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선 많은 이유가 필요했다.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지금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런 이유 몇 개가 손에 꼽히고 나면 그것은 곧 그럴듯한 명분이 된다. 간사하고 하찮은 것이 인간이라 그 명분이 결국 뜻밖의 용기를 만든다.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하게 만들고, 나와는 상관없을 것 같은 일에 뛰어 들게 하고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을 송두리 째로 흔들어 놓기도 한다. 이유를 찾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그 모든 것이 바뀔 것을 알고 있기에 명분이라는 것은 더 중요하고, 또 간절한 것일 지도 몰랐다.


“....”

“....”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시작할 명분 보다, 시작하지 말아야 할 명분이 더 명확했기에 그랬다. 연애를 시작하면 반드시 겪어야 할지도 모르는 그 마지막이 나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웠다. 내 역사에 또 다시 실패를 남겨야 한다는 것이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과 그리고 나도 좋아하는 사람과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는 가장 큰 명분이었다.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데 나만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절망을, 나는 또 다시 겪어낼 자신이 없었다.


“본부장님.”

“.....”


감정엔 내성이 생기지 않았다. 몇 번을 실패해도 다시 잊어버리고 사랑을 하는 것처럼, 아무리 사랑하다가도 한 순간 깨져버리는 이별에는 담담해질 여력이 없었다. 사랑하다 겪는 이별은 어떤 모습이든 늘 가장 연한 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이었고, 그 생채기는 아물지도 흉터로 남지도 않았다. 그저 다른 상처에게 자리를 내어 줄 뿐, 그것은 모습 그대로를 그대로 간직한 채 평생 가슴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요.”

“.....”

“본부장님.”

“.....”

“곽아론.”

“....”

“야.”

“....”


그러나 아물지 않은 상처를 몇 개 주렁주렁 달고 또 다시 사랑을 시작할 명분이 없어서, 그래서 빙빙 돌며 피하던 것이 갑작스레 예상치 못한 순간 방향을 틀어 내 눈 앞에 나타날 때 나는 결국 그것을 똑바로 마주할 수밖에 없다. 보고 싶지 않아서, 보면 붙잡고 싶어질까 봐 어떻게든 피하고 외면하던 것을 도망칠 시간도 벌지 못한 채 마주치는 순간 나는 결국 모든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형.”

“.....”


이것을 놓치면, 자존심을 지키는 대신 평생 후회라는 것을 덤으로 얻게 될 거라는 것을. 원치도 않은 그 덤에 상처보다 더 깊은 한숨을 간직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내 명분이었다. 곽아론에게, 먼저 좋아 한다 다시 고백을 한 이유.


“이제야 보네.”

“......”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곽아론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내 앞에 나타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요, 데려다 줄게요. 그러나 나타나 듣고 싶었던 말은 대답 대신 평범한 것이었다. 이제는 묻지도 않고 당연하게 저장된 주소를 찍는 손가락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짧게 숨을 내쉬고는 핸들을 돌리는 얼굴에서 조심스레 시선을 옮겼다. 갑작스런 고백과 뜻밖의 순간은 곽아론에게도 충분히 당황스러운 것일 거라는 것을 알아 아무 말 없이 어둠이 내린 도로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느새 눈에 들어오는 익숙한 골목의 풍경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알아요, 나 되게 이기적인 놈인 거.”

“....”

“내가 먼저 싫다고 해놓고 이제와 이러는 거 되게 웃긴 거 아는데.”

“....”

“근데 이기적인 김에 그냥 확 이기적일래요.”

“.....”


내리라는 말도 들어가보라는 말도 없이 그저 묵묵히 시동이 꺼진 어두운 차안에서 그 어둠에 익숙해지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는 곽아론의 시선이 나에게 돌아오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무슨 짓을 해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앞만 바라보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변명처럼 쏟아내는 목소리에 곽아론은 표정도 바꾸지 않고 그저 내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미안해요.”

“.....”

“내 멋대로 이기적이라서.”

