거리며 중앙 계단 쪽으로 내려가는 길, 삼삼오오 모여 앉은 교내 커플들 사이를 이리저리 비켜 내려간다. 오늘은 건네받은 자료들만 정리해서 보내고, 아직 남은 돈도 넉넉하고.. 간만에 고기나 구워먹을까. 아니 저번에 집에서 보내준 야채들도 있으니까 두부 사서 전골 해먹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어깨에 맨 가방을 다시 올려 매는데. 툭- 인형이 떨어진다. 아 이런.., 그래 오래되긴 했네. 오렌지색 고릴라 인형을 만지작거리다 안주머니에 쿡 찔러 넣는다. 그리고 그런 이와이즈미의 뒤로 누군가 불쑥 나타나 귓가에 속삭인다. 



“ 이와쨩 집에 가? ”

“ 시발 깜짝이야 ”

“ 욕했다! ”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면 누구나 놀라지만, 나타난게 네 놈이면 더 욕이 나올만 하지. 꽉 주머니 안 인형을 쥐며 고개를 내민 오이카와의 얼굴을 내리치듯 밀어버린 이와이즈미 탓에 풀썩 오이카와가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 아야, 이와쨩 아프잖아. ”



어 그래. 어디서 개가 짖는가보구나하는 태도로 무시하는 이와이즈미의 뒤를 졸졸, 오이카와가 따라온다. 나도 지금 퇴근하는데, 이와쨩 집에 같이 가도 돼? 내가 고기 살게 우리 같이 전골 해먹을까? 후식으로는 역 앞에 팥빵이랑 크림 소다 사갈까? 이와쨩 좋아하잖.., / ..... 야 오이카와 / 응? / 나야 친구 없다 치자, 넌 뭐냐 / 무슨 소리야 이와쨩 / 주변에 밥 같이 먹을 사람정도에 넘치잖아. 너. 굳이 왜 자꾸 나한테 엉기는거냐고. / 이젠 화도 안난다, 조금 질리려고 해. 환멸이라는 게 이런 건가. 눈치 없는 척도 아니잖아. 너 다 알면서 이러는 거잖아. 지금. 사람 괴롭히는 거야? / 내가 이와쨩을 뭐하러 괴롭혀 / 떨어지라고 좀. 그러니까. 꽉, 입술을 씹으며 팔을 젓는 이와이즈미의 몸짓에 오이카와가 멈칫 자리에 멈춘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울망한 눈동자로 사람을 보는 건가.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 든다. 오이카와 넌 꼭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사람을 보는 건데.



“ 난 아직도 이와쨩이 왜 날 미워하는지 모르겠어.. ”



‘ 잘생긴게 죄야? 역시 그래서 미워하고 거리 두는 거야? .. 그런다고 이와쨩이 돋보이거나 잘생겨지진 않아. 세상 기준이란게 그래.’ 저 뚫린 입에 주먹을 날려 뒤통수까지 쳐버린다면 속이 시원해질까. 종알종알 헛소리를 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씁쓸한 입꼬리 한쪽만 올리던 이와이즈미는 곧 체념한다. ‘ 닥치면 밥 줄게 ’ 영원히 닥치지 않을 거 같던 주둥이가 한순간 확 닫힌다. 하아, 숨을 쉬고 다시 뒤로 돌아가는 이와이즈미 뒤를 얼른 오이카와가 따라 붙으며, 고기 사려면 저쪽 뒷골목 정육점이 좋은데.., 입 열면 넌 야채만 먹을 줄 알아. 으르렁 윽박을 지른다. 쉿. 다시 조용해진다. 아 이 평화가 오래 가면 좋겠다. 보골 거리던 전골냄비가 미지근해지고,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크림소다가 잔을 꼴꼴꼴 거리며 채우는 것처럼. 오이카와는 또 당연하게 이와이즈미의 집 쇼파 가운데에 자연스럽게 드러누워있다.



“ 다 먹었으면 이제 좀 꺼져주겠니 ”


심심한데 영화 볼래? 아님 게임할까? / 여가는 너희 집 가서 즐겨 / 대학원생이 너처럼 한가하기도 하냐? 난 졸업하고 이제 취업준비해야 해서 엄청 바쁘거든. 발로 꾹꾹 오이카와의 엉덩이를 밀어내보지만, 힘이 좋은 엉덩이는 쇼파에 붙어 떨어지질 않는다. 이 자식 엉덩이에도 근육있는 거 아냐? 꿈틀, 눈썹을 찌푸려 본다. / 이와쨩. 기말 시험 준비는 잘 되가? / 신경 꺼줄래? / 학과에 족보 도는데 알아? / 그딴 족보 없어도 되거든 / 험악하게 오이카와의 엉덩이 사이로 발가락 끝을 세워 찔렀다. 아야 아파 소리 지르던 말던, 내 쇼파에서 저 궁둥이를 떨어뜨리고 말겠다는 일념이다.



