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히나타가 감기에 걸렸다고?"


"네...오빠가 아침부터 누워만 있어요. 저랑 놀아주지도 않고..."


"그건 안된 일이네..."


2월 중순에 감기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침부터 부랴부랴 챙겨온 손의 고급 초콜릿이 쓸모 없어 보이는 순간이었다. 환불하고 감기약이나 사올까, 스가는 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2월의 미야기는 여전히 쌀쌀했다. 발렌타인데이가 다가오고 있었지만, 날씨는 질투하듯 오히려 추위에 박차를 가했고, 발렌타인데이 당일에는 최저기온을 기록했다. 물론 조금만 주의하면 감기 같은 건 걸릴 일이 없을 정도의 추위였지만, 히나타는 분명 넘치는 열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구 연습에 전념하다 덥다면서 반팔 차림으로 마을 곳곳을 누볐으리라. 굳이 보지 않아도 스가의 눈에는 뛰어다니는 히나타의 모습이 선히 보이는 듯 했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괜히 히나타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나름대로 주문제작까지 한 초콜릿인데. 실제로 스가가 아침부터 챙겨온 초콜릿에는 작은 글씨로 ‘SUGAHINA’라고 쓰여있는 장식이 그려져 있었다. 초콜릿을 바라보며 환히 웃는 히나타의 모습을 한 발짝 한 발짝 선명하게 그리며 걸어왔는데, 헛수고가 된 느낌이었다. 직접 전해주고 싶었는데.


“안 들어오세요?”


“응, 그러면 오늘은 이만 갈게. 환자에겐 역시 절대안정이니까!”


사실 잠깐 들러 병문안 정도는 할 수 있었겠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뾰로통해진 스가는 그냥 돌아서기로 결정했다. 그를 뒤로 하고 나츠가 울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이 아이도 꽤나 기다려왔던 날인가 보다. 스가는 애써 나츠에게 미소 짓고 그럼 잘 있어, 하고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고 돌아섰다.


“오빠랑 오늘 초콜릿 만들기로 했는데…”


나츠의 말을 듣자마자 스가의 머리 속을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스가는 갑자기 밝아진 얼굴로 나츠에게 달려갔다. 방금 전의 뾰로통한 모습은 추위와 함께 어딘가로 날라간 모양이었다.


“바로 그거야!”


나츠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스가는 왼쪽 눈에 고인 눈물이 아직도 그렁그렁한 상태에서 고개를 갸우뚱하던 나츠에게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히나타가 잘 때 우리가 몰래 만들어 주는거야, 초콜릿!”


그제야 나츠의 표정에 생기가 돌아왔다. 나츠는 쪼그리고 앉았어도 여전히 제 눈 높이보다 높은 스가를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닮은 남매야, 라고 스가는 생각했다. 언제 봐도 힘이 되는 웃음이었다.


“자, 그러면 힘내자는 의미로 하이파이브 한 번 할까!”


“오!”


나츠의 조막만한 손이 스가의 예쁘게 뻗은 하얀 손에 가볍게 닿는 소리와 함께 둘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츠는 언제 울먹거렸냐는 듯이 익숙한 동요를 흥얼거리며 그 작은 손으로 스가를 끌고 부엌으로 달려갔다. 혹시라도 작은 손이 자신을 놓칠 세라 스가는 나츠의 속도에 맞춰 부엌을 향했다. 부엌에는 근처 가게에서 사온 듯 한 초콜릿들이 잔뜩 쌓여있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재료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식탁 위에 너저분하게 얹어져 있었다.


“그럼,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나…”


사실 초콜릿을 만들어본 적이 없었던 스가의 표정에 그제야 약간의 당혹감이 보였다. 그새 그 표정을 눈치챘는지, 나츠가 어디선가 구깃구깃한 종이 한 장을 들고 뛰어왔다.


“이거, 오빠가 준비한 거에요!”


종이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발렌타인 초콜릿 대작전!’이라고 쓰여있었다. 누가 봐도 쇼요의 글씨체였다. 초콜릿을 녹인다. 생크림을 녹인다. 뜨거운 물에. 녹인 초콜릿을 도마에 붓고 굳힌다. 맛있게, 스가 선배가 좋아하게! 사랑을 듬뿍 담아. 팟, 하고 우주 최고의 초콜릿을 만드는 거다! 이 부분을 읽자마자 스가의 입에서 피식, 하는 소리가 본능적으로 튀어나왔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당장에라도 올라가서 자고 있을 히나타의 볼에 깜짝 놀랄 정도로 진하게 키스해주고 싶었지만, 스가는 참고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 시작할까?”


“오!”


꽤나 진지한 과정이었다. 언제 추위를 느꼈냐는 듯이 최선을 다해서 초콜릿을 만드는 두 사람의 얼굴에선 녹고 있는 초콜릿만큼이나 달콤한 땀이 한 방울 한 방울 흘러내렸고, 도대체 얼마나 만들려고 했던 건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의 초콜릿들이 굳도록 틀에 옮기고 난 다음에야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주저앉아 쉬기 시작했다.


“어때, 기분 좋아?”


