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상이라는 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단어일까. 휴대폰 알람소리가 오늘따라 특히 더 거슬렸다.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새벽 4시 50분. 기지개를 있는 힘껏 켜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창문을 열자 한껏 차가워진 공기가 뺨에 달라붙었다. 세수와 양치를 한 다음 러닝복을 단단히 챙겨 입는다. 이젠 바람막이도 걸쳐야 할 정도로 새벽이 차갑다. 운동화 끈을 조여매고 현관을 나선다. 넓은 정원에서 풍겨오는 나무의 짙고 푸르른 향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블루투스 이어폰을 목에 걸고 휴대폰을 열었다. 새벽녘 푸른 하늘처럼 옅게 미소 짓고 있는 제 약혼자의 얼굴이 환한 빛처럼 떠오른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찍은 사진이다. 사진 저장이 되지 않았단 핑계로 그 아이에겐 주지 않았다. 보쿠토는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조심히 입술을 떨어트렸다.

“좋은 아침, 케이지.”

힘차게 발걸음을 뗀다. 숨이 조금씩 차오른다. 일정한 속도로 달린다.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다리에 저릿저릿 충격이 느껴진다. 호흡이 더워진다. 이 순간이 좋았다.
고등부에 진학하자마자, 아버지가 보쿠토를 서재로 부르셨다. 앞으로 진로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다. 회사를 물려받을 건지, 아니면 따로 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아버지는 아들의 생각을 듣고자 했다. 보쿠토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배구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 태어나 한 번은, 가슴에 국기를 달고 뛰고 싶습니다. 반대하실까? 아니면, 다른 말을 하실까. 그는 조용히 아들의 어깨를 두드려 줄 뿐이었다. 사업은 은퇴하고 나서 공부해도 늦지 않아. 나는 하고 싶은 걸 못 했다. 회사만 바라보고 달렸어. 하지만 내 아들은 다르게 컸으면 했다. 가슴 깊이 우러나온 진심에 보쿠토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내내 코끝을 매만져야 했다.

“헉…, 후….”

언덕길이다. 45분 쯤 달렸구나. 땀이 턱을 타고 흐른다. 언덕을 넘어 공원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딱 1시간 30분이 걸린다. 중학교 때도 로드워크를 했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하진 않았다. 그땐 그냥 한 30분 정도 일찍 일어나 정원을 뱅글뱅글 도는 걸로 대신 했었지. 선수를 목표로 삼은 지금, 남들보다 배는 더 열심히 해야만 했다.
배구 선수가 되는 데에 전폭적인 지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대신 아카아시가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대학팀에 들어가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보쿠토 역시 동의했다. 기왕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사람의 반려자가 되기로 했다면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한다 생각했으니까.
매달 1회 정도 하곤 했던 가족 식사에서 보쿠토는 정식으로 제 미래에 대해 아카아시가의 두 어른에게 설명을 했다.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던 포부에 그들은 옆 자리에서 조용히 샐러드를 포크로 뒤적이던 아카아시를 쳐다보았었다. 케이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코타로 군은 네 사람이 될 거니까. 네 의견도 중요하단다.

-전에 말씀 해 주셨잖아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어요.

아카아시는 크게 흥미가 없어 보였다. 보쿠토는 씁쓸하게 웃었다. 눈이 마주쳤다. 청록 빛이 어두웠다. 그의 시선이 똑바로 저를 쳐다보았다. 먼저 눈을 돌린 건 자신 쪽이었다. 오늘 음식이 좋네요, 같은 시시껄렁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는데, 아카아시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배구 계속 하기로 했어요. 고등학교 때 까진 하고 싶어서요. 보쿠토 씨랑 같이 배구하는 거 재밌기도 하고요. 그제야 얼음처럼 차갑던 얼굴에 복숭아같이 살갑고 달큰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쿠토는 그 표정을 놓치기 싫어 내내 눈 안에 담아 두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저 미소를 안구에 박제하고 싶었다. 눈이 마주칠 새라 무섭게 얼굴을 돌렸다. 그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제 몫이었지만, 알아달라고 시위하고 싶진 않았다.
로드워크가 끝나면 샤워를 깨끗하게 하고 아카아시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좋은 아침! 잘 잤어? 답장이 돌아오면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 날이고, 답장이 오지 않으면 평소와 같으려니 한다. 그는 아침에 많이 약해 메시지를 읽고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예전부터 그랬으니 보쿠토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을 갖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고등부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전거를 샀다. 중등부에 있을 때만 해도 아카아시와 함께 등하교해야 한단 이유가 있었지만 고등부가 되고 나니 그럴 핑계가 사라져버렸다. 혼자 걷기도 심심하니 선택한 자전거였는데, 체력 키우기에 꽤 쏠쏠한 도움을 준다.

