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줄 요약: 고통은 우주의 기본값이니 견딜 만한, 견딜 가치가 있는 고통을 찾자. 

제목 참 기깔나게 지었다. 연재 했어도 어그로 확실하게 끌었을 듯. 

2019.5 시작한 웹소스터디를 2020.1 마무리했다. 돈 벌고 인정 받고 싶다, 와 내가 쓰고 싶고 스스로에게 떳떳한 글을 쓰겠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후자로 마음을 정했기 때문. 시장 분석은 할 만큼 했고, 지금부터 내가 쓰는 건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라 알면서도 안 하는 거다. 그게 확실해진 이상, 나한테 의미 없는 글을 읽을 이유가 없다. 돈은 둘째 치고 시간이 더 아깝다. 읽는 것 자체가 내 인생에 대한 모독 같은 글을 끊기로 결심하면서, 웹소 스터디도 정리했다. 혼자라면 몰랐을 많은 것을 깨닫고 배워 감사한 마음이다. 

스터디를 마치고, 혼자 유의미한 독서를 하기로 했다. 한 달에 영문 1권, 국문 1권씩. 그리고 첫 번째 영문 책이 바로 이 '모든 것이 좆같아.' 국문은 '희망 버리기 기술'이라는 점잖은 제목으로 의역됐다. 

내가 이 책을 영화로 만든다면 첫 장면은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달리고 있다. 산을 타고 올라 가는 구불구불한 도로. 도로 왼쪽에는 바위벽이, 오른쪽에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다. 시원스럽다면 시원스럽고, 황량하다면 황량한 풍경.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정장에 넥타이를 맨 이성이다. 그리고 조수석에는 요란스럽게 치장한 감정이 타고 있다. 감정은 혼자 지랄발광을 하는 중이다. 웃다가, 전화통을 잡고 지껄이다가, 뭔가 수가 틀렸는지 전화를 차 밖으로 내버리고, 울고 불고 쌍욕을 한다.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이성은 미간에 굳은 주름만을 지은 채 흔들림 없이 운전을 한다. 그에게는 도달해야 할 확고한 목표가 있다. 옆에서 뭐라 지껄이건 귀 담아 듣지 않는다. 

감정은 점점 목소리를 높이다가 급기야 운전대를 잡아채려 한다. 차가 풍랑을 만난 나뭇잎처럼 위태롭게 갈지자를 그린다. 이성이 소리친다. 

"그만해! 그만 좀 하라고!"

"아하하하~ 싫어. 재밌잖아! 다 죽여 버릴 거야! 난 지금 거기로 돌아가야겠다고! 얼른 차 돌려!"

이성은 조수석 문을 열더니 감정을 밖으로 밀어 버린다.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점점 멀어진다. 이성은 생각한다. 이제 드디어 집중할 수 있겠군. 나 혼자 남았으니 순식간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겠지. 그런데 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운전대와 엑셀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제야 그는 깨닫는다. 운전대를 잡고 있다는 건 자신의 착각이었을 뿐, 사실 '의식의 차'를 운전하고 있던 주체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장면이 바뀐다. 이번에는 감정이 차를 몰고 있다. 한 손으로 대충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담배를 빡빡 피우면서. 간간히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병을 들고 마시기도 한다. 이성이 말한다. 

"운전할 때는 운전에 집중해. 그리고 이 길 아니잖아.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오른쪽이라고."

감정이 무심한 얼굴로 그를 힐끗 보며 반문한다. 

"그래?"

그리고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 미친 듯한 곡예 운전이 시작된다. 몸이 여기에서 저기로 처박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비명조차 못 지르고 영원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딘 끝에, 감정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아까 뭐라고? 잘 못 들었는데."

이성은 간신히 몸을 똑바로 세우고 답한다. 

"왼쪽으로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우리 계속 오른쪽으로만 달렸으니까 기분 전환도 할 겸.. 다른 건 뭐 필요한 거 없어?"

감정은 피식 웃고, 이성의 뺨을 두어 번 툭툭 두드린다. 절벽을 끼고 달리는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영원히 정상에 다다르지 못할 듯이. 


이런 책이다.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고, 이성으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건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 실제 주도권은 감정이 쥐고 있고, 인간의 이성이란 그 감정의 충동적인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좆같은 소리.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희망 따위는 없다, 라는 게 이 책의 핵심이다.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안 하는 건,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다. 기분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그렇다면 그 감정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3대 법칙에 따라서. 

1. 모든 행동에는 감정적인 작용, 반작용이 따른다. 

: 그 작용, 반작용 때문에 어떤 사건에 대한 도덕적 격차가 발생한다. 격차가 발생하면, 감정은 평형을 회복하려 한다. 가령 누가 나를 밀었다.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 격차: 나는 아무 죄가 없고, 저 인간이 나쁘다. (작용: 분노) 평형 회복 수단: 나도 똑같이 밀친다. (반작용: 복수) 그래서 인간은 그토록 복수극에 열광한다. 도덕적 격차를 해소하고 평형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원초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2. 인간의 자아 존중감은 감정의 총합으로 결정된다. 