스가는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나츠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었다. 그런 스가에게 나츠는 다시 한 번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그럼 히나타가 깰 때까지 기다리면 되려나. 언제 일어나려나. 어지간히 아픈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소란을 피웠는데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지. 아픈 아이를 깨우고 싶지 않았던 스가는 히나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방 안에 들어갔다. 히나타는 이미 완전히 녹아서 미지근한 물로 변해버린 얼음주머니를 머리 위에 놓고 약간 얼굴을 찌푸린 채 잠들어 있었다. 스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으며 이미 다 녹은 얼음주머니를 내려놓고 혹시나 싶어서 새로 가져온 얼음주머니를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아프지 말라고, 바보. 발갛게 상기된 볼에 살짝 입술을 대고서 스가는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볼. 평소에도 잡아당기면서 자주 장난치던 스가였지만, 오늘따라 열기가 감도는 볼이 안타까웠다. 빨리 나아, 내가 만든 초콜릿 먹어줘야지. 곧 일어선 스가가 곤히 잠든 히나타를 보고 한 번 미소 짓고 방을 나가려는 순간, 히나타가 뒤척이면서 왼쪽을 바라보며 누웠다. 그와 동시에 얼음주머니가 잘그락거리면서 떨어졌다.


정말 긴장 풀 수가 없네. 스가는 살짝 투덜거리면서 다시 히나타에게 다가갔다. 히나타를 도로 똑바로 눕히고, 얼음주머니를 원 위치에 놓고, 이리저리 헝클어진 이불을 들어 정리하는데 편지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불을 다시 히나타의 위에 덮어주고 나서야 스가는 편지에 시선을 주었다. 편지의 바깥에는 To.스가 선배. 라고 삐뚤삐뚤한 글자가 보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히나타의 글씨였다. 아직 채 밀봉되지 못한 편지였다. 스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쇼요에요. 벌써 발렌타인, 으와, 완전 시간 빠르다고요! 저희 사귀게 된지 79일째인거 알아요? 79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었는데, 안 나오더라고요. 카게야마한테 물어봤는데 그 바보는 모르고, 츠키시마도 모른댔어요. 그래도 우리가 만난 날이니까, 분명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해요. 전 선배가 좋아요. 환하게 웃는 모습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시는 손도, 다정하게 연습을 도와주시는 모습도, 다 좋아요. 선배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발렌타인 때 뭔가 특별한 게 주고 싶어서, 초콜릿을 만들어 보기로 했어요. 오늘 나츠와 나가서 장을 보고 왔는데, 초콜릿을 너무 많이 사온 것 같아요. 그래서 초대형 초콜릿을 만들기로 했어요. 나츠가 자꾸 한 입 달라고 떼를 썼는데, 저도 먹고 싶은 거 꾹 참고 만든 거니까, 꼭 다 드셔야 해요! 우리 백일 때는 더 맛있는 거 만들어 드릴게요. 스가 선배, 항상 사랑해요. 앞으로도 많이 사랑할게요. –사랑하는 히나타 쇼요가-


스가는 감기 걸린 히나타 만큼이나 새빨개진 얼굴로 방을 나왔다. 자꾸만 미소가 튀어나오려는 모습을 감추지 못 해 두 손을 어색하게 얼굴로 가린 상태로 스가는 나츠에게 갔다. 에 거짓말, 스가 오빠 그새 감기 옮은 거야?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나츠에게 아니라는 말을 하고 스가는 틀에 담아놓은 초콜릿으로 시선을 향했다. 반쯤 굳은 초콜릿이 예쁜 직사각형 형태로 담겨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스가는 칼을 들고 초콜릿을 향해 가서 무언가를 적고선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에 나츠, 누구 왔어?”


그새 잠에서 깼는지, 히나타가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선 방 밖으로 나왔다. 아직 잠에서 덜 깨 게슴츠레하게 뜬 

눈의 시야에 스가가 비춰지자마자 히나타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소리질렀다.


“에, 스가 선배? 에? 에! 에?”


“오빠 일어났다!”


“왜 그렇게 놀랄 일이야?”


“엣, 선배, 그런 게 아니라, 저.”


말할 필요도 없이, 히나타의 시선은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만들었어야 할 초콜릿을 향해 있었다.


“내가 만들었지롱. 그러게 누가 감기 걸려서 누우래? 이번 발렌타인은 나한테 빚진거다 히나타!”


“에에…”


히나타의 울상 가득한 표정마저 사랑스럽다고, 스가는 생각했다. 스가는 엉거주춤 서있는 히나타를 꽉 껴안았다. 갈 길을 잃은 히나타의 두 팔이 잠깐 허공을 헤매다 이내 스가의 넓은 등에 자리잡았다. 상기된 두 얼굴이 포개어 있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던 히나타의 귀에 스가가 속삭였다.


“해피 발렌타인데이 히나타. 그리고 내가 더 사랑해.”

----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렛 줄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고, 스가히나 영원하라고 단편을 써보았습니다ㅎㅎ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오늘도 누워서 한가로이 글을 쓰고 글을 쓰고 또 글을 쓰고

블루블루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