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주의
*비정기연재 주의






30.


옥새는 이제 관리자가 계속 붙어있지 않아도 반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을 보살피면서 정작 직접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관리자에게 가능한 일이라곤 옥새를 만지작거리는 것뿐이던 탓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반자동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신경을 끌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자동 시스템도 만들 수 있을 듯했으나, 그럼 정말로 할 일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 차마 손대지 못했다. 세상 모든 곳을 둘러볼 수 있는 광막한 감옥 안에서 제갈량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림을 견딜 자신이 없었으니까.

옥새의 반자동화를 기점으로 제갈량은 종종 눈을 감고 의식을 차단하곤 했다. 인간의 잠과는 다르지만 제갈량은 그것에 수면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거의 모든 감각을 차단할 수 있는 시간은 마치 명상과도 같아, 오랜 기다림을 견뎌야 하는 신선에게 제격이었다.

해가 지고 뜨는 하루하루의 개념 따위는 금세 잊어버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 행성의 자전은 그에게 어설픈 시간 개념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또한 그의 불행이었다.

처음에는 한 달 터울이었지만 점차로 수면에 드는 날짜의 간격이 줄어들었다. 스무 날, 보름, 일주일. 지금은 거의 사흘에 한 번 꼴로 제갈량은 수면에 들었다.

유비가 있는 곳을 기준으로 지난밤, 제갈량은 수면에 들었다. 그리고 눈을 뜨기 전부터 이상을 눈치챘다. 주변이 차고, 습하면서 어두웠다. 옥새 내부에서는 기온이나 습도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기에 그는 두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꿈이거나, 또다시 온세에게 불려 왔거나.’

정신이 깨어난 뒤에도 그는 고집스럽게 눈을 뜨지 않았다. 온세라면 왜 눈을 안 뜨냐고 당장 눈꺼풀을 잡아 벌리고도 남았을 만큼 충분히 오래. 그렇다면 남은 답은 꿈뿐이었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뒤에도 제갈량은 눈을 뜨지 않았다.

딱 한 번 인간계에 있을 때 서서의 꿈을 꾼 적이 있다. 현실처럼 생생하던 그녀의 모습에 깨어난 뒤 얼마나 오랫동안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그 후에 서서가 사실은 내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꼭 가슴속을 누가 비틀어 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꿈이 두려웠다.

가장 기대하던 것이 다가올 꿈이 두려웠고, 의식이 돌아오는 순간과 함께 여지없이 스러질 것은 더욱 두려웠다. 꿈은 인간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했다. 자신의 의식, 무의식 모두가 한 점에 집중되어 있기에 자신의 꿈이 보여줄 거라곤 하나뿐이었다. 생명과도 같고, 빛과도 같은 단 한 사람. 자신의 주군.

눈을 뜨고 꿈속에서 그를 보게 되면, 깨어난 뒤에 얼마나 오랫동안 먹먹한 가슴을 치며 괴로워해야 할지 모른다. 그가 언젠가는 오겠다고 했지만 그게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차라리 기대를 버려야, 다가올 언젠가가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그래서 제갈량은 고집스러운 어린애처럼 한사코 눈을 뜨지 않았다.

수면이라 이름붙인 차단의 상태에서 진짜 잠으로 넘어가는 것을 자신이 제어할 수 없다면 이 소소한 취미도 그만둘 생각이었다. 신선은 두려움을 수도 없이 겪었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못했다. 유비에 대한 것은 늘 새로운 화상처럼 아프고 뜨거워 매번 그는 소스라쳐야 했다.



유비에게 편지를 받은 뒤로 삼 년이 흘렀다.

그사이 공손찬과 조운은 결혼을 했고 아이를 데려왔다. 수련생 가운데 비룡권의 후계자가 될 만한 재목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에 처음엔 의아했지만, 곧 두 사람이 원한 것이 후계자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공손찬은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이 없었지만, 조운은 절실하게 원했다. 그렇지만 공손찬은 임신과 출산이 어려울 것이며, 만약의 경우에는 무술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의사로부터 듣게 되었다. 의사에게 그 말을 들은 즉시 조운은 아이를 포기하자고 공손찬을 설득했다. 그러던 중에 공손찬이 의견을 냈다. 그럼 우리를 원하는 아이를 데려오자고.

어른이 쳐다봐도 눈을 피하지 않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을 도와주려 애쓰며,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면 먼저 웃으며 손을 흔드는 남자아이가 그들은 선택했다. 아이에게 공손찬은 유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제갈량은 언젠가 인간계에서 처음으로 흘린 뒤, 몇 번째일지 모를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흘려보냈다.

