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세상으로

01

 

w. hiver

 

 

 

 

 

 

 

 

 

 

Ep #01 2층 젠틀맨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이유 없이 불안하고 굉장히 불쾌한 날이 있는데. 딱 오늘 같은 날이다. 기지개를 켤 시간도 없이 벌떡 일어나 앉아 시계를 보면, 아니나다를까, 서두르지 않으면 지각. 밍이 셔틀버스도 놓치고, 나는 내 인생을 놓치겠지. ‘밍아, 일어나. 일어나야해.’ 눈도 못 뜨는 애를 들어다 욕실로 들어갔다.

 

 

‘밍아! 정신 차려!’ 얼굴에 물만 묻히고, 까치집으로 방방 뜬 머리도 물로 누르고. 나는, 정말 군에서나 씻을 법한 속도로 해결했다. 옷부터 입히고. 옷. 뭐든 먹여야 하는데. 아직 비몽사몽인 녀석을 눕힌 채 옷을 입히고. 부엌으로 뛰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피곤하다고 애 끌어안고 같이 잘 일이야? 싱크에 설거지도 산더미. 난 애 아빠라는 인간이 왜 이렇게 허술하고 성실하지 못 할까. 냉장고에는 다섯 살 애가 아침으로 영양가 있게 먹을 수 있는 거라곤 없다. 울컥, 갑자기 서럽다. 일도 육아도 완벽하게 하고 싶은 워킹맘들의 마음이 이런 걸까. 눈까지 시큰거리는 이 물리적인 속상함을 달랠 길이 없다. 참 순발력없다. 그냥 올 스톱이야.

 

 

 

 

 

“삼촌,”

 

“응? 밍이 왔어? 배고프지.”

 

“삼촌 슬퍼?”

 

“아-니-”

 

 

 

 

 

하여튼, 귀신 같네. 시계를 보니 이럴 시간에 밖에 나가서 간단한 걸로 사와야 할 것 같다. 오늘은 퇴근하면서 정말 작정하고 집으로 출근해야지. 혹시 몰라 수트로 갈아입고 나갔다 오려는데, 운동을 하고 들어오는 건지 운동복 차림의 2층 세입자님, 양예밍 씨. 눈으로 인사하고 얼른 나가려는데 팔을 잡는다.

 

 

 

 

 

“출근 하시는 거예요?”

 

“아니요, 장 보는 걸 깜박해서 밍이 아침이-”

 

“아, 밍이 빵 먹여도 되나요?”

 

“네?”

 

 

 

 

 

나와 밍이를 나란히 앉히고, 빵과 우유. 컵을 찾는데, 싱크 안에 가득한 설거지 더미가 창피해 죽겠다. 손이 길을 잃고는 머쓱하게 웃는다. 일단 출근하고 생각하자, 지금은 양예밍 씨 앞에서 부끄러운 것보다 월급이냐, 새우잡이냐가 문제니까. 

 

 

 

 

 

“밍아, 잘 먹겠습니다- 해야지.”

 

“드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내가 최근 받았던 호의 중 가장 빛나는 친절. 뭐야, 구세주. 내가 먹일 땐 그렇게 산만하더니, 저 사람이 먹이니까 조용히 받아 먹네. 야오밍, 배신자. 뛰고 와서 덥고 귀찮을 텐데, 자세를 낮추고 서툰 손으로 빵을 잘라 먹여준다. 

 

 

 

 

 

“매일 아침에 이렇게 바빠요?”

 

“전쟁이에요.”

 

 

 

 

 

‘퇴근하면, 마트 들렀다가,’ 아, 혼잣말이 너무 크게 나왔네. 빵을 물고 또 어색하게 웃고. 

 

 

 

 

 

“밍이 데리고 마트 가려면, 힘들지 않아요?”

 

“힘들죠. 쟤 정말 대단하거든요.”

 

“몇 시 퇴근이에요?”

 

“저요?”

 

“네, 저도 마트 가야해서.”


“꼬맹이 데리고 오면, 7시쯤 될 거예요.”

 

 

 

 

 

-

 

 

 

 

 

정체 모를 구세주의 도움으로 제대로 출근하고, 정신 차리니 퇴근 시간이다. 마트도 가야하고, 청소도 제대로 하고. 밍이 어린이집 스케줄도 다시 체크하고. 팀장이 난리 치고 있는 정산보고도 빨리 끝내고. 아직 주말이 되려면 남았는데, 금요일 밤만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삭신이 쑤시는 것 같아. 늦은 오후까지 몇 명 없는 종일반 애들 사이에 끼어 나만 기다리고 있을 우리 똑똑이. 



