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율의 시녀 자리를 노리는 몇몇 귀족 부인들이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한율을 따라가 가벼운 말을 걸었다. 이미 연회에 대한 흥은 떨어졌지만, 그의 기분을 돋워주려는 부인들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들으며 한율은 미소를 되찾았다. 한율이 완곡하게 거절한 왕자들은 다시 다가오진 않았지만 한율을 둘러싼 긴장감은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또래의 귀족 아이와 신나게 대화하는 한나를 발견하고 흐뭇하게 미소지은 한율은 대신들과 대화하거나 장식품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북쪽 나라의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해가 중천을 넘어서고 어느 정도 시간을 오래 때웠다고 생각한 한율은 제게 모인 긴장감을 해산시키기 위해 복통을 핑계 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하진이 눈에 들어와 괜히 더 미안해졌다. 이제 판단과 소문은 평가를 좋아하는 저들의 몫이 될 것이다.

"마마?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음식을 들고 부산스럽게 다니는 고용인들에게 지시를 내리던 시종장이 연회가 시작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연회장을 나오는 한율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는 탈모가 와 가운데가 벗겨져 있었다. 한율은 손을 저었다. 물러나란 몸짓에 일단 눈치를 살피면서도 시종장은 원래의 일에 집중했다.

성 안 대부분의 인력이 연회장에 집중해있는 탓에 궁 내는 한적했다. 일어나서 음식을 제대로 입에 대지 못했다. 연회 일정 때문도 있지만, 이 상태에서 무언가를 먹으면 얹힐 것 같았다. 한율은 벽에 기대 구불구불하게 흘러내린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빈속에 술을 마신 탓인지 배가 조금 쓰렸다.

이런 연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은 인간이 정한 것일 텐데 사람들은 너무 복잡한 것을 좋아한다. 질서가 없으면 혼란해질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지만, 혼란 속에도 개인의 질서가 존재한다. 가치관이나 신념 같은 것. 왕이 사라지고 백성들이 계몽해 모두가 바라는 정치를 한다면,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다면 이런 머리 아픈 정치싸움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한가. 왕족에게 분노한 사람들에게 권력과 동등함을 준다면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기존의 권력자들이다. 자신의 지식을 갖고 비굴하게 빌붙는 기회주의자가 아니라면 전부 사형대에 오를 것이다. 한율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궁전을 가득 메꾸는 이 부의 상징이 어디에서부터 쥐어짜 올라왔는지. 사람을 다스리는 존재의 무지는 죄다. 한율은 무지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백성들에게 쥐여줄 수 있는 힘은 그들의 분노를 잠재운 뒤에 주는 것이 옳다. 왕이 된다면 해낼 수 있을까. 성벽 밖에서 가난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그 모든 자가 똑같은 생명임을 명시하고 싶다. 그리고 수화와 같은 인어들도.

수화. 수화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말을 태워주겠다는 말에 얼굴을 새파랗게 굳혔던 수화를 떠올리고 한율은 웃음을 살짝 터트렸다. 표정이 너무 다양한 여자다. 맨날 정색하고 싫다는 티를 팍팍 내지만 상당히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 원래는 밝고 다정한 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화가 한율을 미워하는 건 어찌 생각하면 당연했다. 인간이 수화를 잡아 가뒀고 한율 또한 그 인간이니까. 수화에게 자신 같은 인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왜 이렇게 진심이 되었을까. 역시 모르겠다. 인어는 사람을 홀리니 자신도 홀려버린 게 아닐까.

이왕 수화가 생각났으니 방에 돌아가 보자고 생각한 한율은 드레스를 잡아 위로 추스르고 걸음을 빠르게 디뎠다. 갑자기 들어가면 놀랄까 싶어 두어 번 노크한 뒤 들어간 한율은 옷과 한참 씨름 중인 수화를 발견하고 크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다가갔다.

한율은 일단 자신의 옷을 벗고 몸을 갑갑하게 조이던 코르셋의 끈을 풀었다. 손으로 줄을 당기며 여유를 만들자 숨이 편안하게 트였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수화도 한율의 냄새를 맡고 붉은 드레스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대체 옷을 어떻게 벗으려 했길래 저 꼴이 난 것일까. 잠깐 침대 위에 엎드려 눕고 싶었지만, 수화를 외면할 순 없었기에 한율은 쪼그려 앉아 수화가 미처 풀지 못한 등의 끈을 풀어주었다. 끼어있었던 수화의 얼굴이 옷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제야 개운해졌다는 듯 얼굴색을 환하게 바꾼 수화는 침대 위로 널브러진 한율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율이 입고 있는 흰 슬립의 한쪽 어깨끈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려 흐물거리다가 수화의 무릎에 밟혔다.