노식 사부는 어느 순간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공손찬을 후계자로 지목한 뒤 거의 도원관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조운과 식을 올린 뒤로는 발길이 끊겼다. 그는 그날을 마지막으로 소원을 빌지 않았기에 제갈량도 그에 관해 더는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마 수명을 다했으리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강동관은 몇 번 방송을 탄 뒤로 가뜩이나 작지 않던 규모가 몇 배로 커졌다. 손책, 손상향, 손권은 각 지역으로 나뉘어 자리를 잡아야 했다. 물리적 거리와는 무관하게 세 남매는 언제나 돈독했다.

한편 협력 도장으로 도원관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일전의 시범 경기 방송에서는 조운을 호출해서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관우와 장비, 황충과 마초도 강동관을 비롯한 여러 타 도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잡고 마치 처음부터 인간이었던 것처럼 어울려서 지내고 있다. 그들은 늘 도원관 18대 후계자인 공손찬과 그녀의 가족인 조운, 어린 유비의 행복을 빌었다.

조조는 드림 배틀이 끝난 후 한동안 조용히 지내다가 경찰직에 복귀했다. 초선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에 아저씨가 다시 멋있는 경찰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으니까. 어쩌다 보니 도원관에 대련하러 왔던 손권이 초선과 가까워지는 바람에 조조는 강동관까지 오가며 경찰로서, 학부형으로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까칠한 성미를 버리지 못해 현행범 폭행 등으로 종종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래서인지 초선은 종종 아저씨가 참을성을 키울 수 있게 해달라고 빌기도 했다.

미축은 잠시 연예인에 빠져 한참 방송사를 따라다니다가 스토커 취급당할 뻔한 일을 계기로 연예기획사를 차렸다. 뜻밖에도 이게 대박이 났다. 말 그대로 대박 신인이 둘이나 각각 연기자와 가수로 연이어 히트를 치는 바람에 갑자기 주가가 올라 최근에는 황금 안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회사를 키우고 있다. 물론 브라더즈와 함께.

그들 모두 제각각의 삶을 꾸려가고 있었다. 자신들이 무얼 잃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로.


유비가 편지를 남겨놓고 사라진 뒤 정말로 신선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직까지 아무런 기별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가 인간계에서 사라졌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유비가 지워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유비를 찾지 않았다. 영웅패조차도. 오직 제갈량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마치 드림 배틀이 끝난 직후의 제갈량 자신처럼. 단 한 사람의 의식 속에만 남고 세상은 그를 지웠다.

처음에는 너무나 섬뜩했다. 어떻게 유비를 그렇게나 아끼던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에 그를 잊어버릴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고, 화가 났다. 드림 배틀이나 온세가 관련되면 단일개체의 이지로는 파악하거나 대처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그걸 알면서도 세상이 유비를 잊은 걸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깨달았다. 유비가 겪은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음을.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상대를 그리워하고, 어쩌면 영영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약 없이 기다리며 홀로 그리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정말 유비라는 사람이 존재했을까? 자신에게 그렇게 귀한 마음을 나눠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을까? 전부 내 망상이 빚어낸 허구가 아닐까?’

어쩌면 꽤 오래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자기 자신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그런 생각은 불청객처럼 제갈량을 찾아오곤 했다. 그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는 괴로워하며 기다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러나 그런 생각에 사로잡힐 때마다 유비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단 하나의 증거를, 편지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랬다. 유비의 지적대로, 그 편지 없이 유비의 존재가 지워졌다면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다 공손찬이 데려온 아이에게 유비라는 이름을 붙인 줄 알게 되었을 때, 제갈량은 마치 유비에게서 두 번째 편지를 받은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주군께서 기다리라고 하신 이상, 포기하지 말라고 명한 이상 그걸 듣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들의 아이는 바르고,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났고 그건 제갈량에게 비할 데 없는 위안이 되어주었다.

아직 이 세계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유비가 사랑했고, 무의식의 영역에서라도 유비를 기억하는 세상이기에. 사실 유비가 사라진 뒤로 신선이 마음을 기댈 데라고는 그뿐이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한기가 점점 심해지는 가운데 제갈량은 자신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눈을 떴다. 영원히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기에 그리고 만약 꿈속에 유비가 나타났다면 보고 싶은 마음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어졌기 때문에.

그리고 감각 일부가 큰 착각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추위는 맞았지만, 습한 게 아니라 몸 안의 수분을 모두 빨아들일 듯이 건조했다. 옥새에서 세상을 둘러볼 때처럼 그는 투명하고 둥근 원 안에 있었다. 그리고 시야 가득 새카만 배경과 붓을 휘날려 뿌려 놓은 듯한 별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행성의 대기권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었다.

- 솔직히 이렇게 오랫동안 버틸 줄 몰랐어. 진즉에 못 견뎌서 달려올 거라 생각했는데. 내가 너희를 과소평가했군.