야오밍을 데리러 가볼까.

 

 

퇴근길, 복잡한 도로 위. 얼마전까지만 해도 주차장처럼 도로가 막히든 말든 노래를 들으며 퇴근길을 즐겼는데. 

 

 

어린이집 앞에 주차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사랑하는 내 조카, 내 아들. 야무지게 말하는 입 모양. 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넣으니 쪼그만 게 세상 행복한 얼굴로 뛰어온다. ‘미안, 늦었지.’ 아직 남아있어야 하는 애들 얼굴에 부러움이 가득이다. 내가 다섯살들을 보며 감정 이입하는 날이 오다니. 

 

 

 

 

 

“밍아, 마트 가자.”

 

“마트?”

 

“응, 공룡 사러 가자.”

 

 

 

 

 

공룡 소리에 벌써 신이 났다. 아직도 적응 되지 않는 만화 주제가를 쩌렁쩌렁하게 부르면서. 매형은 이걸 어떻게 같이 부른 거야. 나 근데 집에 뭐 놓고 온 거 있나? 찝찝한데. 마트에 도착해서 카트에 밍이를 싣고. ‘밍아, 공룡 하나만 골라야 해.’ 신신당부. 이 놈 애교에 방심하면 안 그래도 가득한 공룡에, 집이 쥬라기공원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리저리 입으로 운전하는 밍이 잔소리를 들어주며 필요한 걸 고르고 있는데, 옆에 카트 하나가 붙는다. 

 

 

 

 

 

“아! 맞다, 같이 오기로 했었죠.”

 

 

 

 

 

이 부실한 정신머리. 왠지 집에 들리고 싶더라니.

 

 

 

 

 

“아침에 정말 고마웠어요.”

 

“아, 아니에요.”

 

“진짜. 구세주였어요.”

 

 

 

 

 

열심히 고해성사하며 말하고 있는데, 떼 쓰기가 시작됐다. 못 이겨서 결국 바닥에 내려주고 눈으로는 야오밍을 쫓으며, 장보기와 수다를 동시에. 이 엄청난 멀티플레이도 잠시, 동서남북으로 잡으러 다니느라 장보기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혼내려고 자세를 잡는데, 내 어깨를 누군가 두드린다. 카트를 손에 쥐어주고, 밍이를 가뿐히 안아 든다. 

 

 

 

 

 

“엄청 높지? 아저씨가 밍이 안고 갈까?”

 

“아니야!”

 

“삼촌이 너무 힘든 거 같아서 안 되겠어.”

 

 

 

 

 

‘물건 안 섞이게, 카트 하나로 합쳤어요.’ 키가 엄청 크구나. 저 사람한테 안겨있으니까 우리 밍이 아직 아기 맞네. 그리고 구세주도 맞다. 버둥거리는 걸 너무 가볍게 한 팔로 안고 걷는다. 안긴 채 나를 보며 손을 흔드는 야오밍. 저 든든한 뒷모습을 보니, 오늘 장보기는 성공이네. 다행이다. 

 

 

피곤한지 기운이 좀 빠진 밍이를 내게 넘겨주고, 계산이며, 짐 정리며. 차에 실어주기까지. 한사코 거절해도 조용히 웃으며 ‘집에서 봐요.’ 누가 데려갈 건지, 로또가 따로 없겠네. 집으로 가는 차 안, 밍이가 뭔가 말하고 있는데 룸미러에 보이는, 뒤따라 오는 차만 자꾸 보게 된다. 저녁을 대접할까. 할 줄 아는 건 없고, 오늘 저녁은 시켜 먹어야 하나. 아닌가, 딱히 고맙다는 말 말고는 할 말도 없는데.

 

 

셋이서 나란히 집으로 들어왔다. 

셋. 아직은 낯설다.

 

 

 

 

 

 

 

 

 

 

저녁을 무슨 정신으로 먹었는지. 

 

 

일찍 잠든 밍이를 눕혀두고 밖으로 나와서 한참 고민하는 중이다. 아까는 일단 좀 치워두고 뭘 하든 해야 할 것 같아 부엌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싱크는 깨끗했고. 버려뒀던 냉장고 안도 정리가 되어 있었다. ‘아, 너무 바쁜 거 같아서.’ 당황해서 대답하는 것도 까먹었다. 저 사람 뭐지, 진짜. 누나가 하늘에서 보낸 천사라도 되는 건가- 그리고 아직까지 저 사람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이 시간에 커피를 줄 수도 없고. 2층에 뭐든 갖다 주고 싶은데. 

 

 

 

 

 

“안 피곤해요?”

