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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소년의 관심을 한껏 받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드레이코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서 가만히 어젯 밤을 회상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돌아오던 날에 술 냄새를 풍기면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셨고-맹세코 드레이코는 그런 루시우스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게다가 무슨 고약한 술버릇인지, 루시우스는 볼드모트가 친히 선물한 파이어볼트를 완전히 아작 내어버렸다. 그도 드레이코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 틀림없었다.


어찌 되었던, 드레이코는 빗자루가 망가진 것도 망가진 것이었지만, 아버지가 그런 짓을 함으로써 후에 볼드모트가 제 아비에게 내릴 처사가 너무나 무서웠다. 아무리 자신이 볼드모트에게 화대 운운하며 그의 기분을 망쳐놓았어도 그가 준 선물을 부술 만큼의 배짱은 없었다. 드레이코는 바닥에 조각난 빗자루보다 더 망가진 것처럼 보이는 루시우스에게서 도망쳐 파이어볼트의 잔해만을 들고 얼른 방으로 피신했다. 


찬찬히 뜯어봐도 이미 빗자루는 회생불가였다. 그 자한테 어떻게 변명을 해야할 지 감도 안 올 정도였으니, 차라리 새로 사는 게 어떨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그러다 걸린다면, 조금 더 보태서 정말 말포이라는 성 자체가 없어질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올 것만 같은데. 오늘은 그 남자와 자신이 만날 수 있는 마지막 밤 아니었던가?


호그와트로 가기 전 마지막 밤, 볼드모트가 자신을 순순히 보낼 리가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 볼드모트가 저한테 준 선물 하나 망가진 것을 알아채지 못할까... 드레이코는 망연자실해 이제는 빗자루에 대고 지팡이를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흉흉한 모양으로 변하고 있었다..


처참히 망가진 파이어볼트를 손에 쥐고 있던 그 순간, 결코 좋지 않은 생각이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그에겐 필요한 건 알리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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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볼드모트는 주인 없는 방에 잠시 멈췄다. 활짝 열린 창문에, 은빛 커튼이 밤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이가 어딘가로 영영 떠나버린 것처럼.

리들이 눈을 깜빡였다.

보내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창틀을 잡은 리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깜찍하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가족을 잡아 놓았으니 도망칠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차라리 죽이는 게 나앗을 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적어도 시체만큼은 가질 수 있었겠지.


"겨,경-!"


리들의 흉흉한 생각을 떠올린 때와 저 밑바닥에서 갸날픈 소리가 난 건 거의 동시였다. 익숙한 목소리에 리들은 그 곳으로 곧장 낙하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뚜렷한 형체가 보였다. 


그 아이였다-


"순간 균형을 잃어서-"


그러나 드레이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리들의 손바닥이 그의 뺨을 때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세게 때렸던지, 순간 볼에 아무 감각도 없다가 뜨거움이 화악 퍼졌다. 드레이코는 제가 한 잘못도 잊고 화를 내려했지만 남자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우습게도 그는 자신보다 더 상처받은 모습이다. 


"네가 어떻게 감히, 나에게서 벗어나려고 , 이따위 짓을 해!"


리들을 분노에 겨우 나머지 음절을 끊어 말을 내뱉었다. 그의 분노는 드레이코가 예상했던 것보다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정말 그가...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진심이었나? 


드레이코는 왠지 정말로 어이가 없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남자는 자신에게 넘실대는 불꽃을 쏟아 붓고 있었다.


 "네가 무슨 짓을 하던지 난 결코 놓아줄 생각이 없다. 알겠나? 없어진 예언을 다시 만들기라도 해서 널 묶어둘 수도 있어! 네 육신과 영혼까지-그 모든 것은 오직 나를 위해 만들어졌단 말이다! 그 작은 머리를 아무리 굴려봤자 영영 내게서 도망갈 수는 없을거다! 절대로!" 


리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말포이 후계자의 귓전을 울렸다. 둘 사이의 공기는 흉포하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그 거대한 마력에 드레이코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몸뿐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꽉 붙들려있었다...그 남자에게.


당장에라도 이 어둠의 남자는 자신을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커다랗고 차가운 손이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드레이코는 공포감도 공포감이지만, 알리바이를 만들겠답시고 얼간이처럼 다리를 부러트려버려 지독하게도 아픈데 차마 티를 내지는 못하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다행히도 드레이코의 마음 속 비명을 들은 누군가가 있었던지, 검은 인영이 저택의 문쪽에서 황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루시우스였다. 드레이코는 그때서야 안도했다. 확 풀려버린 긴장감에 그는 정신이 가물가물해진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그는 볼드모트의 품에 쓰러졌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아이가, 아이가...많이 다쳤습니다."


루시우스는 허락을 구하듯 잠시 멈췄지만, 볼드모트는 드레이코를 붙잡은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루시우스는 천천히 자신의 아들로부터 미치광이의 손을 떼어냈다.


"드레이코 말포이."


루시우스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드레이코의 몸을 볼드모트에게서 천천히 떼어냈다. 그의 등 뒤로 흉포한 살기가 느껴졌지만 지금, 아니 언제나-그는 목숨보다 아들이 더 소중했다. 정원 바닥에 흩어진 빗자루 조각을 보고 루시우스가 헛웃음을 삼켰다. 


멍청이 같은 녀석.


그가 이제 완전히 아이를 안아든 모습을 보고 볼드모트가 붉은 눈을 번뜩였다. 주인의 분노를 종에게 상기시키듯, 팔에 새겨진 어둠의 표식이 가히 타들어갈 만치 아팠다. 그러나 루시우스는 겉으로 표시하지 않고, 정중하게 볼드모트를 돌려보내고는 저택으로 들어왔다.