“좋은 아침!”
“주장! 좋은 아침입니다!”
“주장 오셨습니까!”

1학년들이 먼저 보쿠토를 반겨준다. 활짝 웃으며 부실로 들어가 라커를 열었다. 휙휙, 옷을 벗어 던지고 연습복으로 갈아입고 무릎 아래 레그슬리브까지 꼼꼼하게 착용했다. 올해 3학년은 일찍 은퇴했다. 인터하이가 지나고 바로 2학년인 보쿠토에게 부를 물려주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자신도 이제 3학년이다. 올해 인터하이, 후쿠로다니는 전국 4강에서 멈추었다. 보쿠토는 제 힘이 모자라서라 생각했다. 모든 운동선수가 느낀다는 벽. 그것을 보쿠토 자신 역시도 느끼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벽을 뛰어 넘으면 더욱 우수한 선수가 되고, 뛰어 넘지 못하면 거기서 멈추는 거다.
겨울이 지나고 4월, 다시 신학기가 시작되면 드디어 3학년이다. ‘학생’이란 타이틀에서 진정한 졸업을 하는 날도 머지않았다. 보쿠토는 손가락을 주물렀다.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많이 뛰어야지. 어제보다 더 잘 해야지. 몸 풀기 체조를 꼼꼼하게 했다. 무릎이나 어깨 컨디션도 좋다.

“좋은 아침입니다.”
“부주장! 어서 오세요!”
“아카아시 선배! 좋은 아침입니다!”

아카아시가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한다. 머리가 뻗쳤네. 잠을 잘못 잤나. 귀여워라.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눈을 부비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보쿠토의 시선을 눈치 챈 건지 그가 고개를 까딱, 하고 숙였다.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보쿠토 씨.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손을 흔들었다.

‘…부주장….’

그 자리에 누구를 올리면 좋을까? 주장에 보쿠토를 앉히는 데엔 그 어떤 이견도 없었다. 다들 당연히 보쿠토가 차기 주장이라 생각했으니까. 허나 부주장 자리는 꽤 많은 이름이 오르내렸다. 코노하 선배는? 보쿠토 선배를 잘 이끄시니까 괜찮지 않나? 그럼 사루쿠이 선배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데. 듬직하고. 코미 선배는? 같은 3학년 레귤러들 이름이 많이 떠올랐으나, 코노하의 한마디에 토론은 금방 종결되고 말았다.

-야, 아카아시가 있는데 누가 부주장을 하냐?

당연히 아카아시지. 안 그래? 조금 멀찍이 떨어져 앉아있던 아카아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코노하를 쳐다봤다. 저요? 라고 되묻는 듯 한 얼굴이었다. 그렇지, 너 아니면 누가 보쿠토 이끄냐. 네가 있어야 저 망나니 같은 놈 컨트롤도 하지. 코노하가 웃으며 말했다. 아카아시가 당황해했다. 그 모습에 더더욱 보쿠토가 당황했다. 괜찮아, 하기 싫으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좋아. 그리 말 했더니, 오히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저가 하겠다고 말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보쿠토는 그렇게라도 함께 있을 시간이 늘어났다는 것이 기뻤지만 아카아시를, 곤란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한참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제가 할게요. 약간의 넉살도 부리고. 농담도 하고. 다른 3학년 들이 마구 달려들어 머리를 흐트러트리고 뺨을 꼬집어도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는 알까. 그 때는 참으로 개구쟁이처럼 웃는다는 걸. 그는 알까. 그렇게 웃는 얼굴을, 제 앞에선 꽤 오랫동안 보여주지 않았다는 걸. 그는 알까.

…알고 있을까.

“보쿠토 씨.”
“응, 아카아시. 좋은 아침.”