 

 

 

 

 

계단 앞에서 고장 난 인형마냥 왔다 갔다 움직이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들려서 기절할 뻔 했다. 

 

 

 

 

 

“밍이는 자나 봐요.”

 

“네, 오늘은 좀 일찍 자네요.”

 

“뛰어다니느라 피곤 했나 보네.”

 

“어, 저... 예밍 씨-”

 

“편하게 불러요, 형이라고 해도 되고.”


“아,”


“계약서 쓸 때 봤던 게 기억 나서.”

 

 

 

 

 

조용한 거실에 마주보고 앉아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하는 시간. 시작은 소개팅 하듯, 나이며, 하는 일 같은 소소하고 가벼운 것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사람. 어떤 회사인지 자세히 말하진 않지만 자택업무와 출근을 병행하고 있고. 

 

 

별 다른 접점 없는 삼십 대의 대화였다. 

 

 

 

 

 

“아, 밍이 궁금하시죠?”

 

“불리한 이야기면, 괜찮아요.”

 

“조카에요, 이 집도 누나집이고.”

 

 

 

 

 

자세하게 설명하기엔 내 마음이 아직 단단하지 않아서 커다란 이야기만 꺼냈다. 망설이며 느릿하게 말을 꺼내는데, 눈에 띄는 반응 없이 경청하는 모습이 썩 믿음직스럽다. 그러고 보니 누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도 처음이네. 괜히 무거운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아 끝은 잘라먹고 화제를 돌렸다. ‘참, 그때 그 개!’ 시원하게 웃는다.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 ‘밍이, 걱정 안해도 되겠어요.’ 그 여자가 소리를 지르고 흥분해도, 우리 밍이는 의연하게 개를 만지던 손을 떼며 옆에 있던, 음, 형을, 쳐다보더란다. 

 

 

 

 

 

“밍이가 대단한 삼촌을 뒀네요.”

 

“같이 크는 거죠, 뭐.”

 

“멋있어요.”

 

“...제가요?”

 

“네, 그래서 이 집 들어왔어요.”

 

 

 

 

 

뭔가 어깨가 으쓱, 괜찮은 형이네.

 

 

 

 

 

-

 

 

 

 

 

밍이는 아침마다 2층으로 안부인사를 하러 뛰어다녔고, 그렇게 셋이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있었다. 혹시나 저 천방지축을 미워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넘치게 다정한 사람이라, 나보다 더 잘 맞는 둘을 질투하는 일도 있었다. 특히 공룡. 공룡박사 야오밍을 진지하게 상대해주는 유일한 사람. 난 그게 그거 같은데, 둘이서 이름을 구분해 불러가며 한참을 열띤 토론. 그 모습이 왠지 질투가 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좋은 그림인 건 확실한데.

 

 

 

 

 

“밍이삼촌!”

 

“작은 밍이, 잘 잤어?”

 

 

 

 

 

아침을 준비하느라 정신 없는데, 밍이 목소리가 들린다. ‘일어나셨어요?’ 고개를 돌렸는데, 평소에 보지 못했던 수트차림. 자켓을 의자에 걸쳐두고 내 손에 들려 있는 조리도구를 가져간다.

 

 

 

 

 

“아니에요, 형, 제가 할게요.”

 

“출근준비 하고 와요, 내가 할게.”

 

“오늘...”

 

“아,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요.”

 

 

 

 

 

말끔하게 차려 입은 옷에 음식 냄새가 밸 까봐. ‘괜찮으니까, 얼른 준비해요.’ 멋있다. 안심되는 여유 가득한 목소리. 확실히 아침 시간이 편해졌다. 조금만 허둥지둥 바빠지려 하면 나타나니까. 옷을 갈아 입고 밖으로 나가니 이미 두 사람은 식사 시작. 

 

 

 

 

 

“밍아, 맛있어?”


“응, 우리 삼촌이 하는 거 보다.”


“그럼 매일 아저씨가 할까?”


“응!”






배신자. 좀 더 크면 아주 삼촌이고 뭐고. 여자친구만 생겨도 냅다 버리겠네. ‘야, 밍!’ 둘이 동시에 쳐다본다. 한껏 서운한 표정을 야오밍에게 어필하며 형 옆자리에 앉았다. 접시를 챙겨주는 손. 나도 모르게 옆으로 자꾸 시선이 가는데, 밍이를 먹여주다 말고 날 물끄러미 쳐다본다. 덩달아 눈을 마주치고 쳐다보는데 입에 쑥 들어오는 빵 조각.



‘그렇게 보고 있으면, 늦을 거 같은데요.’ 머리를 툭툭 쓰다듬는다. 

 

 

 

 

 

아,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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