“.....”

“말 바꾸고, 혼란스럽게 해서.”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곽아론이 곧 살며시 고개를 돌려 창에 기댄 팔에 이마를 기댔다. 어렵게 돌아온 시선이 다시 돌아가 버리는 것을 붙잡지 못하고 바라보던 나는 가슴께가 지릿한 느낌에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나를 그렇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요.”

“.....”

“부담스럽다면서.”

“.....”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다음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보다 먼저 들려오는 음성에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밖을 바라본 채 나를 향해 묻는 목소리는 과거의 내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뱉어 낸 말은 결국 뱉어 낸 사람의 몫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닌 곽아론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나는 그 말이 생각보다 가슴이 아프고 괴로운 말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그 말을 듣고도 곽아론은, 그리고 그 말을 되풀이하는 순간의 곽아론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닌 거예요? 내 마음이 부담스럽지 않게 됐어?”

“...아니요.”

“.....”

“난 여전히 본부장님이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린다고 한다면, 먼저 떠나버릴 거예요. 그럴 수 없도록.”

“.....”

“여전히 그건 부담스러워요.”

“.....”


나를 보지 않던 시선이 전과 다르지 않은 대답에 다시 나를 향했다. 어슴푸레 쏟아지는 골목의 가로등 빛이 완전한 어둠을 면하게 해주었다. 그 빛에 의지해 이제는 완전히 선명해진 얼굴을 마주하던 나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나는 버릴 게 없어요. 모든 걸 버린다고 해도 당신 발끝만큼도 못 따라가요.”

“.....”

“가진 것이라곤 마음뿐인데.”

“.....”

“내 마음이 당신의 그 희생을 변상할 수 있을 만큼인지는.”

“.....”

“확신이 없어요.”

“.....”

“희생은 무거운데, 마음은 가벼운 거니까.”


사랑이 끝나는 순간은 여러 가지 모양이지만 결국 같은 실패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사랑의 소멸은 양 쪽의 불이 모두 꺼져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변만식이 변하는 동안 나 역시도 버티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내 사랑이 소중했기에, 오롯이 내가 중요해서. 변만식을 사랑했던 마음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뭐가 달라진 거예요.”

“달라진 것 없어요.”

“.....”

“본부장님만 나에 대한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

“단지.”

“.....”


내가 먼저 질려 끝내버릴 수도 있는 사랑이었다. 곽아론이 아닌 내가 먼저 스스로 이 사랑을 실패로 결론 내버릴 수도 있었다. 곽아론이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 짜증날 수도 있었다. 미국에서 걸려오는 전화만 봐도 질색하는 날이 올 수도 있었다.


“좋은 사람이에요, 본부장님은.”

“.....”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됐고.”

“......”


시작하지 않으면 해피엔딩이라 믿었던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시작하지 않으면 끝이 없듯이, 이미 시작한 연애가 끝이 나더라도 그것이 무조건 내가 슬픈 결론일 수는 없었다. 오히려 끝이나 개운한 아주 성공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욕심이 나요. 본부장님을 그냥.”

“.....”

“한 때 내가 좋아만 했던 사람으로 기억하기가 아까워졌어요.”

“.....”

“이기적인 거 알면서도.”


가정은 결국 가정에 불과하지만 아무것도 시작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연애가 어떤 결론일지.


“내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

“나는 여전히 당신이 좋아요. 아니, 더 좋아졌어요.”

“.....”

“지금 이런 말을 하는 순간도, 얼굴을 마주하면.”

“......”

“키스하고 싶을까봐, 보지도 못할 만큼.”


내 명분을 가만히 뱉어내고 처분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나는 곧 담담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한국말을 할 때의 곽아론은 성급하지 않았다. 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서두르지 못하는 탓일 수도 있겠지만 한 번 보다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생각 속에 몇 번이고 내 말을 곱씹는 듯, 담담한 얼굴은 울 것 같았다가 다시 평온해졌다.


“본부장님.”