한율을 열심히 흔든 수화는 손으로 욕조를 가리켰다. 고개만 들어 욕조로 돌린 한율은 나른한 눈으로 수화를 힐끗 바라봤다. 새까만 눈망울이 태양 빛에 은하수가 뿌려지듯 반짝였다. 전 수장의 눈도 한없이 새까맸지만 한율과는 달랐다. 전 수장은 흡수한 빛을 없애버렸지만 한율의 눈은 빛을 받아들여 어둠 속의 빛이 되어 다른 이를 감싸는 것 같았다. 왜 그런 걸까. 수화는 멍하니 먼 옛날, 처음으로 육지를 걷는 연습을 하던 때 처음으로 봤던 전 수장의 까만 눈을 떠올렸다. 짙은 소유욕이라는 애정으로 인해 타오르던 눈. 수화를 제 안에 가두려는 눈. 그것과는 무언가 다른 저 까만 눈에 빠져들 것 같다. 수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빠질 수 없다. 한율은 미지의 바다였다. 자신이 모르는 바다라는 게 두려웠다. 바다가 용암처럼 뜨거워서 화상 입을까 봐.

수화는 한율에게 집중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한율의 손목을 잡고 욕조로 끌고 갔다. 상당한 힘이라 침대 밑으로 떨어질 뻔한 한율은 수화가 고집스레 바라보자 못 이긴 척 일어나 흘러내린 어깨끈을 올리며 따라갔다.

수화는 더러운 욕조 물을 가리켰다. 소금은 귀하다. 물이 더러워졌다는 이유만으로 허투루 버릴 순 없다. 미간에 손을 짚고 고민하던 한율은 배가 음식을 내놓으라며 꼬르륵거리자 저도 모르게 푹 한숨을 쉬었다. 수화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혹시 귀찮다고 생각하는 걸까. 또다시 많은 인간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진 않다. 이 인간은 어느 정도 안전하다. 궁전 곳곳을 보여주면서 이상한 낌새도 보여주지 않았다.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순 없지만 놓칠 수도 없다. 수화는 괜찮다는 의사를 보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 물을 바꿔 달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한율은 문 근처에 있는 종을 울렸다.

연회 때문에 하인은 한참을 기다려야 도착했다. 한창 바쁠 시간에 부른 것에 대해 사과한 한율은 욕조의 물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하인이 물을 바꾸기가 무섭게 욕조 안으로 들어간 수화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연회장에 다시 돌아가려면 몸을 다시 조여야 한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은 한율은 하인이 나가고 나자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

"배고프다……. 너도 아무것도 못 먹었지?"

수화는 고개를 당차게 끄덕였다. 지금 음식을 가져오라고 요청한다면 분명 주방에서 불만을 호소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금 한율 왕녀는 복통 때문에 쉬러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음식을 시킨다면 의심받을 것이다. 실제로 배가 아프긴 했다. 빈속에 술을 한잔 마셨기 때문인지, 아무것도 먹지 않아선지, 계속 눌렸기 때문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냥 저녁때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한 한율은 수화에게 손짓했다. 한율은 수화가 형편없이 벗어던진 물에 젖은 드레스를 다시 입혀준 뒤 옷장 안에 있던 사냥복을 꺼내 입었다. 어차피 일정을 째 버린 이상 불편한 드레스보단 사냥복이 훨씬 편했다. 한율은 수화를 데리고 방 밖으로 나갔다. 왕성 뒤에 숲이 있다. 왕실 숲을 관리하는 이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수화에게 산짐승 한 마리 정도는 잡아줄 수 있을 것이다. 수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율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숲에는 작은 토끼나 새들이 주로 발견되지만 가끔 멧돼지나 표범 같이 사나운 것과 마주치기도 하므로 사냥을 하러 갈 땐 늘 기사들과 동행했다. 이런 무모한 행동은 위험성을 초래하지만, 자신이 굶는 것보다 수화가 굶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태양 빛이 육지에 속하지 않는 것을 바짝 말려 죽이겠다는 듯 강렬하게 쏘아 내렸다. 바다에서 올려다보는 태양은 그렇게도 다정하더니, 수화가 육지를 밟자 이 이상 들어오는 건 용서할 수 없다고 꾸짖어대는 듯 했다. 인어가 인간을 바다에서 몰아내듯 태양은 햇볕에 노출된 수화의 피부를 위협적으로 바싹 말렸다. 수화는 한율의 그림자 뒤로 숨었다.