“ 그 족보는 50%야. 나한테 100% 완성본 있어 ”



웃기지마 그 과목에 100% 족보가 있었으면 내가 낙제를 했을리가 없어. 어디서 사기를 ㅊ.., 꾹꾹 이제 등과 허리를 떼어내기 위해 허벅지로 밀어내는 이와이즈미에게 껌처럼 엉겨붙으며 오이카와가 매달린다.



“ 진짜야. 1000% 통과 보장이야 내 노트거든. ”



오이카와 노트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꿀꺽, 구미가 당긴다는 것이 들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을 유난히 밝힌다는 그 교수님은 전체 수강인원의 10% 남짓도 통과 시켜줄까 말까하는 최악의 커트라인을 가진 분이니까. 흔들리는 이와이즈미의 눈빛을 정확히 읽은 듯 오이카와의 엉덩이를 밀어내는 이와이즈미의 다리 힘이 약해진다. / 나... 돈 없어. / 친구끼리 무슨 돈이야 이와쨩. / 그럼 공짜로 주겠다고? / 노력을 공짜로 달라니, 그건 도둑놈 심보야 이와쨩. / 이 자식이 지금 장난하나. 뭘 바라는 거야. 그럼. 험악하게 눈꼬리가 올라가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이크, 하며 오이카와가 얼른 자세를 고친다.



“ 졸업할 때까지 나랑 놀아 ”


이와쨩은 어차피 이 과목만 패스하면 졸업이잖아, 그 후에 학교에서 나 볼 일 없을 거고.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우리 같이 놀자. 분명 밑지는 장사는 아닌데, 왜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리 속에 삐요삐요- 빨간 불이 들어오는 걸까. 이건 분명 동물적인 그동안의 감각으로 보았을 때 위험신호다. 이와이즈미.


“ ... 콜 ”


본능이 알려주는 위험보다 이와이즈미는 졸업이 간절했다.





...



그 날 이후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오이카와와 점심시간에는 항상 만나서 밥을 먹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은 후 잡담을 하다 헤어졌다. 저녁이 되어 아르바이트를 다녀오면, 제집처럼 쇼파에서 간식거리를 사들고 온 오이카와가 있었다. 한쪽 발로 녀석의 궁둥이를 슬슬 밀치고 게임이나 티비를 보다가, 대부분 이와이즈미가 먼저 잠이 들었다. 이와이즈미가 잠이 들고 나면 오이카와는 언제 가는지 모르게 집에서 사라져 있었다. 제가 우렁 각시라도 되는 듯, 놀았던 흔적과 함께 말끔히 집을 정리해두곤 해서. 오이카와가 있었다. 한쪽 발로 녀석의 궁둥이를 슬슬 밀치고 게임이나 티비를 보다가, 대부분 이와이즈미가 먼저 잠이 들었다. 이와이즈미가 잠이 들고 나면 오이카와는 언제 가는지 모르게 집에서 사라져 있었다. 제가 우렁각시라도 되는 듯, 놀았던 흔적과 함께 말끔히 집을 정리해두곤 해서. 가끔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처럼 편리하단 느낌도 들었다. 한낮 같던 기온이 서늘해지고, 슬슬 학기의 마무리를 할 때 쯤. 이와이즈미는 이정도의 거리감이라면 녀석과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곤했다. 오이카와의 노트의 힘을 살짝 받고 치른 기말고사를 마치고, 캔 맥주를 양손 가득 무겁게 들고 온 밤에는 유난히 마음이 더 느슨해져 있었을지 모른다.