남색 티셔츠에 하얀 반바지. 곧게 쭉 뻗은 다리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주었다 황급히 다시 회수했다. 고등부에 올라오고 나서, 아카아시도 키가 많이 컸다. 몸도 전보다 더 좋아지고, 탄탄하게 근육이 붙었다. 사슴처럼 온 몸이 반들반들 매끈매끈하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보쿠토는 제 약혼자에게 말 하지 못할 비밀이 늘어났다. 잠 못 이루는 밤, 뜨거운 꿈속의 주인공이 아카아시였다거나 가끔 이불 속에서 혼자 손장난을 칠 때에도 언제나 그 상대는 아카아시였다. 그런 말 못할 종류가 하나 둘 씩 늘어난다. 보쿠토는 꼴깍, 침을 삼키며 애써 잊으려 했다.
삐익, 생각을 찢고 들린 휘슬소리에 보쿠토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코치와 감독이 집합신호를 내린 것이다. 서둘러 코트 가운데를 향해 달려가면서도 내내 시선은 아카아시 목덜미에 머물러 있었다. 꿀꺽, 끈끈한 침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점심을 먹고, 부활동을 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 이상한 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아주 보통의 나날. 너무도, 평온한 일상이기에 더욱 위화감이 드는 날들. 그런 위화감 속에 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분명, 저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걸 아는데 파혼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마치 기회를 주는 것 처럼 굴었다. 다른 여자아이나, 남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으면 질투를 하는 것 처럼 눈을 흘기기도 했고, 경기가 잘 안 풀리거나 스파이크가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땐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가끔 먼저 전화를 걸어 주었고, 가끔은 옛날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등교는 따로 했지만 점심은 항상 같이 먹었으며 하교 역시 늘 함께 했다. 주장과 부주장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율 연습도 대부분 함께 어울려 주었고, 부일지 쓰는 것도 도와줬다. 이건 전부터 자신이 하던 일이지 않냐며, 중학교 때도 제가 다 써드렸잖아요. 그리 말하며 웃는 아카아시를 보고 있자면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아직, 아카아시 케이지가 보쿠토 코타로를 좋아 한다고 말 할 수 있던, 그때로 말이다.
그런 일상이었다. 피곤한 몸을 억지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 제 방 침대에 누우면 그날 하루 아카아시의 얼굴이 서서히 눈앞에서 흐릿하게 떠오르다 사라지곤 했다. 어쩌면, 어쩌면-.

아카아시가 정말로 기회를 주는 건 아닐까?

보쿠토는 다시 일어나 대충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무작정 택시를 타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용돈은 넉넉했다. 아카아시가 20살이 되면 집안에선 둘을 정식으로 결혼시킬 것이다. 마음 없는 결혼생활 같은 건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자신의 욕심으로 인한 것이라면 더더욱 싫었다. 그가 기회를 주는 것이 맞는다면. 그렇다면. 시간이 얼마 없다.
택시에서 뛰어내리듯 내린 다음 1층에 있는 주얼리 매장으로 향했다. 폐장 시간이 다 되어 방문한 탓에 매장 안은 한산했다.

“어머, 보쿠토 군. 오랜만이네요.”
“안녕하세요. 키노 씨. 그…. 반지 보러 왔는데요….”

어머, 벌써 새로 예물 맞추는 거예요? 보쿠토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선물, 하고 싶어서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진열장에서 반지 이것저것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금보단 은이 좋겠죠? 아직 정식 결혼도 아니니까 금은 좀 무거울지도 몰라요. 다이아는, 보쿠토 군 용돈으로는 조금 부족할거고. 그녀가 호호, 작게 미소 지었다.

“이건 어때요?”
“아…!”

보쿠토의 눈이 휘둥그레 커진다. 심플한 은색, 청록색 보석. 어느 순간부터 아카아시의 왼손 약지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그 반지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이걸 주면 그 아이가 좋아할까? 조금은 옛날 생각을 할까? 아직도, 내가 이렇게 너를 좋아하고 있노라고. 알아줄까.
결국 보쿠토는 그 디자인을 구매했다. 어쩔 수 없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 케이지 만큼이나,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했으니까. 돌아오는 12월 5일, 다시 고백을 하자. 나는 아직도 너를 너무 사랑한다고. 예쁘게 포장된 작은 봉투를 들고, 택시를 타는 대신 백화점에서 부터 집까지 걸어오기로 했다. 걸으면 1시간 정도 걸리지만, 가는 도중 멀리 아카아시 저택을 볼 수 있다. 가끔, 아주 가끔. 이렇게 멀리서 아카아시 저택을 보곤 했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보쿠토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다시 반지를 끼워줘야지. 사랑을 말 해야지. 내 마음이 이렇게 너를 향해 뛰고 있다고, 그렇다고. 그러니까…. 아카아시도, 케이지도 조금만 노력해 주면 안 되겠냐고 빌어 봐야지. 한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그리 말 해야지. 멀리서 저택이 보였다. 환한 불빛. 아카아시가 있을 법한 2층. 지금이면 책상에 앉아 숙제나 공부를 하고 있겠지. 눈이 나쁜 건 아니지만 선천적으로 시력이 조금 약해 공부를 할 땐 언제나 안경을 쓴다. 원체 잘생긴 얼굴이어서 안경을 써도 색다른 맛이 있다. 그 얼굴 보는 게 좋아서 일부러 같이 공부하자고 떼쓰곤 했지. 피식, 웃음이 났다.