사람 말을 모르는 것들만 사는 작은 섬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가을이었기에 이렇게 덥진 않았다. 흐르는 냇물은 지하수 섞인 바닷물이기에 몸이 마른다 싶으면 냇물에 몸을 적시면 됐다. 하지만 인어와 인간을 가르는 산에서 바다와 육지를 향해 두 갈래 방향으로 흐르는 거대한 수원지의 물은 익숙하지 않은 민물이다. 바다와 강물은 대사작용이 반대로 해야 한다. 이곳의 물은 수화가 숨 쉴 수 없는 물이다.

"많이 더워?"

한율이 수화에게 물으며 수화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수화의 피부는 차가웠지만, 처음처럼 미끄럽진 않았다. 인어는 심해의 추위에 적응했다고 들었다. 그 대신 더위엔 취약한 걸까. 한율은 쥘부채를 펼쳐 수화에게 건네주었다.

"부채인데, 쓸 줄 알아?"

조개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던 수화는 부채를 머리 위에 써 햇빛을 가렸다. 틀린 사용법은 아니지만 옳은 사용법도 아니다. 부채를 도로 가져간 한율은 수화에게 가볍게 부쳐주었다. 더운 것은 날아갔지만 몸이 더 마르는 것 같아 수화는 부채를 뺏듯이 낚아채 다시 머리 위를 가렸다.

숲에 다다르자 나무 그림자가 햇살을 어느 정도 가려주었다. 수화는 드디어 만족스럽다는 듯 한율에게 부채를 건네주었다.

여름의 숲은 녹색 바다 같았다. 바다는 절대 가질 수 없는 오랜 녹색 생명. 수화는 갈색과 녹색투성이인 세상을 바라보다 수장이 얘기해줬던 최초와 근접한 인어를 떠올렸다. 그 인어는 육지의 바다 같은 이곳을 사랑한 걸까. 최초와 근접한 인어는 사랑하는 이를 인어로 만들지 못한다. 수화는 망설임 없이 재희의 얼굴을 그었다. 그리고 사랑을 바랐다. 친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친구가 되었는가? 재희는 인어에 대한 증오를 수화에게 쏟아내고 물거품이 됐다. 최초와 근접한 인어가 사랑했던 인간도 인어를 미워했을까? 그 인간이 바다를 사랑하는 만큼 인어를 미워해 자신이 인어라는 걸 말해주지 못한 걸까. 그러다 자신의 사랑이 너무 커져 견디지 못한 걸까.

수화는 수해(樹海) 속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바닷냄새는 나지 않았다. 바다가 그립다. 바람에 깎여 몰려오는 파랗고 하얀 것. 부서지는 빛.

날 바다에 돌려달라고 말하면 이 인간은 들어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율을 압도해서 말을 전하고 싶진 않았다.

수화는 제 안에서 해일처럼 몰아닥치는 생각을 표정 뒤로 숨겼다. 단순한 아이인 척 하는 건 쉬운 일이다. 무엇보다 저 어린 인간 아이는 수화를 자신의 또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한율은 사냥터 입구에 버려져 있는 장식이 떨어진 활을 집어 들었다. 아직 오래 쓸 수 있는 활이지만 장식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버린 것 같았다. 이 정도 활이면 충분하다. 그는 나무에 꽂혀있는 화살을 뽑아 모았다. 수화도 한율을 따라 화살을 힘껏 뽑았다. 촉이 날카로웠다. 이빨로 화살대를 부순 수화는 화살촉을 옷 안에 숨겼다. 들짐승이나 쓸 것 같은 그 길쭉한 입마개를 또다시 쓰게 된다면 이빨 대신 무기로 쓸 생각이다. 수화는 하나만 챙긴 뒤 의심을 피하고자 나머지 화살은 그냥 모아 건네주었다. 한율이 고맙다며 미소짓자 괜히 기분이 좋아진 수화는 꼬리를 살랑거리듯 엉덩이를 작게 흔들었다. 인어가 되기 전엔 강아지가 아니었을까. 한율은 수화가 강아지였으면 어떤 견종이었을까 멍하니 추측해보았다.

그때 먼발치에서 무언가가 수풀을 스치는 소리가 났다. 한율은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활보다는 칼을 더 잘 다루는 터라 명중할 자신은 없지만, 잔뜩 굶주렸을 수화를 생각하며 한율은 소리에 집중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땅을 밟는 소리를 줄이며 천천히 수풀 방향으로 다가갔다. 수풀에 가까이 다가가자 녹색 풀들 사이로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보였다. 한율은 성급하게 시위를 놨다. 화살이 거무스름한 것에 꽂히자 꿰엑, 하는 멧돼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화살이 급소를 뚫지 못했는지 멧돼지는 몸부림을 치며 수풀을 빠져나와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았다. 수화는 먼발치에 서서 한율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장 먹고 싶은 건 인간 고기다. 다른 짐승고기보다 인간이 더 맛있다. 인어들이 공통으로 좋아하는 식감이나 맛이 그렇다. 인어에게 인간은 먹이, 혹은 새 인어를 탄생시키기 위한 유사 포궁일 뿐이다. 인간이 인어가 되기에 인어는 생식능력이 없다. 이 몸은 그저 인간이었을 때의 형태를 닮은 것일 뿐이다. 인어들은 상체로 성별을 구분하고 남인어와 여인어를 식별하며 시력이 사라진 뒤엔 낼 수 있는 초음파영역으로 성별을 나눈다.