“ 이와쨩 기분 좋아보이네 ”



육포를 질겅거리고 씹는 오이카와의 밉상스럽게 잘생긴 얼굴을 향해 치얼스. 이와이즈미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끝이었으니까. 까마득한 후배들과의 조별모임도, 깜깜한 종이 가득 시험도. 키득키득, 웃으며 한 캔 두 캔을 이와이즈미가 비워가는 동안. 오이카와는 제 흑맥주 한캔의 절반도 비워내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마음에 흥이 오른 이와이즈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제 마음의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 ... 야 너 그때 왜 그랬냐? ”

“ 언제 말인가요 이와쨩 ”

“ 그때, 너 그때  모른척 하지말고 새끼야.. 너 왜 그랬는지 말 해보라고 ”

“ 질문을 제대로 해야 답을 할 수 있답니다. ”



뱅글뱅글 맥주캔을 돌리는 오이카와의 얼굴이, 뱅글뱅글 돌아보인다. 그래서 인가. 꾹꾹 마음속에 꼬아놓았던 기억이, 녀석을 만나고 나서 불쑥 올라오던 궁금증이 제멋대로 삐죽하게 올라온다. 그때는 묻지 못했다. 그 3학년 선배가 결국 무탈하게 졸업하고, 뻔뻔하게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돌린 것도. 힘들어하던 아키가 결국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어느 지방의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동기들 하나 둘, 해프닝처럼 그때 일을 기억하지 못해도. ... 나는 계속 기억하는데. 아키를 뒤따라 계단을 뛰어올랐을 때, 뒤에 남겨진 잔상 같은 오이카와 네 모습이 오래도록 떠오르고 기억이 나서. 내내 궁금했었다. 

끔벅, 술에 잠긴 눈꺼풀을 반쯤 뜨고 보니, 어느새 쇼파에 드러누운 이와이즈미였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그런 이와이즈미를 빤히 올려보는 오이카와의 얼굴이 유난히 새하얗게 느껴졌다. 계단을 돌아서 뛰어오르기 전에. 아키가 그 오렌지색 고릴라 인형을 던지듯 버리고 가기 전에. 쿵쾅거리는 음악소리를 뒤로 하고 닫힌 문에서 막 걸어 나왔던, 오이카와의 얼굴처럼. 그 3학년 선배와 뜨겁게 키스 하면서. 분명 너.


“ 날 보고 있었잖아.. ”


제 눈을 덮으며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 알길 바랬으니까. 이와쨩이 "


이와이즈미의 덮힌 손을 치우는 오이카와가 바로 한 뼘에서 이와이즈미의 젖은 얼굴을 내려다 봤다.



“ .. 개새끼야 ”

“ 이제 이와쨩도 알잖아 ”


스물의 우리는 너무 어려서, 상처를 내는 것 외에는 방법을 몰랐어.


“ 내가 미워? ”

“ 닥쳐.. 너랑은, 끝이야 새끼야 ”



필요 없어 이제 다 끝났어. 너 같은 거.., 중얼거리는 이와이즈미의 눈은 오이카와의 시선을 피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 스스로를 향한 다짐인 듯, 이와이즈미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끝났어, 이제 끝났어.., 손등에 제 얼굴을 괴고 오이카와는 그런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빤히 본다.




***



" 혹시. 이와이즈미? "



운명이란 건 참 얄궂다. 톡톡 등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본 이와이즈미는 한참이나 말을 잊었다. 긴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눈을 반짝거리는 사람을 한참 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쿡, 상대가 본인을 가리킨다. 기억 안나? 나야.


“ 아키.."



응, 잘 지냈어? 요즘 뭐하고 지내? 엄청 오랜만이다. 그치? 생글거리며 웃는 아키와 마주 앉아서도 얼떨떨하다. 고향에.. 내려갔다고는 들었어. 자리를 옮겨 카페에 마주 앉아서도 어쩐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와이즈미다. 난 엄청 반가운데, 넌 아닌가.. 다시 긴머리를 넘기고 어색하게 웃는 아키를 향해 이와이즈미도 어색하게 마주 웃는다. 그럴 리가. 항상 생각했는데. 이와이즈미의 말에 시선을 돌리던 아키가 좌석 옆에 놓인 이와이즈미을 본다. 그 인형.. 설마 우와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어? 아키의 시선이 닿은 것을 배낭에서 빼내어 이와이즈미가 건네준다. 응 언젠가 돌려주려고 생각했거든. 이와이즈미에게 건네받은 오렌지색 고릴라인형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아키가 신기해한다. 그리고 아키의 손, 네 번째에서 반지가 반짝거린다.