“좋아한다는 말 들으니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요.”

“....”

“진짜 죽을 것 같이 좋은데.”

“.....”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얼굴이 나를 향해 느리게 돌아왔다. 무언가를 곱씹는 듯 잠시 숨을 고르던 곽아론은 복잡한 표정을 했다.


“생각 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

“나 말고 당신.”

“...네?”


당연하다 생각했다. 우리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은 나였으니 어쨌든 생각할 시간은 필요했다. 그 시간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곧 달라붙은 다음 말에 그대로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미국가요.”

“.....”

“한 달 뒤에.”

“.....”


의문은 단숨에 풀렸다. 곽아론이 내 말에 선뜻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한 것도, 내내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실패가 두려워 시작도 하지 못했던 나를 헤아리는 마음이, 나에게 선택지를 내밀고 있었다.


“쉽게.”

“.....”

“돌아 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


유예기간은 한 달. 그리고 그 중 얼마가 나에게 허락될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

“나랑 연애 할래요?”

“.....”


곽아론은 모든 허물을 벗어던지고 가장 불리한, 가장 나체의 상태로 나에게 다시 묻고 있었다. 시작하자 말을 꺼낸 이기적인 사람은 나였지만, 결국 또 곽아론이 내게 묻고 있었다.


“싫다고 말해도 괜찮아요.”

“.....”

“나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니까.”

“.....”


그리고 또 괜찮다 말을 하는 곽아론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내 손을 붙잡고 있는 손만 빤히 내려다보았다.


“뭐가 됐든, 최민기씨가 행복한 쪽을 골라요.”

“.....”

“나는 그럼 돼요.”

“.....”


이 순간에도 나의 행복을 비는 이 사람을 내가 놓칠 이유는 명분은 없다.





-






생각이 정리되면 그때 이야기를 하자는 곽아론의 말에 나는 싫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하고 잘 자라는 말과 함께 나를 보내는 얼굴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내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곽아론은 정말로 아무런 것도 하지 않을 작정인 듯 했다.


“갑자기 미국이요?”

“갑자기가 아니야, 뉴욕에서 계속 들어오라고 콜을 했던 모양이던데.”

“근데 왜 버틴 거래요.”

“여기 일도 있으니까. 근데 거기도 어지간히 급했나봐. 오늘 첫 비행기로 바로 날아간 거 보면.”


아침에 일어나 처음 본 메시지에 나는 그저 한참을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나 미국가요. 모레 돌아옵니다. 언제 가고, 언제 돌아오는지 혹시라도 내가 겁을 내진 않을까 그 누구보다 친절하게 남겨 놓은 메시지엔 여전히 기다려달라는 말 같은 것은 없었다. 아직 잘 시간이라 전화로 전하지 못했다는 말을 남기면서도 전화 하겠다는 기약 하나 하지 못한 곽아론의 메시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나는 이내 가만히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최민기 휴가네, 휴가.”

“선배 일이나 좀 가져가고 그런 말해요.”

“미안하다, 내가 양심이 없다.”

“돈 주고 좀 사던가요.”


짜식이 말만 잘한다고, 나를 향해 커피 한 잔을 내밀며 중얼거리는 주석 선배를 보지도 않고 마우스를 움직이던 나는 곧 야, 근데 너 하며 다시 말을 거는 선배를 향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불어.”

“느닷없이 무슨 말인데요.”

“너 누구 생겼지.”

“.....”

“그치? 어? 그래서 그 날 그렇게 가버린 거지? 그치?”

“.....”


너 우리랑 맥주 마시기로 했다가 갑자기 휙 가버린 거 그래서 그런 것 아니냐며 저만의 논리를 펼치는 주석 선배를 향해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선배가 말하는 누구에 곽아론은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그 누구가 좋아하는 사람을 말하는 건 다르지 않아서 나는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봐, 이거. 아니라고 안하네.”

“.....”

“배신자. 어떻게 혼자 먼저 가버릴 수가 있어. 날 두고!”