재희는 수화의 목을 너무 깊이 그었다. 그곳이 바다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수화가 끈질기게 살아나고자 하지 않았다면 분명 과다 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분명 분했겠지. 초음파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을 뿐이니까.

수화는 떠오르는 이상한 잡생각을 지웠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늘 쓸데없는 방향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수화의 고질적인 습관이다, 인간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구에서 갑자기 재희와 목소리에 대하여 넘어가는 생각 같은 것이.

멧돼지는 고통에 휩싸인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한율은 다시 침착하게 시위를 당기며 조준했다. 곧 멀뚱멀뚱 서 있는 수화를 발견한 멧돼지는 한율을 내버려 두고 수화에게 돌진했다. 한율은 서둘러 방전했지만, 화살촉은 애먼 나무에 박혔다.

한율을 입을 벌렸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호칭을 찾지 못해 다시 다물었다. 이름 하나 모르는 푸른 꼬리의 인어. 푸른 괴물이라고 부르면 분명 상처받을 것이다. 일단 수화가 다치는 건 두고 볼 수 없기에 한율은 머리를 굴릴 시간까지 아끼며 화살 하나를 움켜쥐고 달려가 도약해 멧돼지의 귀 뒤에 쑤셔 박았다. 멧돼지가 통증에 울부짖으며 고개를 털자 한율은 뒤로 넘어졌다. 멧돼지가 의식이 흐릿한 가운데 살기 위해 한율이 넘어진 방향으로 도망치려 하는 순간 수화가 멧돼지의 목에 이빨을 박아넣었다. 그대로 멧돼지를 단단히 붙잡은 그는 멧돼지의 고개를 한 번에 반대쪽으로 꺾어버렸다. 목뼈가 부러지며 멧돼지는 힘없이 쓰러졌다. 멧돼지를 끝까지 물고 있던 수화는 멧돼지 밑에 깔린 채 살가죽을 뜯어 뱉었다. 멧돼지의 피가 수화의 얼굴을 축축이 적셨다.

수화는 멧돼지를 발로 찬 뒤 손으로 얼굴을 닦으며 일어났다. 붉은 드레스가 흙과 피로 범벅이 되었다. 한율은 수화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나 살폈다. 한율을 뒤로 조심스럽게 민 수화는 멧돼지를 가리키고 어깨를 으쓱였다.

"가져가서 먹어야지. 아니면 여기서 먹던가. 나는 저녁에 성에서 먹을 거야. 그니까 너 실컷 먹어."

너는 내가 무섭지도 않아?

수화가 멍하니 입술을 움직였다. 수화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수화를 뚫어지라 바라보던 한율이 천천히 미소지었다.

"무서웠다면 다가가지도 못했을걸? 근데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 있잖아. 안 그래?"

수화는 말없이 손을 뻗어 한율을 귀를 약하게 잡았다. 넘어졌을 때 작게 쓸린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달려들지 않았어도 멧돼지쯤이야 충분히 목뼈를 꺾어버릴 수 있었는데. 수화는 가볍게 혀를 찼다. 수화의 손목을 붙잡은 한율이 잡은 손을 제 앞으로 가져오며 물었다.

"걱정해주는 거야?"

수화는 고개를 젓고 손을 뺐다.




대환장 커플. 서로를 신경 쓰다 보니 서로 엇나가버리는 게 한수커플의 특징 아니겠소. 아니 잘못 알아듣지 말라고.

아,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지, 진짜. 아무리 바빠도 밥은 먹어야지. 그러니까 한율아. 네가 근걱단 피해자가 되는 것 아니니.

근데 진짜 사람이 옷을 입어야지, 옷이 사람을 입냐.

연회를 학교째 듯 완벽히 째 버리는 한율이.

쓰다가 현타옴. 애들아, 너희들이 멧돼지를 왜 잡아..? 왜..? 아니 꼭 멧돼지여야 했니..? 사냥터에 왜 하필 멧돼지가..? 몰라. 걍 써. 왕녀가 멧돼지 좀 잡을 수 있지, 뭐.

중요한 건 얘네 만난 지 이틀인가 사흘 밖에 안 됨. 너 왜 이리 단순하냐, 류수화? 한 달 정도는 경계해라, 좀.

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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