“ 아 맞아 나 결혼 했어 ”



응. 어 축하해. 조금 얼떨떨하게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끄덕인다. 스무살의 소녀티가 났던 아키와 지금 이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아키는 같은 얼굴이지만 아주 다른 사람같다. 이와이즈미는? 나는... 얼마 전에 겨우 졸업해서 아직 자리 잡으려면 멀었지. 오랜만에 만난 아키의 모습이 건강해보여서 안도감이 들면서도. 어쩐지 애잔함에 이와이즈미는 그녀처럼 밝게 웃지 못했다. 잘 지내는지 궁금했어. 뭐 사실 그렇게 휴학한 거.. 도망친 거였지만, 그래도 덕분에 고향에서 첫사랑이랑 재회도 하고. 넌 어떻게 지냈어? 너도 학교 휴학했었지?, 맞아.. 나도 그냥 한동안 여행도 하고, 돈도 벌고, 뭐 그랬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아키가 웃어 보인다. 그래도 이렇게 나 생각해줬다니 고마운걸. 얼마 전에 만난 오이카와는 나 알아보지도 못하던데.



" .. 오이카와를 만났어? "



응 그이 회사가 여기 학교 근처라 그랬구나.., 어색하게 시선을 내리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살피던 아키가 묻는다. 이와이즈미는 어쩐지.. 잘 지내지 못한 거 같네. 아직도 과거에 메어 있는건 아니지? 묻는 아키를 향해 이와이즈미는 저에게는 엊그제처럼 생생한 기억이.. 아키 너는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 뭐 그때는 엄청 힘들었지만 사실 그렇게 그 사람을 좋아한 건 아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자존심의 문제 였달까. 엊그제 오이카와 만나서도 이야기했지만. 왠지 나와 그 선배 문제에 네들이 더 피해본 거 같아. 너도 상처받았을 텐데 ”

“ 내가 무슨.. ”

“ 난 그때 화가 났었고, 사실 실연당한 표정을 하고 있는 건 너였으니까 ”


실연이라니. 아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푸핫- 웃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살피며 아키는 오렌지색 고릴라 인형을 다시 테이블위에 둔다.


" 오이카와랑 이야기 해봐. 이와이즈미 "

" 그 녀석이랑 무슨 할 말이 있겠어. "

" 보이는 게.. 다가 아닐 수 있으니까 "



사실 그때 미처 말은 못했었지만, 오이카와한테 사과 받았었어 그녀석이 아키 너에게 사과를 했었다고? 되묻는 이와이즈미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과를 받을 건 굳이 내가 아니었지만. 난 지금 현재에 잘 살고 있으니까. 이와이즈미 너도, 이제 그만 외면하고 마주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 ..얼마 전에 물었어 / 시원한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그냥 거리까지. 그 녀석과 나는 해결하기에 이미 너무 오래되고 퀘퀘한 지나가버린 사이가 된 걸지도.


" 굳이 해결하고 말 것도 없고, 녀석과 나는 그냥 그렇게.. 끝날 사이였던 거지 “


사이라는 표현도 우습지만 딱 소리에 순간 불이 번쩍인다.


" 아키? 지금? "

" 어. 때렸어 “


불이 나는 이마를 붙잡고 이와이즈미가 눈을 깜박인다. 못마땅한 듯 혀를 차고 자리에서 일어선 아키가 고개를 저었다.


" 네들은 어쩜 아직도 스무살 같니? "

" ... 아키? "

" 무슨 끝난 사이들이 아직도 그렇게 구구절절해 “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아직도 네들 표정은 똑같은걸. 스무 살 그때처럼.

가장 밝고 가장 아픈 표정이야.




...



어둑해진 캠퍼스 안, 올려다본 학과실 불이 드디어 꺼지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가만히 듣는 이와이즈미를 발견한 누군가 반가운 듯 손을 흔든다.



“ 이와쨩 ”


부르는 소리에 어두운 벽에서 가로등 쪽으로 나오며 이와이즈미가 고개를 까닥인다.


“ 잠깐 걸을래, 오이카와 ? ”




...




학기말이 지난 저녁의 캠퍼스는 비교적 한적하다. 삼삼오오 어두운 캠퍼스를 거니는 사람들 사이와도 멀어져, 길을 밟는 자박거리는 소리만 한참. 공원 끝 호숫가 벤치쪽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돈다. 


" 이와쨩 곧 졸업이네 "

" 어 덕분이다 "

" 무슨. 이와쨩이 열심히 한 거지 “


요즘은.. 왜 놀러 안 오냐. 용기를 내 묻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오이카와가 놀란 듯 눈을 뜬다.