“….”

아카아시를 생각하면, 언제부터인가 설렘이나 두근거림보다 꼭, 미어질 것 처럼 가슴 아픔이 먼저 느껴졌다. 아마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고 나서 부터 인 것 같다. 그래도 아주 기회가 없는 건 아니니까.

“도련님, 어디 다녀오세요?”
“아, 잠깐 요 앞에 운동하러요.”
“아휴, 그렇게 운동하시고도 또 하세요?”

몸 상해요. 도우미 아주머니의 호들갑 어린 잔소리가 상냥하고 다정해, 보쿠토는 히히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2층으로 올라갔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괜히 포장된 반지를 꺼냈다. 그러고보니 조금 있으면 제 생일이 다가오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까진, 아카아시 일가와, 제 가족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고 선물을 받곤 했었다. 그 이후엔 친구들과 보냈지만 저녁엔 꼭 아카아시를 만났다. 매년 그랬다. 아카아시는 웃는 얼굴로 저에게 선물을 주었다. 중학교 때 받은 배구화는 모두 아카아시가 선물 해 준 것이었다. 예전엔 카드를 쓰거나 편지를 쓰기도 했었는데. 중학교를 졸업하니 그런 건 없었다. 아쉬웠지만…. 마음이 없는 상대에게 쓰는 편지란 무릇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아카아시가 주는 건 무엇이든 좋지만, 그런 식의 편지는 또 받고 싶지 않았다. 사람 마음이라는 건, 참 이상하다. 작년에도 아카아시는 배구화와 운동복을 선물로 줬었지…. 올해는 무엇이려나. 역시 배구 관련 물품이려나. 뭐, 어떤 걸 받아도 아카아시가 주는 거라면 다 좋지만.

“이거… 좋아하려나….”

반지를 보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작년 아카아시 생일 땐 근사한 곳에서 저녁을 먹고 함께 영화를 본 다음 꽤 값이 나가는 시계를 줬었다. 항상 그의 손목이 허전한 게 신경 쓰였기 때문이었다. 그 전엔, 혹시나 선물 해 주면 그가 고맙다는 의미로 편지나 카드 같은 걸 써줄까 싶은 기대로 만년필을 줬었다. 중학교 때는…. 서로 배구에 열중했었으니 자신도 배구용품을 줬었고.
한참 과거로 추억여행을 떠나고 있자니 아카아시가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보쿠토는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 앱을 실행했다. [보고 싶어 케이지, 지금 뭐해?] 무의식중에 그리 적었다가 메시지를 주욱 지우고 다시 적었다. [아카아시 공부해?] 좋아, 이 정도면 평범하겠지….

“…!”

웬일일까. 바로 답장이 왔다. 기뻤다. 숙제하고 있었습니다. 보쿠토 씨는요? 평범하고 단조로운 문장인데, 이렇게 기쁜 건 그가 보낸 답장이기 때문일 터였다. 응, 열심히 해! 답장을 돌려주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카아시 생각만 하면 감정이 혼자 100M 달리기를 하는 것 마냥 저만치 앞서나간다. 다시 고백 해 보자. 다시 사랑을 말 해 보자. 다시, 잘, 해 보자. 이 반지를 주면서. 말 해 보자.
그러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으악, 나 지금 씻지도 않고 잠든 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새벽 4시 49분. 웬일로 알람 울리기 1분 전에 일어났다. 침대에 구겨지듯 잠든 탓에 부은 눈을 꾹꾹 문지르며 자리서 일어났다. 부랴부랴 메시지를 확인하자 메시지가 세통 정도 와있었다. 보쿠토 씨는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한참 뒤, 11시 쯤 온 메시지 두개. 주무시나요? 안녕히 주무세요. 입가에 웃음이 날 정도로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아카아시에게 굿나잇 인사를 받은 지 대체 얼마만이지? 오늘은 운이 좋을 것 같았다.