“걱정마요. 아직 완전히 간 건 아니니까.”


그런 나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나를 향해 완전히 파티션을 넘어서 다가 온 주석선배는 빈 의자를 아무거나 끌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선배를 향해 담담하게 중얼거리자 선배는 왜, 뭔데 하며 더 눈을 반짝거렸다.


“왜, 뭐가 잘 안 돼? 너 싫대?”

“나 싫다는 사람 없어요.”

“여기 있잖아, 나.”

“...쌍방으로 싫은 거 말고요.”

“나 커피 들었다.”


손에 들린 커피가 뜨거운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듯 비릿하게 웃는 선배를 바라보던 나는 곧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에는.”

“....”

“너무 좋아서 망설이는 것도 있는 것 같아요.”

“뭔 소리야.”

“내가 너무 좋아서, 망설이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에요.”

“...개소리구나.”


더 이상 듣고 있을 필요가 없겠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선배가 곧 돌아서려다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관자놀이 즈음으로 손가락을 가지고 올라가 빙글빙글 돌리고는 이내 어깨를 툭 쳤다. 망상이 커지면 그것도 병이라고 안쓰러운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힘없이 옆에 놓아 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직도 하늘이구나.”


눈을 떠 점심을 먹었는데도 곽아론은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세 번도 봤을 시간에 아직 도착도 하지 못한 곽아론과의 거리가 새삼 실감이 나, 나는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았다.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나도 그리고 곽아론도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시간이. 이미 시작하기로 먹은 마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나를 향해 아무런 말도 투정도 부리지 못하는 곽아론을 설득해야했다. 당신이 옆에 있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아니,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


내가 괜찮은 건 그것이라고. 그러니까, 나와 함께 해 달라고.


“......”


그런데 생각할 시간보다 지금 나에게 더 간절하게 필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보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가 볼 수 있는 얼굴, 부르면 들을 수 있는 목소리. 그냥, 곽아론이라는 사람.


“......”


텅 빈 본부장실을 열고 들어선 나는 이내 하루 사이 바람 냄새만 가득해진 공간을 가만히 둘러보다 곧 느리게 그 곳을 빠져나왔다.


“......”


그리고 잠시 긴 복도를 바라보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곽아론이 있을 것 같은 공간을 돌아본 나는 그대로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것을 꺼내들었다.


“나예요, 본부장님.”


답장을 하지 않았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려다 대신 그대로 통화버튼을 누른 나는 당연하다는 듯 들려오는 안내 음성을 뒤로하고 가만히 내 목소리를 담았다.


“할 말이 있어서 전화했는데, 아직은 못 받는 것 같아요.”


아무도 없는 복도를 울리는 목소리는 오롯이 다시 나에게만 돌아왔다. 들어줄 사람이 없는 메아리가 곽아론에게 닿기를 바라며, 나는 조심스럽게 허공을 향해 다시 중얼거렸다.


“도착하면, 전화해요. 꼭.”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주 오지 않는 것도 아닌데, 나는 혼자라는 생각에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익숙해져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직은 낯설고 이상하기만 했다.


“꼭 전화해줘요, 하고 싶은 말 있으니까.”


곽아론이 없던 날이 더 많았다. 내 삶에 이 사람이 들어온 것은 고작이라는 말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내 간사한 마음은 평생을 옆에 두었던 것처럼 허전해하고, 어색해하고 있었다.


“기다릴게요.”


어쩌면, 이런 나를 곽아론은 염려했을지도 몰랐다.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도, 저와 만나 달라 보채지 않은 것이, 좋아하기만 하자는 내 말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


“......”


고백을 하는 그 순간부터, 곽아론은 어쩌면 단 한 번도 나를 욕심내지 않았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혼자 남게 되는 순간에도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내 편이 되고 싶은 것이 전부였을 수도 있다.