두 가지 가능성 중 후자였다. 온세가 잠자코 기다려준 게 몇 시간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조바심을 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라기보다는 텔레파시에 가까운 형태로 말이 전달되었다. 제갈량은 마른침을 삼키며 주변을 살폈지만 아무도 없었다. 광막한 별의 바다에 있는 거라곤 발아래 눈부시고 푸른 별, 그 외에는 모두 작고 찬란한 빛과 암석뿐이었다.

- 그거 알아, 신선? 내가 너희들에게서 원한 건 열망이었어. 누군가를,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움직이는 것.

제갈량은 잠자코 온세의 이야기를 들었다. 단 한 가지가 너무나 궁금했지만, 그 대답 여하에 따라 더는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할 것이기에 먼저 물을 수가 없었다.

- 나는 전부였고 거의 온전했지만, 그 상태는 너무나 고요했고 나는 소요를 원했다. 그래서 불완전해지길 바랐지.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게 욕구, 욕망이었어. 그래서 상성이 맞고 개중 가장 강한 너희들 걸 받으려 했는데.

가져봤자 괴로워질 뿐이라고 답변이 즉시 떠올랐지만 제갈량은 그걸 소리 내어 입에 담지 않았다. 괴롭다 한들, 자신 또한 유비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마음이 조금도 없으니까.

- 내가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 자체가 바로 욕망이라고, 굳이 남의 것을 받을 필요 없다고 가르쳐 주더라.

누가? 바로 그 의문이 떠올랐지만 역시 제갈량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면 만사를 제치고 유비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 그간 난리치고 다닌 게 허무하긴 하지만 덕분에 정리가 됐어. 그리고 이젠 그걸 증폭시킬 방법을 궁리해볼 수 있게 되었지.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변 외에는 상대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조차 없이 이야기를 쏟아내는 대화 방식은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어딘가 온세의 기색이 예전과는 달랐다. 필시 열망이라는 것을 품을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제갈량 역시 유비로 인해 욕망이 일깨워진 뒤로 존재가 뒤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변했으니까.

- 그러니 더 이상 너에게 뭔가를 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유비에게 답변과 함께 너에 관해 부탁을 받았으니 선택의 여지를 줄게. 지금 네가 네 세상의 옥새를 반자동화해두었기 때문에 조금만 더 손보면 네가 없어도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원한다면 당장 너를 소멸시켜 주지. 더는 괴로워할 필요 없도록. 물론 너희 세상은 네 소멸 이후로도 유지될 거야.

유비의 이름이 나온 순간 제갈량은 이를 악물어야 했다. 타아가 말하는 유비라는 이름 두 글자만으로도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였다. 이제는 그 이름이 아프게 피부를, 내장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소멸.

유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이상의 결말은 없다. 하지만 지금 온세는 유비에 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말도 없었다. 온세를 찾아가 유비가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 알아야 했다.

- 아니면 유비를 네 손으로 찾는 방법도 있….

“어떻게? 어디에 있지? 아직 그가 존재하고 있는 건가?”

온세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갈량은 숨도 쉬지 않고 연이어 물었다. 조금 전까지 무미건조한 얼굴로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다급한 태도였다. 한편 예상했다는 듯 온세의 말투는 태연했다.

- 유비는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윤회에 들어갔어. 그런데 인간이 아니게 된 터라 네가 관리하는 세상에서는 안 되겠더라고. 그래서 무작위로 풀었어. 어때, 유비를 찾으러 가 보겠어?

덤덤한 온세의 설명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오싹한 감각이 제갈량의 온몸을 관통했다. 유비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이 감옥에서 벗어나서 그를 찾으러 갈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호흡마저 가빠지고 있었다.

- 그런데 말이지. 범위가 넓을 거야. 인간의 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몸체로만 환생할 테니 겉모습이야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내 넓이가 넓이이니만큼 다 뒤지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거든. 솔직히 말해서 전자가 나아. 가능성은 제로가 아니지만 한없이 제로에 가깝다.

무작위. 넓이. 제로. 조짐이 좋지 않은 단어가 연이어 들려오자 제갈량은 모양 좋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 그렇게 해서 네가 자력으로 유비를 찾아낸다면 너를 그 세상의 주민으로 만들어 수명이 다할 때까지 함께하게 해 줄게. 내가 찾아내서 너와 연결해주는 건 수복력이 방해하겠지만, 네가 직접 찾겠다면 수복력은 발동하지 않을 테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온세의 제안 가운데 이 정도로 제갈량의 희망에 들어맞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제로에 한없이 가깝다는 말이 계속해서 불안하게 심장을 두들겼다.