* * *




“좋은 아침!”
“좋은 아침, 보쿠토!”

야, 너 오늘 뭐 좋은 일 있냐? 평소보다 훨씬 더 활기찬 보쿠토의 모습에 코노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뭐 가끔은 이런 날도 있지. 올라간 광대를 스윽 문지르며 보쿠토가 부실로 들어갔다. 콧노래가 나온다. 날씨도 좋고, 어제는 아카아시가 굿나잇 인사도 했다. 오늘은 뭔가 모두 다 좋을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카아시!”

아카아시 역시, 평소보다 일찍 왔다. 가방을 집어넣고, 넥타이를 푸는 그의 옆모습을 훔쳐보다 보쿠토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것도 기분 탓인가? 아카아시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인다. 심장이 쿵, 쿵 세차게 뛰었다. 이렇게 시끄럽게 뛰면, 눈치 챌 텐데. 흘끗, 옆모습을 훔쳐본다. 아카아시. 아카아시. 이름을 불러본다. 마음속으로, 여러 번. 불러 보았다.

“왜 그러세요?”
“응? 아, 아니…. 아니. 아무것도….”

실없긴. 아카아시가 웃었다. 네가 웃으면, 나도 좋아. 보쿠토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부실 문을 열고 나가는 제 약혼자의 등 뒤를 졸졸 따라갔다.
정말로 신기한 하루였다. 스파이크는 때리는 족족 네트를 넘어갔다. 아침 연습 컨디션은 최고였고, 공을 올려주는 아카아시마저도 놀랄 정도였다. 코치와 감독에게 칭찬을 2배는 더 받은 듯 했다. 오전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는, 오늘 까지였던 수학 숙제가 다음 주로 밀린다거나, 평소엔 인기가 너무 많아 구경도 하지 못했던 마지막 남은 수제 메론 빵을 손에 얻기도 했다. 도시락 반찬은 모두 보쿠토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아카아시 역시 오늘은 이상하게 사근사근 부드러웠다. 입 안에 넣은 달걀찜마냥 모두 몽글몽글 부드럽기만 했다. 오늘 같은 날만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 점심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활짝 웃었다.
6교시 수업도 일찍 끝났다. 보쿠토는 뒷문을 활짝 열고 체육관을 향해 달렸다. 평소라면 학생주임 선생님이 득달같이 달려와 보쿠토 이름을 부르며 훈계를 하셨을 텐데 그는 지금 출장 중이다. 체육관은 아무도 없었다. 오예, 1등이다! 신이 나 부실 문을 활짝 열었다.

“…어….”

묘한 향기가 난다. 부실에서. 누가 향수를 쏟았나? 보쿠토가 코를 문질렀다. 꽃향기? 아니, 그것보단 과일 향기 같은데. 푹 익은 과일…. 자두나 복숭아 같은 달고 물 많은…. 그런 종류의 과일이 익다 못해 금방이라도 과육이 전부 터질 것 같을 때 나는 냄새다. 코가 간지러웠다. 향기가 후각 뿐 아니라 피부에 까지 들척지근하게 모두 달라붙는 것 같았다. 순간 등골에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몸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 했다. 보쿠토는 이 향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히트 사이클이 시작된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였다. 그리고. 그리고…. 이 부실에 들어올 수 있는 오메가 배구 부원은 딱, 한명이다.

“아, 아카아시 호, 혹시 거기 안에 있…어?”

아카아시는 아직 히트 사이클이 오지 않았다. 일부러 숨기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일부러 히트 사이클이 왔는데 오지 않은 척 한 거였다면 아마 보쿠토에겐 기회고 뭐고 약혼 파기라는 서류부터 날아왔을 테니까. 만약 그에게 히트 사이클이 오면 어떻게 할까. 뭘 해야 할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었다. 만약 눈앞에 그 아이가 그렇게 쓰러져있다면, 안아야지. 아무리 마음이 없는 상대여도 알파가 오메가에게 각인을 하면 마음이 따라가는 일이 생긴다던데. 아카아시가 다신 저를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으면 그렇게라도 해야지. 그런 나쁜 마음도 먹었었다. 보쿠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쩌면 이것도 또 하나의 기회일지 모른다. 하루 종일 운이 좋았잖아. 이게, 그 마무리일 수도 있다.