“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시작할 명분은 또 생겼다. 나도, 곽아론의 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





도착을 하고, 일을 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탈 시간 까지 곽아론은 전화를 하지 않았다. 메시지에 대한 답도, 그저 나를 생각하다 우연히 걸려온 전화도 없었다. 오롯이 곽아론이 없이 보낸 며칠이 지루한 장마처럼 길게 이어졌다. 최민기 오늘을 즐겨라, 월요일이면 곽 본 출근 할 테니. 나를 향해 속 모르고 던지는 말에 나는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내가 보고 싶지도 않나.”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북적였다. 주말을 앞둔 마지막 현실은 모두 피곤을 가득 달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오롯이 손에 들린 휴대전화만 바라보던 나는 여전히 울리 생각을 않는 것을 바라보다 곧 그대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직장이면 간절한 주말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이대로 한국에 온다고 해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도 되는지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았다.


“.....”


월요일이면 볼 수 있는 얼굴이지만, 월요일이어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답답하기만 했다. 생각할 시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필요한 건 곽아론 뿐이었다. 곽아론만 돌아오면 모든 것은 충분했다.


“.....”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느릿느릿 걸으며 여전히 손에 든 휴대전화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울릴 생각이 없는 것을 괜히 만지작만지작 거리다 곧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익숙한 건물로 그대로 몸을 틀었다.


“......”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걸려온 전화에,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나는 선명하게 적힌 본부장이라는 글자에 그대로 숨을 크게 내쉬었다. 너무 보고 싶어서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뚫어져라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조심스레 휴대전화의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그게 갑자기.. 아니 내가 늦게 받은 게 아니라.”

[....]


“그 쪽이 늦게 연락을 한 거잖아요.”

[화났네.]


“...화 난거 아닌데요.”

[그럼 뭔데요.]


잠시 멈춰있던 나는 곧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서야 안심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화 난 게 아니라.”

[.....]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나도.]


“.....”

[나도 보고 싶었어요.]


어느새 내가 내려야 할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육중한 중심을 쩍 열어젖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귓가로 들리는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


“근데 왜 전화 안했어요.”

[...무서워서.]


“.....”

[최민기씨가 할 말이.]


“.....”

[무서워서.]


내가 오롯이 곽아론을 기다리는 시간 동안, 나와 다를 바 없이 곽아론은 오롯이 겁을 먹고 있었다. 낯선 순간에 두려운 것은 곽아론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을 보지 못하고 전할 말은,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반갑기보단 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곽아론은 용기를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무슨 말이든.]


“...곽아론씨가 당장 내일 돌아간다고 해도, 당신하고 연애하겠다는 말 이라두요?”

[어.]


“.....”

[그게 제일 무서워.]


그런 말이 어디 있냐고, 대꾸를 하려던 나는 그보다 먼저 멈춰있던 육중한 것이 아래로 움직이는 것에 이내 대꾸할 타이밍을 놓치고 그대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 손은 열림 버튼을 누를 틈도 없이 다시 내가 올라가야 할 층을 눌렀다. 그리고는 5에서 4로 줄어드는 숫자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본부장님.”

[이제는 진짜 나도 그러자고 할 것 같거든요.]


“.....”

[겨우 하루여도 내가 당신 붙잡을 것 같아서.]


“.....”

[그게 무서웠어.]


4에서 3으로 줄어드는 숫자 만큼 점점 간절해지는 목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곧 3에서 2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안 할 거예요, 연애?”


그 순간 2에서 1로 그리고 잠시 멈추었다 열리는 문에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나는 곧 그대로 전화기를 붙잡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니.”

“......”

“할 거야, 연애.”

“......”


아무리 피하고 외면하려고 해도 갑자기 방향을 바꿔 나타나는 사랑은 피할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작스레 달려드는 것을 가벼운 마음이, 한없이 가볍기만 한 이 간사한 마음이 피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하자, 연애.”

“.....”


거짓말처럼 나타난 곽아론이 그대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곧 그대로 내 입술을 머금었다. 실을 것을 싣고 문을 닫은 육중한 기계는 곧 그대로 우리를 태우고 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1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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