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성당은 물에 잠겨있었다. 숲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맑은 물은 성당 계단 아래쪽까지 차올라 아름다운 연꽃과 이파리들을 끌어안았다. 물에 잠긴 바닥은 푸른 이끼와 진흙으로 덮여 미끄러웠고, 발목까지 오는 물 덕에 걸을 때마다 찰랑 소리가 났다. 주위에는 고즈넉한 안개가 껴있었다. 안개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어 포근한 품에 안긴 듯이 따뜻했다. 아홉 시쯤 되면 부지런한 신도들과 사람들이 이곳에 참배하러 올 것이었다.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보고서 그녀는 열두 신의 심볼이 원형을 이루는 장식물 앞, 성당 입구에 섰다. 어느 원예가는 조용한 아침에 이곳으로 와, 물결에 반사되는 햇살로 가득한 성당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고도 엄숙해서 그는 곧 머리를 조아리고 기도하였다 한다. 비록 안개가 자욱한 날씨였으나 엄숙함만은 그대로였고, 그녀도 마찬가지로 에오르제아의 열두 신에게 기도했다. 재해 끝에 다시 찾아온 평화의 시대는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는지, 그들의 정수가 담긴 유품들을 정리하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울었는지. 그들이 주신 품으로 무사히 돌아가기를 바라며 그녀는 기도했다.

마지막으로 성당에 왔던 때가 언제였는지, 머릿속에 남은 잔상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아득히 멀리 있었다. 시간은 오래된 건축물뿐만이 아니라 기억까지 부식시켜 그 빛을 바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오래된 것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특별한 장소와 특별한 사건, 특별한 누군가. 그녀는 그것을 알았고 기억했다. 꼭두새벽부터 바삐 이곳을 찾은 이유가 있었다. 작은 약속이었다. 흘려들었더라면 영영 놓쳤을지도 모를 약속이었다.


"용케도 들어주었군."


찰박거리는 물소리와 함께 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몸을 돌려 그를 향했다. 햇빛에 생긴 그늘 때문인지, 주위에 끼어있는 안개 때문인지, 그도 아니라면 눈앞으로 내려와 있는 제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 들렸다.


"자네에게... 또 한 번 놀랐네."


그녀는 잠자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예전보다 깊어진 목소리는 예전만큼 차분하지 않고 약간의 떨림이 들어있었다. 안개 속 실루엣도 기억과는 달랐다. 그럼에도 기억 속의 그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언가 진정하려는 듯 그의 입술은 한참 다물어져 있다가 느릿하게 떨어졌다.


"며칠을 여기 앉아서 생각했지. 아직도 뒤치닥꺼리를 하느라 바쁜 걸지도 몰라. 자네는 사소한 일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으니까."


훅 끼쳐오는 그의 한숨이 썼다. 그의 웃음이 썼다.


"아니면 역시 듣지 못했던 거다, 그리 생각했어."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바랐지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작은 바람이되 오롯이 그만의 큰 욕심이었노라고. 모든 일이 끝나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할 것을 생각하면 괴로워서, 그만 내뱉어버린 아주 작은 목소리였노라고.


"알피노."


그녀의 손이 그를 안개 속에서 잡아끌었다. 주변의 안개를 몰아내듯 약한 바람이 일었다. 훌쩍 큰 키, 더욱 길어진 머리칼, 더는 유약한 소년의 몸이 아닌, 제법 청년티가 나기 시작한 엘레젠 아이. 그녀에게 이끌려 결국 그녀와 마주한 그는 제 표정을 섬세하고 숱 많은 은발로 가려버렸다. 흘러내리는 은발을 조심스레 걷어내자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가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이리 드러내는 걸 처음 보았다.


"그렇게 보지 말게."


푸른 눈동자는 제게 꽂히는 시선을 피했다.


"자네가 나와 같은지 나는 몰라."


그것 만큼은 옛날부터 자신이 없었어. 은색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하얗고 부드러운 뺨에 붉은 물이 엷게 번졌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났다. 제 7재해 후 그리다니아에 도착했을 때. 말 하나 섞지 못한 사이였지만, 그들은 같은 마차에서 새로운 여행을 시작했었더란다. 말이 없는 쌍둥이. 금세 지워질 첫인상은 그뿐이었다.

너무 오래전이었다.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는가? 과거의 그녀는 한 번이라도 그와 제대로 마주했었는가?


"나도 네가 나와 같은지 몰라."


하지만 갈수록 깨닫는 것이 있었다. 순간순간을 늘 옳은 길로만 갈 수 없었던 시간이 있었고,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던 시간도 있었다. 어린 소년은 오만하고 경험이 없었으며, 어린 그녀는 자신을 너무 몰랐으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었다. 그녀는 소년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것은 지금도, 앞으로도.

너는 나로 인해 깨달았다고 했지만, 나 역시 나를 깨워준 네가 있어서.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움이 벅차올라서, 나는 더 나아갈 수 있게 되었어.


"하지만, 우리 도련님."


그녀는 많은 말을 삼키고 삼켰다. 가슴이 답답해서, 머릿속을 정리할 수 없어서, 뭐라 말한들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간단한 행동을 했다.


"......!"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묻혀버린 기분이었다. 끌어안은 팔은 강했지만 부드럽고 답답하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에 먹혀 커졌다가 곧 나른함에 묻혀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마주 끌어안고 숨을 쉬었다. 그의 코끝이 그녀의 목덜미에 머물렀다. 조금의 체취도 놓치지 않는다는 듯이 깊게 들이마셨다. 이상하게 진정이 되었다.


"다시 보게 되어서 기뻐."


그녀는 예전과 같이 인사할 수 있었다. 그리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더메어와 보탈리아에 상시거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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