" 졸업하고도 나랑 놀아줄거야? "

" 새삼.. "


나 오늘 아키 만났거든., / .. 응 나도 얼마 전에 만났어. / 너 임마 알아보지도 못했다면서 또? 동기인데 그래도. 하나마키도 그렇고 나름 친했던 사인데. 못 알아보냐 무심하게. 남한테 관심 좀 가져라. / 어쩌다 보니 또 잔소리다. 흠.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닌데. 멀뚱하게 저를 보는 오이카와의 옆 얼굴을 민망하게 보다 이와이즈미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바람이 시원하고, 공기도 깨끗하다. 왜도록 무거웠던 마음도 여기서 이제 그만 풀어낼 수 있을 거 같다. 그러니까. 내말은. 오이카와. 


" 내가.. 이렇게 너에게 오래 화를 내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같아서 "


고작 그래, 오래된 일로 말야. 오이카와를 향해 이와이즈미가 손을 내민다. 화해하자. 내가 속이 좁았어- 그만 다 잊어버리자. 용기를 내 내민 이와이즈미의 손을 빤히 오이카와가 본다. 팔 떨어지겠다. 아프려고 하는데. 삐죽 입술을 내미는 이와이즈미를 향해 조용히 오이카와가 중얼거린다.


" 이 손 잡으면 "

" ? "

" 우리 다시 친구야? "


푸핫, 고개를 끄덕이며 이와이즈미가 다시 손을 내민다. 그래 임마. 그러니까 악수.., 


" 그럼 안 잡을래 "

" 응? "

" 이와쨩은 아직 반밖에 모르니까 "


벤치에서 일어난 오이카와가 다시 저벅거리며 걷는다. 저를 앞질러 가는 오이카와를 향해 황당한 얼굴로 이와이즈미가 일어서 따라 붙는다. 뭐 이런 황당한 놈이 다 있어. 내가 얼마나 용기를 낸 건데. 과거는 깨끗하게 잊고 서로 쿨하게 화해하자는데. 싫다니. 놀자며 같이, 네가 그랬잖아.


" 야 화해하자니니까 임마? "

" 이와쨩이랑 놀고 싶었어 "

" 그래 "

" 밥도 같이 먹고 싶었고 ”


갑자기 자리에서 멈춘 오이카와의 등 바로뒤에서, 움찔 어깨를 움츠리는 이와이즈미다. / 다시 만나서 잠깐 모른 척 잊은 것처럼 그렇게 지내볼까. 고민도 했었어. 그래 이와쨩 말대로 친구처럼. 그런데.. 이와쨩이 아직도 나를 미워해서 .. 너무 속상한데, 그게 또.. 좋았어. / 미친 변태냐 / 친구로 화해는 안할거야. 차라리 계속 화내고 미워해 / 이와이즈미의 얼굴이 처참히 구겨진다. 마치 열심히 숙제를 풀어왔는데 0점 처리 당한 아이처럼. 오이카와는 그래서 힌트를 주기로 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뒤를 돈 오이카와의 얼굴이 어느 때본 꼭 그 표정이었다. 웃는데, 웃는게 아닌. 슬픈데, 슬픈게 아닌. 


“ 이와쨩이 틀렸어 ”

“ .... ”

“ 나 사람들 기억 못 하는거 아냐. 무심하지 않아 오히려 더 세세하게 잘 기억하고 있어. 매번 하는 악세사리, 즐겨 신는 운동화, 팔위에 난 점의 위치까지도. 다 기억해. 그래야만 했으니까 "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냔 듯 의문을 가득 담은 채 빤히 자신을 보는 이와이즈미의 얼굴을 오이카와가 바라본다. 


“ 난 사람들 얼굴을... 알아보지 못해 ”

“ 뭐 ? ”

“ 얼굴만 그래. 다른 건 다 기억나는데. 얼굴만. 그래 방금 본 사람도. 심지어 내얼굴도, 모를 때가 있어 ”