“아카아시…?”

숨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부실 끝, 라커와 비품 사물함 사이 공간에 까만 그림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일부러 발소리를 내어 다가가자 더욱 흠칫 하며 몸을 말았다.

“흐, 윽, 보쿠토, 씨….”
“으…응. 나, 나야….”

목소리가 젖었다. 이런 목소리, 처음 들어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가까이 다가가자 향기가 더 진해진다. 아래가 바짝 힘이 들어갔다. 지금 당장이라도 저 아이를 눕히고 목덜미를 깨물고 싶었다. 보쿠토가 한발자국 더 다가갔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 붉어진 얼굴과, 축축하게 젖은 청록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

겁먹은 얼굴이었다. 보쿠토가 한 발자국 다가가면 그는 벌벌 떨며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든 숨을 참아보려 한 손으로 가슴을 쥐어 잡았다. 다시 한 걸음 더 가자 아카아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젓다 픽, 하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가슴이 크게 오르락내리락 헐떡인다. 보쿠토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목구멍 너머로 무언가 넘어오려고 한다. 애써 삼켰다. 코가 맵다. 아래도 아프다. 그런데 그것보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아팠다.

“…119 불러줄게, 아카아시….”

보쿠토가 최대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부실 문을 닫고 그 앞에 앉아 119에 전화를 걸었다.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려 고개를 파묻었다. 무리였다. 마음이 흐늘흐늘 젖어 형체도 없이 찢어졌다. 무리다. 나는 이 아이를 강제로 안을 수 없어. 할 수 없어. 무리였다. 불가능했다. 그렇게 겁먹은 얼굴로 쳐다보는데. 아카아시가. 케이지가…. 그렇게, 나를, 그렇게 보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서 구급대원들이 뛰어왔다. 보쿠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켜섰다. 학생이 신고자에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들것에 이미 혼절한 아카아시를 눕혀 데리고 나왔다.

“학생은?”
“….”

보쿠토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 애 약혼자요….”
“그래요? 이건 히트 사이클 증상인데, 알고 있나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탑시다. 러트 지났어요?”

보쿠토는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했다. 구급대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재빠르게 보쿠토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뺨을 타고 뭔가 흘러내렸다. 울고 있던 모양이었다. 있잖아요. 제가 말을 못 했는데요. 케이지, 많이 아프지만 않게 해 주세요. 그 주사. 많이 아픈 거 아니죠? 케이지 몸에 무슨 무리 가는 거 아니죠? 그죠? 쉴 새 없이 눈물이 계속 떨어졌다. 보쿠토는 교복 소매로 눈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눈이 아팠다. 그래서 일까?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그날 밤, 보쿠토는 연습을 엉망으로 마무리 하고, 부모님 몰래 병원에 들렀다. 아카아시 쪽은 보쿠토가 없던 사이 히트 사이클이 터져 누군가 대신 신고를 넣은 것으로 알고 계셨다. 물론 그 말을 전해준 것도 보쿠토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펑펑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는데도 눈물이 계속 흘렀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팠다. 너무 아파서 계속 울 수밖에 없었다.
집 안은 캄캄했다. 도우미 아주머니도 돌아가신 듯, 식탁 위엔 짧은 메모가 있었다. 보쿠토는 터덜터덜 계단을 올라가 조용히 제 방 문을 열었다. 책상위에 올려뒀던 반지 케이스를 열어 반지 두개를 꺼냈다. 창문을 열었다. 달이 아름다웠다. 손을 하늘 높이 쭉 뻗었다. 그리곤 천천히 손을 펼쳤다. 눈물 같은 은빛 두개가 허공에서 반짝이다 이내 사라졌다. 보쿠토는 희미하게 웃다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사랑을 이어나가리라 마음먹었지만, 그건 이기심이었다. 그것도 지독하게 상대를 파괴하는, 욕심 같은 이기심. 이것은 버려야 한다. 끝내야 한다. 혼자 하는 사랑이니 괜찮다. 그러니 지금, 우는 것 정도는 모두가 이해 해 줄 것이다.

“…안녕.”

안녕 케이지. 내 사랑아. 안녕.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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