전혀 말포이 답지 않은, 하지만 자신을 닮아있는 아들의 사태 수습방식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루시우스는 자신이 아는 치료 스펠을 드레이코의 다리에 쏟아부었다. 중간에 윌셔 가로 호그와트의 마법약 선생이 방문했다는 사실은 그와 나시사만 아는 비밀이었다.



-




드레이코는 창백한 새벽에 눈을 떴다. 조금 전만해도 부셔졌던 다리는 이제 완전히 치료되어 있었고, 그 위엔 빗자루 조각 대신에 달빛 파편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진정제가 투약되어 혼몽한 정신을 애써 다잡으려 노력했다. 몽롱함으로 푹 젖은 정신을 붙은 뼈 틈새에서 흘러나온 고통이 날카롭게 깨웠다. 드레이코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거친 숨소리를 공기 중으로 흘려보내자, 침대맡에서 밤새 그를 치료하던 루시우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드레이코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다시 일어났을 때는 이른 아침이었다. 애초에 마법으로 수면에 빠진 터라 깊은 수면은 아니었고, 또 다리가 욱신거려 이 이상은 잘 수 없었다. 드레이코는 그대로 누워 눈만 뜬 채로 주위를 살폈다. 그의 침대 주위에 세 명이 있었다. 둘은 그의 부모님일 것이 분명했지만, 나머지 한 명의 존재가 아주 걱정스러웠다. 그가 자고있는 루시우스와 나시사에게서 등을 돌린 그때서야 드레이코는 남자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순간 탁 풀리는 긴장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낯이 익은 성 뭉고병원의 치료사였다, 간간히 드레이코가 이렇게 심히 다쳤을 때 곧잘 파견 나오던. 치료사가 드레이코의 상태를 살피려고 가까이 다가왔다.


 "드레이코. 다리는 완벽히 고쳐졌지만, 이전에도 부러진 적이 몇 번 있어서 다음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한단다. 치료 마법이나 치료약의 잦은 사용은 그닥 좋지 않으니까. 점점 효과가 떨어지기 마련이거든."


 "제가 알아서 해요, 브라운." 드레이코는 왠지 모를 짜증스러움에 머리를 흩트렸다. 


그러나 치료사는 말포이 가의 도련님이 내는 짜증에 면역이 있던 터라, 방금 전의 대화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를 지워내기엔 미약했다.


"자고있는 부모님을 깨워줘요. 호그와트에 오늘 가야하니까."


드레이코는 일어나려는 노력 한 톨도 없이 앉은 자리에서 치료사에게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내렸다. 치료사는 환자의 요구를 듣지 않고, 그에게 더욱 바싹 다가갔다.


 "뭐하는 거에요?"


 "부모님을 깨우기 전에, 네 담당 치료사로서 조언을 해야겠구나."


 "하- 언제부터 성 뭉고 병원에 상담사가 생겼죠? 금시초문인데요." 드레이코는 열렬히 그를 비꼬았다.


"들어보렴. 순수혈통가문이 자제를 훈육하는 방식이 꽤나 거칠고, 무자비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안단다. 하지만 네가 이어받을 가문은 다른 보통의 가문보다 심한 것 같더구나."


"말포이는 <다른 보통의 가문> 따위가 아니니까요."


"내가 하고싶은 말은...말포이 군은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야한다는 거야. 심지어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부터라고 해도."


"제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씀 드렸어요, 브라운. 일어서지도 못하는 환자를 두고 충고를 하는 것보단, 환자의 안정을 위해 부모님을 모셔오는 방법이 낫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리고 대체 어떤 오해를 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건은 그 젠장맞고 빌어먹을 집안 훈육 차원이 아니었으니까 상관하지 마시죠. 제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니까요."


드레이코는 이제 짜증이 나서 거의 씹어 뱉듯이 말했다. 일전부터 그가 담당 치료사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환자 보호'라는 명목의 충고는 매우 거슬렸다. 그 충고는 가족밖에 없는 아이에게 어떠한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 대체 그가 뭐라고?


 "그래. 부모님을 깨우마. 그런데..." 커다란 손이 드레이코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이제 이름을 부를 때도 되지 않았나? 에드워드 브라운이란다. 에드워드라고 불러 주렴.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사이잖니."


"브라운 씨." 드레이코는 그 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머리를 흐트렸다. 그가 으르렁거리자, 브라운은 졌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드레이코의 치료로 밤을 샌 그 둘이 겨우 일어나자, 브라운은 환자들이 많다며 성 뭉고 병원으로 곧장 가버렸다.- "다음엔 꼭 에드워드 형이라고 불러주렴!"이란 말을 남기고 말이다- 드레이코는 지은 죄가 있었기에 침대에서 눈치를 보며 눈을 도륵도륵 굴리고 있었다.


"일어나있었구나."


지은 죄가 있었기에 드레이코는 부모의 시선을 피했다. 그들을 보기가 죄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루시우스는 별 말 하지 않고 한 손을 드레이코의 머리에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앞으로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라. 우리에겐 네가 가장 중요하다, 드레이코." 


나시사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런 부모의 모습에 목구멍이 틀어막혀 고개를 주억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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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의 일이 불과 몇 시간만에 다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드레이코는 열차 플랫폼에서 부모님을 배웅한 뒤에, 잠시 서성거렸다.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예언. 


분명히 볼드모트가 그에게 말했다, 둘 사이의 예언이라고. 정말 무언가가 있다고? 그럴리가! 그런 류의 연결이 있었다면 지금 예언의 아이는 해리포터가 아니라 드레이코 말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치고는 드레이코의 뇌리에 '예언'이라는 단어는 깊게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라리 자신이 그 자의 특별한 존재라고 예언이 말해주는 게 지금처럼 남창 취급을 당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드레이코는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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