품안의 지갑에서 오이카와가 언제인지 어렴풋한 때. 스물의 저와 이와이즈미가 찍힌 사진을 꺼낸다. /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서 봤는데.. 우습겠지만. 보고 싶은 사람 얼굴인데 볼 수가 없어서 미칠 거 같더라. / 오이카와.. , 이와이즈미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떨려온다. / 그래서 한참 늦게 알았어. 근데 그냥.. 네 체온도, 냄새도 난 다 기억나, 나를 등지고 가는 네 뒷모습까지 전부.. / 한발짝 먼저 다가온 이와이즈미는 두 손을 들어 오이카와의 얼굴과 볼을 문질렀다. 흠뻑 젖어있는 녀석의 얼굴을 매만지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 오이카와.. 왜 .. 말을 안했어? ”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와이즈미는 그동안의 모든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자신을 후려치는 거 같았다.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의 자리를 불편한 듯 피하던 오이카와의 모습. 관찰하듯 가려진 후드모자 사이로 사람들을 빤히 보던 습관. 재수 없는 녀석이라고 오이카와가 욕을 먹었던 하나하나의 순간까지. / 그 선배는.. 그럼.. /  몰랐다고 해도.. , 네가 믿어주지 않을 거 같아서.. / 우연히 만난 클럽에서 알아보고 오이카와에게 자신을 만나줄 것을 요구했던 3학년 선배가- 다시 오이카와를 찾아와 클럽 계단에서 키스를 했던 그 날. 오이카와는 그 선배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태였던 거다. / 너는 바보처럼.., 


“ .. 그 개새끼를.. 가만 뒀어? ”


뿌득, 이를 갈며 이와이즈미가 주먹을 꽈악 쥐었다. 덕분에 두 손으로 쥐고 있던 오이카와 얼굴도 같이 쥐어뜯긴다. 마구 구겨진 오이카와의 얼굴 위의 입술이 우물거린다.



“ .. 이와쨩, 아픕니다. ”

" 넌 임마 !! "


울컥, 같이 일그러진 이와이즈미의 얼굴에 오이카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 왜 이와짱이 그렇게 화를 내? 다 지난 일인데 ”

“ 어떻게 화가 안나?! ”



오이카와 네 일에는 도무지 무신경할 수가 없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얼굴을 붙잡고 소리를 치느라 제 코앞까지 오이카와 얼굴을 당겨왔다는 걸 알았다. 마주친 시선에 움찔, 다시 입을 꾹-다문 이와이즈미를 빤히 오이카와가 본다. 찬찬히 머리끝부터, 훑어가며 살피는 시선이 이제 답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 안에 저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 걸까.



“ 뭘 봐, 못생긴 게 ”

“ 거짓말.. 나 잘생겼댔는데 ”

“ 내 눈엔 못생겼어 ”

“ 진짜? ”



거짓말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 잘났다. 오이카와 넌 참 안됐다. 거울을 봐도 이렇게 잘난 네 얼굴을 못 본다니. 빤히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에 비추는 얼굴도 알아보지 못하는 걸까. 생각하느라 가까이, 더 가까이 오이카와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이와이즈미는 깨닫지 못했다. 윗입술부터 맞물려, 아랫입술을 덮었다. 말캉하고 폭신하게 눌린 입술이 한참이나 머물렀다. 가만히 눌린 입술이 머금어졌다 마른 듯 싶었던 입술위 어느새 촉촉하게 비벼지고 장난기 있게 쿡쿡, 눌렸다. 살짝 앞니로 물었다가 혀를 내밀어 느릿하게 비비는 통에 등줄기로 또다시 소름이 끼쳐 꾹, 녀석의 팔을 붙잡아 보기도 한다. 천천히 떨어 질 때까지 이와이즈미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감은 두 눈 안에서도 오이카와의 얼굴을 그릴 수가 있었다. 캠퍼스 안을 오이카와와 손을 잡고 걸었다. 친구로서는 아니었다. 그래도 잡은 커다란 두 손의 체온이 참 따뜻했다.






Fin.




+)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는 과 CC가 되었습니다. 이와이즈미가 오이카와의 후배로 대학원에 입학 했기 때문이죠.

+) 이와이즈미의 논문 주제는 < 안면실인증과 애착의 관계 >로 정해졌다고 하네요.

+) 오이카와가 홈스쿨링을 한 이유는 중고교 시절이 안면실인증 병으로 적응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 오이카와는 두 사람이 만난 첫날 본인이 무슨 색 후드를 입은 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이와이즈미만 기억하고 있는데. 참 이상하네요.

+) 유난히 이와이즈미는 멀리서도 잘 알아보는 오이카와. 십년이 넘도록 한결같은 이와쨩의 머리스타일 덕분이다라고 했지만, 과연 그것뿐일까요

+) 대학 와서 오이카와는 본인이 잘생겼다는 걸 남들을 통해 았았는데, 이와이즈미만은 절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아서 잠시 혼동. 사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말해주지 않아서 제 얼굴이 이와쨩 취향이 아닌 걸까 아직도 마음고생 중이라고.

+) 모두 즐거운 명절 되셨길. ♥







하늘령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