: 평형이 회복되지 않을 때, 감정은 불균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을 구축한다. 가령 학대 피해자가 나는 맞을 만해서 맞는다고 생각하는 경우. 인간은 어떤 식으로건 평형을 회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외부적으로 복수를 하거나 탈출하는 식으로 회복할 수 없다면, 내부에서 불균형이 존재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찾으려 한다. 

3. 현재 나를 구성하는 가치관에 반하는 경험을 하면, 가치관이 변화한다. 

: 인간의 가치관은 단순히 이런 저런 감정을 모아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서사에 따라 재배치된다. 가령 회사에서 짤리면 곧장 서사가 생성된다. 몇 년간 개처럼 충성했는데 망할 부장 놈이 나를 내쳤어! 오직 이 회사를 위해 견마지로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딱히 견마지로 같은 건 하지 않고, 매일 불평을 하며서 회사를 다녔으며, 틈이 날 때마다 농땡이를 피우고, 업무 시간에 인터넷 서핑이나 했다는 사소한 디테일은 거대한 서사에 묻힌다. 나는 그저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희생양이고, 부장과 회사는 악의 축이 된다. 

이어 인간은 희망을 얻기 위해 어떤 식으로 분투했고, 그 희망은 어떻게 인간을 배신하고 불행으로 몰아 넣었는지를 얘기한다. 신비적 종교(실제 종교), 사회적 종교(이데올로기), 개인적 종교(가정, 연인) 등 다양한 종교가 있었지만,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래서 결론은? 불교적이다. 인생은 본래 고행이라는 거다. 고통이 당연하고, 고통을 없애겠다는 노력이 부질없다. 그런 고통을 견디는 방법은 2가지가 있다. 대체와 망각. 

대체는 고통의 종류를 바꿔치기하는 방법이다. 어차피 고통스러울 거, 기왕이면 좀 더 견딜 만한, 그리고 견딜 가치가 있는 고통을 견디자는 것. 반지하 방에서 굶주리는 고통보다는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고통이 견딜 만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출근을 한다. 내가 발작적으로 글을 쓰는 현상은, 상위 가치를 위한 고통에 해당된다. 써도 좆같고 안 써도 좆같을 거, 기왕이면 쓰면서 좆같은 편이 낫지 않겠나 싶은. 쓰면 최소한 나한테는 유의미한 결과물이 나오니까. 

망각은 고통을 잊게 하는 임시 방편이다. 내게는 예능 같은 것.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웃으면서 숨을 돌리면, 고통이 무디어지는 기분. 물론 사라지지는 않고, 그냥 마취시켰을 뿐이다. 술이나 마약, 섹스도 망각적 방편에 해당한다. 아, 몰라, 딴 거 해. 좋은 거. 현대 사회는 대체보다 망각에만 너무 치중해, 점점 살기가 좆같아진다. 

최종 결론은.. 생뚱맞다. 인간이 인간인 이상, 인간의 좆같음을 벗어날 수가 없다. 감정은 어차피 널 뛰는 미친년이라 이성으로 제어를 하고 나발이고 불가능하다. 그러니 AI를 숭배하자. 벌레 같은 인간들의 가소로운 선악을 뛰어넘은, 그 너머의 존재. 니체가 말한 초인은 바로 인공지능이다. 가능하다면 몸뚱이도 버리고 기계로 대체하고, 결과적으로는 개개인의 의식을 버리고 클라우드에 접속해 집단 지성이 되자. 

*** 

잘 읽다가 결론에서 님.. 도랏? @.@ 왜 사람들이 결론이 새드라고 뒤집어지는지 약간 이해하게 됐다. 갑자기 이러시면.. 너무 생뚱맞네요. 나한테는 좀 지나치게 급진적이다. 하긴 인간한테는 본질적으로 희망이 없다는 걸 232페이지에 걸쳐 얘기했으니, 이게 가장 합당한 결론일지도 모르겠지만. 

결론을 제외하면,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다. 너만 그런 생각하는 거 아냐, 나도 그래, 그리고 이런 저런 실험과 통계도 그렇게 말해. 과학이 지지하는 결론이야, 라고 토닥여 주는 느낌. 

고통에는 총량이 있다. A가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B가 괴롭힌다. 아무도 괴롭히지 않는 인생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쓸데없이 고통을 없애겠다고 버둥대지 마라. 계속 좌절하다가 빡쳐서 마약이나 하게 되니까. (작가 Mark Manson은 실제 마약 중독자였다) 인생에 아무리 괴로울 일이 없어도, 뭐라도 찾아내서 기어코 괴로워 하는 게 인간 본성이다. 못 벗어날 고통이라면, 최대한 견딜 만한 고통으로 바꿔치기하고 견딜 가치가 있는 고통을 추구하라. 

그리고 희망은 버려. 뭐가 더 나아질 거라고 기대를 하지 마. 어차피 다 좆같으니까. 그냥 희망 없이도, 네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돼.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에 좀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그게 희망 없는 인생을,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Don't hope for better. Just be better. 

여전히 탐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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