- 너라면 기억하고 있겠지. 나는 너와 달리 나유타 단위의 세상을 관리한다고. 넌 그 전부를 뒤져야 해. 운이 없다면 수십, 수백 번을 뒤지게 되겠지. 설령 맞는 세상을 찾는다 해도 시간대가 다르면 엇갈리겠지. 그리고 넌 분명 기약 없는 희망을 위해 영겁의 시간을 매달리며 절망하고 좌절하며 괴로워하고 후회하게 될 거야. 유비는 계속해서 무작위로 태어나고 살다 죽을 테니까. 거기에 내 개입은 없어.

제갈량은 온세가 하고 있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 세상에서 계속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는 풀꽃 하나를 찾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 반면에 유비는 널 만나지 않으면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을 테니 몇 번이든 다시 태어나 평온무사하게 살 수 있지. 소립자와 같은 희망을 안은 채로 영원히 헤맬 너만 괴로워질 거라는 이야기야. 어느 쪽을 택할래? 혹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가?

온세의 말끝은 어딘가 냉엄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앞두고 있기에 그렇게 들렸는지도 모른다.

“유비 님이 어딘가에 다시 태어나 계시다는 거군.”

- 그래.

“당장 날 내보내라.”

그렇지만 제갈량의 답에 망설임은 없었다. 제갈량은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온세가 긍정의 답을 하자마자 당장을 입에 담았다.

“제로만 아니면 돼. 영겁이어도 상관없다. 이번만큼은 그분 혼자 남겨두지 않겠어. 무슨 일이 있다 해도 그를 찾을 테니 날 내보내.”

나름의 친절한 제안에 명령조의 강압적인 말이 돌아오자 온세는 기가 찼는지 잠시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실제로 한숨을 쉬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갈량은 그렇게 느꼈다. 온세는 이전에 대화했을 때보다 훨씬 더 인간의 색에 물들어 있었다. 과연 그건 누구의 영향일까 하는 의문이 제갈량의 머리를 스쳤지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런 문제 따위가 아니었다.

- 옥새의 관리자 제갈량, 똑바로 들어. 저 별 하나하나가 다 하나의 세상이야. 그리고 이 우주만 있는 게 아니야. 나는 너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모래 알갱이보다도 무수한 수의 우주로 이루어져 있어. 너는 그 망망함을 아직 모른다. 아니, 너로서는 짐작조차 불가능한 크기야. 그게 나다.

눈앞에 펼쳐진 무수한 별들 속 어느 세상에 태어나 있을지 모르는 유비를 찾아내는 건 생각만으로도 아득한 일이었다. 온세는 더구나 이 별들의 바다가, 이곳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 하나를 관리하는 신선 따위가 감히 짐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존재하는 모든 세상, 온세가 보기에도 그건 너무나 이루어질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래서 온세는 소멸과 방출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제안했다.

차라리 소멸시켜 주겠다, 이 고통을 끝내 주겠다니. 그건 제갈량이 느끼기에도, 과잉 친절이었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유비 님께서 내게 부탁하셨다. 그러니 포기할 수 없어. 그리고….”

- 그리고?

…아직 서서와, 유비 님과 약속한 세 번째를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걸 굳이 온세에게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제갈량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는 아득하고 먼 별의 빛이 무수하게 펼쳐져 있었다. 문자 그대로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세상이 그 앞에 존재했다. 그러나.

어딘가에 만나서, 대화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유비가 존재할 세상이었다.

- 넌 분명 지금 이상으로 고통스러워하게 될 거야. 정말 유비를 만날 수 있는 건지 의심하며 무종의 시간을 방황하겠지. 희망고문이라는 말은 하찮게조차 느껴지지 않을걸? 그러다 또다시 나를 의심하고, 유비의 존재를 의심하고, 정말로 유비를 만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어져서….

제갈량은 온세의 말에 더 이상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옥새의 제어권이 제게 돌아왔음을 깨닫고 옥새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꿨다. 가장 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눈을 피하던 곳, 그와 함께 하던, 도원관이었다.

“상관없다. …내보내 줘.”

그렇게 말하며 제갈량은 그토록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한 번도 돌아볼 수 없었던 곳을 눈으로 훑어 둘러보았다. 지금껏 신선이 몸담았던 곳 중 가장 사랑스러운 장소였으나 지금은 그저 추억의 장소일 뿐이었다. 신선으로 하여금 이곳에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으니까.

자신을 찾기 위해 인간이기를, 이 세상에 속한 존재이기를 포기한 사랑스러운 사람을 찾기 위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수 있다.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다 하더라도, 제로가 아닌 이상 제갈량은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 님을 찾으러 가겠다.”

그게 유비와의 약속이었으니까.

- 그게 너의 답이군.

그렇게 대답하며 온세가 미소를 지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갈량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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