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관일을 맞이하여 송파구 신천동에 있는 서울책보고에 다녀왔다. 서울책보고는 올해 3월 서울시가 헌책의 가치를 되살려 고사 직전인 헌책방들을 지원하는 한편, 다양한 독립출판물을 비롯해 각종 전시와 특강, 독서교육 등을 체험할 수 있게 만든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전까지 유통업체 창고로 쓰였던 1500㎡(443평)에 육박하는 넓은 공간 중 대부분을 헌책 약 15만권이 채우고 있다. 서울시의 헌책방 29곳이 공공 헌책방 실험에 참여했고 서울책보고는 헌책방들이 내놓은 책을 대신 판매해 책값의 10%를 운영비 등으로 떼고 나머지 판매액을 헌책방에 돌려주는 식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개관 후 5개월 만에 누적 방문자 수는 17만3000명에 달했다. 하루 평균 방문객은 1300명 수준, 주말이면 방문객 수는 2000명 선으로 늘어난다. 현재까지 팔린 책도 12만권가량이나 된다. [i]

평일 낮에 갔는데도 사람이 꽤 많았다. sns에서 본 것처럼 헌책이 꽂혀있는 서가 디자인이 멋졌으나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서가 마다 책을 제공한 헌책방의 이름이 적혀있고 뒷면엔 바코드와 함께 가격이 적혀있다. 앞의 검색대 pc에서 원하는 책을 검색하면 그 책의 소장 유무와 서가 이름 정도의 정보는 제공하지만 구체적인 진열 위치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서울책보고는 그것이 이 시스템의 묘미이며 책을 우연히 만나고 알게 되는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했지만 나에겐 타이레놀 네 알과 저녁까지 이어진 지긋지긋한 두통으로 남았다. 마치 관내분실된 책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종합 열람실 서가 전체를 리딩하는 그 겨울 실습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떤 규칙도 인덱스도 찾을 수 없는 서가 앞에 선 사서의 기분? 출판된 지 10년 이상 된 책들을 천 권씩 기증하겠다며 수없이 많은 박스와 함께 사무실에 찾아온 교수들을 보는 기분

서울책보고 소개 1 . 당최 어디에 도서관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열람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집어 넣은 것 같다. 차라리 북카페라고 하지. 사람들은 문화센터와 도서관과 북카페를 늘 혼동하곤 한다

어지럼증과 맞서 싸우며 헌책들을 찬찬히- 갈수록 대충- 리딩하며 서가 사이를 돌아 다녀본 결과 “맞아 나 어릴 땐 이런 책이 예전엔 인기있었지, 저런 책을 많이 읽었지.” 하는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는 있으나 그 뿐이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오래된 책, 특히 많은 분야의 비문학 책이 현재에 와서 가지는 가치란 거의 제로에 수렴하지 않나, <오래된 책은 낡고 헌 책이 아닙니다. 시대 정신과 사람의 체온을 품은 유기체입니다.> 라는 서울책보고의 소개멘트가 어불성설이지 않나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책이 가진 생각이 단지 오래된 것뿐만이 아니라 오래 돼서 아예 틀리게 된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일례로 내가 초등학생 때 한참 붐이었던 <우리 아이 서울대 보내기>,  <10대 때 인생이 결정된다> 류의 책들은 늘 학급문고에 기증 책으로 들어올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죄다 아동 학대에 버금 갈 정도이며 그렇게 공부 시켰던 아동들은 현재 어른이 되어 ‘곰돌이 푸, 쉬어가도 괜찮아’ 류의 심리 에세이를 서점 판매 1위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의학, 경제, 컴퓨터 이론 및 기술 (중년을 위한 아이패드2 배우기), 각종 실용서 (최신가요 모음집 - sg워너비와 vos노래가 있음), 각종 심리 서적 및 사회학 이론서, 제목에 ‘여자’가 들어간 모든 비문학 책들 (인기 있는 여자, 남들과 다른 여자, 여우들의 앙큼한 사전, 여성의 순결에 대한 책들) 등등. 대체 2019년에 살며 2019년에 적절한 사고를 하는 사람이 이런 헌책들을 사야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시대정신 탐구를 위한 표본 수집을 위해? 차라리 레트로 풍의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서, 3000원짜리 기념품이나 인증용 티켓으로 여겨 산다고 하는 편이 납득이 쉽겠다. 서울책보고에서 현재까지 팔린 책이 12만권이라 하고 그 중 비문학 책도 정말 많을 텐데 그 책을 사는 이유가 옛날에 대한 향수 외에 무엇이 있는지 다소 궁금했다.

다양한 독립출판물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섹션은 좋았다. 개성 있는 독립출판물 수집하고 전시한 뒤 열람할 수 있게끔 한 것은 좋았으나 그 책을 사려면 따로 곳곳의 독립 서점을 방문해야 하는데 책마다 어디서 파는지 정보가 안 적혀있었다. 그래, 독립서점을 홍보하고 방문객의 발걸음을 유도하기 위해 아예 위탁 판매를 안 하고 있는 점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위치라도 제대로 적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몇몇의 독립출판물을 보며 책은 역시 아무나 낼 수 있구나 쫄지 말고 나도 언젠가 책을 내자 큰 용기를 얻었으니 무용한 시간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서울책보고는 북 토크와 저자 초청회 및 다양한 강연을 하는 문화 공간의 기능도 하고 있다. 내가 갔을 땐 연극 배우로 보이는 두 분이 유명한 고전의 한 챕터를 직접 연기하며 읽어주고 계셨다. 한 편에는 명사들의 책 기증을 통해 명사·지식인의 서재를 재현하고 전시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이미 그 때는 머리를 부여잡고 앉아 있어서 자세히 살피지 못했다.
 현재 시점에서 서울시의 공공 헌책방 실험을 평가하자면 꽤나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론 이 사업이 오래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마치 페이스북 각종 연애 페이지에 < 꼭 가야하는 데이트 장소 top10 >으로 올라 온갖 관광객을 끌어 모았지만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벽화 마을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닐 수도 있고.

아무튼 헌책들을 잔뜩 보고 나서 내게 남은 건 두통과 남은 타이레놀 네 알, 그리고 수서 기준에 대한 고민뿐이다. 우리 도서관은 미디어 특화 도서관이라 최신 미디어에 관련된 책을 잔뜩 수서 하고있는 상황이다. 당장 인쇄된 시점에서 1-2년만 지나도 최신 정보 전달이라는 측면에서 도서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이 갈수록 빨라질 텐데 자료선정기준을 어떻게 해야하나, 공간이 한정되어있는 도서관에서, 짧게 이용가치가 있는 책들을 많이 사들이는게 옳은 일일까? 고민하게 됐다. 하지만 인쇄매체를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정보 계층이 분명히 존재한다. 정보에 시차가 생기더라도 말이다. 여러 고민을 하게 됐다. 서울책보고 후기 끝.



 


[i] 헌책방 살리기에 나선 서울책보고의 실험.김태훈.경향신문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9281050021&code=960100#csidx1e88370204674fab33499046d80f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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